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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의 태생지, 대구향교 外
25/02/24 12:59:01 金 鍾國 조회 234
 학교의 태생지, 대구향교

1910년 5월 1일 대구 공립 농림학교(현 자연과학고등학교)가 대구향교에서 개교하여 같은 해 10월 4일 대봉동(현 사대부고 자리)로 이전하였다.
1916년 관립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가 향교에서 문을 열었다.
1945년에 대구향교가 대성중 학원 설립(설립자 최 준)을 인가받아 1952년 명륜당에 개설하였다.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대구여자 사범대학, 대구경리여자중학교 등의 다수 학교가 대구향교 명륜당에서 개교하였다.
1948년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의거 하여 재단법인 경상북도 향교재단의 설립 인가받음.

1967년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현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1974년 명륜당과 외삼문, 사무실이 중건되었다.

1981년에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재단법인 대구직할시 향교재단 설립을 인가받음.
1982년 3월 4일 대성전이 대구광역시 문화제 1호로 등록되었다.
1990년 동∙서재와 낙육재가 복원되었고 이어서 양사재, 1995년에 유림 회관이 신축되었다. 

 대구향교의 수난기
 
 大邱鄕校 鄕案 修編輯歷史
고을에 鄕案이 있는 것이 비유하건대 여러 나라에 史記와 법전이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 규모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예를 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향내 선비 가문의 융창(隆昌)과 흥폐(興廢) 유무를 밝혀서 기재함은 한 고을의 지침이요,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훤하게 눈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트이고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어, 오직 우리 대구향교 설립 당시의 고을 유림 여러 선배가 처음 편집하고 案을 만들어 한 권의 책으로 한 권의 책으로 향교에 비치해서 비로소 공사 간에 참고하여 관람자가 수 백 년 이어져 왔었는데, 어느새 세태가 황폐하여 이미 다 유실되었으니,​ 또한 차마 말 할 수 없도다.

 그래서 향내 모든 선비들이 鄕案續修를 여러 차례 계획 하였으나 지금까지 만들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던 차에 지난해 무자(戊子- 1948년)년 가을에 전국 향교 재산이 예전에 없었던 큰 변동을 당하여 문묘수호하는 재산을 보호하는데 지장이 막대하여, 우리 고을 유림 수 천 명이 물심양면으로 일치 사수결의하고 일 년간 호소하고 성명서를 냈던바, 올해 己丑年(1949년) 5월 8일 서울 성균관 전국유림대회에 본 향교 대표로 楊夏甲, 李景熙, 柳根道, 제씨가 참석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활동한 결과 이미 원상회복을 이루었으니, 이때에 일찍이 향안 속수를 역설하던 李景熙씨의 발의로 각 문중에 단자를 받아보니 역시 문호의 수가 종전에 비해 몇 배가 되었다. 그 단자에 의거해서 崔三敎, 李景熙, 徐健洙, 全柄坤, 梁在湖씨 등에게 교정을 의뢰하고 金熙煥, 李樂雨, 간사에게 인쇄출판을 맡겨, 향문 각 문중에 빠짐없이 반질(頒帙)하니 그간의 업무처리가 근만(勤慢)함이 있었고, 단지 들어옴이 또한 조만(早晩)이 있어서 진행에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후진 여러 선비들이 이 향안을 보게 되면 마음속에 유연(油然)히 孝感之心 이 일어나 아마도 향교 재산의 보존에 대한 성의와 좋은 풍속을 유지하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있을 것이니라.

                          단기 4282년 乙丑 六月 日 (서기 1949년 6월 일) 

 참고자료: 大邱鄕校略史, 大邱鄕校案續修錄, 傳統禮節과 儀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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