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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자의 인간미
24/07/25 01:05:58 채종근 조회 188

                                                           증자의 인간미                                

                                                                                                                                    채종근 

                                                                                                                            (대구향교  의전국장)

  증자(曾子)는 공자(孔子)의 도맥을 이은 대현으로 공자와 더불어 유가에서 길이 존숭 받는 인물이다. 그는 공자보다 40세 정도 연하로 공자 문하에서 가장 어린 제자이기도 하다. 원래 증자의 아버지 증점(曾點)이 공자 제자로, 증자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공자에게 배우기 시작하였다.  공자도 증점도 그 어린 꼬마 증삼이 훗날 공자의 도맥을 잇는 인물이 될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으리라.   <논어>에서 다른 제자들을 언급할 때는  자나 이름을 쓴 반면에  증자(曾子)나 유자(有子) 두 사람에게 대해서는 '子'라는 존칭을  붙이고 있다. 논어가 공자의 재전제자(再傳弟子)들에 의해 편집 된 것이라고 한 당나라 유종원(柳宗元)의 생각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있거니와, 그 재전제자들에는 주로 증자와 유자의 제자들이었을 것이라 한다. 왜냐하면  <논어>에서 다른 분들과 달리 그렇게 증자와 유자를 높인 것은 자신의 스승을 특별히 높였다고 보여지기 때문이다.  

 그 <논어>에 보이는 증자의  '일이관지(一以貫之)'의 기록이나 '역책(易簀)'의 기사나 혹은 '조지장사 기명애야(鳥之將死其鳴也哀)..." 등의 구절에서도 우리는 증자의 대현대유로서의 면모를 십분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지만 <공자가어>에 나오는 기록을 통해서도 우리는 더욱 증자의 인물됨을 실감한다. 

 증자는 어려서 아버지의 참외 농사를 거들었다. 어느 날 일을 하다가 외 순 하나를 부러뜨린 것을 보고 아버지는 화가 나서 아이를 몽둥이질 했다.  주지하는 대로 외는 순 하나에 외 하나가 열린다.  순 하나를 부르뜨린 것은 외를 하나 잃은 것이나 다름없다.

아이가 기절했다가 일어나서  집으로 돌아가 자신의 방에서 거문고를 탔다.  그  얘기를 전해 들은 공자는 이튿날 공부하러 온 공자를 내친다. 

 "너는 오늘 부터 내 제자가 아니다. "

 증삼은 깜짝 놀란다. 

"선생님, 무슨 까닭이십니까? 저는 선생님께서 그렇게 노여워하시는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이놈이 아직도 제 잘못을 모르다니."

"가르쳐 주십시오.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도 아둔하다니.  어제 외 밭을 가꾸다가 아버지로 부터 맞았다는구나. 아버지가 몽둥이로 때리면 달아나고 회초리로 때리면 맞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너는 몽둥이로 맞아 기절까지 했으면서도 달아나지 않고 그대로 있다가 깨어나서는 돌아가 아버지를 안심시키려고 거문고를 탔다는 구나. 몽둥이로 때릴 때 자칫 죽기라도 하면 그건 효도가 아니라 아버지를 살인자로 만드는 것이니  어찌 불효가 아니랴. 그래서 달아나야 한다는 거다."

 증자는 공자의 말을 듣고 잘못을 빌었다. 

 "선생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앞으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아오니 부디 내치지 말아주십시오."

 "이리 오너라."

 아마도 공자는 이 때쯤 어린 제자 증삼의 머리를 스다듬어 주었으리라.

 "그래, 어디 다친 데는 없느냐?"

 우리는 이런 기록에서 증자가 어려서 부터 얼마나 성실하게 공자의 가르침에 올인했는지 알 수 있다.  증점도 공자의 제자이지만 그 착한 아들을 외 순 하나 부르뜨렸다고 몽둥이찜질을 하다니. 

 

 그런가하면 역시 <공자가어>에는 증자가 마누라를 쫓아내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마누라를 쫓아낸 이유가  '나물을 설 삶아서 밥상에 올렸다.'는 것이다.  그 소문을 들은 증자의 이웃 사람들은 다들 증자를 비난했다. 

"콩잎을 설 삶을 수도 있지. 그 때문에  마누라를 내쫓다니.  나는 증삼이 훌륭한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영 형편없는 인물일세 그려."

"왜 아니랴."

무슨 나물을 설 삶았는 지는 알 수 없다. 호박잎이었는지, 콩잎이었는지.  일단 콩잎이라 해두자. 

 그 소문이 퍼져 마침내 증자의  벗 한 사람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그 소문의 진위를 알아보려고 증자를 찾아갔다.

 "이 친구, 자네 콩잎을 설 삶아 상에 올렸다고 마누라를 내 보냈다며?"

 그 말을 들은 증자는 친구의 손을 잡으며 조용히 말한다.

 "내 아무리 박덕한 인간이기로 어찌 콩잎  한 번 잘못 삶았다고 마누라를 내 보낼 수 있겠나?"

"그럼 무슨 이유인가?"

 "묻지 말아주게."

 "그럼 왜 그런 소문이 난단 말인가?"

 "그래야 그 사람도 어디 가서 살아갈 게 아닌가?"

 우리는 증자와 그의 친구  간의 대화를 통해 도대체 증자 마누라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는 지 알 수 없는 채로  어쨌든 증자로서도 마누라를 내 보내지 않을 수 없는 불가피한 사정이 있었을 거라 짐작될 뿐이다.

 

 목하 세상은 나날이 각박해 간다.  

  한 사람이  몸 담고 있던 자리를  떠나면서 그랬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여길 엄청 어렵게 만들어 버릴 수 있어."

 누군가 직장을 떠나면서 하였다는 말이라는 데,  이런 정도는 그 사람의 경우만은 아니라서 이제  그리 놀라지도 않는다.  그 말을 들으면서  증자가 마누라를 내 보낸 경우를 떠올린다.   마누라를 어쩔 수 없이 내보내면서도  욕은 자신이 먹겠다는 그런 인간미가 그리워진다고나 할까.

 요즘 방송이나 신문을 도배하는 뉴스가  국민의힘 당에서 한동훈 전 비대위원장과 대통령 부인 김건희 여사 간에 주고 받았던 메세지다.  혹은 지난 총선 때  댓글부대가 있었다며  역시 국민의힘 사람 하나가  폭로하고 있다. 

 나는 그 내용의 위법성에 앞서  감탄고토(甘呑苦吐)  시시종종(時時種種)하는,  인간성 말살이 서글프다. 

  <논어>에서  그랬다. 

 "우리  고을은 정말 정의롭게 다스려지고 있다오. 이웃 집 양 한 마리를 몰래 잡아 먹은 아버지의 일을 아들이 관청에 와서 고발하였다오."

그러자 공자는 대답했다. 

 "내가 다스린다면 아버지의 허물을 아들이, 아들의 허물을 아버지가 숨겨주는 그런 고을이 되게 할 것이요."

 공자의 그 말은 법 질서를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리라.  법 보다는 훈훈한 인간미가 더 귀중하다는 말이 아닐까?

 정의라는 이름으로 법정에서 판결이 난 뒤의 형제, 친구, 부부, 혹은 부자 사이가 그 정의를 살갑게 받아들이고  법정을 나와서 

도 따뜻한 한 잔의 차를 앞에 하고 정담을 나눌 수 있을까?   

그들은 법정을 나오는 순간 벌써 심격천산(心隔千山),   마음은 천개의 산이 가로막힌,  서로 오갈 수 없는 세계의 사람이 되어 버린다. 가까운 사람들이  남이되고 원수가 되는 이 법 만능의 세상에서  우리는 더욱 증자의 따뜻한 인간성이 그립다. 

 이제 믿고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물론  사마광처럼  '평생을  남이 들어서는 안될 얘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이야 문제가 없겠지만  나 같은 장삼이사(張三李四)로서는  때로  '너만 알고 있거라.'라며 알고 있는 이야기를 지인에게 전하기도 한다.  그 상대가 뒤에 나와  적대 관계가 된다 하더라도  전날 주고 받았던  얘기들에 대한 약속은 지켜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앞에 있는 상대가 경우에 따라 나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다 까발릴 거라고 생각한다면 과연 무엇을 이야기할 것인가. 훗날의 배신을 두려워하며 조심조심, 나누는   이야기 들이란 얼마나 하나마나한 건조한 이야기들일 것인가.  서로 믿고 이야기할 수 없는 삭막한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증자가 마누라를 내 보내면서도  설삶은 콩잎 때문이라는 이유를 들어  욕을 자신이 먹겠다는 그 자세가 더욱 그립다.  요즘의 부부 사이란 증자처럼 욕은 자신이 먹겠다는 자세가 아니라,  없는 허물도 만들어서 세상에 영원히 매장되기를 바란다.  개를 지나칠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개는 주인을 배신하지 않는다.'한다.  그 말 또한 곱씹어 보면 역시 우리를 슬프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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