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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陳壽의 (東夷族見聞錄(5부)
23/03/17 09:18:07 김종국 조회 1806
5부
3.옥저(沃沮)
동옥저東沃沮는 고구려高句麗의 개마대산蓋馬大山 동쪽, 큰 바다 가까이 위치해 있다. 그곳의 지형은 동북으로 좁고 서남으로는 길어서 약 1천여 리나 된다. 북으로 읍루挹婁, 부여扶餘와 접해있고, 남으로는 예맥濊貊과 접해있다. 인구는 5천호이며, 대군주大君王 이 없으며, 부락마다 대대로 각각 제일 어른인 수령首領이 있다. 언어는 고구려와 대체로 같거나 때로는 조금씩 다른 경우도 있다. ( 東沃沮在高句麗蓋馬大山之東 濱大海而居 其地形東北狹 西南長 可千里 北與挹婁‧扶餘 南與濊貊接 戶五千 無大君王 世世邑落各有長帥 其言語句麗大同 時時小異)
 
한漢나라 초기에 燕에서 도망쳐온 한인漢人 위만衛滿이 조선의 왕이 되었는데, 이 때 옥저沃沮도 그에 예속되었다. 한무제漢武帝 원봉元封(기원전 110~105년) 2년에 군대를 보내어 조선朝鮮을 쳐서 위만의 손자 우거右渠를 죽인 후 그 땅을 나누어 4개의 군郡으로 삼았는데, 옥저성沃沮城은 현도군玄菟郡의 치소治所가 되었다. 후에 와서 이맥夷貊들의 침략을 받게 되자 현도군玄菟郡의 치소治所를 고구려高句麗의 서북쪽으로 옮겼는데, 지금의 소위 옛터가 바로 그곳이다. (玄菟郡이 옮겨간 후) 옥저는 다시 낙랑군에 예속되었다.(漢初 燕亡人衛滿王朝鮮 時沃沮皆屬焉 漢武帝元封二年 伐朝鮮 殺滿孫右渠 分其地爲四郡 以沃沮城爲玄菟郡 後爲夷貊所侵 徙郡高句麗西北 今所謂玄菟故府是也 沃沮還屬樂浪)
 
한나라는 그 땅이 넓고 멀다고 하여 단단대령單單大嶺(지금의 백두산) 동쪽에 동부도위東部都尉를 설치하고 불내성不耐城에 그 치소治所를 두고 동부東部의 일곱 현縣을 별도로 주관하게 하였는데, 이때 옥저沃沮 전 지역도 이 일곱 현縣 중의 하나가 되었다.
한광무제漢光武帝 건무建武(기원25~56년) 6년(기원30년)에 변경의 군郡들을 줄일 때 이곳의 동부도위東部都尉도 폐지되었다. 그 후에 각 현의 수령들을 현후縣侯로 봉하였는데, 불내不耐‧화려華麗‧옥저沃沮 등의 현縣들도 모두 후국侯國이 되었다. 그러자 동이東夷들이 다시 서로 공벌攻伐하기 시작하였으나, 오직 불내현不耐縣의 예후濊侯 만은 지금까지도 한漢나라의 관직을 그대로 두고 그 자리를 모두 예濊사람들로 하여금 맡게 했다. (漢以土地廣遠 在單單大嶺之東 分置東部都尉 治不耐城 別主領東七縣 時沃沮亦皆爲縣漢光建武六年 省邊郡 都尉由此罷 其後皆以其縣中渠帥爲縣侯 不耐‧華麗‧沃沮諸縣皆爲侯國 東夷更相攻伐 唯不耐濊侯至今猶置功曹 主簿諸曹 開濊民作之)
 
옥저의 여러 부락 수령들은 모두 자신들을 삼로三老라 부르는데, 이는 곧 과거 한漢나라의 현縣으로 있었을 때 각 부락이 수령들에 대한 명칭이다. 나라가 작고 또 큰 나라들 사이에 끼어 있었음으로 마침내 고구려高句麗에게 신하의 지위로 예속되었다. 高句麗는 다시 그들 중에서 사자使者를 뽑아 서로 다스리도록 하고, 또 고구려의 대가大加를 보내어 그들의 조세租稅를 통일적으로 거두게 하였다. 조세의 징수 대상에는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베(貊布)와 고기와 소금 및 해산물 등이 포함되었다. 옥저沃沮 사람들은 그것을 짊어지고 1천 리나 되는 먼 길을 가서 바쳐야 하였다. 이 밖에 또 미녀를 뽑아 보내어 고구려의 귀족들의 비첩婢妾으로 삼게 하였는데, 고구려의 귀족들은 그들을 종이나 하인(奴僕)처럼 대우하였다. (沃沮諸邑落渠帥 皆自稱三老 則故縣國之制也 國小 迫于大國之間 遂臣屬句麗 句麗復置其中人爲使者 使相主領 又使大加統責其租稅 貊布‧魚‧鹽‧海中食物 千里擔負致之 又送其美女以爲婢妾 遇之如奴僕)
 
옥저는 토지가 비옥하며, 산을 등지고 바다를 향해 있어 오곡의 생산에 알맞다. 그래서 그곳 사람들은 농사를 잘 지었다. 사람들의 성격은 질박하고 정직하고 강인하고 용감하며, 소와 말이 적어서 기병전에는 미숙하나 긴 창을 들고 걸어가며 싸우는 보병전步兵戰에는 능숙하다. 음식과 집, 의복과 예절, 등은 고구려와 비슷하다. (其土地肥美 背山向海 宜五穀 善田種 人性質直彊勇 少牛馬 便持矛步戰 飮食居處 衣服禮例節 有似句麗)
(*원주:(一) <위략>에서 말하기를 옥저의 결혼 풍속은 여자의 나이가 열 살이 되면 남자 쪽 집안과 서로 혼약을 맺은 후 사위가 될 남자 쪽 집에서 여자를 맞아들여 키운 다음 아내로 삼는데, 성인이 되면 일단 다시 여자 집으로 돌려보낸다. 여자 쪽 집에서 돈을 요구하면 그 돈을 모두 건네준 후에야 비로소 다시 사위에게 돌려보낸다.
(*原註:(一) 魏略曰 其嫁娶之法 女年十歲 已相設許 壻家迎之 長養以爲婦 至成人 更還女家 女家貢錢 錢畢 乃復還壻)
 
장례 풍속은 매장할 때에는 나무로 된 큰 겉 널을 만드는데 길이가 10여丈으로, 머리 쪽 함 부분을 열어두어 문으로 삼는다. 갓 죽은 자는 임시매장을 하는데, 얇게 흙을 덮어서 겨우 형체만 가려 두었다가 살이 모두 썩어 없어지면 그때 가서 뼈만 추려서 관에 담아 둔다. 온 집안사람이 모두가 하나의 널을 공동으로 사용한다. 나무로 죽은 사람의 생전 모습을 조각해 두는데, 그 조각 인형의 숫자는 널 속에 담겨있는 죽은 사람의 숫자와 같다. 또 발이 셋 달린 옹기솥에 쌀을 담아서 널리 문 옆에 매달아 둔다. (其葬作大木槨 長十餘丈 開一頭作戶 新死者皆埋之 才使覆形 皮肉盡 乃取骨槨中 擧家皆共一槨 刻木如生形 隨死者爲數 又有瓦鎘(력) 置米其中 編(縣)懸之於槨戶邊)
 
북옥저는 일명 치구루置溝婁라고도 하는데, 남옥저에서 8백 여리 떨어져 있다. 그 風俗은 남쪽 옥저와 모두 같다. 그리고 읍루挹婁와 접해있다. 읍루사람들은 배를 타고 노략질하기를 좋아하므로, 북옥저 사람들은 이를 겁내어 여름이면 항상 산의 깊은 바위굴에 숨어 지내다가 겨울에 얼음이 얼어 읍루의 배들이 다닐 수 없으면 그때서야 내려와서 마을에서 지낸다.(北沃沮一名置溝婁 去南沃沮八百餘里 其俗南北皆同 與挹婁接 挹婁喜乘船寇鈔 北沃沮畏之 夏月恒在山巖深穴中爲守備 冬月冰凍 船道不通 乃下居村落)
 
현토군 태수 왕기가 따로 군사를 보내어 고구려왕 위궁을 추격하게 하여 옥저의 동쪽 끝까지, 해변까지 갔다.(王頎別遣追討宮 盡其東界)
*(이하에서 나오는 이야기는, 저자 申采浩 선생이 말했듯이, 중국의 침략이 멀리까지 미쳤음을 과장하기 위하여 꾸며낸 이야기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이다.)
 
(*(병사들이) 그 지방 노인들에게 물었다. ⌜바다의 동쪽에도 사람이 사는가?⌟노인들이 대답하였다. ⌜옥저 사람이 일찍이 배를 타고 고기를 잡고 있다가 풍랑을 만나 수십 일간 표류하여 동쪽의 한 섬에 닿았는데, 그 섬에는 사람이 살고 있으나 우리와는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그곳의 풍속은 항상 7월이면 여자아이를 뽑아서 바다에 던진다.⌟ 또 말했다.⌜베옷 한 벌이 바다로부터 떠내려 왔는데 그 옷 모양이 중국인들의 옷 같았으며, 양 소매의 길이는 3丈⌟이나 되었다. 또 남파선 한 척이 파도에 밀려와서 해변가에 닿았기에 배 안을 뒤져 보았더니 배 안에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목에 또 얼굴이 하나 있었다. 그를 산채로 붙잡았으나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음식을 먹지 않아서 얼마 후에 죽었다. 이상에서 말한 일들이 일어난 지역은 모두 옥저의 동쪽 큰 바다 가운데 있다.*)
(*問其耆老⌜海東復有人不⌟ 耆老言國人常乘船捕魚 遭風見吹數十日 東得一島 上有人 言語不相曉 其俗常以七月取童女沈海 又言有一國亦在海中 純女無男 又說得一布衣 從海中浮出 其身如中人衣 其兩袖長三丈 又得一破船 隨波出在海岸邊 有一人項中復有面 生得之 與語不相通 不食而死 其域皆在沃沮東大海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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