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진수의 동이족 견문록(3~4부)
23/03/14 17:21:10 김종국 조회 1869
3부
2.고구려高句麗
“계란과 같은 기운이 저의 몸에...”
위략에서 말하기를 ⌜옛 기록 구지舊志⌟에서 말하기를, 옛날 북방의 고리高離라는 나라가 있었는데, 그 왕의 시비가 임신을 하자 왕이 그를 죽이려 했다. 이에 그 시비가 말했다. “계란과 같은 기운이 저의 몸에 내려왔는데, 그로 인하여 임심을 하였습니다.”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왕이 그것을 돼지우리에 버리니 돼지주둥이로 그 아이에게 입김을 불어 주고, 마구간에 옮겼더니 말이 입김을 불어주어 그 아이가 죽지 않았다. 이에 왕은 그가 하늘이 내려 보낸 아이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그 어머니에게 가두어 기르도록 하고는 이름을 東明이라 했다.
 
그가 성장한 후 그에게 말을 기르는 일을 맡겼다. 동명은 활을 잘 쏘므로, 왕은 동명이 자기나라를 빼앗을까 두려워서 그를 죽이려 했다. 동명이 달아나 남쪽의 시엄수에 이르러 활로 강물을 치니 물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만들어 주었음으로 동명을 건너갈 수 있었다.그가 건너온 후 물고기와 자라들이 곧 흩어졌음으로 추격하는 병사들은 강을 건널 수가 없었다. 이리하여 동명은 부여 땅에 도읍하고 왕이 되었다.⌟ 라고 하였다.
原註: 魏略曰 舊志文言 昔北方有高離之國者 其王者侍婢有身 王欲殺之 婢云 ⌜有氣如雞子來下我故有身⌟ 後生子 王損之溷中 豬以喙噓(훼허)之 徒之馬閑 馬以氣噓之 不死 王疑以爲天子也 乃令其母收畜之 名曰東明 常令牧馬 東明善射 王恐奪其國也 辱殺之 東明走 南至施掩水 以弓擊水 魚鼈浮爲橋 東明得度(渡) 魚鼈乃解散 追兵不得渡 東明因都王扶餘之地)
※施掩水: 고구려 건국신화에 나오는 강 이름으로 실제로 있는 강이 아니고 神話構成에 설정한 이름이며, 『논형(論衡)』․『위략(魏略)』ㆍ『후한서(後漢書)등에서는 각각 ‘엄호수(奄淲水)’ㆍ‘시엄수(施掩水)’ㆍ‘엄사수라고 하는데, 【三國史記】에는 엄체수(淹遞水)’로,「광개토왕릉비문(廣開土王陵碑文)」에는 ‘엄리대수(奄利大水)’,『양서(梁書)』고려전에는 ‘엄체수(淹滯水)’라 하였다.
 
고구려는 요동의 동쪽 약1천리에 있다. 남으로 선비예맥朝鮮․穢貊․과 접하고, 동으로 옥저沃沮와 접하며, 북으로 부여扶餘와 접하고 있다. 환도산丸都山 아래에 도읍하니, 면적은 약 2 천리이고, 인구는 3만 호이다.
나라 안에는 큰 산과 깊은 계곡이 많으며 평원과 소택沼澤은 없다. 그곳 사람들은 산의 계곡에 살면서 산간 개울물을 마신다. 토지가 척박하여 비록 힘들여 농사짓더라도 그 수확으로 배불리 먹기에 부족하다.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穢貊 東與沃沮 北與扶餘接 都於丸都之下 方可二千里 戶三萬 多大山深谷 無原澤 隨山谷以爲居 食澗水 無良田 雖力佃作 不足以實口腹)
 
고구려 풍속은 먹는 음식은 절약하지만 사는 집은 잘 짓는다. 거실 왼쪽이나 오른쪽에 큰 방을 만들어 귀신에 제사지내고, 또 노성靈星과 사직신社稷臣(토지와 곡식을 주관하는 신)에게 제사지내고 풍년을 기원한다. 사람들의 성격은 사납고 급하며 남의 재물을 빼앗기를 좋아한다. (其俗節食 好治宮室 於所居之左右入大屋 祭鬼神 又祀靈星․社稷 其人性凶急 喜寇鈔) (역자주:靈星은 天田星이라고도 한다. 太微星 왼편 태두리의 동쪽에 있는 두 개의 별로서 고대에는 이 별이 농사의 풍년과 흉년을 좌우한다고 생각하여 각 지방에서는 계절마다 소를 잡아 이 별에 제사지내고 풍년을 기원하였다.)
 
나라에는 국왕國王이 있고, 관직에는 상가(相加), 대로(對盧), 패자(沛者), 고추가(古鄒加), 주부(主簿), 우태승(優台丞), 사자(使者), 조의선인(皂衣先人) 등이 있는데, 각 관직마다 높고 낮음의 등급이 있다. 동이東夷의 옛 말에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別種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언어와 기타 각종 일들은 대부분 부여와 같다. 그러나 성격과 의복 등은 부여와 같지 않다. (其國有王 其官有相加․對盧․沛者․古鄒加․主簿․優台丞․使者․皂衣先人 尊卑各有等級 東夷舊語以爲扶餘別種 言語諸事 多與扶餘同 其性氣衣服有異)
 
고구려에는 원래 다섯 部族이 있는데 연노부(涓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가 그것이다. 본래는 연노부에서 왕이 되었는데, 후에 와서 연노부의 세력이 미약해지자 지금은 계루부에서 대신 왕이 된다.(本有五族 有涓奴部․絶奴部․順奴部․灌奴部․桂婁部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한漢나라 때 조정에서 고구려에 악대樂隊와 노래하고 춤추는 예인藝人들을 보내주었는데, 그들은 언제나 현도군으로부터 관복과 옷과 두건 등을 받아 가고, 현도군玄菟郡의 고구려 현령이 그것을 관리하였다. 후에 와서 고구려가 점차 교만하고 방자해져서 다시는 현도군玄菟郡으로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동쪽변경에 작은 성을 쌓고 관복과 옷과 모자 등을 그곳에 갖다놓아 해마다 고구려에서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어 가져갔다. 지금도 그곳 사람들은 여전히 그 성城을 ⌜책구루(幘溝婁)⌟라고 부르는데, ⌜구루(溝婁)⌟란 고구려 말로 城이라는 뜻이다. (漢時賜鼓吹技人 常從玄菟郡受朝服衣幘 高句麗令主其名籍 後稍驕恣 不服詣部 又東界築小城 置朝服衣幘其中 歲時來取之 今胡猶名此城爲幘溝漊 溝漊者 句麗名城也)
 
제4부
고구려에서 관직을 둘 때에는 대로를 두면 패자를 두지 않고 패자를 두면 대로를 두지 않는다.(其置官 有對盧則不置沛者 有沛者則不置對盧)
 
국왕의 종족인 대가大加들은 모두 고추가古鄒加라 연노부본국왕은 본래 연노부涓奴部에서 국왕이 되었기 때문에, 비록 지금은 더 이상 국왕이 되지 않지만(더 이상 왕족이 아니지만) 연노부 적통대인嫡統大人 또는 고추가古鄒加라고 부르며, 그는 또한 종묘宗廟를 세울 수 있고, 영성신靈星神과 사직신社稷神에 제사지낼 수 있다.(본래 이 제사는 왕실에서만 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절노부絶奴部는 대대로 왕실과 혼인婚姻하였음으로 고추가古鄒加의 칭호가 더해진다.
모든 대가大加들 또한 자신의 사자使者․조의선인(皂衣先人) 등의 관리를 둘 수 있는데, 이들의 명단은 모두 왕에게 보고된다. 이들은 중국 고대의 경대부卿大夫의 가신들처럼 조정의 모임에서 국왕의 사자․조의선인과 同列에 앉거나 설 수 없었다. (王之宗族 其大加皆稱古鄒加 涓奴部本國王 今雖不爲王 適統大人 得稱古鄒加 亦得立宗廟 祠靈星․社稷 絶奴部世與王婚 古鄒加之號 諸大加亦自置使者․皂衣先人 名皆達於王 如卿大夫之家臣 會同坐起 不得與王家使者‧皂衣先人 同列)
 
고구려 권문세가 사람들은 농사일에 종사하지 않는데, 이처럼 그저 앉아서 놀고먹는 자가 1만여 명의나 된다. 그들의 밑에 있는 일반 居民들은 먼 곳에 살더라도 양식과 고기‧소금 등을 지고 와서 그들에게 공급한다.
(其國中大加不佃作 坐食者萬餘口 下戶遠擔米糧魚鹽供給之)
 
 고구려 사람들은 가무를 좋아하여 나라 안 마을들에는 초저녁 때가 되면 남녀가 모여서 무리를 지어 노래도 하고 유희도 하며 즐긴다. 나라 안에는 큰 창고가 없고 집집마다 작은 창고가 있는데 이를 ‘부경’이라고 한다. (其民喜歌舞 國中邑落 暮夜男女群聚 相就歌戱 無大倉庫 家家自有倉庫 名之爲桴京)
 
사람들은 청결한 것을 좋아하고 술을 잘 빚는다. 무릎 꿇고 절을 할 때 한쪽 다리를 뒤로 뻗는데, 이 예절은 부여와 다르다. 걸음걸이가 마치 달려가듯 한다. (其人潔淸自喜 善藏釀 跪拜申一脚 與扶餘異 行步皆走)
 
10월에는 제사를 지낸다. 이때에는 전국적인 큰 집회를 큰 집회를 가지는데 이를 ‘동맹東盟’이라고 한다. 공중이 모일 때에는 사람들은 모두 비단에 수놓은 옷을 입고 금‧은으로 장식을 한다. 대가와 주부들은 머리에 두건을 쓰는데, 그 모양은 마치 중국의 두건과 같으나 다만 머리 뒤에서 아래로 늘어뜨려진 부분이 없다. 소가小加들은 절풍(折風)이라는 모자를 쓰는데, 그 모양은 마치 중국의 변(弁)과 같다.(以十月祭天 國中大會 名曰東盟 其公會 衣服皆錦繡金銀以自飾 大加‧主簿頭著幘 如幘而無餘 其小加著折風 形如弁)
 
고구려 동쪽에 수혈(隧穴)이라는 큰 동굴이 있다. 10월에 전국적인 집회를 가질 때 수신隧神을 맞이하여 동쪽으로 가서 제사를 올리는데, 신좌神坐에다 나무로 조각한 수신隧神을 올려놓는다. 감옥은 없고 죄를 지은 자가 있으면 제가들이 의논하여 곧바로 죽이고, 그 처자는 몰수하여 노비로 삼는다.(其國東有大穴 名隧穴 十月國中大會 迎隨神還于國東上祭之 置木隨于神坐 無牢獄 有罪諸加評議 便殺之 沒入妻子爲奴婢)
 
고구려의 혼인은 쌍방이 구두로 서로 혼인하기로 약정한 후에 여자 쪽 집에서 집 본체 뒤편에 작은 집을 세우는데 이를 서옥壻屋이라 한다. 사위가 될 자는 해가 진 뒤에 여자의 집 대문 밖에 이르러 자기 이름을 말하고 무릎을 꿇어 절을 하고 여자와 동숙하기를 청한다. 그렇게 하기를 두 세 번하면 여자의 부모가 비로소 사위를 작은 집 잎으로 데리고 가서 딸과 동숙하도록 허락하고 그 곁에다 돈과 폐백을 쌓아 놓는다. 자식을 낳아 그 자식이 성장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사위는 처자를 데리고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其俗作婚姻 言語已定 女家作小屋於大屋後 名壻屋 壻暮至女家戶外 自名跪拜 乞得就女宿 如是者再三 女父母乃聽使就小屋中宿 傍頓錢帛 至生子已長大 乃將婦歸家)
 
고구려 풍속은 음란하다. 남녀가 이미 시집가거나 장가를 가고 나면 곧바로 수의壽衣를 장만하기 시작한다. 장례는 성대하게 치르는데, 가지고 있던 금․은과 재물들을 전부 다 쓴다. 돌을 쌓아서 고분高墳을 만들고, 양쪽으로 소나무와 잣나무를 심는다. 고구려의 말들은 모두 작아서 산을 오르기에 편리하다. 고구려인들은 모두 기운이 세고, 항상 전투훈련을 한다.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는 모두 고구려에 예속되었다.(其俗淫 男女已嫁娶 便稍作送終之衣 厚葬 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列種松栢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其力 習戰鬪 沃沮‧東濊皆屬)
 
이밖에 소수맥小水貊이라 불리는 작은 부락이 있다. 고구려 사람들은 나라를 세울 때 큰 강을 의지하여 터전을 잡았다. 서안평현西安平縣의 북쪽의 작은 강(小江)이 있는데, 남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고구려의 별종別種인 이 부락 사람들은 이 작은 강에 의지하여 부락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들을 소수맥小水貊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좋은 활이 산출되는데, 소위 맥궁(貊弓)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곳에서 나는 것이다. (又有小水貊 句麗作國 依大水而居 西安平縣有小水 南流入海 句麗別種依小水作國 因名之爲小水貊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이전글 ,陳壽의 (東夷族見聞錄(5부)
다음글 陳壽의 東夷族 見聞錄 (2부)
작성자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숫자)
댓글목록 0개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십시오
비밀번호를 입력해주십시오
답글쓰기
작성자
비밀번호
자동등록방지(숫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