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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학을 이용한 낙랑군의 평양설 造作( 上 )
23/04/15 10:14:15 김종국 조회 1628
고고학을 이용한 낙랑군의 평양설 造作
             (사)우리역사 바로 알기모임의 오순제 교수의 연구자료를 소개합니다.
 
1. 조선사(朝鮮史)에 대한 식민사관(植民史觀)의 창출과정(創出課程)
♦ 현 사학계는 일제가 심어 놓은 랑케(Ranke, 1795~1886)의 실증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이
것은 이미 서구에서 폐기된 학설로 역사기술에 있어서 “과거에 있었던 그대로를 기록”하는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얼이 빠져있는 문헌만능주의로 변절된 것으로 독일의 히틀러나 일제의 군국주의가 유적과 을 이용하여 한민족의 열등성과 후진성을 강조하려는 범죄의 도구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서구에서는 이미 폐기된 학문이다.
♦ 1867년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서국문물을 도입한 일본제국주의는 1887년에 동경제국대학에 사학과를 설치하고, 1889년 실증사학의 창시자였던 독일 랑케(Ranke)의 제자 리스(Riess)를 주임으로 초빙하여 史學會를 조직하였는데, 회원은 4-여명으로 사학회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잡지에는 요시다 도고(吉田東伍), 하여시다이스케(林泰補), 간마사토모(菅政友), 나카 미치오(那珂通世), 사라도리구라키치(白鳥庫吉), 쓰메이 구메조(坪井九馬三), 시데하라 다히라(弊原坦) 등이 한국 관련 저서와 논문을 발표하였다.
 
2. 만철(滿鐵)의 역사 조작
♦ 일본제국주의는 1905년 러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 남부의 관동주(關東州)를 차지한 만주를 침략하기 위해서 만주철도 부권을 얻어낸 후 1906년에 남만주철도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사전조사를 위해 1908년 만주사지리사실(滿州史地理 調査實)을 조직하고 동경제국대학의 교수 마쓰이 히로시(松井等), 이나바 이와키치(稻葉岩吉),이게우찌 히로시(池內宏) 등을 대거 참여시켜 『만주역사지리』, 『조선역사지리』 등을 간행하였는데, 이것들은 하나같이 한민족의 주체적 발전을 부정하고, 한국사를 대륙사에 부속시킴으로서 한국사의 타율성만응 강조하는 만선사관(滿鮮史觀)을 주장하는 것이었다.
♦ 1909년 동경제대 교수 돌리이 류조(鳥居龍藏)를 중심으로 한낙랑(漢樂浪)시대의 고적학술조사대를 조직하여 남만주에 파견하여 이들의 활동 결과 『남만주조사보고서』를 제출하였다.
♦1913년 9월 23일 세끼노(關野貞)는 대동가변의 고분지역의 강 언덕에 있는 구두진(狗頭津)
부근에 ‘토성’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알고 그 곳에 있는 土城을 답사하여 기와 파편을 수집하였는데, 그들은 이 토성을 낙랑군치소(治所)라고 주장하였다.
♦ 1913년 9월 30일 조선총독부 촉탁인 이마니시(今西龍)가 5회 조사 때 평안남도 용강에서 점선현(秥蟬縣)신사비를 발견하였는데, 이로써 용강이 낙랑군 소속의 점제현(粘제縣)이라고 주장하였다.
♦ 1915년 조선총독부는 중추원에 편찬과를 설치하여 조선반도사의 편친을 착수하였으며 3월에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박물관을 개관하였다.
♦ 1916년 7월에는“고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1919년 2월에 조선총독부 명의로 『조선금속총람』 2권을 발간하였다.

3. 조선사편수회 역사 조작과정
♦ 1915년 12월에 조선총독부 취조국으로부터 ‘조선사편찬사업’을 인수받은 중추원은 1916년 5월부터 편찬과를 설치하였다. 그리고 3년 계획으로 ‘조선반도사편집사업’을 시작했다.
♦ 1922년 12월에 ‘조선사편찬위원회’를 새로 구성하여 10년 계획으로 조선사편찬사업을 시작하였다.
♦ 1925년 6월 조선사편수회를 새롭게 설치하여 고문에는 이완용, 권중현, 박영효, 이윤용 등의 친일파를 영입하고 편찬진용을 재정비하고 최남선, 이능화, 이윤직, 윤영구, 이진호, 이병소, 유맹 등 조선인 사학자들을 포섭하고 이병도, 신석호 등을 수사관보로 임명하였다.
♦ 조선사편수회에서 1938년에 조선사를 6편 37권으로 편찬하였다. 이것은 고조선부분을 제외하고 삼국시대에서 1984년 갑오경장까지 편년제를 만들었다.
♦ 1편은 신라 통일 이전은 3권(이마니시, 이병도), 2편은 신라통일이후는 1권으로 (이마니시, 이완용), 3편은 고려시대 7권으로 (이마니시, 이병도)가 맡았다. 두 사람이 우리나라의 고대사와 중세사를 조작한 주역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4편은 조선 전기 10권, 5편은 조선 중기 10권, 조선후기는 4권 등이다.
♦ 이마니시 류는 『檀君考』를 통해서 단군의 역사를 신화로 조작한 인물이다. 그는 경도제국대학을 나와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그의 제자인 이병도는 해방후 그의 후신인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어 그들이 깔아 놓은 식민사학을 매우 충실하게 수행하여 그로부터 칭찬을 받기까지 하였다.
 
4. 평양 낙양토성의 낙랑군 조작 비판
♦ 1913년 세끼노 타다시(關野貞)가 대동강 남쪽 구두진에 있는 토성을 답사하고 “토축(土築)의 성벽이 위요(圍繞)한 흔적이 완연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12년 후에는 ‘과연 토축의 성벽이 상존할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 漢式의 기와 수십 개를 채집하였고⸳⸳⸳토성이 협소한 구릉에 얕게 쌓여져 있다’고 앞뒤가 모순된 말을 하면서 마치 이곳이 漢의 낙랑군의 治所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는 그들이 조선역사의 맥을 고조선-위만조선-낙랑군으로 엮음으로서 낙랑의 治所는 곧 위만조선과 고조선의 治所인 왕검성으로 조작하였으니 다음과 같은 모순이 있다.
 
*첫째, 歷史書에서 “왕검성(王儉城)은 패수(浿水)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만약 대동강을 패수로 본다면 그들이 낙랑군의 治所로 조작한 토성은 패수인 대동강의 남쪽에 있어서 왕검성이 될 수 없다.
 
 
*둘째, 역사서에 “왕검성은 물이 깊고 험하여 공격하기 힘들다”하였는데, 이 토성은 물이 얕고 나지막한 구릉에 위치하여 적으로 공격이 용이하다.
* 셋째, 이 토성은 東西 709m, 南北 599m, 면적 396,650㎡로 약 1만평 정도인데 기록에 의하면 낙랑군 치소는 가구가 62,812호이고, 406,748명이었다고 하므로 이곳은 이를 수용할 수 없을 만큼 좁다.
♦ 이 토성은 漢의 낙랑치소가 아니라 어울동토성(평남 온천군), 운성리토성(황해 은율군), 청산리토성(황해 신천군), 소라리토성(함남 영흥군) 등과 힘께 한무제 당시 BC 3~2세기경의 것으로 BC1000년경의 전반기 고조선문화인 비파형동검문화(琵琶形銅劍文化)를 계승한 세형동검문화(細形銅劍文化)의 유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특히 이 토성은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도와 황해도에 걸쳐 있었던 막조건(莫朝鮮)과 낙랑국(樂浪國)의 유적으로 漢 의 유물들이 출토되는 것으로 본다.
♦ 《제왕운기(帝王韻紀)》에 “마한(馬韓)의 왕검성(王儉城)은 지금의 서경(西京)이다. 《고려사(高麗史)》 지리지에도 ”서경유수관 평양부는 삼조선(三朝鮮)의 옛 도읍이다“
♦ 낙랑국이 고구랴 대무신왕 20년(AD 37) 멸망 당한 후에 고구려가 요동지역을 쳐서 생포한 한인(漢人)포로수용소로 사용된 때문인 것으로 보고 있다.
♦ 고조선 전반기의 문화였던 비파형동검(琵琶形銅劍)은 요서와 하북성, 북경과 당산지역, 내몽고 동부와 요녕성 서부지역, 평양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다. 초기의 세형동검(細形銅劍)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만 출토되고 있으며 고조선 후기, 부여로 이어지는 BC 3~2세기는 철기문화가 시작되면서 비파형동검이 세형동검으로 변화하게 된 것이다.
 
5. 중국 황제 급의 명문와당
♦ 평양의 낙랑초성 안에서는 “낙랑예관(樂浪禮官), 낙랑부귀(樂浪富貴)‘ 천추만세(千秋萬歲)” 등의 명문이 있는 막새기와가 나왔다. 특히 만세(萬歲)라는 것은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다.
♦ 그리고 토성동의 귀틀무덤에서 국왕 또는 그와 대등한 신분을 말해주는 “영수강녕(永壽康寧)이라는 길상어(吉祥語)가 새겨져 있는 옥도장(玉印)이 나왔다. 이것은 한나라의 하잘것없는 변방태수 정도로써는 사용할 수 없는 것으로 왕급을 나타내는 유물이다.
♦ 왜냐하면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한대고고학개설(漢代考古學槪說>에 보면 전한(前漢)의 수도인 장안성(長安城)에서 유일하게“장락미앙(長樂未央)” “장생무극(長生無極)” ‘천추만세(千秋萬歲)“ ”億年無疆)“ 등의 최고의 길상어가 새겨진 기와가 나왔기 때문이다.
♦ 한나라릐 장안성 외에 북방의 변경인 내몽고 포두(包頭)에 있는 흉노의 성터에서는 “선우천강( 單于天降)” “선우화친(單于和親)”이라는 와당이 나왔다.
♦ 청해호(靑海湖) 부근에서는 “서해안정(西海安定)”이라는 와당이 출토되었다.
♦ 고구려 적석총인 천추총(千秋塚)에서는 “천추만세(千秋萬歲)”가 나와 고구려의 태왕(太王)이 황제 급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6. 고조선시기 평양지역 막조선(莫朝鮮)의 토성 유적
♦ 평양일대에는 고대성곽들이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평양시 강동군의 황대성, 평양시 대성구역의 청암동토성 아래성, 평양시 은정구역의 덕산토성 아래성, 평남 온천군의 성현리 토성 아래성 등은 청암동토성을 중심으로 각 100여리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다.
♦ 특히 청암동토성의 동쪽에는 황대성, 서쪽에는 성현이토성, 북쪽에는 덕산토성 등이 각각 100여리를 사이에 두고 배치되어 있어서 고조선시기에 청암리토성 아래성이 수도였던 왕검성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암리토성은 평양시 대동구역의 대동강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평양시 강동군의 황대성의 성벽 위에는 고인돌보다 더 오래된 고조선시대의 것으로 보고 있다.
♦ 정암동토성은 대성산성과 평양성(장안성)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성으로 고조선시기에 쌓은 후 고구려시기에 3번에 걸쳐 쌓은 성으로 남쪽에 대동강, 동쪽에 합장강, 북쪽으로 합장강과 보통강으로 흘러들어가는 작은 강줄기들이 흐르고 있어서 삼면이 모두 강으로 둘러 싸여있어서 방어에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이 성의 북쪽은 산 능성과 연결되어 모란봉에 잇닿아있다. 청암동토성은 대체로 반달모양의 반월성으로 전체둘레는 5000m이다.
♦ 청암동토성의 성벽은 황갈색의 진흙을 기본으로 하면서 붉은 갈색의 진흙과 섰어 쌓았는데
황갈색의 진흙에는 작은 잔돌들이 일부 섰여있다. 성벽의 제일 높은 곳은 약 2.5m이고 밑너비는 약 100cm 정도이며 성벽의 나쪽은 20゚정도의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성벽과 성안에는 돌단검, 돌창끝, 돌도끼, 패이그릇조각 등 고조선 초기의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 평양시 용성구역 화성동에서 발굴된 화성동 1호, 2호 제단 시설은 다른 지역에서 알려진 제단 시설보다 훨씬 큰 것이다. 이 제단 시설은 대성산 서쪽의 평탄한 벌판에 자리 잡고 있다. 이와 같이 청암동토성 주변에서 화성동제단 유적이 발견되고 있어서 평양의 청암동토성이 고조선시기의 토성임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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