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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을 이용한 낙랑군의 평양설 造作(下)
23/04/17 08:56:05 김종국 조회 3091
나. 요서지역의 임둔군 유적
1. 한사군의 설치
♦ 『한서漢書』 권65, 조선전(朝鮮傳). 고조선조의 원봉(元封)3년(BC 108)에 마침내 조선을 평정하고 진번(眞番),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등 4군을 설치하였다.
♦ 『한서漢書』 권28, 지리지에는 낙랑군은 한(漢) 무제(武帝 원봉 3년(BC 108), 현도군은 원봉 4년(BC107)에 설치했다고 한다.
♦ 『한서漢書』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에 “무제가가 동쪽으로 갈석을 지나 현도군과 낙랑군으로 삼았다.

♦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고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4만5006호로 22만 1849구이며, 고구려 상은대(上殷台), 서개마(西蓋馬) 등 3현이다. 낙랑군은 6만 2812호로 40만 6748구(口)이며, 조선,엄감(儼邯), 패수(浿水), 점재(煔蝉), 수성(遂成),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해명(海明), 열구(列口), 장잠(長岑), 둔유(屯有), 소명(昭明)< 누방(누방), 제해(堤奚), 혼미(渾彌), 탄열(呑列), 동당(東儻), 불이(不而), 잠대(蠶台), 화려(華麗), 사마대(邪頭昧), 전막(前莫), 부조(夫租) 등 25현이다.(前漢 때의 일)
♦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서는 현도군은 6성(城)으로 1594호로 4만3163구이며, 고구려, 서개마, 상은대, 소현, 후성, 요양이다. 낙랑군은 18성으로 6만 1492호로 25만 7050구이며, 조선, ?감(?邯), 패수(浿水), 함자(含資), 점제(佔蝉), 수성(遂城), 증지(增地), 대방(帶方), 사망(駟望), 누방, 제해(堤奚 ), 혼미(渾彌), 낙도(樂都) 등이라고 하였다.
 
2. 한사군의 설치와 변천
♦ 『후한서(後漢書』 권 85, 동이열전, 예조에는 ‘소제 시원 5년(BC 82)dp 이르러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였다고 한다.
♦ 『한서(漢書』 권6, 무제기(武帝紀) 3년(BC 108)조의 주석에“신찬(臣瓚)이 말하기를 <무릉서(茂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으로 장안(長安)에서 6138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
♦ 진번군의 처소는 삽현(霅縣)으로 장안에서 7640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고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군국지(郡國志)에서는 현도군은 낙양(雒陽) 동북쪽 4000리에 있다. 낙랑군은 낙양 동북 5000리에 있다.
♦ 이것을 보면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 등을 일시적으로 설치했으나, BC 82년 진번군과 임둔군을 파했다고 하였다. 즉, 진번군과 임둔군은 26간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낙랑군과 현도군으로 합해졌기 때문에 『한서(漢書』 지리지에는 수록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3. 갈석(碣石)과 요수(遼水)
♦ 『한서(漢書』 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낙랑군과 현도군의 위치가 갈석(碣石)의 동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갈석은 하북성 창려현(昌黎縣)에 있는 중요한 산으로 이곳을 기점으로 삼게 된다면 학계에서 거론하는 바다 건너 평양까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갈석은 요동(遼東)을 거론 할 때에 꼭 등장하였던 지표지명(指標地名)이었기 때문에 낙랑군, 현도군 등이 요동(遼東)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다.
♦ 요동의 기준이 되고 있는 지표지명이 요수(遼水)는 현재 요하(遼河)가 아니라 이것은 요(遼)나라 이후에 생긴 기준점이다. 그 이전에는 갈석산 부근을 흐르던 난하(灤河)가 요수(遼水)로 그 동쪽을 요서(遼西), 서쪽을 요동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 그리고 가장 큰 낙랑군은 동부도위와 남부도위로 나누었는데, 그 기준이 되는 지표지명인 단단대령(單單大嶺)인데, 현재는 한반도의 개마고원(蓋馬高原)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요서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의무려산맥(醫巫閭山脈)으로 비정된다. 이 산맥은 남북으로 비스듬이 흐르고 있어 난하와 요하 사이의 넓은 지역을 둘로 나누어 주고 있는 지정학적인 요충지였기에 요동의 진산(鎭山)으로 수양제(隋煬帝)도 이곳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오순제교수가 이곳을 답사하였을 때도 고구려(高句麗)의 성(城)을 조사한 적이 있어 이곳이 우리민족에게 매우 중요한 장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4. 한군현(漢郡縣)의 이동설치
♦ 『삼국지(三國志)』 동이전(東夷傳), 예(濊)조에 BC 82년에 임둔군은 낙랑군에, 진번군은 현도군에 병합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임둔군의 치소는 동시현이 었는 데, 병합된 이후에는 낙랑군의 현으로 기록되게 되었다. 그런데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봉니가 산해관 동쪽 해변에 있는 요녕성 호로도시(葫蘆島市) 태집둔(邰集屯)에 출토된 것으로 보아 이곳은 후일 낙랑군 동이현이 되는 곳이다.
♦ 원래 연(燕)나라가 설치한 상곡군, 우국평군, 어양군, 요서군, 요동군, 등의 5개 군은 산해관의 만리장성 서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후 전한(前漢)의 무제가 산해관(山海關)과 요하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위만조선(衛滿朝鮮)을 멸망시키면서 낙랑군, 현도군이 신설되면서 요동군도 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5. 임둔군의 위치와 고고학적 현황
♦ 최근에 요녕성(遼寧省) 호로도시(葫蘆島市) 태집둔(邰集屯) 소황지촌(小荒地村)에서 ‘‘임둔태수장(臨屯太守章)’이라는 봉니(封泥)가 제3기층에서 나왔다.
♦ 이 유적을 보면 제1층은 하가점하층문화, 제2층은 비파형동검을 하는 문화층, 제3층은 2시기문화가 중첩된 것으로 제1단은 선대문화와 외부유입 문화의 요소가 보이며, 제2단은 제1단의 문화요소와 전한시대 문화 요소를 공유하고 있다. 이곳에서 철촉, 철도끼, 수레부속, 철괭이, 철저울추, 철송곳, 철삽 등의 전한(前漢) 시기의 철기 30점이 출토되어 이곳에 임둔군이 치소가 설치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 『한서』 무제기(武帝紀) 원봉 3년(BC 108)조에 대하여 신찬(臣瓚이 주하기를 “<무릉서(武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동이현(東暆縣)으로 장안으로부터 거리가 6,138리이고 현은 15개이다”라고 하였다.
 
6. ‘임둔태수장’의 봉니
♦ 이 도장은 ‘관직명’만 새겨져 있는 서체는 한나라 관인에 사용하였던 전자체(篆字體)로 장사(長沙)의 마왕퇴(馬王堆)1호 한묘(漢墓)에서 발견된 봉니의 서체와 일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 특히 漢나라에서는 2000석 이상의 관리는 은(銀)도장을 사용하였으며 그 문(文)에는 ‘장(章)’으로 하였고, 200~600석의 질(秩)을 받는 관리는 모두 구리도장(銅印)을 사용하였는데, 그 ‘인’으로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태수(太守)는 2000석 이상이기에 임둔태수인장의 문을 “臨屯太守章‘이라고 하여 전한(前漢)시기 중앙정부의 도장규례와 정확하게 일치하고 있다. 따라서 낙랑토성에서 발견했다는 봉니들은 모두 한 사람이 조작하여 만든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일본은 우리의 역사를 날조하여 우리 역사를 만들어 교과서로 꾸민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국사 교과서가 86년 동안 수정도 없이 오늘날까지도 교육현장에서 쓰이고 있으니 오호 애재라. 잘못을 밝혀주신 오순제 교수님 감사합니다.
 
한편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은 조선사연구(上) ‘평양에서 출토된 와당과 봉니의 실체’라는 제하에 다음과 같이 밝히셨다.
평양에서 출토된 와당과 봉니들도 마차가지로 여러 면에서 의문투성이이다. 봉니(封泥)라는 것은 공문 따위를 제3자에게 몰래 개봉하는 사고를 미리 방지하기 위해서 봉투를 봉할 때 붉은색, 노란색, 검은색 등 여러 색깔의 칠을 녹여 붙이고 그 위에 찍던 인장의 일종이다. 여기서 ‘봉(封)’은 밀봉한다는 뜻이고, ‘니(泥)’는 칠을 가리킨다. 거기서 찍히는 인장이 음각이냐 양각이냐에 따라 요철이 달리 나타나고 칠도 가지런하지 않기 때문에 가장자리도 자연히 매끄럽게 찍히지 않는다. 낙랑(樂浪)은 한나라가 설치한 군(郡)이므로 의당 하나라 조정에서 내려 보낸 조령(詔令)이나 요동, 요서, 현도 등의 변방 관청에서 올리는 공문 등에 사용한 다량의 봉니들이 분명히 남아 있어야 정상이 아닌가? 어째서 낙랑 속현의 영(令), 장(長), 위(尉)의 봉인들만 수집되는가? 경우에 따라 관할지역을 따로 두었다고 하더라도 조령이나 공문의 봉인들을 관할성이나 지역의 경계까지 넘으면서까지 비치하지는 않았을 것이 아닌가? 낙랑의 속현(屬縣)이 25개 縣인데, 그 중에서 7개의 현 만 제외하고 18개의 현의 이름이 들어간 봉니들이 모구 발견되었다. 아 점도 대단히 의심스러운 일이지만 다른 군 그것도 한나라 오랑캐의 봉니는 하나도 없고, 유독 낙랑군과 그 속현의 봉니들만 나왔다는 것부터가 이미 조작의 혐의가 농후한 것이다. 《한서》와 《후한서》 〈지리지〉나 〈군국지〉를 펼쳐 놓고 일일이 대조하며 새긴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봉니들이 이처럼 온전한 상태로 발견될 수 있겠는가? 오랜 세월 땅 속에 묻혀있다 발견된 것임에도 양호한 상태로 발견된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라고 이상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참고 자료: 우리역사바로알기(오순제) 조선사연구(정인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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