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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수의 동이족견문록(陳壽의 東夷族見聞錄) (1)
25/05/29 12:38:44 金 鍾國 조회 171
진수의 동이족견문록(陳壽의 東夷族見聞錄)
                                                                                                     자문위원   愼齋  金 鍾國
 
머리말
구당(矩堂) 유길준(兪吉濬)은 최초의 官費 유학생으로 일본, 미국, 유럽, 동남아시아를 둘러보고 [西遊見聞]이라는 최초의 國․漢文 혼용의 西洋見聞錄으로 歐美와 東南亞를 朝鮮에 알렸다. 하멜은 風浪을 만나 제주에 도착해 제주도, 한양, 강진 등지를 배경으로 ‘하멜표류기’를 써 朝鮮을 유럽에 알렸다. 朴趾源은 熱河日記에서 洪大容은 담헌외서湛軒外書에서 山海關과 萬里長城 등을 보고 中國을 우리에게 알렸다. 이들보다 아주 일찍 西晉의 陳壽(기원233~297)는 扶餘, 高句麗, 沃沮, 三韓 등지를 다니며 우리의 祖上 東夷族이 살았던 지역을 두루 보고 기록한 【三國志 위서동이전魏書 東夷傳】을 썼다. 【三國史記】나 【三國遺事】보다 약 900년 앞서서 우리 조상들의 나라에서 동이족의 삶을 살펴 적었기에 ‘陳壽의 東夷族見聞錄’이라 이름하여 간추려 소개하고자 한다. <위서魏書>를 흔히 魏志라고도 하여 魏志 東夷傳이라고도 부른다. 韓半島 일대에 나타난 고대 국가들에 관한 가장 오랜 기록 가운데 하나이며, 각 국가의 제천의식(祭天儀式)이나 풍속(風俗) 등에 관해 비교적 자세한 기록이 전해져 한반도의 고대사(古代史) 연구에 중요한 사료(史料)로 쓰이고 있다. 陳壽가 여행하며 적은 시기는 대략 기원 280년~289년으로 잡고 있다. *역자 註는 박기봉의 註를 의미한다.
이 글은 향교 掌議로 있을 때 明倫誌에 게재하려던 것이다.
 
1. 扶餘
부여(기원전 3세기~기원494년)는 고조선 후기인 위만조선 시기에 고조선북쪽에 자리하면서 중국 漢과 밀접하게 교류했다. 고구려에 의해 멸망되기 전까지 외국과의 전쟁 없이 약 7백년의 역사를 가진 국가이다.(송호정의 ‘처음 읽는 부여사’에서)
扶餘는 長城의 북쪽에 있고, 현도군(玄菟郡현토군이라 쓰고 현도로 읽는다)에서 1천리 떨어져 있으며, 南으로 고구려와 東으로는 읍루挹婁와 서로는 선비鮮卑와 접해있고, 북쪽에는 弱水가 있다.(*弱水:流經省份: 青海省,甘肅省,内蒙古自治区, 全長 821km, 别稱 黑河,甘州河) 사방 약 2천리 가량 된다. 人家는 약 8만 호이며, 사람들은 한 곳에 정착해 살고, 창고와 감옥이 있다. (扶餘在長城之北 去玄菟千里 南與高句麗 東與挹婁 西與鮮卑接 北有弱水 方可2千里 戶八萬 其民土著 有宮室ㆍ倉庫ㆍ牢獄)
(*역자주: 弱水: 강이름,<아리수>古代에는 아리수가 여러 개 있었는데, 이곳 약수는 흑룡강을 의미한다) 宮室=집이란 뜻이다. 현도군은 漢 武帝가 설치한 漢四郡의 하나다.)
扶餘의 地境 안에는 산이 많고 광대한 저지대가 있으며, 東夷族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 지세가 가장 평탄하고 확 트인 지역이다. 토지는 五穀(마麻, 메기장黍, 차기장稷, 보리麥, 콩荳)의 재배가 알맞은 곳이나, 다섯 종류의 五果(복숭아桃, 오얏李, 살구杏, 밤栗, 대추棗)는 나지 않는다. 부여 사람들은 덩치가 크고, 키도 크며 성격은 강하고 성격이 강하고 용맹하고 부지런하고 鎭重하며 남의 재물을 빼앗지 않는다.(多山陵 廣澤 於東夷之地域最平敞 土地宜五穀 不生五果 其人麤(추)大 性强勇謹厚 不寇鈔)
나라에는 君王이 있고, 관직명은 모두 여섯 종류의 家畜名으로 되어 있는데 馬加, 牛加 저가豬加 구가狗加 大使 大使者 使者 등이 있다. 사람들이 사는 부락에는 재력 세력을 가진 豪民이 있으며, 그들 아래 붙어있는 자들은 모두 그들의 奴婢나 종들이다. 加란 명칭이 붙은 관리들은 각지의 일들을 관장하는데, 그 행정구역을 ‘道’라 부른다. 大道의 경우는 數千家를 , 작은 경우 數百家를 관장한다.(國有君王 皆以六畜名官 有馬加‧牛加‧豬加‧狗加‧大使‧大使者 ‧使者 邑落有豪民 名下戶皆爲奴僕 諸加別主四出道 大者數千家 小者數百家)

먹고 마실 때에는 모두 俎와 豆란 그릇을 사용하고, 임금과 신하들이 定期的으로 모임을 갖고 모여서 연회를 베풀 때에는 拜爵, 세작洗爵 등의 의식을 행하며, 나가고 물러날 때, 올라가고 내려올 때 읍揖을 하여 공경의 뜻을 표시하고 서로 겸양하는 종류의 의식과 예절을 행한다.(飮食皆用俎豆 會同‧拜爵‧洗爵 揖讓昇降) * 拜爵: 군신들이 모여서 연회를 할 때 술잔을 받으며 잔을 들어 절을 한 다음 마시는 행동. 洗爵: 연회 도중에 잔을 받아 마신 후에는 다시 잔과 손을 씻은 후 다음의 잔을 받는 의식)*향교의전에서 마주보고 相揖하는 예가 扶餘 때부터 행하여 졌음을 알 수 있다.
殷曆으로 정월(지금의 12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이때 나라 안에서는 큰 집회를 열고 연일 마시고 먹고 노래하고 춤을 추는데, 이 행사를‘迎鼓’라 부른다. 이
기간중에는 죄인들의 형을 판결하고 감옥에 갇혀 있던 죄수를 풀어준다. (以殷正月祭天 國中大會 連日飮食歌舞 名曰迎鼓 於是時斷刑獄 解囚徒) *殷나라는 姓씨를 ‘子’로쓰는 東夷族의 나라여서 扶餘도 殷曆을 쓰고 흰 옷 입기를 즐겨했으니 白衣民族의 특징이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즐겨 입는데, 사람들은 흰 천으로 만든 큰 소매의 웃옷과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외국에 나가는 경우에는 비단 모직물로 만든 옷을 즐겨 입는데, 大人들은 여우나 흰 원숭이, 또는 검은담비의 모피로 만든 모피 옷을 위에 걸치고 모자는 금, 은으로 장식한다. 통역인이 말을 통역할 때에는 모두 무릎을 꿇고 손을 땅에 짚고 낮은 소리로 말을 한다. (在國衣尙白 白布大袂(몌)袍袴(고) 履革鞜(탑) 出國則尙繪繡錦罽(계) 大人加狐狸‧貁(유)白‧黑貂之裘(구) 以金銀飾帽 驛人傳辭 手據地竊語)

형벌을 시행함에 있어서는 엄하고 가혹하다.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그 집안사람들을 노비로 삼는다. 도적질을 하면 벌로 그 훔친 물건의 열두 배를 배상해야 한다( 用刑嚴急 殺人者死 沒其家人爲奴婢 竊盜一責十二)
 
남녀가 음행淫行을 하거나 부인이 투기를 하면 모두 죽인다. 특히 투기하는 것을 증오하여 투기하는 부인을 죽이고 난 후에도 그 시신을 남쪽 산위에 갔다버려 썩어 문드러지게 한다. 여자의 집에서 시신을 거두려면 관청에 소와 말을 바쳐야만 시신을 건내 준다.(男女淫 婦人妒(투) 皆殺之 尤憎妒(투) 已殺 尸之國南山上 至腐爛 女家欲得 輸牛馬乃與之)
형이 죽으면 아우가 형수를 아내로 삼는데, 이 풍속은 匈奴와 같다.(兄死妻嫂, 與匈奴同俗)
 
부여 사람들은 특히 제사에 쓸 가축을 잘 기른다. 名馬와 붉은 옥 및 담비와 원숭이 그리고 아름다운 진주가 난다. 진주 가운데 큰 것은 멧대추만 하다. 병기는 주로 활과 화살 및 칼과 창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집집마다 모두 갑옷과 병기를 가지고 있다. (其國善養牲 出名馬‧赤玉‧貂狖(초유)‧美珠 珠大者如酸棗 以弓矢刀矛爲兵 家家自有鎧(개)杖)
 
부여국의 늙은이 들은 스스로 말하기를 자신들은 옛날에 도망쳐 나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城마다 울타리는 모두 둥글게 만드는데, 그 모양이 마치 감옥과 비슷하다.(國之嗜老自說古之亡人 作城柵皆員 有似牢獄)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들 길을 다닐 때는 밤에든 낮엔들 노래를 부르는데, 노래 소리가 하루 종일 끊이지 않는다. (行道晝夜無老幼皆歌 通日聲不絶)
전쟁을 앞두고 군사를 움직일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소를 잡아 그 발굽을 관찰하여 길흉을 점친다. 굽이 갈라져 있으면 凶한 것으로 여기고 합쳐져 있으면 吉한 것으로 여긴다. 적이 쳐들어오면 여러 ‘加’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나가서 싸우고, 民家에서는 양식을 날라 군사들에게 공급한다.(有軍事亦祭天 殺牛觀蹄以占吉凶 蹄解者爲凶 合者爲吉 有敵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사람이 죽으면 여름에는 모두 얼음을 사용하여 냉동시킨다. 산 사람을 죽여서 죽은 자와 함께 묻는데, 순장자殉葬者가 많을 때는 100여 명이나 된다. 후하게 장사 지내지만 겉 널(槨)은 있어도 속 널(棺)은 없다. (其死 夏月皆用氷 殺人殉葬 多者數百 厚葬 有槨無棺)(원주: <魏略>에 이르기를 부여의 풍속에는 죽은 후 다섯 달이 지나서 매장하는데, 매장을 늦게 할수록 성대한 장례로 여긴다.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경우 그 제사음식은 날 것도 있고 익힌 것도 있다. 상주는 매장을 빨리 하고자하지 않으나 다른 사람들이 빨리하도록 강요하여 언제나 서로 끌고 당기면서 다투는데, 부인은 얼굴가리개 베옷을 입으며, 고리나 패물을 떼어 놓고 차지 않는데, 이것은 대체로 중국의 風俗과 비슷하다. ⁕(一) 魏略曰 其俗停喪五月 以久爲榮 其祭亡者 有生有熟 喪主不欲速而他人彊之 常諍引以此爲節 其居喪 男女皆純白 婦人着布面衣 去環珮(패) 大體與中國相彷彿也)
부여는 본래 현도군玄菟郡에 소속되어 있었다. 漢 말기에 公孫度가 遼東에서 세력을 떨치며(AD190년) 그 위세로 인근 夷族들을 굴복시키니, 부여왕 尉仇台가 다시 遼東에 복속되었다. 이때 고구려와 鮮卑가 매우 강대하였는데, 공손도는 부여가 고구려와 선비 사이에 끼여있다고 하여 자기 집안 여자를 尉仇台에게 시집보냈다(그리하여 자신이 부여를 편들고 있음을 표시하였다)(扶餘本屬玄菟 漢末 公孫度雄張海東 威服外夷 扶餘尉仇台更俗遼東 時句麗‧鮮卑彊 度以扶餘在二虜之間 妻以宗女)

위규태가 죽은 후 簡位居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간위거에게는 적자嫡子가 없었고 庶子로서 마여麻余가 있었다. 간위거가 죽은 후 여러 ‘加’들이 모여서 麻余를 왕으로 옹립했다.(尉仇台死 簡位居立 無適子 有孼子麻余 位居死 諸加公立麻余)
 
당시 우가의 조카로서 위거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외교를 주관하는 관리, 즉 大使의 직위에 있었다. 그는 재물을 가볍게 여기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베풀기를 좋아하였음으로 나라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그는 해마다 魏나라 京都에 보내어 공물을 바쳤다. (牛加兄子名位居 爲大使 輕財善施 國人附之 歲歲遣使詣京都貢獻)
 
帝王 芳의 正始(기원240년~249년) 연간에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고구려를 토벌하면서(서기 246년, 고구려 동명왕 20년) 현도 태수 왕기(王頎)를 부여로 파견하자, 位居는 大加를 보내어 교외에서 영접하고 군량을 공급해 주었다. 그는 叔父인 牛加가 반역할 마음을 품고 있어서 簡位居는 숙부와 그 아들을 죽이고 그 재산을 몰수한 후 사람을 보내어 시신을 대충 처리한 후 관청에 보내게 하였다. (正始中 幽州刺史毌丘儉討句麗 遣玄菟太守王頎詣扶餘 位居遺大加郊迎 供軍糧 季父牛加有二心 位居殺季父父子 籍沒財物 遣使簿斂送官)
 
옛 부여의 풍속에 홍수와 가뭄으로 수확이 줄면 언제나 그 책임을 王의 잘못 탓으로 돌렸는데,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국왕을 바꿔야 한다고 하고, 어떤 사람들은 마땅히 국왕을 죽여야 한다고 하였다. 麻余가 죽었을 때, 그의 아들 依慮가 여섯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즉위하여 왕이 되었다.(舊扶餘俗 水早不調 五穀不熟 輒(첩)歸咎於王 或言當易 或言當殺 麻余死 其子依慮年六歲 立以爲王)
 

漢나라 때, 부여 국왕이 죽으면 금실로 옥을 엮어서 만든 옷(玉衣), 즉 玉匣을 입혀서 매장하였으므로, 항상 그것을 미리 마련하여 玄菟郡에 비치해 두었다가, 왕이 죽으면 곧 그것을 받아 가서 매장을 하였다. 公孫淵 이 죽임을 당하였을 때(기원 238년, 고구려 東川王12년) 현도군의 창고에는 그때까지 옥갑 한 벌이 있었다. 지금 扶餘의 나라에는 옥벽(玉璧)‧珪‧瓚 등 여러 代 동안 전해온 옥기들이 있는데, 그것들은 대대로 국보로 여기고 있다. 노인들은 말하기를, 그것들은 모두 先代로부터 下賜받은 것들이라고 하였다.(漢時 扶餘王葬用玉匣 常豫以付玄菟郡 王死則迎取以葬 公孫淵伏誅 玄菟庫猶有玉匣一具 今扶餘庫有玉璧珪璨數代之物 傳世以爲寶 耆老言先代之所賜也)
 
<魏略>에서 이르기를, 그 나라의 번성과 부유함은 선대 이래로 파괴된 적이 없었다고 하였다(魏略曰 其國殷富 自先世以來 未嘗破壞).
 부여국의 인장에는 ⌜濊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국내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는데, 아마도 본래는 穢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부여 사람들이 스스로 ⌜망명자亡人⌟라 부르는 것을 아마도 그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其人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言濊城 蓋本濊貊之地 而扶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似也 )

 부여국의 인장에는 ⌜濊王之印⌟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고, 국내에 濊城이란 이름의 옛 성이 있는데, 아마도 본래는 穢貊의 땅이었는데 부여가 그곳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생각된다. 부여 사람들이 스스로 ⌜망명자亡人⌟라 부르는 것을 아마도 그리한 이유에서일 것이다.(其人文言 ⌜濊王之印⌟ 國有故城言濊城 蓋本濊貊之地 而扶餘王其中 自謂⌜亡人⌟ 抑有(以)似也 )

 
 참고도서: 朝鮮上古文化史(丹齋 申采浩) 부록 三國志 魏書 東夷傳(박기봉), 처음 읽는 扶餘史(송호정),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이덕일, 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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