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第27回 全國漢詩紙上白日場 마감 - 156편 응모
21/10/25 11:56:40 김정현 조회 190
大邱鄕校는 斯文振作과 漢詩發展을 위해 금년에 「第27回 全國漢詩紙上白日場』을 개최하였다. 大邱鄕校는 全國 鄕校 중 가장 빠른 1990년부터 漢詩白日場을 開催하여 全國의 儒林과 漢詩同好人들로부터 큰 關心을 받았으며, 그동안 수많은 漢詩作家를 배출하고, 珠玉같은 漢詩作品을 모아 漢詩集을 發刊하여 왔으나 今年에는 지난해와 같이 코로나19로 인해 儒林들이 모여 現場에서 직접 詩作을 할 수 있는 與件이 되지 못하여 부득이 紙上白日場으로 실시하였다.
금년 詩題는 조선 성종때의 사림파 유학자였으며 대구 오천서원에 제향되는 중화양씨 大峯 楊熙止 선생의 학덕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 追慕大峯楊熙止先生」으로 결정하였다.
大邱鄕校는 지난 10월 22일까지 원고를 마감한 결과 찬조작을 제외한 응모작은 156편이었으며, 考選委員은 이종문, 류수락, 이용옥씨가 맡았다.
 
〇 入賞者 명단

〇 壯元 1人 : 金 箕 讚

〇 次上 2人 : 李 壬 出, 鄭 相 鎬

〇 次下 3人 : 金 柄 奭, 閔 敬 仙, 李 相 妙

〇 參榜 10人 : 奇 順 任, 南 基 完, 朴 潤 和, 박 화 식, 徐 正 善
                   安 永 仁, 安 再 煥, 張 鉉 燮, 曺 喜 旭, 洪 美 花

〇 佳作 20人 : 姜 信 壽, 金 國 重, 金 思 昊, 金 時 台, 金 鐘 大
                   金 鎭 善, 朴 在 穆, 白 樂 相, 徐 銘 敎, 孫 秉 泰
                   孫 鳳 翼, 安 三 守, 安 尙 秀, 安 承 模, 李 渭 洙
                   李 淙 榮, 張 相 允, 張 宰 榮, 崔 在 洛, 崔 海 大




 이 종문 고선위원께 선임장을 드리고 있다. 

류수락 고선위원께 선임장을 드리고 있는 장면


이용옥 고선위원 

심사를 하는 고선위원들



大峯 楊熙止(1439-1504) 先生
 
선생의 휘는 희지(熙止)이며 자는 가행(可行), 호(號)는 대봉(大峯)으로 부친은 순창군수를 지낸 양맹순(楊孟淳)이며, 어머니 나주 정씨(鄭氏) 사이에 3남으로 태어났으며, 中和楊氏 시조로 고려 고종때 정승이었던 楊浦의 팔세손이다.
어려서 모친과 함께 울산으로 가서 당시 이 지역의 세력가였던 학성인 이예(李藝)의 후원으로 학업에 정진하였으며, 이 인연으로 나중에 이예(李藝)의 손녀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처향인 울산과 인연을 가지게 되었다.
선생은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462년(세조 8) 생원·진사 두 시험에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1474년(성종 5) 식년 문과에 급제하고, 편전에서 성종을 알현했을 때 왕으로부터 임금이 명하기를 ‘버드나무는 가지가 드문 것을 귀하게 여긴다.’ 라고 하시며 희지라는 이름과 정보(楨父)라는 자(字)를 내려주었다. 검열,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지내고 1476년부터 3년간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으며, 저작(著作)·박사를 거쳐, 이듬해 부수찬(副修撰)에 올라 경연관을 겸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대구에 있는 노모 봉양을 위해 사직소를 올렸으나 문무를 겸전한 신하이며, 형이 시양(侍養)하고 있다는 이유로 허락을 얻지 못했으나 나중에 모친 봉양을 위해 사천현감, 현풍현감에 나아가 모친을 봉양하였다. , 이어서 교리(校理)·문학·검상을 역임하고 1487년 예조좌랑, 이듬해 병조좌랑을 거쳐 1489년 장령(掌令)이 되었다. 그 뒤 1494년 연산군 즉위 후 홍문관전한을 거쳐 상의원정(尙衣院正)으로서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1497년 직제학이 되었을 때 왜인들이 삼포에 출몰하여 양민의 재물을 약탈하자 조정에서는 이례적으로 문관인 공을 경상도로 보내 왜인들을 다스리고 추장 사두(沙豆)를 잡아 죄를 다스리고 회유하여 평온을 되찾게 하였다.
1498년 좌부승지, 1499년 대사헌으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로 나간 뒤 무오사화로 바로 사직하였다. 1500년에 다시 부총관을 거쳐 대사간이 되었으나, 1502년에 동지중추부사 겸세자우부빈객(兼世子右副賓客)이 되었으며, 이듬해 동지성균관사를 거쳐 한성부우윤에 이르렀다. 선생은 벼슬이 충청도관찰사, 한성부우윤, 대사헌에 이르렀고 문장이 뛰어나고 성품이 청백하였으므로 명신록에 기록되었으며, 저서로는 『대봉집』이 있다. 대구 오천서원(梧川書院)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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