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호(投壺) 교육(敎育) 가이드
1. 古典 속의 투호놀이
나는 여러 해 동안 초등 4학년과 중학교 1학년을 상대로 선비 투호를 담당해 왔다. 투호교육이 시작될 때 孔子 백옥상 앞에서 공자임을 알려주고 예기 40편부터 설명하여 투호의 역사가 적어도 2570여 년은 되었다고 했고,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에서 실시했고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대에서 실시했음을 강조해 왔다. 선비투호를 지도하실 때 참고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싣겠습니다.

禮記 40篇에 보면 대부나 사가 빈객과 함께 연음(燕飮)할 때 投壺를 하여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투호인데, 그 예법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투호는 활쏘는 것과 동류이니, 이것은 五禮(吉禮, 凶禮, 軍禮, 家禮, 賓禮) 중의 가례에 소속시켜야 할 것이나, 빈례(賓禮)에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解義: 투호의 예는 주인이 화살을 받들고, 시사(司射)가 中을 받들고 사람을 시켜서 병(壺)을 잡게 한다. 주인이 청하기를, “저에게 못난 화살과 삐뚤어진 병이 있는데, 청컨대 이것으로써 손님을 즐겁게 해드릴까 합니다” 한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에게 맛있는 술과 아름다운 안주가 있어서 내가 이미 받았는데, 또 거듭 주신다니 감히 사양하겠노라.” 한다. 주인이 다시 말하기를 “못난 화살과 삐뚤어진 병이니 족히 사양 할 것이 못됩니다. 감히 굳이 청합니다.” 객이 말한다. “내가 굳이 사양해도 승낙을 얻지 못하니 감히 공손히 좇지 않겠습니까.”(投壺之禮 主人奉矢 司射奉中 使人執壺 主人請曰 某有枉矢哨壺 請以樂賓 賓曰 子有旨酒嘉肴 某旣賜矣 又重以樂 敢辭 主人曰 枉矢哨壺 不足辭也矣 敢固以請 賓曰 某固辭不得命 敢不敬從)
註: 주인봉시(主人奉矢): 시는 병에 덮어서 넣는 것으로, 나무로 만들고 껍질을 벗기지 않고 깃이나 촉도 달지 않는 것이다. 사사봉중(司射奉中): 사사는 투호의 예를 맡는 사람. 中은 투호에 쓰는 산까치를 담은 그릇, 나무로 새겨 동물의 모양을 만들고 위에는 둥글게 해서 산까치를 담기에 편리하게 했다. 산까치는 경기에 이겼을 때 하나씩 세우는 조그만 나무까치다. 왕시소호(枉矢哨壺): 枉矢: 반듯하지 못한 화살, 哨壺: 입이 똑바로 생기지 않은 병. 哨: 입 삐뚤 소, 이것은 모두 겸사(謙辭)의 말이다.
解義 손님이 두 번 절하고 화살을 받으려 하면, 주인이 옆을 피하면서 사양한다고 한다. 주인이 조계 위에서 절하고 보내면, 손님이 조금 피하면서 사양한다고 한다. 이미 절하고 화살을 받으면 앞으로 나아가서 두 기둥 사이에 갔다가 물러와서 제자리로 돌아와 손님에게 읍하고 자리에 앉게 한다.
司射가 나아가서 병을 마련할 곳을 고르는데, 그 사이는 화살 두 개 반의 거리로 한다. 제자리로 돌아와서 中을 마련하고, 동면하고서 산까치 여덟 개를 집고 일어선다. 손님에게 청하기를 “순투(順投)를 넣으시고, 비투(比投)를 놓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긴 자는 이기지 못한 자에게 술을 마시기로 하여 정작(正爵)이 이미 행해졌으니, 청컨대 이긴 자를 위해 서면 청컨대 산까치를 세우겠노라. 한 까치는 두 까치에게 따르고, 세 까치가 이에 서면, 청컨대 산까치가 많은 것을 치하하겠노라.“ 한다. 주인에게 청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이한다. (賓再拜受 主人般還(선)曰辟(피) 主人阼階上拜送 賓返還曰辟 已拜 受矢 進卽兩楹間 退 反位 揖賓就筵 司射進度(탁)壺 間以二矢半 反位 設中 東面 執八算興 請賓曰 順投爲入 比投不釋 勝飮不勝者 正爵旣行 請爲勝者立馬 一馬從二馬 三馬旣立 請見多馬 請主人亦如之) *還: 돌 선, 辟: 피할 피 楹 기둥 영)
註: 반선왈벽(般還曰辟): 반선은 감히 똑바로 대하지 못하고 조금 비켜섬. 피(辟)는 감히 손의 재배의 예를 받지 못하고 피하는 것. 已拜受矢: 주인이 절하고 화살을 주어보면 뒤에 주인의 찬자는 화살을 주인에게 준다. 주인은 조계 위에서 이것을 받아 가지고 앞으로 나가서 두 기둥 사이에 가서 투호의 장소를 보고 다시 물러서서 조계의 위치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서쪽을 향해서 손에게 읍하고서 손을 투호의 장소로 나아가게 함. 탁호(度壺): 병을 걸어 놓은 장소를 가려 봄. 間以二矢半: 병과 손(賓)의 자리를 화살의 두 배 반의 거리에 정한다. 集八算興: 한 번 경기에 빈주가 함께 팔시를 던진다. 때문에 여덟 개의 산까치를 집어 빈주가 승부의 수를 센다. 順投: 화살이 병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 比投= 비는 빈(頻)과 같다. 투호란 빈주가 한 번씩 교대로 하는 것인데 자기가 순투한 것을 기뻐해서 남이 던지기 전에 거듭 던지는 것을 비투라고 한다. 비투일 때는 화살이 들어갔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정작(正爵): 이긴 자가 이기지 못한 자에게 먹이는 술잔. 정당한 예로 먹이기 때문에 정작이라고 한다. 立馬: 馬는 곧 산까치, 산까치를 馬라고 하는 것은 말은 위무(威武)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투호나 활쏘기도 역시 習武의 기예이므로 馬라고 하는 것이다. 一馬從二馬: 투호의 예에서는 三馬를 가지고 一成으로 친다. 그러나 이기는 자가 반드시 모두 삼마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긴 자가 二馬를 얻고 진자가 一馬를 얻었을 때는 一馬를 얻은 자는 二馬를 얻은 자에게 빼앗겨서 결국 二馬를 얻은 자는 三馬를 얻은 것이 된다. 그래서 一馬는 二馬에 따른다고 했다. 請慶多馬: 승패가 이미 결정되어 술을 따라 多馬를 얻은 자에게 축배롤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解義: 현자(弦子)에게 명하기를 ”청컨대 이수(貍首)를 연주해서 間一과 같이 하라.“ 하면, 大師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다. 좌우 사람들에게 화살이 갖추어졌다고 고하고, 번갈아 던지겠다고 청한다. 들어간 것이 있을 때에는 司射가 앉아서 산까치 하나를 놓는다. 손님의 黨은 오른쪽에 있고, 주인의 당은 왼쪽에 있는다. 던지기를 끝내면 사사가 산까치를 잡고 말하기를 ”좌편, 우편이 모두 던지기를 끝냈으니 청컨대 세어보겠습니다. 산까치 두 개를 一純으로 하고, 일순씩 집어서 一算을 남은 것으로 하렵니다.“ 한다. 드디어 남은 산을 가지고 고하기를, ”아무는 아무보다 많기를 몇 순입니까?“ 한다. 남을 때에는 남는다고 말하고 같은 때에는 좌우가 같다고 말한다.(命弦者曰 請奏貍首 間若一 大師曰 諾 左右告矢具請拾(습)投 有入者 則司射坐而釋一算焉 賓黨於右 主黨於左 卒投 司射集算曰 左右卒投 請數 二算爲純 一純以取 一算爲奇 遂以奇算告曰 某賢於某約干純 奇則曰奇 鈞則曰左右鈞 *貍: 삵쾡이 리(이)
註 현자(弦者): 악공, 貍首: 일시(逸詩) 편명, 간약일(間若一): 詩章을 연주해서 투호의 절도로 삼아 그 던지는 시간을 균일하게 함 大師: 악관의 장 左右告矢具: 빈주의 자리를 모두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주인은 좌편에 있고 객은 우편에 있는다. 賓黨於右: 우편에 있는다는 것은 司射의 앞 조금 남쪽에 있는 것이요 좌편에 있다는 것은 司射의 앞의 조금 북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二算爲純: 산을 세는데 두 개를 일순이라 하고 일순 씩 쥐어서 승부를 비교한다. *爲奇: 기는 남는 것, 균(鈞=均): 좌우의 산이 똑같음
解義: 작자(酌者)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청컨대 잔을 따르라,“ 하면 작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다. 벌주를 마시는 자가 모두 꿇어앉아 술을 받들고 말하기를 사관(賜灌)이라고 한다. 이때 이긴 자는 말하기를, 경양(敬養)이라고 한다. 정작(正爵)이 이미 행해지면 산을 세우겠다고 청한다. 산을 각각 제자리에 세운다. 1마는 2마를 따라서 치하한다. 敬禮에 말하기를 ”3마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청컨대 다마를 치하합니다“ 한다. 빈주가 모두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정작이 이미 정해지면 馬를 거둘 것을 청한다. 산까치의 많고 적은 것은 그 자리에서 본다. 화살은 방안에서 5부, 堂위에서는 7부, 마당 가운데서는 9부로 한다. 산까치의 길이는 1척 2촌으로 한다. 병목의 길이는 7촌이요, 복판의 길이는 5촌, 입의 넓이는 2촌 반으로 한 말 다섯 되를 담을 수 있다. 병 속에는 팥으로 채운다. 그 화살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병은 자리에서 2촌 반의 거리에 놓는다. 화살은 산뽕나무나 가시나무로 하되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命酌曰 請行觴 酌者曰 諾 當飮者皆跪奉觴曰 賜灌 勝者跪曰敬養 正爵旣行 請立馬 馬各直其算 一馬從二馬以慶 敬禮曰 三馬旣備 請慶多馬 賓主皆曰 諾 正爵旣行 請徹馬 算多少視其坐 籌(주) 室中五扶 堂上七扶 庭中九扶 算長尺二寸 壺 頸脩七寸 腹脩五寸 口徑二寸半 容斗五升 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壺去席二矢半 矢 以柘諾棘 毋去其皮) *觴:술잔 상 頸脩(경수):목의 길이
註: 당음자(當飮者): 罰杯(벌배)를 마시는 자, 즉 패자. 사관(賜灌): 관은 飮과 같다. 주신 술이라는 뜻으로서 이긴 자의 재예를 존경하는 말. 경양(敬養): 공경하여 봉양하겠다는 뜻으로 역시 존경하는 말이다. 請立馬: 여기까지로서 한 번의 승부가 이미 끝났음으로 司射가 빈주에게 고하여 승자를 위하여 산까치를 세우는 것이다. 馬各直其算: 세우는 마는 먼저 놓아두었던 산까치의 자리가 된다. 一馬從二馬以慶: 투호는 사례와 같이 세 번으로 끝난다. 때문에 매번마다 이기면 세 번의 3마를 얻어서 전승이 된다. 하지만 한 쪽은 2마를 얻고 한쪽은 1마를 얻었을 때는 1마를 얻은 자가 자기 마를 2마를 얻은 자에게 주어서 3마로 만들고, 그에게 치하를 한다. 正爵旣行: 세 번의 승부가 끝나고 정례에 의한 경작을 행함. 算多少視其坐: 산까치 수가 많고 적은 것은 그 자리 사람 수에 준함. 주(籌): 矢, 부(扶): 네 숟가락 넓이를 扶라고 한다. ※이하 내용에는 이지러진 글자가 많아 생략하였음.

지금 大邱鄕校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기는 최근에 구입한 것이어서 본 도면에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런대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병에 팥을 넣지 않아 호에 들어갔던 살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어 보강해야겠다. 팥이 아니면 모래를 넣으면 가능할 것 같다.
‘살’(산까치): 그냥 살이라고 지도해 온 것은 화살은 동물을 잡거나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으로 여기서는 ‘화’를 빼고 ‘살’이라고 지도해 왔으며, ‘청살 팀’, ‘홍살 팀’이라고 하여 경기를 진행해 왔다. 살 끝에 청색 천과 홍색 천을 달아 ‘청살 팀’, ‘홍살 팀’으로 구분하여 경쟁심이 나오게 지도했었다. 시작하기 전 좌석을 청살 팀과 홍살 팀을 구분하여 각각 한 사람씩 나오게 해서 경쟁의식을 갖도록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禮記’에서처럼 벌을 주지는 못하지만 승리한 팀을 일으켜 세우고 진 팀이 박수를 치도록 하는 것도 흥미롭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우리나라의 투호 역사
원래 중국 당(唐)나라 때 성행하던 놀이로 《북사(北史)》〈백제전(百濟傳)〉과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 백제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이 이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행해진 놀이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왕대별로 조선왕조실록에 궁중과 신하들 사이에 투호 경기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활쏘기와 함께 신하들 사이에 연중 좋은 계절을 택하여 실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살을 던져 패한 팀에게는 얼굴에 붓으로 검을 점을 찍는 벌칙을 행하였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많이 넣는 편이 승리하는 놀이. 넓은 마당 복판이나 대청에 귀가 달린 항아리를 가져다 놓는다. 항아리에서 10보쯤 떨어져 항아리 안에 화살이 들어가도록 하는데, 들어가면 1점을 따게 된다. 화살에는 고운 무늬를 색색으로 그려넣어 장식을 하기도 한다. 옛날 궁중과 양반집에서 하던 놀이다.
가. 놀이의 개관
일정한 거리에 서서 투호통에 화살을 던져, 누가 많은 수를 넣는가를 겨루는 놀이. 이 놀이는 구권 1000원권 지폐에 퇴계 선생의 존영과 투호 통이 실렸을 정도로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과거에는 양반들의 놀이였으나 오늘날에는 누구나 하는 놀이가 되었다.
주로 명절에 고궁이나 민속촌 등지에서 쉽게 할 수 있고, 교과서에 실려 체육 시간에 함으로써 이제 보편적인 놀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특별하게 제작된 투호통을 이용하였으나, 요즘은 항아리나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 놀이의 유래
기산 풍속도첩에서 세종대왕은 투호는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라고 하셨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장 많이 등장하는 놀이가 투호였다. 퇴계선생은 도산서원에서 항시 준비되어 있던 놀이가 투호였다. 역시 수학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투호놀이를 했던 것이다.

사마광(司馬光, 북송 1019~1086, 司馬溫公)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투호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이다. 병 속에는 팥을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화살 2개)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개를 사용하며 살의 길이는 2자 4치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화살 2개)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개를 사용하며 살의 길이는 2자 4치이다."
조선시대는 주로 궁중에서 성행하였고, 양반들의 놀이였다. 따라서 놀이할 때 예(禮)를 갖추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놀이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우리 놀이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고궁에서나 명절의 행사로 누구나 쉽게 해 볼 수 있는 놀이가 되었다.
투호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된 예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주인과 손님이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재예(才藝)를 강론하는 예로써 권장되고 장려되었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성종(成宗)은 “투호는 희롱하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기를 구하는 것”이라며 투호를 권장하였다. 또 중종(中宗) 때 관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유겸(任由謙, 1456 ~ 1527)은 늙어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즐겨 조용히 집에서 지냈는데, 바둑과 투호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던지는 지점을 잘 포착해야하기 때문에 판단력과 집중력이 길러지고, 마구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한 개씩 던지는 가운데 인내력과 끈기가 길러지게 된다.
참고도서: 禮記: 李民樹 譯解本, 네이버 지식백과, 투호놀이(投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투호놀이 (체육학대사전)
1. 古典 속의 투호놀이
나는 여러 해 동안 초등 4학년과 중학교 1학년을 상대로 선비 투호를 담당해 왔다. 투호교육이 시작될 때 孔子 백옥상 앞에서 공자임을 알려주고 예기 40편부터 설명하여 투호의 역사가 적어도 2570여 년은 되었다고 했고,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고려, 조선에서 실시했고 특히 조선왕조실록에는 여러 대에서 실시했음을 강조해 왔다. 선비투호를 지도하실 때 참고하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싣겠습니다.
禮記 40篇에 보면 대부나 사가 빈객과 함께 연음(燕飮)할 때 投壺를 하여 손님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 투호인데, 그 예법을 여기에서 말하고 있다. 투호는 활쏘는 것과 동류이니, 이것은 五禮(吉禮, 凶禮, 軍禮, 家禮, 賓禮) 중의 가례에 소속시켜야 할 것이나, 빈례(賓禮)에 소속시키는 것이 옳다고도 한다.

解義: 투호의 예는 주인이 화살을 받들고, 시사(司射)가 中을 받들고 사람을 시켜서 병(壺)을 잡게 한다. 주인이 청하기를, “저에게 못난 화살과 삐뚤어진 병이 있는데, 청컨대 이것으로써 손님을 즐겁게 해드릴까 합니다” 한다. 객이 말하기를 “그대에게 맛있는 술과 아름다운 안주가 있어서 내가 이미 받았는데, 또 거듭 주신다니 감히 사양하겠노라.” 한다. 주인이 다시 말하기를 “못난 화살과 삐뚤어진 병이니 족히 사양 할 것이 못됩니다. 감히 굳이 청합니다.” 객이 말한다. “내가 굳이 사양해도 승낙을 얻지 못하니 감히 공손히 좇지 않겠습니까.”(投壺之禮 主人奉矢 司射奉中 使人執壺 主人請曰 某有枉矢哨壺 請以樂賓 賓曰 子有旨酒嘉肴 某旣賜矣 又重以樂 敢辭 主人曰 枉矢哨壺 不足辭也矣 敢固以請 賓曰 某固辭不得命 敢不敬從)
註: 주인봉시(主人奉矢): 시는 병에 덮어서 넣는 것으로, 나무로 만들고 껍질을 벗기지 않고 깃이나 촉도 달지 않는 것이다. 사사봉중(司射奉中): 사사는 투호의 예를 맡는 사람. 中은 투호에 쓰는 산까치를 담은 그릇, 나무로 새겨 동물의 모양을 만들고 위에는 둥글게 해서 산까치를 담기에 편리하게 했다. 산까치는 경기에 이겼을 때 하나씩 세우는 조그만 나무까치다. 왕시소호(枉矢哨壺): 枉矢: 반듯하지 못한 화살, 哨壺: 입이 똑바로 생기지 않은 병. 哨: 입 삐뚤 소, 이것은 모두 겸사(謙辭)의 말이다.
解義 손님이 두 번 절하고 화살을 받으려 하면, 주인이 옆을 피하면서 사양한다고 한다. 주인이 조계 위에서 절하고 보내면, 손님이 조금 피하면서 사양한다고 한다. 이미 절하고 화살을 받으면 앞으로 나아가서 두 기둥 사이에 갔다가 물러와서 제자리로 돌아와 손님에게 읍하고 자리에 앉게 한다.
司射가 나아가서 병을 마련할 곳을 고르는데, 그 사이는 화살 두 개 반의 거리로 한다. 제자리로 돌아와서 中을 마련하고, 동면하고서 산까치 여덟 개를 집고 일어선다. 손님에게 청하기를 “순투(順投)를 넣으시고, 비투(比投)를 놓지 말도록 하십시오. 이긴 자는 이기지 못한 자에게 술을 마시기로 하여 정작(正爵)이 이미 행해졌으니, 청컨대 이긴 자를 위해 서면 청컨대 산까치를 세우겠노라. 한 까치는 두 까치에게 따르고, 세 까치가 이에 서면, 청컨대 산까치가 많은 것을 치하하겠노라.“ 한다. 주인에게 청하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이한다. (賓再拜受 主人般還(선)曰辟(피) 主人阼階上拜送 賓返還曰辟 已拜 受矢 進卽兩楹間 退 反位 揖賓就筵 司射進度(탁)壺 間以二矢半 反位 設中 東面 執八算興 請賓曰 順投爲入 比投不釋 勝飮不勝者 正爵旣行 請爲勝者立馬 一馬從二馬 三馬旣立 請見多馬 請主人亦如之) *還: 돌 선, 辟: 피할 피 楹 기둥 영)
註: 반선왈벽(般還曰辟): 반선은 감히 똑바로 대하지 못하고 조금 비켜섬. 피(辟)는 감히 손의 재배의 예를 받지 못하고 피하는 것. 已拜受矢: 주인이 절하고 화살을 주어보면 뒤에 주인의 찬자는 화살을 주인에게 준다. 주인은 조계 위에서 이것을 받아 가지고 앞으로 나가서 두 기둥 사이에 가서 투호의 장소를 보고 다시 물러서서 조계의 위치로 돌아온다. 여기에서 서쪽을 향해서 손에게 읍하고서 손을 투호의 장소로 나아가게 함. 탁호(度壺): 병을 걸어 놓은 장소를 가려 봄. 間以二矢半: 병과 손(賓)의 자리를 화살의 두 배 반의 거리에 정한다. 集八算興: 한 번 경기에 빈주가 함께 팔시를 던진다. 때문에 여덟 개의 산까치를 집어 빈주가 승부의 수를 센다. 順投: 화살이 병에 제대로 들어가는 것. 比投= 비는 빈(頻)과 같다. 투호란 빈주가 한 번씩 교대로 하는 것인데 자기가 순투한 것을 기뻐해서 남이 던지기 전에 거듭 던지는 것을 비투라고 한다. 비투일 때는 화살이 들어갔어도 계산하지 않는다. 정작(正爵): 이긴 자가 이기지 못한 자에게 먹이는 술잔. 정당한 예로 먹이기 때문에 정작이라고 한다. 立馬: 馬는 곧 산까치, 산까치를 馬라고 하는 것은 말은 위무(威武)의 상징이기 때문이며, 투호나 활쏘기도 역시 習武의 기예이므로 馬라고 하는 것이다. 一馬從二馬: 투호의 예에서는 三馬를 가지고 一成으로 친다. 그러나 이기는 자가 반드시 모두 삼마를 얻은 것은 아니다. 이긴 자가 二馬를 얻고 진자가 一馬를 얻었을 때는 一馬를 얻은 자는 二馬를 얻은 자에게 빼앗겨서 결국 二馬를 얻은 자는 三馬를 얻은 것이 된다. 그래서 一馬는 二馬에 따른다고 했다. 請慶多馬: 승패가 이미 결정되어 술을 따라 多馬를 얻은 자에게 축배롤 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解義: 현자(弦子)에게 명하기를 ”청컨대 이수(貍首)를 연주해서 間一과 같이 하라.“ 하면, 大師가 말하기를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다. 좌우 사람들에게 화살이 갖추어졌다고 고하고, 번갈아 던지겠다고 청한다. 들어간 것이 있을 때에는 司射가 앉아서 산까치 하나를 놓는다. 손님의 黨은 오른쪽에 있고, 주인의 당은 왼쪽에 있는다. 던지기를 끝내면 사사가 산까치를 잡고 말하기를 ”좌편, 우편이 모두 던지기를 끝냈으니 청컨대 세어보겠습니다. 산까치 두 개를 一純으로 하고, 일순씩 집어서 一算을 남은 것으로 하렵니다.“ 한다. 드디어 남은 산을 가지고 고하기를, ”아무는 아무보다 많기를 몇 순입니까?“ 한다. 남을 때에는 남는다고 말하고 같은 때에는 좌우가 같다고 말한다.(命弦者曰 請奏貍首 間若一 大師曰 諾 左右告矢具請拾(습)投 有入者 則司射坐而釋一算焉 賓黨於右 主黨於左 卒投 司射集算曰 左右卒投 請數 二算爲純 一純以取 一算爲奇 遂以奇算告曰 某賢於某約干純 奇則曰奇 鈞則曰左右鈞 *貍: 삵쾡이 리(이)
註 현자(弦者): 악공, 貍首: 일시(逸詩) 편명, 간약일(間若一): 詩章을 연주해서 투호의 절도로 삼아 그 던지는 시간을 균일하게 함 大師: 악관의 장 左右告矢具: 빈주의 자리를 모두 남쪽으로 향하게 하고 주인은 좌편에 있고 객은 우편에 있는다. 賓黨於右: 우편에 있는다는 것은 司射의 앞 조금 남쪽에 있는 것이요 좌편에 있다는 것은 司射의 앞의 조금 북쪽에 있는 것을 말한다. 二算爲純: 산을 세는데 두 개를 일순이라 하고 일순 씩 쥐어서 승부를 비교한다. *爲奇: 기는 남는 것, 균(鈞=均): 좌우의 산이 똑같음
解義: 작자(酌者)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청컨대 잔을 따르라,“ 하면 작자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다. 벌주를 마시는 자가 모두 꿇어앉아 술을 받들고 말하기를 사관(賜灌)이라고 한다. 이때 이긴 자는 말하기를, 경양(敬養)이라고 한다. 정작(正爵)이 이미 행해지면 산을 세우겠다고 청한다. 산을 각각 제자리에 세운다. 1마는 2마를 따라서 치하한다. 敬禮에 말하기를 ”3마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청컨대 다마를 치하합니다“ 한다. 빈주가 모두 그렇게 하라고 대답한다. 정작이 이미 정해지면 馬를 거둘 것을 청한다. 산까치의 많고 적은 것은 그 자리에서 본다. 화살은 방안에서 5부, 堂위에서는 7부, 마당 가운데서는 9부로 한다. 산까치의 길이는 1척 2촌으로 한다. 병목의 길이는 7촌이요, 복판의 길이는 5촌, 입의 넓이는 2촌 반으로 한 말 다섯 되를 담을 수 있다. 병 속에는 팥으로 채운다. 그 화살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병은 자리에서 2촌 반의 거리에 놓는다. 화살은 산뽕나무나 가시나무로 하되 껍질을 벗기지 않는다.
(命酌曰 請行觴 酌者曰 諾 當飮者皆跪奉觴曰 賜灌 勝者跪曰敬養 正爵旣行 請立馬 馬各直其算 一馬從二馬以慶 敬禮曰 三馬旣備 請慶多馬 賓主皆曰 諾 正爵旣行 請徹馬 算多少視其坐 籌(주) 室中五扶 堂上七扶 庭中九扶 算長尺二寸 壺 頸脩七寸 腹脩五寸 口徑二寸半 容斗五升 壺中實小豆焉 爲其矢之躍而出也 壺去席二矢半 矢 以柘諾棘 毋去其皮) *觴:술잔 상 頸脩(경수):목의 길이

지금 大邱鄕校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기는 최근에 구입한 것이어서 본 도면에 있는 것과는 차이가 있으나, 그런대로 적절하다고 본다. 다만 병에 팥을 넣지 않아 호에 들어갔던 살이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어 보강해야겠다. 팥이 아니면 모래를 넣으면 가능할 것 같다.
‘살’(산까치): 그냥 살이라고 지도해 온 것은 화살은 동물을 잡거나 사람에게 상처를 줄 수 있음으로 여기서는 ‘화’를 빼고 ‘살’이라고 지도해 왔으며, ‘청살 팀’, ‘홍살 팀’이라고 하여 경기를 진행해 왔다. 살 끝에 청색 천과 홍색 천을 달아 ‘청살 팀’, ‘홍살 팀’으로 구분하여 경쟁심이 나오게 지도했었다. 시작하기 전 좌석을 청살 팀과 홍살 팀을 구분하여 각각 한 사람씩 나오게 해서 경쟁의식을 갖도록 진행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禮記’에서처럼 벌을 주지는 못하지만 승리한 팀을 일으켜 세우고 진 팀이 박수를 치도록 하는 것도 흥미롭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2. 우리나라의 투호 역사
원래 중국 당(唐)나라 때 성행하던 놀이로 《북사(北史)》〈백제전(百濟傳)〉과 《신당서(新唐書)》〈고구려전(高句麗傳)〉에, 백제 사람들과 고구려 사람들이 이 놀이를 즐겼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우리나라에서 일찍부터 행해진 놀이로 보인다.
조선 시대에는 왕대별로 조선왕조실록에 궁중과 신하들 사이에 투호 경기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활쏘기와 함께 신하들 사이에 연중 좋은 계절을 택하여 실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살을 던져 패한 팀에게는 얼굴에 붓으로 검을 점을 찍는 벌칙을 행하였다고 한다.
여러 사람들이 두 편으로 나뉘어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많이 넣는 편이 승리하는 놀이. 넓은 마당 복판이나 대청에 귀가 달린 항아리를 가져다 놓는다. 항아리에서 10보쯤 떨어져 항아리 안에 화살이 들어가도록 하는데, 들어가면 1점을 따게 된다. 화살에는 고운 무늬를 색색으로 그려넣어 장식을 하기도 한다. 옛날 궁중과 양반집에서 하던 놀이다.
가. 놀이의 개관
일정한 거리에 서서 투호통에 화살을 던져, 누가 많은 수를 넣는가를 겨루는 놀이. 이 놀이는 구권 1000원권 지폐에 퇴계 선생의 존영과 투호 통이 실렸을 정도로 대표적인 민속놀이이다. 과거에는 양반들의 놀이였으나 오늘날에는 누구나 하는 놀이가 되었다.
주로 명절에 고궁이나 민속촌 등지에서 쉽게 할 수 있고, 교과서에 실려 체육 시간에 함으로써 이제 보편적인 놀이가 되었다. 과거에는 특별하게 제작된 투호통을 이용하였으나, 요즘은 항아리나 플라스틱 통을 이용하기도 한다.
나. 놀이의 유래
기산 풍속도첩에서 세종대왕은 투호는 마음을 다스리는 도구라고 하셨고, 조선왕조실록에 기장 많이 등장하는 놀이가 투호였다. 퇴계선생은 도산서원에서 항시 준비되어 있던 놀이가 투호였다. 역시 수학을 하면서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투호놀이를 했던 것이다.
사마광(司馬光, 북송 1019~1086, 司馬溫公)의 《투호격범(投壺格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투호병은 입지름이 3치[寸]이고 귀[耳]의 입지름은 1치이며 높이는 1자이다. 병 속에는 팥을 채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화살 2개)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개를 사용하며 살의 길이는 2자 4치이다."
병은 던지는 이의 앉을 자리에서 2살(화살 2개) 반쯤 되는 거리에 놓고, 살은 1개를 사용하며 살의 길이는 2자 4치이다."
조선시대는 주로 궁중에서 성행하였고, 양반들의 놀이였다. 따라서 놀이할 때 예(禮)를 갖추었는데, 일반 백성들은 놀이도구를 마련하는 일이며 절차가 복잡하여 하지 못했다. 오늘날에는 우리 놀이가 새롭게 조명되면서 고궁에서나 명절의 행사로 누구나 쉽게 해 볼 수 있는 놀이가 되었다.
투호는 단순한 오락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미 오래된 예법을 실천하는 수단으로 주인과 손님이 술자리를 베푼 자리에서 재예(才藝)를 강론하는 예로써 권장되고 장려되었다. 활쏘기가 덕을 함양하는 수단으로 권장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투호 역시 마음을 다스리는데 필요한 수단이었다. 성종(成宗)은 “투호는 희롱하고 놀이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스리기를 구하는 것”이라며 투호를 권장하였다. 또 중종(中宗) 때 관리인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임유겸(任由謙, 1456 ~ 1527)은 늙어 번거로움을 싫어하고 고요한 것을 즐겨 조용히 집에서 지냈는데, 바둑과 투호를 즐겼다는 이야기가 보인다.
던지는 지점을 잘 포착해야하기 때문에 판단력과 집중력이 길러지고, 마구 던지는 것이 아니라 인내심을 가지고 차분히 한 개씩 던지는 가운데 인내력과 끈기가 길러지게 된다.
참고도서: 禮記: 李民樹 譯解本, 네이버 지식백과, 투호놀이(投壺)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투호놀이 (체육학대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