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人行 必有我師: “세 사람이 동행하면 반듯이 내 스승이 있다.” 고 공자께서 말씀하셨으니 이러므로 제자가 반드시 스승만 못한 것이 아니요. 스승이 반드시 제자보다 나은 것이 아니다. (子曰 三人行이면 則必有我師라하시니 是故로 弟子不必不如師요 師不必賢於弟子라. 師說 韓愈 古文眞寶後集)
▼세 번 낙방: 한유(韓愈, 대력 3년(768년 )~장경 4년(824년 ))는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文章家‧政治家·思想家이다. 당송 8대가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한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다. 3세에 아버지를, 14세에 형 한회(韓會)를 잃고 형수 정씨에 의해 길러졌다.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한유는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 정원(貞元) 2년(786년 )부터 장안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이렇다 할 문벌도 배경도 없었던 그는 세 번이나 낙방하고서 8년(792년 )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다시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을 때에도 다시 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정원 11년(795년 ) 세 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된다. (네이버 백과)
▲三吐其哺 三握其髮: 한 번 밥을 먹을 때에 먹던 밥을 세 번이나 뱉고, 한 번 머리를 감을 때에 감던 머리를 세 번이나 쥐고 나왔다 (愈文周公之爲輔相에 急於見賢也하여 方一沐에 三握其髮이라하니 當是時하여 天下之賢才皆已擧用이요 上宰相第三書 韓愈 古文眞寶後集)
▲三蟲: 사람의 몸에 기생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세 가지 벌레인 三尸蟲인 바, 道家에서는 몸 가운데의 神으로 하나는 腦에, 하나는 明堂(이마)에, 하나는 腹部에 있다 하며, 「玉樞經」 註에 靑姑인 上尸, 白姑인 中尸, 血姑인 下尸가 있다 하였다. 捕蛇者說 柳宗元 古文眞寶後集)
▼三十三世: 柳宗元( 773년~819년): 중국 당나라때의 문장가 字는 子厚, 당송 8대가의 한사람. 당 고종때 제상인 柳奭의 후손. 진사 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의 시랑이 되었다. 43세 때에 柳州刺史로 옮겨서 47세에 그곳에서 죽다. 봉건론자로 유명. 시인으로 왕유, 맹호연, 위응들과 함께하여 ‘왕·맹·위·유’라 칭했다.(네이버 백과)
▲三時告災: 자녀와 옥금을 어떻게 하면 이르게 하며, 거마와 기물과 봄, 여름, 가을에 재앙을 고하여 상(임금)이 근심하는 빛이 있거든 공교로운 말을 만들어 기쁘게 하니라. (子女玉帛을 何以取之하며 姦人附勢하며 我將黜之하며 三時告災하여 上有憂色이어든 構巧辭以悅之하니라.
待漏院記 王禹偁 古文眞寶後集)
▲周有臣三千: 「書經」 ⟪秦誓⟫에 이르기를 商나라 주왕은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억만 명의 마음이었거니와 周나라는 신하 삼천 명이 있는데, 오직 한 마음이었다 하였습니다. 紂王의 때는 억만 사람이 각기 마음을 달리하였으니, 朋을 하지 않았다고 이를만 합니다.(書曰 紂有臣億萬호대 惟億萬心이어니와 周有臣三千하니 惟一心이라하니 紂之時에 億萬人이 各異心하니 可謂不爲朋矣로되 然紂以此亡國하고 周武王之臣은 三千人이 爲一大朋이로되 而以周用以興하나이다. 朋黨論 歐陽修 古文眞寶後集)
▲開方三子, 得用三子: 어째서인가? 수조, 역아, 개방 세 사람은 저들은 진실로 남의 나라를 혼란시키는 자들이거니와 돌아보건대 이들을 등용한 자는 위공이다. 舜이 있은 뒤에 사흉을 추방할 줄 알고, 仲尼가 있은 뒤에 소정묘를 제거할 줄 알았으니, 저 위공은 어떠한 사람인가? 돌아보건대 위공으로 하여금 세 사람을 등용하게 한 사람은 관중이었다. 제국은 세 사람이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관중이 없음을 걱정하고 세 사람은 세 필부에 불과하다.
(何則고 竪刁, 易牙, 開方三子는 彼固亂人國者이니라 顧其用之者 威公也 夫有舜而後에 知放四凶하고 有仲尼而後에 知去少正卯하나니 彼威公은 何人也요 顧其使威公으로 得用三人者 管仲也라. ~ 夫齊國은 不患有三子요 而患無仲이니 有仲則三子는 三匹夫耳라. 管仲論 蘇洵 古文眞寶後集)
▲三峯, 三父子: 내 집에 세 봉우리가 있는데 나는 매양 생각하면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듯 하다. 또 그 싹이 나와 죽지 않고, 拱이 되어 요절하지 않으며 또 동량이 될만 한데도 베임을 당하지 않았다. (予家에 有三峰하니 予每思之하면 則疑其有數存乎其間이라 且其藥而不殉하고 拱而不夭하며 任爲棟樑而不伐하다. 木假山記 蘇洵 古文眞寶後集)
▼3소'(三蘇): 소순(蘇洵, 1009년 ~ 1066년)은 중국 북송의 문인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다. 미주 미산 (지금의 쓰촨성 메이산 시) 사람이다. 27세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그때마다 낙방하자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계속하자 소순은 육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한 학자가 되었다.
1056년 소순은 두 아들을 데리고 상경해 학자들을 방문했는데, 소순의 학식과 글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고, 과거를 보러 온 이들 중에는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 소순은 아들들에게 과거를 응시하게 하고, 자신도 몇 년간 써 온 20여 편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구양수에게 보이도록 했다. 구양수는 소순의 글재주와 지식을 인정하고 그를 조정에 천거했고,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소순의 글을 읽었다. 두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면서 세 부자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소순은 비서성 교서랑, 패주 문안현 주부 등을 지냈고 57세에 죽었다. 소순의 글은 아름다우며 날카롭고 잘 정돈된 것이 특징이었다. 소식·소철 두 아들과 함께 '3소'(三蘇)라고 불리며, 그를 특히 노소라 부른다. 저서에 《권서》 《소로천 전집》 등이 있다.
▲예의 3백 가지와 威儀 3千 가지에서 어느 하나인들 聖人의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것이 없다. (禮儀 三百 威儀三千 孰非精神心術之所寓. 禮記集說序)
▲三監叛: 殷나라를 감시하던 세 사람으로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을 가리킨다. 周 武王은 은나라를 정복한 후에 紂王 아들인 武康을 다시 殷에 봉하고 아우인 管叔 등을 殷에 파견하여 武康을 감시하게 했다. 그 후 무왕이 죽고 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관숙 등은 武康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公의 토벌을 받고 모두 죽었다.(高祖論 蘇洵 古文眞寶後集)
▲三軍之帥,: 문풍이 팔대의 쇠함을 일으키고, 도는 천하의 빠짐을 구제하였으며, 충성은 인주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맹은 삼군의 장수를 빼앗으니 이 어찌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제되어 홀연히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文起八代之衰하고 而道濟天下之溺하며 忠犯人主之怒하고 而勇奪三軍之帥하니 此豈非參天地, 關盛衰하여 活然而獨存者乎아 潮州韓文公廟碑 蘇軾 古文眞寶後集)
▼蘇軾: 1036년 ~ 1101년 중국 북송(北 宋 )의 문신. 자는 자첨(子 瞻 )ㆍ화중(和 仲 ), 호는 동파(東 坡 ). 아버지 소순(蘇 洵 ), 동생 蘇 轍과 함께 3소(三蘇)라 불리며, 같이 당ㆍ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철종에 중용되어 구법파(舊 法 派 )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고 특히 구양수 (歐 陽 修 )와 비교되는 대문호로서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한 시ㆍ사(詞 )ㆍ고문(古文) 등에 능하며 재질이 뛰어나 서화(書畫)에도 유명하였다.(네이버 백과)
▼세 번 낙방: 한유(韓愈, 대력 3년(768년 )~장경 4년(824년 ))는 중국 당(唐)을 대표하는 文章家‧政治家·思想家이다. 당송 8대가 (唐宋八大家)의 한 사람으로 자(字)는 퇴지(退之), 호는 창려(昌黎)이며 시호는 문공(文公)이다. 한유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어머니를 잃었다. 3세에 아버지를, 14세에 형 한회(韓會)를 잃고 형수 정씨에 의해 길러졌다. 7세 때부터 독서를 시작한 한유는 13세에 문장에 재능을 보였다. 정원(貞元) 2년(786년 )부터 장안에서 과거에 응시했으나, 이렇다 할 문벌도 배경도 없었던 그는 세 번이나 낙방하고서 8년(792년 )에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다시 이부시(吏部試)에 응시하였을 때에도 다시 세 번이나 낙방한 그는 정원 11년(795년 ) 세 번이나 재상에게 글을 올리고서야 가까스로 천거된다. (네이버 백과)
▲三吐其哺 三握其髮: 한 번 밥을 먹을 때에 먹던 밥을 세 번이나 뱉고, 한 번 머리를 감을 때에 감던 머리를 세 번이나 쥐고 나왔다 (愈文周公之爲輔相에 急於見賢也하여 方一沐에 三握其髮이라하니 當是時하여 天下之賢才皆已擧用이요 上宰相第三書 韓愈 古文眞寶後集)
▲三蟲: 사람의 몸에 기생하여 질병을 일으키는 세 가지 벌레인 三尸蟲인 바, 道家에서는 몸 가운데의 神으로 하나는 腦에, 하나는 明堂(이마)에, 하나는 腹部에 있다 하며, 「玉樞經」 註에 靑姑인 上尸, 白姑인 中尸, 血姑인 下尸가 있다 하였다. 捕蛇者說 柳宗元 古文眞寶後集)
▼三十三世: 柳宗元( 773년~819년): 중국 당나라때의 문장가 字는 子厚, 당송 8대가의 한사람. 당 고종때 제상인 柳奭의 후손. 진사 시험을 거쳐 33세에 상서예부원의 시랑이 되었다. 43세 때에 柳州刺史로 옮겨서 47세에 그곳에서 죽다. 봉건론자로 유명. 시인으로 왕유, 맹호연, 위응들과 함께하여 ‘왕·맹·위·유’라 칭했다.(네이버 백과)
▲三時告災: 자녀와 옥금을 어떻게 하면 이르게 하며, 거마와 기물과 봄, 여름, 가을에 재앙을 고하여 상(임금)이 근심하는 빛이 있거든 공교로운 말을 만들어 기쁘게 하니라. (子女玉帛을 何以取之하며 姦人附勢하며 我將黜之하며 三時告災하여 上有憂色이어든 構巧辭以悅之하니라.
待漏院記 王禹偁 古文眞寶後集)
▲周有臣三千: 「書經」 ⟪秦誓⟫에 이르기를 商나라 주왕은 신하 억만 명이 있으나 억만 명의 마음이었거니와 周나라는 신하 삼천 명이 있는데, 오직 한 마음이었다 하였습니다. 紂王의 때는 억만 사람이 각기 마음을 달리하였으니, 朋을 하지 않았다고 이를만 합니다.(書曰 紂有臣億萬호대 惟億萬心이어니와 周有臣三千하니 惟一心이라하니 紂之時에 億萬人이 各異心하니 可謂不爲朋矣로되 然紂以此亡國하고 周武王之臣은 三千人이 爲一大朋이로되 而以周用以興하나이다. 朋黨論 歐陽修 古文眞寶後集)
▲開方三子, 得用三子: 어째서인가? 수조, 역아, 개방 세 사람은 저들은 진실로 남의 나라를 혼란시키는 자들이거니와 돌아보건대 이들을 등용한 자는 위공이다. 舜이 있은 뒤에 사흉을 추방할 줄 알고, 仲尼가 있은 뒤에 소정묘를 제거할 줄 알았으니, 저 위공은 어떠한 사람인가? 돌아보건대 위공으로 하여금 세 사람을 등용하게 한 사람은 관중이었다. 제국은 세 사람이 있는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관중이 없음을 걱정하고 세 사람은 세 필부에 불과하다.
(何則고 竪刁, 易牙, 開方三子는 彼固亂人國者이니라 顧其用之者 威公也 夫有舜而後에 知放四凶하고 有仲尼而後에 知去少正卯하나니 彼威公은 何人也요 顧其使威公으로 得用三人者 管仲也라. ~ 夫齊國은 不患有三子요 而患無仲이니 有仲則三子는 三匹夫耳라. 管仲論 蘇洵 古文眞寶後集)
▲三峯, 三父子: 내 집에 세 봉우리가 있는데 나는 매양 생각하면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듯 하다. 또 그 싹이 나와 죽지 않고, 拱이 되어 요절하지 않으며 또 동량이 될만 한데도 베임을 당하지 않았다. (予家에 有三峰하니 予每思之하면 則疑其有數存乎其間이라 且其藥而不殉하고 拱而不夭하며 任爲棟樑而不伐하다. 木假山記 蘇洵 古文眞寶後集)
▼3소'(三蘇): 소순(蘇洵, 1009년 ~ 1066년)은 중국 북송의 문인이다. 자는 명윤(明允), 호는 노천(老泉)이다. 미주 미산 (지금의 쓰촨성 메이산 시) 사람이다. 27세 때부터 학문에 전념하였으며,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지만, 그때마다 낙방하자 자신이 지었던 글을 모두 불태우고 새로 시작했다. 그렇게 공부를 계속하자 소순은 육경과 제자백가에 능통한 학자가 되었다.
1056년 소순은 두 아들을 데리고 상경해 학자들을 방문했는데, 소순의 학식과 글은 많은 이를 놀라게 했고, 과거를 보러 온 이들 중에는 과거를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도 있었다. 이듬해 소순은 아들들에게 과거를 응시하게 하고, 자신도 몇 년간 써 온 20여 편의 글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구양수에게 보이도록 했다. 구양수는 소순의 글재주와 지식을 인정하고 그를 조정에 천거했고, 사대부들이 앞다투어 소순의 글을 읽었다. 두 아들 모두 과거에 급제해 진사가 되면서 세 부자의 이름은 유명해졌다. 소순은 비서성 교서랑, 패주 문안현 주부 등을 지냈고 57세에 죽었다. 소순의 글은 아름다우며 날카롭고 잘 정돈된 것이 특징이었다. 소식·소철 두 아들과 함께 '3소'(三蘇)라고 불리며, 그를 특히 노소라 부른다. 저서에 《권서》 《소로천 전집》 등이 있다.
▲예의 3백 가지와 威儀 3千 가지에서 어느 하나인들 聖人의 정신과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것이 없다. (禮儀 三百 威儀三千 孰非精神心術之所寓. 禮記集說序)
▲三監叛: 殷나라를 감시하던 세 사람으로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을 가리킨다. 周 武王은 은나라를 정복한 후에 紂王 아들인 武康을 다시 殷에 봉하고 아우인 管叔 등을 殷에 파견하여 武康을 감시하게 했다. 그 후 무왕이 죽고 成王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관숙 등은 武康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가 周公의 토벌을 받고 모두 죽었다.(高祖論 蘇洵 古文眞寶後集)
▲三軍之帥,: 문풍이 팔대의 쇠함을 일으키고, 도는 천하의 빠짐을 구제하였으며, 충성은 인주의 노여움을 범하고 용맹은 삼군의 장수를 빼앗으니 이 어찌 천지에 참여하고 성쇠에 관제되어 홀연히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文起八代之衰하고 而道濟天下之溺하며 忠犯人主之怒하고 而勇奪三軍之帥하니 此豈非參天地, 關盛衰하여 活然而獨存者乎아 潮州韓文公廟碑 蘇軾 古文眞寶後集)
▼蘇軾: 1036년 ~ 1101년 중국 북송(北 宋 )의 문신. 자는 자첨(子 瞻 )ㆍ화중(和 仲 ), 호는 동파(東 坡 ). 아버지 소순(蘇 洵 ), 동생 蘇 轍과 함께 3소(三蘇)라 불리며, 같이 당ㆍ송 8대가의 한 사람이다. 철종에 중용되어 구법파(舊 法 派 )의 중심적 인물로 활약하였고 특히 구양수 (歐 陽 修 )와 비교되는 대문호로서 유명한 《적벽부(赤壁賦)》를 비롯한 시ㆍ사(詞 )ㆍ고문(古文) 등에 능하며 재질이 뛰어나 서화(書畫)에도 유명하였다.(네이버 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