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의 태생지, 대구향교
⚫1910년 5월 1일 대구 공립 농림학교(현 자연과학고등학교)가 대구향교에서 개교하여 같은 해 10월 4일 대봉동(현 사대부고 자리)로 이전하였다.
⚫1916년 관립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가 향교에서 문을 열었다.
⚫1945년에 대구향교가 대성중 학원 설립(설립자 최 준)을 인가받아 1952년 명륜당에 개설하였다.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대구여자 사범대학, 대구경리여자중학교 등의 다수 학교가 대구향교 명륜당에서 개교하였다.
⚫1948년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의거 하여 재단법인 경상북도 향교재단의 설립 인가받음.
⚫1967년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현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1974년 명륜당과 외삼문, 사무실이 중건되었다.
⚫1981년에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재단법인 대구직할시 향교재단 설립을 인가받음.
⚫1982년 3월 4일 대성전이 대구광역시 문화제 1호로 등록되었다.
⚫1990년 동∙서재와 낙육재가 복원되었고 이어서 양사재, 1995년에 유림 회관이 신축되었다.
대구향교의 수난기
大邱鄕校 鄕案 修編輯歷史
고을에 鄕案이 있는 것이 비유하건대 여러 나라에 史記와 법전이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 규모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예를 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향내 선비 가문의 융창(隆昌)과 흥폐(興廢) 유무를 밝혀서 기재함은 한 고을의 지침이요,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훤하게 눈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트이고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어, 오직 우리 대구향교 설립 당시의 고을 유림 여러 선배가 처음 편집하고 案을 만들어 한 권의 책으로 한 권의 책으로 향교에 비치해서 비로소 공사 간에 참고하여 관람자가 수 백 년 이어져 왔었는데, 어느새 세태가 황폐하여 이미 다 유실되었으니, 또한 차마 말 할 수 없도다.
그래서 향내 모든 선비들이 鄕案續修를 여러 차례 계획 하였으나 지금까지 만들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던 차에 지난해 무자(戊子- 1948년)년 가을에 전국 향교 재산이 예전에 없었던 큰 변동을 당하여 문묘수호하는 재산을 보호하는데 지장이 막대하여, 우리 고을 유림 수 천 명이 물심양면으로 일치 사수결의하고 일 년간 호소하고 성명서를 냈던바, 올해 己丑年(1949년) 5월 8일 서울 성균관 전국유림대회에 본 향교 대표로 楊夏甲, 李景熙, 柳根道, 제씨가 참석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활동한 결과 이미 원상회복을 이루었으니, 이때에 일찍이 향안 속수를 역설하던 李景熙씨의 발의로 각 문중에 단자를 받아보니 역시 문호의 수가 종전에 비해 몇 배가 되었다. 그 단자에 의거해서 崔三敎, 李景熙, 徐健洙, 全柄坤, 梁在湖씨 등에게 교정을 의뢰하고 金熙煥, 李樂雨, 간사에게 인쇄출판을 맡겨, 향문 각 문중에 빠짐없이 반질(頒帙)하니 그간의 업무처리가 근만(勤慢)함이 있었고, 단지 들어옴이 또한 조만(早晩)이 있어서 진행에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후진 여러 선비들이 이 향안을 보게 되면 마음속에 유연(油然)히 孝感之心 이 일어나 아마도 향교 재산의 보존에 대한 성의와 좋은 풍속을 유지하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있을 것이니라.
단기 4282년 乙丑 六月 日 (서기 1949년 6월 일)
참고자료: 大邱鄕校略史, 大邱鄕校案續修錄, 傳統禮節과 儀禮
⚫1910년 5월 1일 대구 공립 농림학교(현 자연과학고등학교)가 대구향교에서 개교하여 같은 해 10월 4일 대봉동(현 사대부고 자리)로 이전하였다.
⚫1916년 관립보통학교(현 경북고등학교)가 향교에서 문을 열었다.
⚫1945년에 대구향교가 대성중 학원 설립(설립자 최 준)을 인가받아 1952년 명륜당에 개설하였다.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건국고등공민학교, 1949년 대구여자 사범대학, 대구경리여자중학교 등의 다수 학교가 대구향교 명륜당에서 개교하였다.
⚫1948년 남조선과도정부 법령 제194호에 의거 하여 재단법인 경상북도 향교재단의 설립 인가받음.
⚫1967년 대구대학은 청구대학과 통합하여 현 영남대학교로 개편되었다.
⚫1974년 명륜당과 외삼문, 사무실이 중건되었다.
⚫1981년에 대구시가 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재단법인 대구직할시 향교재단 설립을 인가받음.
⚫1982년 3월 4일 대성전이 대구광역시 문화제 1호로 등록되었다.
⚫1990년 동∙서재와 낙육재가 복원되었고 이어서 양사재, 1995년에 유림 회관이 신축되었다.
대구향교의 수난기
大邱鄕校 鄕案 修編輯歷史
고을에 鄕案이 있는 것이 비유하건대 여러 나라에 史記와 법전이 있는 것과 같아서 비록 그 규모가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라도 그 예를 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향내 선비 가문의 융창(隆昌)과 흥폐(興廢) 유무를 밝혀서 기재함은 한 고을의 지침이요, 촛불을 밝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보는 이로 하여금 훤하게 눈에 참고가 되지 않을까 트이고 참고가 되지 않을 수 없어, 오직 우리 대구향교 설립 당시의 고을 유림 여러 선배가 처음 편집하고 案을 만들어 한 권의 책으로 한 권의 책으로 향교에 비치해서 비로소 공사 간에 참고하여 관람자가 수 백 년 이어져 왔었는데, 어느새 세태가 황폐하여 이미 다 유실되었으니, 또한 차마 말 할 수 없도다.
그래서 향내 모든 선비들이 鄕案續修를 여러 차례 계획 하였으나 지금까지 만들지 못함을 한스럽게 여기던 차에 지난해 무자(戊子- 1948년)년 가을에 전국 향교 재산이 예전에 없었던 큰 변동을 당하여 문묘수호하는 재산을 보호하는데 지장이 막대하여, 우리 고을 유림 수 천 명이 물심양면으로 일치 사수결의하고 일 년간 호소하고 성명서를 냈던바, 올해 己丑年(1949년) 5월 8일 서울 성균관 전국유림대회에 본 향교 대표로 楊夏甲, 李景熙, 柳根道, 제씨가 참석하여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활동한 결과 이미 원상회복을 이루었으니, 이때에 일찍이 향안 속수를 역설하던 李景熙씨의 발의로 각 문중에 단자를 받아보니 역시 문호의 수가 종전에 비해 몇 배가 되었다. 그 단자에 의거해서 崔三敎, 李景熙, 徐健洙, 全柄坤, 梁在湖씨 등에게 교정을 의뢰하고 金熙煥, 李樂雨, 간사에게 인쇄출판을 맡겨, 향문 각 문중에 빠짐없이 반질(頒帙)하니 그간의 업무처리가 근만(勤慢)함이 있었고, 단지 들어옴이 또한 조만(早晩)이 있어서 진행에 어려움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후진 여러 선비들이 이 향안을 보게 되면 마음속에 유연(油然)히 孝感之心 이 일어나 아마도 향교 재산의 보존에 대한 성의와 좋은 풍속을 유지하는데 만분의 일이라도 도움이 있을 것이니라.
단기 4282년 乙丑 六月 日 (서기 1949년 6월 일)
참고자료: 大邱鄕校略史, 大邱鄕校案續修錄, 傳統禮節과 儀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