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邱鄉校略史 序文
夫既有人矣則必有集團既有集團則必有事業既有事業則必有記錄 無論洋之東西世之古今隨其集團之大小皆有記錄是之為歷史而國有史邑有誌家有乘概其一也 收錄人事之交遞世道之消長風物之盛衰制度之存廢通千古之得失鑑百代之興亡善者勸之惡者懲之史之使命旣在於此而為用大矣子曰殷因於夏禮所損益可知也周因於殷禮所損益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又曰夏禮吾能言之杞不足徵也殷禮吾能言之宋不足徵也文獻不足故也足則吾能徵之矣聖人之言既重其歷史之錄而又憂其間斷而傷之也
顧我嶺南東方鄒魯之鄉而大邱乃嶺南之首府也鄉校又尊聖衛道之道場也 國初以儒教為國是而建成均館於國都漢陽分設鄉校於州縣我大邱鄉校之建亦在其時則以來 六百餘年之久矣其儀文制度燦然具備而 上古史不幸為島夷之兵燹灰燼無餘則不可詳攷中古以後己無可舉之灾難而從亦俱空先父祖懿蹟嘉行難可索見其故 安在上所謂杞宋無徵者良有以也不侫猥張參鄉員一席出入校門者有五十餘禩而常恨校史之缺如無傳者久矣
何幸典校楊泰烈甫賢勞於此蒐集舊聞採取傍證合為一書名以略史 示余而請以弁卷之文顧不佞不文不敢當此重責而辭不獲且有分勞之意 謹披而閱之則其意內實而仔詳其文外華而嚴正春秋之筆於斯復見遠古之事多小闕略中近世史煥然復明如 顚木之有甹孽豈不美哉自知僣妄而略叙顚末凡我鄉中僉賢 其相勉勗哉
孔子紀元二千五百三十二年辛酉端陽節
綾城具滋德謹序
綾城具滋德謹序
대구향교 약사 서문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집단이 있고 집단이 있으면 반드시 사업이 있으며 사업이 있으면 반드시 기록이 있다.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그 집단의 대소에 따라 기록이 있어 이것이 역사가 되니 나라에는 사史가 있고 고을에는 지誌가 있고 집에는 승乘이 있으니 대체로 같은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따랐으니 거기에서 보태거나 뺀 것을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따랐으니 거기에서 보태거나 뺀 것을 알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주나라를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백 왕조 뒤의 일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또 “내가 하나라의 예의와 법도는 말할 수는 있으나 그 자손의 나라인 기나라에서는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의와 법도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나라에서는 증거로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그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인의 말씀이 이미 역사기록의 중요함을 말하고 역사가 끊어짐을 애닯아 하여 걱정하셨던 것이다.
돌아보니 우리 영남은 동방의 추로지향이요, 대구는 곧 영남에서 첫째가는 고을이다. 향교는 성인을 높이고 유도를 지키는 도량이다. 조선 건국초에 유교를 국시로 삼고 국도 한양에 성균관을 건설하고 주현에 향교를 분설分設하였는데 우리 대구향교를 세운 것도 또한 그때에 있었으니 육백년의 오랜 역사가 있어서 의문과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 있으나 상고사는 불행하게소 섬나라 오랑캐의 병란을 만나 불타고 남은 것이 없어 상고할 수 없으나 중고中古 이후에는 이미 재난을 열거할 수 없고 더욱이 돌아가신 부조父祖의 훌륭한 업적이나 아름다움 행실을 찾을 수 없이 텅 비어 버렸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위에서 말한 기나라 송나라에서 징험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외람되이 향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향교에 출입한지 50여년이나 항상 향교의 역사가 없어 전해주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 오래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전교 양태열씨가 이것을 수집하는데 힘써 방증을 채취하여 책이 한 권이 되었으니 책이름을 약사라고 하고 나에게 서문을 청했는데 돌아보건대 나는 글재주가 없고 이 중책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노고를 분담하는 뜻으로 삼가 펼쳐 열람하여 보니 그 뜻이 내실이 있고 자상하며 그 글은 화려하고 엄정하여 춘추필이 지금에 다시 보인다. 먼 옛날의 일이 다소 빠지고 생략되었으나 중 근세사는 환하게 다시 밝아졌으니 쓰러진 나무에 싹이 새로 돋은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참람하고 망령된 줄 스스로 알지만 대략 전말을 적어 우리 향중의 여러 유림들과 서로 권면하고자 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은나라는 하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따랐으니 거기에서 보태거나 뺀 것을 알 수 있고, 주나라는 은나라의 예절과 법도를 따랐으니 거기에서 보태거나 뺀 것을 알 수 있다. 그 누군가가 주나라를 계승하는 자가 있다면 백 왕조 뒤의 일이라 할지라도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시고 또 “내가 하나라의 예의와 법도는 말할 수는 있으나 그 자손의 나라인 기나라에서는 증거로 삼을 만한 것이 부족하며 은나라의 예의와 법도를 말할 수는 있으나 그 후손의 나라인 송나라에서는 증거로 문헌이 부족하기 때문에 말하기 어렵다. 문헌이 충분하다면 그것을 징험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성인의 말씀이 이미 역사기록의 중요함을 말하고 역사가 끊어짐을 애닯아 하여 걱정하셨던 것이다.
돌아보니 우리 영남은 동방의 추로지향이요, 대구는 곧 영남에서 첫째가는 고을이다. 향교는 성인을 높이고 유도를 지키는 도량이다. 조선 건국초에 유교를 국시로 삼고 국도 한양에 성균관을 건설하고 주현에 향교를 분설分設하였는데 우리 대구향교를 세운 것도 또한 그때에 있었으니 육백년의 오랜 역사가 있어서 의문과 제도가 찬연히 갖추어 있으나 상고사는 불행하게소 섬나라 오랑캐의 병란을 만나 불타고 남은 것이 없어 상고할 수 없으나 중고中古 이후에는 이미 재난을 열거할 수 없고 더욱이 돌아가신 부조父祖의 훌륭한 업적이나 아름다움 행실을 찾을 수 없이 텅 비어 버렸으니 그 까닭이 어디에 있는가? 위에서 말한 기나라 송나라에서 징험할 수 없는 것이 참으로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내가 외람되이 향원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향교에 출입한지 50여년이나 항상 향교의 역사가 없어 전해주지 못하는 것 같은 것이 오래 되었다.
다행스럽게도 전교 양태열씨가 이것을 수집하는데 힘써 방증을 채취하여 책이 한 권이 되었으니 책이름을 약사라고 하고 나에게 서문을 청했는데 돌아보건대 나는 글재주가 없고 이 중책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양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또 노고를 분담하는 뜻으로 삼가 펼쳐 열람하여 보니 그 뜻이 내실이 있고 자상하며 그 글은 화려하고 엄정하여 춘추필이 지금에 다시 보인다. 먼 옛날의 일이 다소 빠지고 생략되었으나 중 근세사는 환하게 다시 밝아졌으니 쓰러진 나무에 싹이 새로 돋은 것이니 어찌 아름답지 않겠는가?
참람하고 망령된 줄 스스로 알지만 대략 전말을 적어 우리 향중의 여러 유림들과 서로 권면하고자 한다.
공자기원 2532년(1981) 신유 단오절
능성綾城 구자덕具滋德은 삼가 서序하노라
능성綾城 구자덕具滋德은 삼가 서序하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