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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6장 孔子時代 (3)
23/03/28 05:50:27 김종국 조회 1714
공자시대(孔子時代)(3)
 
제(齊)나라 귀족 중에 고장(高張)이라는 경대부(卿大夫)가 있었다.
공자(孔子)는 고장의 가신(家臣)으로 들어가 제경공(齊景公)에게 줄을 닿으려고 애썼다. 이러한 그의 노력은 성공을 거두어 마침내 제경공을 알현(謁見)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제경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라가 순조롭겠소?"
공자가 대답했다.
"군주(君主)는 군주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자식은 자식답게 행해야 합니다. 그러면 나라는 평안합니다." (君君 臣臣 父父 子子 )
"좋은 말이로다. 만일 군주가 군주답지 못하고, 신하가 신하답지 못하고, 아버지가 아버지답지 못하고, 자식이 자식답지 못하면 비록 곡식이 있은들 내 어찌 그것을 먹을 수 있을 것인가?"
며칠 후 다시 제경공이 공자를 불러 물었다.
"어떻게 하면 나라를 부강하게 할 수 있겠소?"
"정치의 핵심은 재물을 절약하는 데 있습니다. 검소하고 또 검소하십시오."
근검절약의 사상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제경공은 공자의 말에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를 이계(尼谿)라는 땅에 봉하려 할 때였다.
재상(宰相) 안영(晏嬰)이 나서서 반대했다.
"무릇 유학자는 말재간이 있어 법망을 교묘히 빠져나가며, 거만하고 제멋대로여서 신하로 두기 어렵습니다. 검소를 강조하면서도 상례(喪禮)를 중시하여 장례를 한 번 치르면 파산까지 서슴지 않으며, 도처에 유세(遊說)를 다녀 나라의 정치를 맡길 수도 없습니다.
현자(賢者)가 사라진 이래로 예악(禮樂)이 붕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지금 공자는 용모를 성대히 꾸미고 의례절차를 번거롭게 하고 세세한 행동규범을 강조하고 있으니, 이는 몇 세대를 지나도 다 배울 수 없습니다. 주공(主公)께서 공자를 채용하여 齊나라 풍속을 바꾸려 하신다면 이것은 백성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절약가라면 안영을 따라갈 사람이 없다.
그의 눈에 공자의 예의범절은 너무나 사치스럽고 위선적으로 비쳤다.
 
더욱이 齊나라는 실리를 좇는 자유분방의 나라다.
반면 노(魯)나라 출신인 공자는 형식과 예법에 얽매어 현실을 무시하는 경향이 짙다. 한마디로 齊나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사상이라는 것이었다. 일종의 '공자 비판'이다.
제경공은 안영의 간언을 받아들였다.
공자를 불러 말했다.
"나는 이제 늙었소. 그대를 등용할 수가 없소."
이에 공자는 齊나라를 떠나 다시 魯나라로 돌아왔다.
공자가 학숙(學塾)을 열고 제자들을 받아들여 일종의 교단(敎團)을 이루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였다.
齊나라에서 거절당하다시피 귀국한 공자였지만 그는 안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그 자신 齊나라와 魯나라의 풍속이 다르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그는 안영을 칭찬했다.
 
≪논어(論語)≫에 이런 구절이 있다.
안평중(晏平仲)은 사람을 잘 사귄다. 오래 지나도 상대에게 경의를 잃는 일이 없다.
하지만 역시 정(鄭)나라 명재상(名宰相) 자산(子産)을 극찬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미약하다. 단 한 구절밖에 나와 있지 않다. 아무래도 사상적으로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공자가 귀국했을 때 魯나라를 세 조각으로 나누어가진 삼환(三桓)의 대표자는 계손의 여(季孫意如), 맹손무기(孟孫無忌), 숙손주구(叔孫州仇)였다.
그런데 이 무렵 魯나라에 또 하나의 이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삼환인 계손씨(季孫氏), 맹손씨(孟孫氏), 숙손씨(叔孫氏)의 가재(家宰)들이 자신의 주인들을 제치고 또 다른 권력자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삼환이 군주의 실권을 빼앗았듯 가신들이 삼환의 실권을 빼앗아버린 것이었다. 명을 내려도 가재들이 수락하지 않으면 아무도 따르는 사람이 없었다.

이 무렵의 삼환과 그 가신들의 관계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계손의여의 식읍(食邑)은 비읍(費邑)이었으며, 그 관리자는 공산불뉴(公山不狃)였다.
맹손무기의 식읍은 성읍(成邑)으로, 그 관리자는 공렴처보(公斂處父)였다.
숙손주구의 식읍은 후읍(郈邑)으로, 그 관리자는 약묘(若貓)였다.
삼환이 소유하고 있는 이 세 성은 높고 튼튼하기가 魯나라 도성(都城)인 곡부(曲阜)에 조금도 뒤짐이 없었다. 그래서 魯나라에는 네 개의 도성이 있는 듯했다. 삼환의 가신 중 가장 강성하고 횡포한 자는 계손의여의 살림을 맡아보는 공산불뉴였다.
계손의여의 가신 중에 또 한 사람의 실력자가 있었다.
양호(陽虎)라는 가재였다. 양호는 ≪논어≫에서 '양화(陽貨)'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양호는 공산불뉴 못지않은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던 모양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어깨가 수리 같았고, 이마가 매우 넓었다고 한다. 그는 장성하여 키가 9척이 넘었고, 힘도 세었으며, 꾀도 많았다. 그는 공산불뉴와 더불어 계손씨의 재산을 독단적으로 관리했다. 그들의 권한은 점차 커져 마침내는 주인인 계손의여를 능가하게 되었다.
공자 나이 42세 때인 기원전 510년에 노소공(魯昭公)이 齊나라 땅에서 죽었다.
재위 32년이라고는 하지만 말년의 8년간은 군주자리에서 쫓겨난 상태로 있었다. 노소공이 죽자 魯나라의 실권자 계손의여는 노소공의 동생 송(宋)을 군주로 올렸다.
그가 노정공(魯定公)이다.
노정공 5년인 기원전 505년, 계손의여가 죽고 그 아들 계손사(季孫斯)가 계손씨의 당주자리에 올랐다. 이 해는 초(楚)나라가 진(秦)나라의 도움을 받아 오(吳)나라에 빼앗겼던 수도 영성(郢城)을 되찾은 해이다.
당주가 바뀌는 어지러운 틈을 타 양호는 자신의 권한을 더한층 강화했다. 신임당주인 계손사를 감금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계손사는 양호와 협정을 맺고 풀려나는 수모를 겪었다.
결국 계손사는 가신인 양호에게 지배당하는 기묘한 처지에 놓인 셈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어쩌랴. 현실적으로 힘을 가진 자는 양호인 것을.
이렇듯 魯나라 국정이 일개 평민이라 할 수 있는 가재들에 의해 좌지우지되자 魯나라 전역에서는 정도에서 벗어난 일들이 비일비재(非一非再) 생겨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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