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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사 강좌 1부 1부(오순제 교수) (1)
23/12/11 12:20:26 金 鍾國 조회 436
부여사 강좌 1부 (오순제 교수)
Ⅰ부. 맥족과 예족의 문화
1. 진조선의 쇠퇴와 열국의 분화
그림입니다. ♦ 『제왕운기(帝王韻紀』 卷下, 초수개국계풍운(初誰開國啓風雲)조의 주석에“이름을 단군이라 하고 朝鮮의 땅을 차지하여 왕이 되었다. 이런 까닭으로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沃沮), 동북부여(扶餘), 예(穢), 맥(貊)은 모두 檀君의 자손인 것이다.”라고 하여 고조선 후예에는 시라(尸羅), 고례(高禮), 남옥저(南沃沮), 북옥저(北沃沮), 동부여(東扶餘), 북부여(北扶餘), 예(穢), 맥(貊) 등의 10개국이어  었다고 한다.
♦『제왕운기(帝王韻紀』 한사군급열국기(漢四郡及列國紀)조에는 “각자 나라를 칭하고 침략하니 70여개 이름을 어찌 다 밝히랴. 그 중에서 大國이 어느 것인고, 첫째는 부여와 비류국(沸流國)이 떨쳤고, 다음은 신라(新羅)와 고구려이며, 남북옥저와 예맥(濊貊) 따르더라, 이들 임금님의 조상을 묻지 마라, 모두모두 단군의 한 핏줄이다”라고 하였다.
♦ 『후한서』 권85, 동이열전, 예조에 “예, 옥저, 고구려는 본래 모두 조선 땅이다”라고 하였다.
♦ 『三國遺事』 권1, 기이에 ⟪通典⟫에 이르기를 “조선의 유민들이 나뉘어 70 여국으로 되었으니 지역은 모두가 사방 100 여리나 되었다”라고 한다.
♦『帝王韻紀』에는 큰 나라는 10개국, 작은 나라까지 모두70여 개국이라고 하였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서는 큰 나라가 9개국, 작은 나라는 12개국이었다고 한다. 『後漢書』 에서는 이들이 고조선에서 분화된 나라들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三國遺事』에서도 ⟪通典⟫을 인용하여 고조선의 유민들이 나누어져 70개국을 이루었다고 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에는 “단군왕검은 치우(蚩尤)씨의 후손은 남국(南國), 신지씨의 후손은 숙신국(肅愼國), 고시씨의 후손은 청구국(靑丘國), 수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 여수기는 예국(濊國), 단군왕검의 둘째 아들인 부소(扶蘇)는 고구려, 셋째 부우(扶虞)는 진번국(眞蕃國), 막내아들인 부여(夫餘)는 부여국(夫餘國)에 봉했으며, 그 뒤를 이은 첫째아들 부루(夫婁)가 서자 세 사람을 각각 옥저국(沃沮國,) 졸본국(卒本國), 비류국(沸流國)에 봉하여 大國 9개이었으며, 小國은 12개 였다“고 한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기에는 “BC1285년 우현왕 색불루(索弗婁)가 부여신궁에서 즉위하자 소태가 아사달로 은거하였다”고 하며, 또 “BC425년에 백민성(白民城)의 욕살이었던 구물(丘物)이 반란을 제압하고 장당경(藏唐京)에서 즉위하여 국호를 대부여(大夫餘)라 하였다”고 한다. 이것을 보면 BC13세기경에 만주지역의 진조선에 정치적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치적 변화는 국읍 → 대읍 → 소읍 → 촌 등의 누층구조로 되어 있었던 정치체제가 흔들리면서 대읍들이 열국으로 분화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2. 맥족의 서단산문화
♦서단산문화(西團山文化)는 BC11 ~ BC3세기까지 중국의 동북지역을 대표하는 청동기문화로 길림성의 길림시 영길현을 중심하는 제2송화강 유역에 분포하고 있는 서단산문화 무덤의 95%는 석관묘이다.
♦ 1910년부터 지금까지 조사된 석관묘(石棺墓) 유적은 100여 곳으로 23곳이 발굴되었으며 확인된 것은 400여기에 이른다.
♦요동(遼東)지역의 석관묘의 기원은 마성자문화(馬城子文化)로 볼 수 있다. 이 문화가 남쪽으로 천산산맥을 따라 요남(遼南)지역의 신금현 일대까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일부는 요북지역 석관묘 유적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길림합달령(吉林哈達嶺)을 따라 吉林市 일대에 영향을 미치면서 서단산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단산문화를 거친 석관묘는 다시 장광재령 일대와 제일송화강을 건너 소흥안령 동쪽 흑룡강성 제1송화강 중류의 파언현(巴彦縣) 일대까지 전파되기도 하였다.
♦요동지역에서 청동기가 출토되고 있는 유적은 약 70여 곳으로 요하유역에 27곳, 요동반도지역에 31곳, 압록강유역에 8곳이 확인 되고 있다. 지금까지 확인된 가장 이른 시기의 청동기는 마성자문화에 속하는 본계(本溪)의 장가보(張家堡) A동굴유적의 11호 토광묘에서 출토된 환형장신구이다. 탄소연대측정결과 이 토광묘연대는 기원전 1140년+-55년으로 확인되고 있다. 전체적으로 요동지역의 비파형동검문화와 서단산문화는 마성자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요동지역의 청동기유적 중에 前期에 속하는 유적은 대련의 쌍타자, 강상, 누산, 요양의 이도하자, 무순의 대갑방 등으로 모두 비파형동검이 출토되고 있으며, 연대는 대략 기원전 10~9세기이다.
♦중기에 속하는 유적은 서풍의 성신촌, 장해의 상마석, 심양의 정가와자 등이 있으며 연대는 대략 기원전 10~9세기이다.
♦ 후기에 속하는 유적은 대련의 윤가촌, 신금의 쌍방, 심양의 정가와자, 본계의 상보, 무순의 축가구 등으로 연대는 기원전 5세기 정도이다. 주로 비파형동검. 동촉, 선형동부 등이 출토되고 있다.
♦ 길림성 중부지역에 분포되어있는 서단산문화는 3시기로 나누어진다.
♦ 前期는 성성초(星星哨)유적의 연대는 기원전 10~9세기로 추정된다.
♦ 중기는 소달구(騷達溝) 산정대관(山頂大棺), 반석(磐石)의 소서산, 영길의 낭두산(狼頭山), 후석산(猴石山) 등으로 연대는 기원전 7세기경이다.
♦ 후기에는 토성자, 포자연전산, 영길의 양둔대해맹 등으로 연대는 기원전 5세기경이다.
♦ 주로 비파형동검, 비파형동모, 선형동부, 동도 등이 출토되고 있다.
♦ 西團山文化의 중심지였던 제2송화강 중류지역은 기원전4~3세기에 들어서면 초기철기문화가 유입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고고학문화가 형성되면서 문화적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다. 그러나 길림시 일대는 서단산문화의 중심지였기에 늦게까지 서단산문화의 영향이 남아있게 되며, 기원전 4~3세기에 들어 평원지역과 인접한 永吉의 大海猛 유적, 學古東山 유적 등에서 토광묘와 옹관묘 등 새로운 형태의 묘제가 나타나게 된다.
♦이 지역에 본격적으로 철기와 더불어 토광목곽묘(土壙木槨墓) 등의 새로운 포자연문화(泡子沿文化)가 나타나게 되는 것은 기원전 3세기말~3세기 초이다.
♦ 이것은 서단산문화가 석광묘를 사용했던 맥족문화였는데, 반해 토광목곽묘를 사용한 예족에 속하는 부여문화에 속하는 것으로 이 시기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北扶餘의 문화권으로 편입되어 간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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