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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17.왜적이 남쪽으로 물러감/18. 명(明)나라 장수들의 전황(戰況).
23/10/16 20:22:33 金 鍾國 조회 433
17. 왜적(倭敵)이 남쪽으로 물러감.
賊兵退.
時賊蹂躪三道 所過皆焚燒廬舍 殺戮人民. 凡得我國人 悉割其鼻以示威 兵至稷山 都城人皆奔散.
九月初九日 內殿避兵西下.
經理楊鎬 提督麻貴在京城 而平安道軍 五千餘人 黃海⋅京畿軍數千徵至 分守江灘 警守倉庫.
賊從京畿界還退 淸正再屯蔚山 行長屯順天 沈安頓吾屯泗川 首尾七八百里.
是時 都城幾不守 朝臣爭獻出避之策 知事申磼進言曰「車駕應行寧邊 臣曾爲兵使 備諳寧邊事 其最可憂者 乃無醬也. 若不預辦 何以繼用?」聞者傳笑曰「辛不合醬.」
一大臣言於朝堂曰「此賊何足憂? 久當自息 惟當奉乘與往安便處耳.」
元帥權慄 走至京 上引見問之 慄曰「當初 車駕不合遽還都城 當留駐西方 以觀賊勢如何.」
旣而聞賊退 慄又下慶尙道. 臺諫論慄無謀恇㥘 不可爲元帥 不聽.

왜적(倭敵)이 물러갔다. 이때 倭敵들은 3도(三道 : 경상⋅전라⋅충청)를 짓밟았는데, 지나는 곳마다 가옥을 다 불사르고 백성들을 죽였으며, 무릇 우리나라 사람을 잡기만 하면 모두 그 코를 베어 가지고 위엄을 보였으므로, 倭敵들이 직산(稷山)에 이르자 서울[都城] 사람들은 벌써 다 달아나 흩어지는 형편이었다. 9월 9일에 내전(內殿 : 王妃)께서는 병란(兵亂)을 피하여 서쪽지방으로 내려가셨다. 명(明)나라 장수인 경리(經理) 양호(楊縞)와 제독(提督) 마귀(麻貴)는 서울에 있으면서 평안도(平安道) 군사 5천여 명과 황해도[黃海]⋅경기[京畿] 군사 수천 명을 징집 하여 한강(漢江) 여울목을 나누어 지키고 창고를 경비하여 지켰다.

倭敵은 경기도(京畿道) 지경까지 왔다가 도로 물러갔는데, 가등청정[淸正]은 다시 울산(蔚山)에 주둔하고, 소서행장[行長]은 순천(順天)에 주둔하고,심안돈오(沈安頓吾 : 鳥津義弘)는 사천(泗川)에 주둔하였는데, 그 머리와 끝의 거리가 7, 8백 리나 되었다. 이때 서울은 거의 지키지 못할 상태에 놓였는데, 조신(朝臣)들은 서로 다투어 피란할 계책을 올렸다. 지사(知事) 신잡(申磼)은 진언하기를, "임금께서는 마땅히 영변(寧邊)으로 떠나소서, 신은 일찍이 평안도병사(平安道兵使)를 지낸 적이 있어 영변의 사정을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가장 걱정 이 되는 것은, 곧 장(醬)이 없는 것이오니, 만약 미리 준비를 하지 않는다면 어찌 소용되는 것을 이어 댈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서로 이 말을 전하고 웃으면서 말하기를, "신일(辛日)에는 장을 담그지 않는다네."라고 하였다.

한 대신이 조정에서 간하기를, "이번의 倭敵은 어찌 걱정할 거리가 되겠습니까? 오래 끌면 반드시 저절로 물러가게 될 것이오니, 마땅히 임금님의 행차를 받들고 편안하신 곳에 모셨으면 할 따름입니다." 했다.  그런데 도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달아나 서울에 이르렀으므로, 임금께서는 불러보시고 그에게 정세를 물으니, 권율은 대답하기를, "당초에 임금님께서 갑자기 서울로 돌아오신 것이 적합한 처사가 아니었습니다. 마땅히 서쪽 지방에 머물러 계시면서 倭敵의 형세가 어떠한가를 살펴보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왜적이 물러갔다는 말이 들리자 권율(權慄)은 또 경상도(慶尙道)로 내려갔는데, 대간(臺諫)들은 "권율은 꾀가 없고 겁이 많으니 도원수(都元帥)로 삼아서는 안되겠습니다."라고 논핵하였으나, 임금께서는 받아들이지 않으셨다.
 
18. 명(明)나라 장수들의 전황(戰況).
十二月 楊經理⋅麻提督 領騎步兵數萬 下慶尙道 進攻蔚山賊營.
時賊將淸正 築城於蔚山郡東海邊斗絶處. 經理提督 乘其不意掩之 以鐵騎馳擊 賊披靡不能支 天兵奪賊外栅 賊奔入內城. 天兵貪擄獲之利 不卽進攻 賊閉門固守 攻之不克. 諸營分屯城下 圍守十三日 賊不出.
二十九日 余自慶州 往見經理⋅提督 望見賊壘甚靜暇 寂無人聲 城上不設女牆 環四面爲長廊 守兵悉在其內 外兵若至城下 則銃丸亂發如雨.
每日交鋒 天兵與我軍 死城下成積. 賊船從西生浦來援 列泊水中如鳧雁.
島山無水 賊毎夜出沒城外 經理令金應瑞 率勇士伏兵城外泉傍 連夜擒百餘人 皆飢羸僅屬聲氣. 諸將言城內糧絶 久圍將自潰.
時天甚寒陰雨 士卒手走瘒*2)[皸]*3)瘃已而.
賊又從陸路來援 經理恐爲所乘 遽旋師.
正月 天將悉回京師 謀再擧.
戊戌七月 經理楊鎬罷 新經理萬世德代之. 時邢軍門參謀官 兵部主事丁應泰 劾奏楊鎬欺罔僨事二十餘罪. 鎬遂罷去.
上以鎬於諸經理中 銳意討賊 卽遣左議政李元翼 䝴伸救奏 馳赴京師.
八月 鎬西去 上送至弘濟院東 流涕而別. 萬世德將出 未至.
九月 邢玠又分調麻貴主蔚山 董一元主泗川 劉綎主順天 陳璘主水路 同時進攻. 皆不利 董軍爲賊所敗 死者尤多.

12월에 양경리(楊經理 : 楊縞)⋅마제독(麻提督 : 麻貴)은 기병과 보병 수만 명을 거느리고 경상도(慶尙道)로 내려가서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倭敵)의 진영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이때 倭敵의 장수 가등청정(加籐淸正)이 성을 울산군(蔚山郡)의 동해 바닷가 험준한 곳에 쌓고 있었는데, 양호 경리와 마귀 제독은 그들의 뜻밖의 기회를 틈타서 엄습하여 날랜 기병대로 몰아치니, 倭敵들은 쓰러져 감히 견디지 못하였 다. 명(明)나라 군사가 倭敵의 외책(外栅 : 外城)을 빼앗으니 倭敵들은 달아나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明나라 군사들은 倭敵이 두고 간 전리품의 노획을 탐내어 즉시 몰아서 진공(進功)하지 않았는데, 倭敵들은 성문을 닫고 굳고 크게 지키므로 이를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였다.

명군(明軍)의 여러 진영에서는 성 아래 나누어 주둔하고, 성을 포위한지 13일이나 되어도 倭敵들은 나오지 않았다. 29일에 내가 경주(慶州)로부터 울산(蔚山)으로 가서 양경리와 마제독을 만나보았는데, 倭敵의 진루[壘]를 바라보니 매우 고요하고 한가로워 사람의 소리도 없이 적적하였고, 성 위에는 여장[女牆 : 성(城)가퀴 ; (몸을 숨겨 적을 공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성 위에 덧쌓은 낮은 담. 성첩(城堞)]을 베풀지 않고 사면을 둘러 장랑[長廊 : 줄 행랑(行廊) : 대문 좌우쪽에 쪽 벌여있는 행랑]을 만들어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그 안에 있다가 밖의 군사 가 만약 성 밑에 이르면 총탄을 비가 쏟아지듯 어지럽게 쏘았다. 날마다 이런 싸움이 되풀이되어 明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군사의 주검이 성 밑에 쌓이게 될 뿐이었다. 이때 倭敵의 배가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와서 돕는데 물속에 벌여 정박한 것이 마치 물오리 떼와 같았다.

이 섬 안에는 물이 없어서 倭敵은 밤마다 성 밖으로 출몰하므로, 양경리는 김응서(金應瑞)로 하여금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의 샘 곁에 복병을 설치하게 하여 밤마다 연달아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그들은 다 굶주리고 파리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성 안에는 양식이 끊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하고 있으면 倭敵들은 장차 저절로 무너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춥고 게다가 비가 와서 군사들은 손발이 얼어 터졌다. 얼마 뒤에 倭敵은 또 육로로부터 와서 구원하니, 경리 양호는 그 공격을 당하게 될까 두려워하여 갑자기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정월(1598년)에 明나라 장수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진격할 일을 도모하였다. 무술년[戊戌 : 宣祖 31年,1598] 7월에 경리(經理) 양호(楊鎬)가 파면되고, 새 경리로 만세덕(萬世德)*1)이 그를 대신하여 왔다. 이때 형개(邢玠)의 참모관(參謀官)인 병부주사(兵部主事) 정응태(丁應泰)는 '양호가 속이다가 일을 그르친 20여 가지 죄'를 탄핵하여 아뢰었기 때문에 양호는 드디어 파면되어 가게 된 것이다.
임금께서는 양호가 여러 경리들 가운데서 倭敵을 토벌하는 데 가장 힘썼다고 해서 즉시 좌의정(左議政) 이원익(李元翼)을 파견하여 그를 구제하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明나라 서울로 달려가게 하였다.

8월에 양호가 서쪽으로 떠나가므로 임금께서는 홍제원(弘濟院)의 동쪽까지 나가서 보내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다. 만세덕(萬世德)은 곧 출발하였으나 아직 도착하지는 않았다. 9월에 형개(邢玠)는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마귀(麻貴)는 울산(蔚山)을 맡게 하고,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을 맡게 하고,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을 맡게 하고, 진린(陳璘)은 수로(水路)를 맡게 하여 동시에 진공하게 하였으나 다 불리하였고, 동일원의 군대는 倭敵에게 패한 바 되어 죽은 사람이 더욱 많았다.
*1)만세덕(萬世德) : 명(明)나라 장수. 병법을 잘 알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우포정(右布政)에 임명되었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첨도어사(僉都御史)로 양호(楊鎬)를 대신하여 경리(經理)가 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움.
*2)온(瘒) : 어리석은 모양 온. 동상을 입다.
*3)군(皸) : 틀. 군. 틈. 얼어터짐. 瘃 : 동상 촉. 동상. 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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