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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26/04/21 07:55:12 金 鍾國 조회 36
《일본 고대사와  한민족 발자취》(4)

◆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일본의 야마토 왜(大和倭)가 4세기 후반에 한반도 남부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신라·가야를 지배하고, 특히 가야에는 일본부(日本府)라는 기관을 두어 6세기 중엽까지 직접 지배하였다는 설이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진구황후(神功皇后)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에 건너와 7국(國)과 4읍(邑)을 점령하였고, 그 뒤 임나(任那:伽倻)에 일본부가 설치되었으며, 562년 신라에 멸망하였다는 것이다.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도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거론되었다.
 
비문의 신묘년(391년) 기사를 "왜가 바다를 건너와 백제와 임나·신라 등을 격파하고 신민(臣民)으로 삼았다"고 해석하여, 당시 왜국의 한반도 남부 지배를 알려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하였다.
한편 남조(南朝)·송(宋)·제(齊)·양(梁) 나라의 역사기록에 나오는 왜왕의 책봉기사도 들고 있다.
 
여기에는 왜왕이 "왜백제신라임나진한모한제군사왜국왕(倭百濟新羅任那秦韓慕韓 諸軍事倭國王)"이라는 관작(官爵)을 인정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송에서는 백제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 대한 왜의 지배권을 인정하는 듯한 칭호를 내린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하여 이소노카미신궁(石上神宮)의 칠지도(七支刀)도 왜의 군사적 우세와 한반도 남부 지배를 인정한 '번국(蕃國)' 백제가 야마토조정에 바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임나일본부'란 명칭은 《일본서기》의 6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기록에는 빈번히 나타나지만 한국의 기록에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이 때문에 그 존재 여부조차 의심되었고 이에 대한 반론들이 제기되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이 북한학계 김석형(金錫亨)의 분국설(分國說)이다. 

이 설에 의하면 삼한·삼국 시대에 수많은 사람들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 그곳에서 삼한·삼국의 식민지라 할 수 있는 분국들을 곳곳에 설치하였고, 이때 임나일본부는 일본열도 내에 수립된 가야의 분국 임나에 설치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설은 광개토대왕비문이 석회가 발라져 변조되었다는 주장과 함께, 그 사실 여부보다는 근대 일본역사학의 ‘제국주의적 체질'에 대한 반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에 의미가 있었다.
 
한국 학계에서는 임나일본부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는데, 가야를 지배했다고 하는 《일본서기》의 '왜'가 실제로는 백제라는 견해와 한반도 남부지역에서 활동한 왜군을 백제의 용병으로 보는 백제군사령부설(百濟軍司令部說)이 있다.
 
최근에는 임나일본부는 왜의 통치기관이나 백제의 군사령부와 같은 것이 아니었으며, 임나(任那)와 안라(安羅)에 파견된 왜의 사신인 기비노오미(吉備臣)와 가와치노아타이(河內直)였다는 주장도 나왔다. 

◆ 백제 무령왕 

백제 21대 개로왕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문주왕의 동생인 곤지(昆支)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송서(宋書)』, 『일본서기』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곤지는 461년에 왜국(倭國)으로 파견되었다가 귀국 후 내신좌평에 임명되지만 3개월 만에 의문의 죽임을 당한다. 

제24대 동성왕(재위 479년∼501년)은 곤지의 아들이다.
그는 신진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등용하여,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을 견제함으로써 왕권을 강화하고 웅진 천도 초기의 정치적 불안을 종식시켰다. 

제25대 무령왕(武寧王, 재위 501~523년)은 재위 기간 동안 담로제(擔魯制)를 실시하여 지방통치를 강화하고, 백성에게 귀농과 정착을 장려하여 농민층의 안정을 이루었다. 

무령왕의 이름은 사마(斯麻) 혹은 융(隆)이다. 이름을 따서 사마왕이라고도 한다. 
『일본서기』에는 도군(嶋君)이라고도 기록되어 있다. 
시호는 무령이다.

무령왕의 아버지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있다. 
동성왕의 둘째 아들이라는 설, 개로왕(蓋鹵王)이 생부이고 곤지(昆支)는 의붓아버지라는 설, 마지막으로 곤지의 첫째 아들이고 동성왕은 그의 이복 아우라는 설 등이다. 

그러나 무령왕릉 출토 지석의 사망연대를 역으로 계산하고, 여러 사료들을 비교 검토한 결과 현재는 곤지의 장남이자 동성왕의 이복형으로 이해되고 있다. 

곤지가 왜에 가던 도중에 축자(築紫)의 각라도(各羅嶋)에서 무령왕을 낳았다.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도군(嶋君)이라 하고, 곧바로 배에 태워 백제로 돌려보냈다고 한다.

백제에 돌아와서 즉위하기까지 무령왕에 관한 기록은 전무하다. 
무령왕이 다시 문헌기록에 등장하는 것은 동성왕이 시해되면서부터이다.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다">

《속일본기(續日本紀)》 권40에는 일본의 수도를 헤이안쿄(平安京, 현재의 교토)로 천도하며 새로운 시대를 개창한 간무 천황(桓武天皇, 737~806)의 생모, 타카노노 니가사(高野新笠)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이 기록은 그녀가 백제 제25대 무령왕의 아들인 순타 태자의 직계 후손임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를 1년 앞둔 2001년 12월 23일 아키히토(明仁) 일왕은 68세 생일을 맞아 왕실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자리에서 다시 한 번 공인되었다.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천황(50대 천황, 737~806년재위 781~806년)의 생모(生母)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續日本紀)》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는 당시 야마토 정권의 최상위 지배층 내부에 백제계 왕족 및 귀족 계급이 단순한 조력자가 아닌 핵심적인 지배 계급의 일원으로서 융합되어 있었으며, 정치적 정통성의 한 축을 담당했음을 시사하는 결정적 증거이다.

그로부터 3년 뒤인 2004년 8월 3일에는 아키히토 일왕의 5촌 당숙이자 일본 왕족인 아사카노 마사히코(朝香誠彦) 씨가 수행원과 친척 2명만 데리고 무령왕릉(충남 공주)을 직접 찾아 참배하고 간 사실이 이튿날 공주시의 발표로 알려졌다. 

참고자료
1) 일본 일본인 일본문화/정형/다락원
2) 처음 읽는 일본사/전국역사교사모임 지음/Humanist
3) 아틀라스 일본사/일본사학회 지음/(주)사계절
4) 위키 백과 및 동아일보 2015.6.24. 기사
 
                 2026, 4, 20.   우인의 카톡에서 인용,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 문화어: 미마나미야께설)은 4~6세기경에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한반도 남부의 임나 지역에 통치기구 임나일본이 (일본이任那日本府 미마나니혼후[*])를 세워 지배 하였다는 학설이다.[1] 당시 국제관계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조작의 혐의가 짙은 내용과 사료에 모순이 있다는 점에서 현대에는 한일 양국 모두 《일본서기》 속 임나일본부를 그대로 믿지 않고, '안라제왜신' 정도의 역할이었다고 본다.[2] 가야사에 대한 대외관계 중심의 연구 분야에 속한다    위키백과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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