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역사 전쟁이다" 45년간 삽 들고 싸운 한국, 연해주 땅속 530년 증거에 중국 동북공정 완전 박살, 유네스코 "발해는 한국 역사" 인정한 충격(해외감동사연] ※이 영상은 실화를 바탕으로 일부 각색되었습니다.
유튜브 감동포럼에 나오는 내용이 우리 역사를 아는 데 도움이 되어 이글을 옮겨 실었습니다. 옮긴이 裕 亭
연해주 땅속에서 1,500년 전 한국인의 집이 나왔습니다. 2009년 7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 발굴현장 서울대학교 연구팀이 보낸 목탄 샘플의 측정 결과가 도착했습니다. 연대는 서기 530년, 발굴현장이 얼어붙었습니다. 발해 건국은 698년 530년은 발해가 아니었다. 고구려 동북아 역사재단 김은국 연구위원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이건 고구려입니다. 연해주가 발해보다 170년 더 오래된 한민족의 땅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베이징은 즉각 반발했습니다.
“단 하나의 샘플로 성급한 결론을 내린 비학술적 행위”라고 비난했습니다. 도쿄 역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크라스키노 발굴에 대한 “재평가 필요성”을 거론했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는 한 젊은 고려인이 서 있었다. 할아버지가 평생 “조선 땅”이라 부르던 그곳에서 1,500년 전 조상들의 흔적이 나오는 걸 보며 그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도대체 연해주에서 무슨 일이 진 걸까요?
45년간 한국 학자들이 이 땅을 판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리고 왜 중국은 이토록 긴장하는 걸까요? 저는 드미트리 박입니다. 러시아 이름이지만 할아버지는 평생 저를 “박동훈‘이라 부르셨습니다.
고려인 4세입니다. 증조할아버지는 1937년, 이 연해주 땅에서 화물차에 실려 중앙아시아로 강제 추방당하셨습니다. 6,000km를 넘는 여정 그 광장에서 증조할머니와 어린 삼촌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할아버지는 1930년생 강제이주 당시 겨우 7살이었습니다. 하지만 평생 연해주를 잊지 않았습니다. “동훈아, 우리는 조선사람이다. 크라스키노, 그곳이 우리 조상이 살던 땅이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
2022년 겨울, 할아버지 자가 돌아가셨습니다. 유언은 간단했습니다. “크라스키노에 가봐라, 한국 사람들이 우리 조상의 흔적을 찾고 있다
저는 울디 보스토크에서 역사교사로 일하고 일합니다. 러시아 역사는 잘 압니다. 하지만 할아버지가 말씀하신 “우리 조상의 역사”는 학교에서 배운 적이 없었습니다. 2023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남쪽으로 200km 저는 차를 몰아 크라스키노로 향했습니다. 두만강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습니다. 할아버지가 평생 “우리 조상의 땅”이라 부르던 곳 차창 밖으로 끝없는 평야가 펼쳐졌습니다. 저 어딘가에 할아버지의 기억이 묻혀 있었습니다. 크라스키노 마을 입구 “한-러 공동발굴 45주년 기념” 표지판이 보였습니다.
발굴현장은 바닷가에서 700km 떨어진 평지에 있었습니다. 텐트 몇 개와 발굴구역을 표시한 말뚝들, 그리고 그곳에 한 노인이 서 계셨습니다. 블라디슬라프 볼딘 박사 러시아 극동 역사연구소 명예교수.
“박동훈 할아버지 손자 맞습니까?” 볼딘 박사가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자주 말씀하셨어요. 언젠가 손자가 이곳을 찾아올 거라고.” 박사님은 저를 발굴현장으로 안내하셨습니다. 걸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이야기는 1987년부터 시작됩니다.” 1980년,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젊은 고고학자 블라디슬라프 볼딘은 크라스키노 바닷가에서 이상한 흙무더기를 발견했습니다.
“이건 자연적인 언덕이 아닙니다.” 시험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깊이 1m를 파 내려가자 기왓조각이 나왔습니다. 2m, 성벽의 돌 기초가 드러났습니다. 渤海 유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었습니다. 1980년 소련 국경 지역 발굴은 군사기밀과 직결되었습니다. 크라스키노는 두만강에서 북쪽으로 60km, 중국 훈춘에서 동쪽으로 40km KGB가 수시로 감시하는 전략 요충지였습니다. 볼딘 박사는 10년간 홀로 발굴을 이어갔습니다. 예산도 없었고, 인력도 부족했습니다. 여름마다 혼자 텐트를 치고, 삽을 들었습니다.
1990년, 소련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1991년 12월, 소련 해체 1992년 9월 30일, 한국과 러시아가 수교했습니다. 바로 그달, 한국에서 첫 발굴단이 왔습니다. 볼딘 박사가 발굴현장을 가리키며 말씀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께서 2010년부터 거의 매년 이곳을 찾아오셨어요. 발굴현장을 멀리서 지켜보시며 많이 우셨습니다.”
저는 몰랐습니다. 할아버지가 이곳에 오셨다는 것을. 1992년 10월, 한국학자들이 처음 왔을 때 당신 할아버지도 계셨어요. 발굴현장 옆 언덕에 서서 하루 종일 지켜보셨어요.
저녁에 제가 다가가 말을 걸었습니다. ‘혹시 이곳에 연고가 있으십니까?’ 할아버지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하셨어요.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이 마을에서 농사를 지으셨습니다. 1937년, 우리 가족 14명이 화물차에 실렸습니다. 7명이 카자흐스탄까지 살아서 도착했습니다.” 볼딘 박사의 눈가가 붉어졌습니다. “그 순간 알았습니다.
이 발굴이 단순한 학술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이건 살아남은 사람들의 기억을 되찾는 일이라는 것을.” 1992년 첫 한-로 공동발굴 한국에서 온 학자는 5명이었다.
고구려 연구재단 소속 러시아 학자 3명과 함께 석 달간 작업했습니다. 첫해 성과는 놀라웠습니다. 흙을 쌓고 돌로 마무리하는 전형적인 고구려식 축조법, 옹성 발견,:성문을 보호하는 방어구조 이것 역시 고구려 성곽의 특징, 하지만 가장 주요한 발견은 따로 있었다. 볼딘 박사가 발굴 구역 한쪽을 가리켰습니다. 돌로 둘러싸인 직사각형 공간이 보였습니다. “고래, 그러니까 온돌 아궁이에서 굴뚝까지 이어지는 통로 폭이 22에서 30cm입니다. ‘디귿자로 꺾여 있어요. 완벽한 온돌 구조입니다.” 박사님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6.54-34.47 “중국 학자들이 왔을 때 이걸 보고 할 말을 잃었어요. 중국에는 온돌이 없으니까요. 발해가 중국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하던 사람들이 온돌 앞에서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는 온돌 구들 옆에 앉았습니다. 손으로 돌을 쓰다듬었습니다.
갑자기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동훈아, 우리 증조할아버지 집도 온돌이었단다. 1937년 화물차에 실릴 때, 증조할머니가 방바닥 돌 하나를 주워가셨어.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 그 돌을 베고 주무셨지. “조선 땅 냄새가 난다고 하시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볼딘 박사가 조용히 옆에 앉으셨습니다. “당신 할아버지도 2010년 이 온돌을 보셨어요. 한참을 만지시더니 무릎을 꿇고 이마를 땅에 대셨습니다. ‘돌아왔습니다. 증조할아버지, 저 왔습니다.’하고 중얼거리셨죠“ 박사님이 다른 발굴 구역으로 안내하셨습니다. “우물입니다.” 깊이 5m 윗부분은 원형, 아랫부분은 사각형 ”전형적인 고구려식 우물 구조입니다.“
이것도 중국에는 없는 방식입니다. 1992년부터 2023년까지 31년간 발굴 성과가 하나씩 쌓였습니다.
1995년: 기와 가마터 발견. 발해가 이곳에서 직접 기와를 구웠다는 증거 1998년: 불교 사찰 터 발견. 금당지, 그러니까 부처님을 모신 본당 터와 스님들이 기도하던 전각 터가 나왔습니다. 연해주에서 발굴된 발해 사찰 중 최대규모였습니다. 2003년: ‘도융홍지’명문 토기 발견 볼딘 박사가 설명했습니다. ”일본 학자들이 난리가 났어요. 이게 일본 승려 이름이라고 주장했죠. 발해-일본 교류의 증거라면서, 발해가 한국만의 역사가 아니라고 우겼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반박했습니다. 727년부터 922년까지,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낸 횟수가 34회, 일본이 발해에 보낸 횟수가 15회 누가 누구한테 문화를 전해줬겠습니까? “박사님이 웃으셨습니다.
”게다기 같은 해에 청동 낙타 상이 나왔어요. 서역 교류의 증거 편벽도 나왔는데, 이거 신라 장보고 상단이 사용하던 것과 똑같은 형태였습니다. 발해가 얼마나 넓은 세계와 교류했는지 보여주는 거죠“ 저는 물었습니다. “그런데 박사님, 왜 45년이나 걸렸습니까?” 이 정도 성과면 10년이면 충분하지 않았나요?” 볼딘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찾는 것은 유물이 아닙니다. ” 증거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부정할 수 없는, 절대적인 증거.“ 박사님이 발굴 구역 가장 깊은 곳을 가리켰습니다. 2004년부터 우리는 더 깊이 파기 시작했습니다.
발해 층 아래에 뭔가 더 있을 거라고 확신했거든요.” “뭘 찾으신 겁니까?” “2005년, 주거지 맨 아래층에서 타고 남은 나무 조각, 목탄을 채취했습니다. 서울대학교에 보냈죠. AMS 연대측정이라고, 남가 탄 후 남아있는 탄소성분을 분석해서 정확히 몇 연도 것인지 알아내는 과학 기술입니다.”
“결과는요?” 박사님이 잠시 말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말씀하셨다. “2009년 7월, 측정 결과가 왔습니다.” “서기 530년” 저는 숨이 멎었습니다. “발해 건국은 698년입니다. 그런데 530년이라니” “네, 이곳은 발해 이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박사님의 눈빛이 타올랐습니다. “이것은 고구려였습니다.” 530년, 이 숫자가 왜 중요한 자 저는 처음엔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든 발해든, 다 오래전 나라 아닙니까? 하지만 볼딘 박사님의 말을 듣고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2009년 7월, 측정 결과를 발표하자마자 베이징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중국에서요?” “중국 사회과학원 변강사지연구증심 동북공정을 주도하는 기관입니다. 그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십니싸?” 박사님이 쓴 웃음을 지었습니다. “단 하나의 샘플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비과학적이다. 추가 검증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엇을 했는지 아십니까?“ ”더 많은 샘플을 채취하셨습니까?“ 2010년부터 2015년까지, 6년간 17개 지점에서 목탄을 채취했습니다. 서울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 미국 애리조나대학 새 곳에 교차 검증을 의뢰했습니다.” 결과는요, “540년, 530년, 620년, 840년 모두 고구려 시대부터 발해 시대까지 연속적으로 사람이 살았다는 증거였습니다.”
박사님이 발굴 현장 지도를 펼쳤습니다. “성벽 구조를 보세요, 내성과 외성 이중 구조입니다. 2009년 마이크로 자기 촬영과 전기 측량으로 성 내부 우측에서 고구려 시대 내성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발해가 고구려성을 그대로 사용하고 확장한 겁니다.” 저는 전율했습니다. “그럼 이 땅은?” “698년 발해가 건국되기 170년 전부터 한민족이 살던 곳입니다.” 그때 제 머랏속에 할아버지 목소리가 다시 들렸습니다. “동훈아, 1937년 우리를 화물차에 태울 때, 소련 장교가 이렇게 말했단다. ‘너희는 일본 간첩이다. 조선인은 믿을 수 없다.’
그런데 우리 증조할아버지가 대답하셨어. ‘우리 조상은 천 년 전부터 이 땅에서 살았소. 우리가 이 땅의 주인이요.” 천년,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는 정확히 알고 계셨습니다. 저는 물었습니다.
“박사님, 왜 중국은 이렇게 반발하는 겁니까?” 러시아 땅인데 중국이 왜 신경을 씁니까? “볼딘 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대답했습니다. “동북공정을 아십니까?“ ”들어는 봤습니다만.“ ”2002년부터 중국이 시작한 국가 프로젝트입니다. 목표는 하나 ’고구려와 발해는 중국의 역사다‘라고 못 받는 것, 왜냐하면 박사는 지도를 가리켰습니다.
중국 동북 3성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이 지역에 조선족 200만
명이 삽니다. 만약 고구려와 발해가 한국 역사라고 인정되면?”
“조선족이 ’이 땅은 원래 우리 조상의 땅이라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중국 입장에선 영토 분리 위험이 생기는 겁니다.” 저는 이해했습니다. “그래서 발해를 중국 지방 정권으로 만들려는 거군요:”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530년 고구려 증거를 찾아낸 순간, 중국 논리 전체가 무너졌습니다.” 박사님이 설명을 이어갔습니다. “중국 주장은 이렇습니다. ‘발해는 말갈족이 세운 나라다.
고구려 유민이 일부 참여했지만, 주도권은 말갈족에게 있었다. 따라서 중국 역사다.’ 그런데 크라스키노에서 뭐가 나왔습니까?” “고구려 성곽, 고구려 온돌, 고구려 우물,“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게 아닙니다. 고구려 그 자체를 이어간 겁니다. 갚은 땅에서, 같은 방식으로, 연속적으로 살았습니다. 박사님이 2015년 발굴보고서를 꺼냈습니다. “성 내부 북서쪽 지역에서 땅을 21개 층으로 나눠 조사했습니다. 맨 위 표토층, 그러니까 풀과 흙이 섞인 층부터 시작해서 맨 아래 생토층, 사람 손이 닿지 않는 원래 땅까지 전부요.
깊이 2.3m. “왜 그렇게 세밀하게요, “중국이 계속 시비를 걸었거든요. ‘오염된 샘풀이다’, ‘지층이 뒤섞였다.’ 연대 측정이 틀렸다‘ 그래서 우리는 절대 반박할 수 없는 증거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보고서에 지층 사진이 있었습니다. 각층 마다 색깔이 달랐습니다. “7세기부터 10세기까지, 발해 멸망 시점까지 쌓인 토층이 선명하게 구분됩니다. 그리고 그 아래, 고구려 층이 있었습니다. 중간에 단절이 없습니다. 연속성입니다.” 박사님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이 땅에 사람이 끊임없이 살았다는 겁니다.
구구려 멸망 후에도, 발해건국 전에도, 계속 이곳을 지켰다는 겁니다.” 그 사람들이 당신 조상입니다. 이 땅을 떠나지 않고 지킨 사람들. “2019년, 러시아 극동연구소 블라디슬라프 볼틴 박사가 학술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제목은 ”크라스키노 발해 성의 성격 재규정“ 결론: ”크라스키노 성은 단순한 발해 주적이 아니다. 고구려 시대부터 발해까지 이어진 한민족의 연속 거주지이며, 고구려 축조 기술이 발해로 계승된 증거다.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임이 고고학적으로 증명되었다.“
이 논문이 발표되자 중국 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2020년, 중국 사회과학원이 반박 논문을 냈습니다. ”크리스키노성의 민족 구성에 대한 재검토“ 하지만 논리가 약했습니다. 이미 물리적 증거가 나온 상태였으니까요. 일본도 조용하지 않았습니다. 2021년, 일본 도로쿠대학 역사학과가 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주제: 발해의 다민족성과 동아시아 교류” 발표내용 중 하나: 크라스키노에서 발견된 ’도융홍지‘ 명문은 일본 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 발해는 한반도만의 역사로 볼 수 없다. “하지만 한국 학계가 즉각 반박했습니다.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34회 보냈고, 크라스키노 연주성이 바로 그 출발지였다. 일본 승려 이름이 토기에 새겨진 것은 발해가 주도권을 가지고 교류했다는 증거다“ 볼딘 박사가 말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왜 45년이 걸렸는지.” ’이건 단순한 발굴이 아닙니다. 역사전쟁입니다>“ 박사님이 발굴 현장을 둘러보았습니다. “중국은 동북공정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빼앗으려 합니다. 일본은 다민족 국가로 희석시키려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삽 하나로, 그들과 싸우고 있습니다”
이기고 계십니까. 볼딘 박사가 웃었습니다. “530년 이 숫자 하나가 모든 걸 바꾸었습니다. 이제 세계 어떤 학자도 ‘발해는 중국의 역사가’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증거가 있으니까요.” 저는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45년이 왜 필요했는지. 왜 한국 학자들이 매년 여름이 추운 연해주까지 와서 땅을 팠는지. 왜 할아버지가 평생 “절대 잊으면 안 된다.”라고 하셨는지. 볼딘 박사가 발굴 현장 옆 작은 창고로 저를 안내했습니다. “당신께 보여드릴 것이 있습니다.” 낡은 나무상자 하나를 꺼냈습니다.
열어보니 낡은 공책 몇 권과 사진들이 있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께서 2022년 돌아가시기 전, 제게 맡기신 겁니다. ‘손자가 언젠가 이곳을 찾으면 꼭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손이 떨렸어요. 공책을 펼쳤습니다. 할아버지 필체였습니다. “1937년 9월 21일 우리 가족 마지막 날. 새벽 4시, 소련 군인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한 시간 안에 짐을 싸라. 한 사람당 16kg만 가져갈 수 있다. ‘어머니는 쌀 한 포대를 쌌다. 아버지는 농기구를 챙겼다. 증조할아버지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으셨다. 그저 마루에 앉아 손으로 온돌을 쓰다듬으셨다.”
“이 집은 내 할아버지가 지었다.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도 이 땅에 살았다. 우리는 여기를 천년을 살았다.’ 증조할아버지가 중얼거렸다” ‘화물차에 실릴 때, 증조할머니가 온돌 하나를 치마 속에 숨기셨다. 군인이 빼앗으려 했지만, 할아버지가 러시아어로 ’이건 그냥 돌입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군인이 비웃으며 그냥 두고 갔다. “카자흐스탄까지 6,135km 42일이 걸렸다. 화물차 안에서 증조할머니와 작은할아버지, 사촌 동생 둘이 세상을 떠났다. 몸을 기차 밖으로 던졌다. 묻을 시간도 없었다.”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2010년 7월 15일 크라스키노 첫 방문“ ”73년 만에 돌아왔다. 우리 마을은 사라지고 없었다. 러시아 사람들이 새로 지은 집들만 가득했다. 증조할아버지 집이 있던 자리를 찾았다.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바닷가 쪽에서 한국 사람들이 땅을 파고 있었다. 다가가서 물었다. ‘무엇을 찾으십니까? “김은국이라는 젊은 학자가 대답했다.
’고구려와 발해의 유적입니다. 이곳은 우리 조상이 살던 곳입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울었다. 73년 만에 처음으로, ‘우리 조상’이라는 말을 들었다.” “2015년 8월 3일” “오늘 김은국 박사가 나를 불렀다. ‘박 선생님, 보여드릴 게 있습니다. ‘발굴 구역 깊은 곳에 온돌이 나와 있었다. 1,500년 전 집이라고 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손으로 온돌 돌을 만졌다. 차갑지만 따뜻했다. 증조할머니가 카자흐스탄까지 가져갔던 그 돌이 생각났다.” “증조할머니는 1955년 돌아가셨다. 임종 직전까지 그 돌을 베고 주무셨다. ‘조선 땅 냄새가 난다’고 하시면서 나는 그것이 노인의 망상인 줄 알았다.”
“하지만 오늘 알았다. 망상이 아니었다. 증조할머니는 진짜로 조선 땅을 안고 주무신 거였다. 이 온돌과 똑같은 온돌 위에서, 우리 조상들이 천년을 살았다.” “2019년 5월 12일” “오늘 볼딘 박사가 논문을 보여주었다. ‘크리스키도 성은 530년 고구려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 나는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1937년, 소련 장교가 우리를 일본 간첩이라고 했을 때, 증조할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우리 조상은 천년 전부터 이 땅에 살았다.’ 장교가 비웃었다 ‘증거가 있느냐?” “82년이 지났다. 이제 증거가 나왔다. 천년이 아니라 1,500년이다.” “오늘 볼딘 박사가 논문을 보여주었다.
“증조할아버지, 이제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주인이었습니다.” 마지막 페이지 “2022년 6월 20일 내 생일 92세가 되었다. 몸이 많이 안 좋다. 이번 여름 크라스키노에 가지 못할 것 같다.” “손자 드미트리에게 이 공책을 남긴다. 동훈아 네가 이 글을 읽고 있다면, 나는 이미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나는 평생 러시아 사람으로 살았다. 러시아 이름을 쓰고, 러시아를 말하고, 러시아 음식을 먹었다. 하지만 단 한 번도 러시아 사람이 된 적은 없다.” 나는 조선 삶이다. 증조할아버지가 그랬고,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다.
이건 핏줄의 문제가 아니다. 기억의 문제다.“ ”크라스키노에 가봐라 한국 사람들이 우리 조상의 흔적을 고 있다. 땅속 깊은 곳에서, 1,500년 전 조상들의 집이 나오고 있다. 그것을 보고 와라“ ”그리고 기억해라 우리는 이 땅을 빼앗겼지만, 이 땅의 역사는 빼앗기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이제 간다.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가 계신 그곳으로 하지만 너는 남아라 그리고 이 이야기를 네 아이들에게 전해라”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절대 잊지 마라” 공책을 덮었습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습니다. 볼딘박사가 조용히 말씀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2010년부터 2021년까지, 12년간 매년 이곳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매번 같은 일을 하셨어요” “무엇을요, 온돌 앞에 앉아서, 한국 학자들이 일하는 모습을 종일 지켜보셨습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웃으셨습니다.” “2021년 여름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몸이 많이 안 좋으셨어요. 제가 내년에 또 오십시오’라고 했더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됐습니다. 내가 찾던 것을 찾았습니다. 우리 조상이 진짜로 여기 살았다는 증거를 이제 안심하고 갈 수 있습니다.”
박사님의 목소리가 떨렸습니다. “그리고 박사님, 제 손자가 언젠가 이곳을 올 겁니다. 그때 이 공책을 꼭 전해주십시오” 저는 발굴현장으로 다시 걸어갔습니다. 온돌이 있는 곳으로 무릎을 꿇었습니다.
손을 온돌에 갖다 댔습니다. 차갑지만 따뜻했습니다. 1,500년 전 이 돌 위에서 제 조상들이 밥을 먹었습니다. 1937년, 증조할머니가 이 돌 하나를 품에 안고 6,000km를 갔습니다. 2010년, 할아버지가 이 온돌을 만지면서 울었습니다. 2023년, 저는 이 온돌 앞에 앉아 있습니다. 할아버지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동훈아, 우리는 조선 사람이다.” “네 할아버지 저도 이제 알았습니다.” “절대 잊지 마라”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볼딘 박사가 옆에 앉으셨습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연해주 고려인 중 2000년대 이후 이곳을 찾아온 사람이 3,000명이 넘습니다.
대부분 당신 할아버지처럼 강제이주 2세, 3세들이었어요. 그들도 또 같이했습니다. 발굴현장을 찾아와서, 온돌을 만지고, 울었습니다.” “이 발굴은 단순한 고고학이 아닙니다. 이건 귀환입니다” 박사님이 하늘을 올려다보셨습니다.
“고려인들은 육체로는 1937년 쫓겨났지만, 역사로는 지금 돌아오고 있습니다. 한국 학자들이 45년간 그 길을 만들어주고 있는 겁니다.” 저는 그제야 이해했습니다. 왜 할아버지가 “한국 사람들이 우리 조상의 흔적을 찾고 있다”라고 하셨는지. 왜 할아버지가 매년 이곳을 찾으셨는지 왜 할아버지가 “이제 안심하고 갈 수 있다”라고 하셨는지 45년간의 발굴 이것은 단순히 유적을 찾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빼앗긴 역사를 되찾는 일이었습니다.
볼딘 박사가 저를 작은 사무실로 안내했습니다. 벽 한쪽에 두꺼운 책들이 빽빽이 꽂혀서이었습니다. “2004년부터 2021년까지, 우리가 낸 발굴보고서입니다” 손으로 책등을 쓰다듬으셨습니다. 마지막 책이 가장 두꺼웠습니다. “크라스키노 발해서 – 발굴 40년의 성과‘ 2021년 2월 15일 출판 김은국 박사와 제가 공동 집필했습니다.” 박사님이 책을 펼쳤습니다. 600페이지가 넘었습니다. “이 책이 나온 후, 세계가 바뀌었습니다.” 2021년 5월, 파리 유네스코 본부 세계고고학회가 열렸습니다. 주제 중 하나가 “발해 유적의 재평가”였습니다. 볼딘 박사가 발표했습니다.
“크라스키노 성은 530년 고구려 시대부터 926년 발해가 멸망까지 약 400년 연속적으로 거주한 유적입니다. 17개 지점에서 채취한 목탄의 연대 측정, 고구려식 성곽 구조, 한국식 온돌, 고구려식 우물, 이 모든 증거는 발해가 고구려를 직접 계승한 국가임을 물리적으로 증명합니다.” 중국 학자가 반박을 시도했습니다. “말갈족의 역할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볼딘 박사는 차분히 대답했습니다. “말갈족이 발해국에 참여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크라스키노에서 발견된 모든 문화층은 한민족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온돌, 성곽 구조, 불교 사찰 양식 이것은 고구려 문화의 연속입니다.” 일본 학자가 질문했습니다. “발해의 다민족 성격은요?” “다민족 국가였던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지배 문화는 명확히 고구려 계승입니다. 크라스키노에서 나온 ’도융홍지‘ 명문은 발해가 일본과 교류했다는 증거이지, 일본문화에 종속되었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발해가 일본에 34회 사신을 보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합니다.” 회의는 3일간 계속되었습니다. 최종 결론: “크라스키노 발해성 발굴 성과는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 국가임을 고고학적으로 입증했다.
중국의 ’발해=중국 지방 정권‘ 주장은 학술적 근거가 부족하다.” 볼딘 박사가 말했습니다. “이 결론이 나온 순간, 베이징이 공황에 빠졌습니다.” “어떻게 아십니까?” “중국사회과학원이 급하게 반박 논문을 5편이나 냈거든요. 2021년 하반기에만. 하지만 이미 늦었습니다. 국제학계가 인정한 후니까요.” 박사님이 컴퓨터를 켰습니다. 학술논문 검색 사이트였습니다. “2021년 이후, ’크라스키노’를 키워드로 검색하면 국제 학술논문이 83편 나옵니다. 미국 32편, 유럽 27편, 일본 15편, 중국 9편” “중국이 제일 적네요” “중국은 더 이상 반박 논리를 만들 수 없습니다.
물리적 증거 앞에서는 정치 논리가 무용지물이거든요” 2022년 9월, 서울 동북아시아재단이 국제 학술심포지엄을 열었습니다. 주제: “크라스키노 발굴 성과와 동북아 역사 재조명” 17개국 학자 120명이 참석했습니다. 미국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 제임스 루이스가 기조연설을 했습니다. ‘크라스키노 발굴은 단순한 고고학적 성과를 넘어, 역사학 방법론의 승리입니다. 정치 논리가 아니라 물리적 증거로, 역사 왜곡을 막아낸 사례입니다“ 독일 막스프랑크 연구소 고고학자 한스 베르너가 발표했습니다.
”우리 연구소가 크라스키노 목탄 샘플을 교차 검증했습니다. 결과는 명확했습니다. 530년 이 연대는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역사학과 교수 마크 바이밍턴이 말했습니다.
”발해는 더 이상 ’동북아시아의 잊힌 왕국‘이 아닙니다. 크라스키노 발굴 덕분에 발해는 이제 ’고구려를 계승한 한민족 국가’로 국제학계에 등재되었습니다. “볼딘 박사가 저를 바라보면서 말했습니다. ”이제 아시겠습니까?“ ”45년간의 발굴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박사님이 천천히 말씀하셨습니다.
”연해주는 1860년 러시아 영토가 되었습니다. 정치적으로 한국은 이 땅을 영원히 되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박사님이 발굴보고서를 쌓아 올렸습니다. 역사적으로, 학술적으로, 이 땅이 이제 한민족의 역사 공간입니다. 세계가 인정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더 이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게 역사적 편입입니다.” 저는 전율했습니다. “땅은 빼앗겼지만, 그 땅의 역사는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45년간 한국학자들이 삽으로, 붓으로, 논문으로 싸워서 지켜냈습니다.”
박사님이 창밖을 가리켰습니다. 크라스티노바닷가가 보였습니다. “2025년 지금,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아십니까?” “무엇입니까?” “고려인 젊은이들이 돌아오고 있습니다.” “소련 붕괴 후 중아시아에서 살던 고려인 2세, 3세들이 연해주로 재이주하고 있습니다. 2000년 이후 약 2만 명이 왔습니다. 그들이 왜 왔는지 아십니까?” 박사님이 저를 바라봤습니다. “할아버지 세대가 ‘이곳이 우리 땅이라고 말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크라스티노 발굴 이후 달라졌습니다. “정말로 우리 조상이 살던 땅이구나,’ 이 증거를 봤으니까요. 당신처럼요.“
저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연해주 고려인 커뮤니티는 2023년 블라디보스토크에 ‘고려인 역사박물관’ 건립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크라스키노 발굴 성과를 전시할 예정입니다. 러시아 정부가 승인했어요.“
”러시아가 왜요?“ ”러시아로서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기네 땅에서 중요한 역사 유적이 나왔으니까요. 게다가 한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도 도움이 됩니다. 2025년 한-러 수교 35주년이거든요. “박사님이 마지막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평생이 순간을 기다리셨습니다. “
”1937년 화물차에 실렸을 때, 소련 장교가 ‘너희는 이 땅과 아무 상관없다’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세대는 평생 그 말에 반박하지 못했습니까요. 증거가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증거가 있습니다. 530년부터 926년까지, 400년간 우리 조상이 이 땅에 살았다는 물리적 증거, 17개국 학자가 인정한 증거“ 박사님이 제 어깨에 손을 얹었습니다. “당신 할아버지는 승리하셨습니다. 82년 만에“ 저는 울었습니다.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 화물차에서 실려 가신 모든 분들, 카자흐스탄 황무지에서 돌아가신 모든 분들 평생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고 외치신 모든 분들
이제 세계가 인정했습니다. 이 땅은 당신들의 땅이었습니다. 해가 지고 있었습니다. 크라스키노 바닷가에 석양이 붉게 물들었습니다. 저는 발굴 현장 한가운데 섰습니다. 1,500년 전 고구려 사람들이 이 바다를 바라봤던 것입니다. 1,000년 전 발해 사람들이 이 항구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갔을 것입니다. 90년 전 증조할아버지가 이 땅에서 농사를 지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여기서 있습니다. 땅은 빼앗겼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돌아왔습니다.
45년간의 전쟁 삽, 하나로 붓 하나로, 논문 하나로 한국 학자들이 싸워서 이겼습니다. 연해주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한민족사 공간입니다. 2023년 7월 18일 저녁, 크라스키노 바닷가에 혼자 앉아 할아버지 공책을 다시 펼쳤습니다. “동훈아, 우리는 러시아에 사는 조선 사람이다. 이 땅의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다.“ 저는 휴대전화를 꺼내 아내에게 전화했습니다. “여보, 우리 아들 이름 정해서 박준호 한국 이름으로 지을 거야.“ ”드미트리 괜찮아?“
”할아버지가, 증조할아버지가 천 년을 이 땅에 살아서 증거가 지금 내 눈앞에 있어. 우리 아들한테도 이 이야기를 해줄 거야“ 다음 날 아침, 떠나기 전 볼딘 박사께 인사드렸습니다. “박사님, 저는 역사 선생님입니다. 이제 수업에 한 챕터를 추가할 겁니다.“ ”무슨 챕터요?“ ”연해주에 살았던 한민족사‘530년부터 1937년까지 그리고 45년간의 발굴 이야기까지“ 박사님이 제 어깨에 손을 얹으셨습니다. “당신 할아버지께서 원하셨던 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저는 고려인 4세, 박동훈입니다. 할아버지는 82년간 증거 없이 ”우리는 조선 사람“이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리고 한국이 그 증거를 만들어주었습니다. 45년간 땅을 파서, 1,500년 전 조상의 집을 찾아냈습니다. 연해주는 정치적으로 되찾을 수 없는 땅입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는 되돌러 왔습니다. 세계가 인정했습니다. 중국도 일본도 이제 부정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진짜 승리입니다. 할아버지 이제 압니다. 할아버지께서 지키려 하신 건 기억이 아니라 존엄이었습니다. 한국이 해냈습니다.
45년 걸렸지만, 해냈습니다. 저는 제 아들 박준호에게도 이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 우리는 조선 사람입니다.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여러분이 일궈낸 나라가 연해주 땅속에서 1,500년 전 조상을 찾아냈습니다. 세계를 설득해서 빼앗긴 역사를 되찾았습니다. 자랑스러워 하십시오. 여러분 덕분입니다. 감사합니다. 45년 발굴, 539년 증거, 82년 만의 승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