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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9.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고 사신(使臣)들이 일본(日本)에 왕래함.
23/09/05 19:11:45 金 鍾國 조회 599
9.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고 사신(使臣)들이 일본(日本)에 왕래함.
十月 車駕還都.
十二月 天使行人司行人司憲來.
先是沈惟敬 挾倭將小西飛 持關白降表而歸. 天朝疑降表非出於關酋 行長等詐爲之.
又惟敬纔至 而晉州見陷 納疑之意不誠 留小西飛於遼東 久不報.
時提督及諸將皆還去 惟劉綎⋅吳惟忠⋅王必迪萬餘兵 駐箚八莒.
而中外飢甚 且困於饋運 老弱顚溝壑 壯者爲盜賊 重以癘疫 死亡殆盡 至父子夫婦相食 暴骨如莽.
未幾 劉軍自八莒移南原 又自南原還都城 留十餘日 浚巡西去. 而賊猶在海上 人心益恐.
於是 經略宋應昌 被劾去 新經略顧養謙 代至遼東 遣參將胡澤 以箚付來 諭我群臣.
其略曰 <倭奴無端侵爾 勢如破竹 據王京開城三都會 有爾土地人民十八九 虜爾王子陪臣. 皇上 赫怒興師 一戰而破平壤 再進而得開城. 倭奴竟遁王京 送還王子陪臣 復地二千餘里. 所費帑金不貲 士馬物故亦不少. 朝廷之待屬國 恩義至此 皇上罔極之恩 亦已過矣. 今餉已不可再運矣 兵已不可再用矣. 而倭奴畏威請降 且乞封貢矣. 天朝正宜許之封貢 容之爲外臣 驅倭盡數渡海 不復侵爾 解棼息兵 所以爲爾國久遠計也. 今爾國糧盡 人民相食 又何恃而請兵耶? 旣不與兵餉於爾國 又絶封貢於倭奴 倭奴必發怒於爾國 而爾國必亡 安可不早自爲計耶? 昔句踐之困於會稽山也 豈不欲食夫差之肉乎? 而姑忍恥含垢 以有待也 身且爲臣也 妻且爲妾也. 況爲倭奴請爲臣妾於中國 以自寬而徐爲之圖 是愈於句踐君臣之謀也. 此而不能忍 是悻悻小丈夫之見耳 非復讎雪恥之英雄也. 爾爲倭請封貢 若果得請 則倭必益感中國 而且德朝鮮 必罷兵而去. 倭去 而爾國君臣遂苦心焦思 臥薪嘗膽 以修句踐之業 天道 好還 安知無報倭日也?> 其言縷縷千百 大意如此.
胡澤在館三月餘 朝議不決 聖意愈難之. 臣時以病在 吿啓曰 <請封義固不可 惟當祥具近日事情 奏聞以聽中朝處置.> 屢啓乃允. 於是陳奏使許頊去.
時顧經略 又以人言辭去 新經略孫鑛來代 兵部奏請收小西飛入京 詰以三事 一但求封不求貢 二一倭不留釜山 三永不侵朝鮮. 如約卽封 不如約不可. 小西飛指天爲誓 請遵約束.
遂令沈惟敬 更帶小西飛 入倭營宣諭 又差李宗誠⋅楊方亨爲上副使 往封平秀吉日本國王. 而使宗誠等 留我都城 候倭盡撤方行.
乙未四月 宗誠等至漢城 連遣使促倭渡海 項背相望.
於是倭先撤熊川數陣及巨濟⋅場門⋅蘇津浦等諸屯 以示信. 且曰「恐如平壌見欺 願天使速入倭營 當悉如約.」
八月 楊方亨因兵部箚付 先到釜山 而倭遷延不卽盡撤 更請上使 人多疑之. 兵部尙書石星 信沈惟敬言 意倭無異情 又急於退兵 屢促宗誠前去. 雖朝議多異 而星奮然以身當之.
九月 宗誠繼至釜山 平行長不卽來見. 又言將往復關白定奪 然後迎天使. 行長入日本. 丙申正月始回 猶不明言撤兵事. 沈惟敬留二使 又獨與行長先行渡海 託言將講定迎使禮節 人莫能測. 惟敬錦衣登舟 旗上大書調戢兩國四字 立船頭而去. 旣去 久無回報.
李宗誠乃開國功臣文忠之後 以功襲爵 紈袴子弟 性頗恇㥘 或言於宗誠曰「倭酋實無受封意 將誘致宗誠等 拘囚而困辱之.」宗誠懼甚 夜半 以微服出營 盡棄僕從輜重印節而逃. 翌朝 倭始覺 分道追之 至梁山石橋 不得而回.
楊方亨獨留倭營 撫戢群倭 且移文我國 令勿驚動. 宗誠不敢由大路 竄入山谷中 數日不食 宗慶州來西去.
旣而沈惟敬⋅行長始回. 又撒西生浦⋅竹島等屯 其未撤者 只釜山四屯.
乃挾楊副使過海 沈惟敬又要我使同行 遣其姪沈懋時催發.
朝廷不肯 懋時必欲與偕 不得已以武臣李逢春等 稱跟隨陪臣以應之.
或謂武人往彼中 多失誤 宜使文官識事理者往. 時黃愼以沈接伴使 在倭營 就令愼隨行.
天使楊方亨⋅沈惟敬 回自日本.
先是方亨等至日本 關白盛飾館宇 欲迎接 會一夜地大震 摧倒幾盡 遂迎候於他舍 與兩使一再會. 初若受封者然 忽大怒曰「我放還朝鮮王子 朝鮮當使王子來謝 而使臣秩卑 是慢我也.」黃愼等不得傳命. 幷促楊方亨⋅沈惟敬等同回 亦無謝恩天朝之禮.
賊將平行長回釜山浦 淸正復率兵 繼屯西生浦 聲言要王子來謝始解兵. 蓋關酋所求甚大 不止封貢 中朝但許封不許貢. 惟敬與行長相熟 欲臨事彌縫苟且成事 而不以實情聞諸天朝與我國 事竟不諧.
本國卽遣使 馳奏其事. 於是石星沈惟敬 皆得罪 而天兵再出矣.

10월(1593, 宣祖 26년,계사년)에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셨다. 12월에 명(明)나라 사신 행인사(行人司)*1)의 행인사헌(行人司憲)이 우리 나라에 왔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沈惟敬)은 왜적(倭敵)의 장수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관백(關白 : 豊臣秀吉)의 항복문서[降表]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明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關酋]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소서행장[行長]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 였다. 또 심유경[惟敬]이 겨우 돌아오자마자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당하게 되니 강화하겠다는 뜻이 진실이 아니라고 여겨 小西飛를 요동(遼東)에 머물러 두게 하고 오래도록 倭敵에게 회답하지 않았다.

이때 제독(提督 : 李如松)과 여러 장수들은 다 돌아가고 오직 유정(劉綎)⋅오유충(吳惟忠)⋅왕필적(王必迪) 등에게 속한 만여 명의 군사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리고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또 군량을 운반하는데 피곤하여 늙은이,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 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거기에다가 전염병으로 해서 거의 다 죽어 없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다. 얼마 안 되어 유정의 군사가 팔거(八莒)로부터 남원(南原)으로 옮기고, 또 남원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와서 10여 일 동안 머물러 머뭇거리다가 서쪽[明나라]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倭敵들은 오히려 바닷가 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때에 明나라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이 탄핵(彈劾)을 당하여 돌아가고, 새 경략으로 고양겸(顧養謙)이 대신 요동(遼東)으로 왔는데, 그는 참장(參將) 호택(胡澤)을 파견하여 차부(箚付 : 공문서)를 가지고 와서 우리 군신(群臣)들을 타일렀다. 그 대략은, <왜놈들이 까닭없이 그대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그들은 대를 쪼개는 것 같은 형세로 서울과 개성(開城)⋅평양(平壤) 등 세 도회지를 점거하고, 그대 나라의 땅과 백성을 10분의 8, 9는 빼앗아 가졌고, 그대 나라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사로잡았다. 황제께서는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일으켜 한 번 싸워서 평양(平壤)을 쳐부수고, 두 번 진격하여 개성(開城)을 되찾았다. 그러자 왜놈들은 마침내 서울에서 도망하여 가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2천여 리의 땅을 수복하였다.

여기에 소비한 내탕금[帑金]*2)도 많았으며,군사와 마필[土馬]의 죽은 수도 역시 적지 않았다. 우리 조정에서 조선[屬國]을 대접하는 은의(恩義)가 이에 이르렀으니, 황제의 망극한 은덕은 역시 퍽 지나쳤었다. 지금은 군량도 이미 다시 운반할 수 없으며 군사도 이미 다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왜놈들도 역시 우리 위엄을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고 또 봉공(封貢)*3)하기를 빌었다. 明나라 조정에서도 바로 이때야말로 그 봉공을 허락하며 그 외신(外臣)되는 것을 용납하고, 倭敵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몰아내어 바다를 건너가게 하여 다시는 그대 나라를 침범하지 않게 하며 전쟁을 종식시키려 함은, 곧 그대 나라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까닭이다.

지금 그대 나라는 양식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형편인데, 또 무엇을 믿고 군사를 청하려는가? 明나라에서 이미 군량을 그대 나라에 주지 않고, 또 봉공의 청을 왜놈들에게 끊어 버리면 왜놈들은 반드시 노여움을 그대 나라에 내어서 그대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 니, 어찌 가히 일찍 스스로 좋은 계교를 마련하지 않겠는가? 옛날 월(越)나라 구천(句踐)*4)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하였을 때, 어찌 오(吳)나라 부차(夫差)*5)의 살점을 씹어먹고 싶어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얼마 동안 그 부끄러움을 꾹 참고 견딘 것은 뒷날을 기다림이 있었 던 때문이었다. 그 자신은 또한 부차의 신하가 되고, 그 아내는 또한 그[夫差]의 첩이 되었었다.

하물며 지금 왜놈은 신하나 첩이 될 것을 中國에 청하고 있으니, 스스로 너그럽게 그 뜻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도모하는 것은, 곧 구천의 군 신(君臣) 관계의 도모함보다도 나은 것이다. 이것을 능히 참지 못한다면, 이는 발끈 성내는 졸장부의 소견에 불과할 따름이니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영웅다운 품이 아닌 것이다. 그대 나라가 왜(倭)를 도모하기 위하여 봉공을 청하게 하여 만약 청하는 뜻대로 이루게 해준 다면 倭는 반드시 더욱 中國에 감복할 것이고, 또 朝鮮에도 고맙게 여겨 반드시 전쟁을 그만두고 가버릴 것이다. 왜놈들이 가버린 뒤에 그대 나라의 군신이 드디어 애를 쓰고 속을 태우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6)하며 구천이 한 일을 닦아 나간다고 하면 하늘의 운수가 좋게 돌아와 서 어찌 왜놈에게 원수를 갚을 날이 없을 줄 알랴?>(복수할 날이 오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의 길게 늘어놓은 천백 마디의 뜻은 이와 같았다. 호택(胡澤)이 객관에 묵고 있는지 3개월이 넘도록 조정의 의논은 결정을 짓지 못하였고, 임금의 생각도 더욱 난처한 일로 여기셨다. 나는 이때 병으로 휴가 중에 있었는데, 장계(狀啓)를 올려 아뢰기를, <왜적(倭敵)에게 봉공(封貢)을 청하게 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사오니 실로 불가합니다. 오직 근일의 사정을 상세히 갖추어 中國에 알려 그 처분을 듣는 것이 마땅하 겠습니다.> 하고 여러 번 아뢰자, 그제야 임금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이에 진주사(陳奏使)*7) 허욱(許頊)이 明나라로 갔다. 이때 고경략(顧經略 : 고양겸顧養謙)은 남의 말 시비(비난하는 말)로 해서 가고, 새 경략(經略)으로 손광(孫鑛)이 와서 그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병부(兵部)에서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왜사(倭使) 소서비(小西飛)를 데리고 明나라 서울로 들어오게 하여 세 가지 일을 따졌다.
그 내용을 말하면, <첫째로, 다만 봉작[封]만 요구하고 조공[貢]은 (세공을 바치게 해달라고) 요구하지 말 것. 둘째로, 한 사람의 倭兵도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지 말 것. 셋째로, 영원히 朝鮮을 침범하지 말 것. 만약 약속대로 할 것 같으면 즉시 봉작을 봉할 것이나, 약속대로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안 될 것이다.> 하니, 왜사 小西飛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청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다시 왜사 小西飛를 데리고 왜영(倭營)으로 들어가 선유(宣諭)하게[황제의 뜻을 널리 알리게]학고 , 또 이종성(李宗誠)⋅양방형(楊方亨)을 각각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로 삼아 倭國으로 가서 평수길(平秀吉 : 豊臣秀吉)을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봉(封)하게 하고, 그리고 이종성 등으로 하여금 우리 서울에 머물러 倭敵들이 다 철수하는 것을 살펴보고 나서 倭國으로 떠나게 하였 다. 을미년[乙未 : 宣祖 28年,1595] 4월에 이종성 등이 한성(漢城)*8)에 와서 연달아 사자를 보내어 倭敵에게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을 재촉 하느라고 사자들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있어서 倭敵들은 먼저 웅천(熊川)*9)의 몇 진(陣)과 거제(巨濟)⋅장문(場門)⋅소진포(蘇津浦) 등 여러 둔(屯)을 철수하여 그 믿음성을 보이 고는 또 말하기를, <전자 평양(平壤)에서와 같이 속임수를 당할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明나라 사신으로 하여금 속히 왜영(倭營)으로 들면 마땅히 모든 것을 약속한 대로 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8월에 양방형(楊方亨)이 병부(兵部)의 차자(箚子)*10)(공문서公文書)에 따라서 먼저 부산(釜山)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倭敵은 날짜를 늦추면서 즉시 다 철수하지 않고, 다시 상사(上使)가 오는 것을 청하므로 사람들은 이를 많 이 의심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은 심유경(沈惟敬)의 말을 믿고 倭敵이 다른 뜻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군사를 물러가게 하는 데 급하여 누차 이종성을 재촉하여 먼저 가게 하였다. 이때 明나라 조정에서의 의논은 이론이 많았으나 석성(石星)은 분연히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이 일을 맡고 나섰다. 9월에 이종성이 양방형의 뒤를 이어 부산에 이르렀는데, 倭將 평행장(平行長)은 즉시 와서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러 면서 또 말하기를, "장차 가서 관백(關白)에게 복명하여 결정을 얻은 연후에 明나라 사신을 맞이하겠다."고 하였다. 소서행장[行長]은 日本 으로 들어갔다가 병신년[丙申 : 宣祖 29年,1596〕정월에야 비로소 돌아왔으나, 오히려 군사를 철수하는 일에 대하여는 분명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때 심유경(沈惟敬)은 두 사신[양방형, 이종성]을 부산에 머물러 두고 또 혼자서 小西行長과 함께 먼저 바다를 건너가면서 장차 明나라 사신을 맞이할 예절을 의논하여 결정지으러 간다고 말하므로 사람들은 그 내막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심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에 올랐 는데, 그 깃발에는 '두 나라를 조정하여 싸움을 그만두게 한다.'는 조집양국(調戢兩國)의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배 위에 달고 뱃머리에 서서 떠나갔다. 그가 가고 난 뒤 오랫동안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李宗誠)은, 곧 개국공신(開國功臣) 이문충공(李文忠公)의 후손인데, 그 공으로 벼슬을 이어받은 부진하고 귀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자못 겁이 많았다.

이때 어떤 사람이 이종성에게 말하기를, "왜추(倭酋 : 關白 豊臣秀吉)가 사실은 봉작[封]을 받을 의사가 없고 장차 이종성 등을 꾀어 데려다 가두어 놓고 곤욕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니, 이종성은 몹시 두려워하여 밤중에 미복(평복)으로 병영을 빠져나와서 하인들 수행원 들과 행장 소용품과 인장 부절[印節] 등을 다 내버려 두고 도망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倭軍은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길을 나누어 그를 뒤쫓 아 가서 양산(梁山)의 석교(石橋)까지 가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양방형(楊方亨)은 홀로 倭軍의 병영(兵營)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倭軍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또 우리나라에도 공문을 보내어 놀라 소동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종성은 감히 큰 길을 경유하 여 가지 못하고 산골로 들어가서 숨어다니느라고 며칠 동안 밥을 먹지도 못하다가 경주(慶州)로부터 서쪽으로 떠나갔다.

얼마 있다가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行長]이 비로소 부산(釜山)으로 돌아왔다. 倭軍은 또 서생포(西生浦)⋅죽도(竹島) 등지에 주둔하였던 군사를 철수시켰는데, 아직 철수하지 않은 것은 다만 부산의 네 둔진[四屯]뿐이었다. 이어 심유경은 양부사(楊副使 : 楊方亨)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日本으로 갔는데, 이때 심유경은 또 우리나라 사신도 동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 조카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빨리 떠나게 하라고 재촉하였다. 조정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심무시가 반드시 함께 가고자 하므로 마지못하여 무신(武臣) 이봉춘(李逢春) 등을 수행하는 배신(陪臣)이라고 칭하여 그 요구에 응하기로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무인(武人)이 저쪽(일본)에 가면 실수하는 일이 많을 것이니, 마땅히 문관(文官)으로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을 가게 하는 것이 옳겠다."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때 황신(黃愼)*11)이 심유경의 접반사(接伴使)로 倭軍의 병영에 가 있었으므로, 황신으로 하여금 따라 따라가게 하였다. 明나라 사신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沈惟敬)이 日本으로부터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양방형 등이 日本에 이르니, 관백(關白 : 豊臣秀吉)은 관사[館字]를 성대하게 꾸며놓고 사신을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하룻밤새 큰 지진이 일어나서 거의 다 허물어져 버렸으므로 드디어 다른 집에서 맞아들였다. 그[풍신수길]는 두 사신[양방형⋅심유경]과 함께 한두 차례 만났는데, 처음에는 明나라 봉작[封]을 받을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우리가 朝鮮의 왕자[臨海君⋅順和君]를 놓아 돌려보냈으니, 朝鮮에서는 마땅히 왕자(王子)로 하여금 와서 사례하게 해야 할 것인데도 사신도 벼슬이 낮은 사람을 보냈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황신(黃愼) 등은 임금의 분부도 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울러 양방형⋅심유경 등에게도 돌아가라고 재촉하므로 그대로 돌아왔는데, 역시 明나라에도 사은(謝恩)하는 예(禮)가 없었다. 이때 倭敵의 장수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부산포(釜山浦)로 돌아왔고, 가등청정[淸正]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서생포(西生浦)에 주둔하며 "꼭 왕자(王子)가 와서 사례를 해야만 비로소 전쟁을 그만둘 것이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대개 관추(關酋 : 關白 豊臣秀吉)의 요구하는 것이 아주 커서 다만 봉공(封貢)뿐만 아니었는데, 明나라 조정에서는 봉작[封]만 허락하고 조공[貢]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유경[惟敬]은 소서행장[行長]과 서로 친숙하여 임시 미봉책으로 구차스레 일을 성사시켜 보려고 하여 그 실정을 明나라 조정과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일이 마침내 순조롭게 합의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즉시 明나라 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빨리 보고하였다. 이에 있어서 석성(石星)⋅심유경(沈惟敬)은 다 죄를 짓게 되고, 明나라 군사도 다시 나오게 되었다.

*1)행인사(行人司) : 명대(明代)의 조근(朝覲)⋅빙문(聘問)의 외교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외국과의 사신왕래를 관장했던 관청.) 행인(行人)은 여기 소속된 관직명이다.
*2)탕금(帑金) :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사사로운 재산.
*3)봉공(封貢) : 봉작(封爵)과 조공(朝貢).

*4)구천(句踐) : 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월왕(越王)의 이름. 그는 회계산(會稽山) 싸움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곤욕올 당하다가 화약(和約)을 맺고, 20년 뒤에 부차를 쳐 멸망시켜 그 치욕을 씻었다.
*5)부차(夫差) : 中國 춘추시대(春秋時代) 오왕(吳王)의 이름. 부왕(父王) 합려(闔閭)가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패하여 죽자 회계산(會稽山 에서 그를 쳐부숴 원수를 갚았으나, 뒷날 구천에게 패하여 죽고 나라도 망하였다.
*6)와신상담(臥薪嘗膽) : 월왕(越王) 구천(句踐)의 고사(故事). 섶에 누워 잠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말로, 곧 원수를 갚기 위하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

*7)진주사(陳奏使) : 임금에게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여 아뢰는 사명을 가지고 중국[明나라 황제]에 보내는 사신.
*8)한성(漢城) : 우리나라 서울의 옛 이름. 한양성(漢陽城)이라는 뜻.
*9)웅천(熊川) : 경상남도 창원군(昌原郡)에 있는 지명.
*10)차자(箚子) : 간단한 서식으로 하는 상소문(上疏文)을 이르던 말.

*11)황신(黃愼, 1560∼161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본관은 창원(昌原), 시호는 문민(文敏). 성혼(成渾)⋅이이(李珥)의 문인(門人)이다. 宣祖 때 알성과(謁聖科)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통신사(通信使)로 日本에 다녀오고 전라감사(全羅監司)로 활약했다. 벼슬이 대사헌(大司憲),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름. 저서에 ≪추포집(秋浦集)≫⋅≪대학강어(大學講語)≫⋅≪막부삼사수창 府三槎酬唱錄)≫⋅≪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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