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리, 백제, 신라의 사신, 사마르칸트를 가다.
1) 들어가며
다음 내용들은 ‘(사)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단체의 서길수 교수의 연구 내용을 중심으로 고구려가 ’고구리‘ 또는 ’고리‘로 읽어야 함을 알아보자. 이 글은 ’세계 속의 고리(高句麗)‘라는 책을 접하면서 서경대 서길수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고구려의 이름이 ’고구리‘ 혹은 줄여서 ’고리‘로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고증을 통하고 세계 속의 고리를 찾아 중국 대륙 및 유럽대륙을 섭렵하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서 길수 교수님의 증거들을 접하면서 이 글을 소개하려 한다.
우선 사전에서 ‘麗’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찾아보겠다.
왼쪽의 사진은 우리나라 첫 옥편인 ‘전운옥편(1796,
1846)‘에 나와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서 ’麗‘를 읽기를 소개하고 있고, 조선광문회 신사전(1915)에 나와 있는 것으로 ’麗‘字 가 東國名 고구려를 ’고리나라‘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세 번째(1964년 정삼식의 大漢韓辭典)에도 나라 이름 ’리‘로 고구리, 고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아래쪽 한글학회 큰 사전에도 이름씨로 高句麗가 이름씨로 ‘고구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1959년 일본 大漢和辭典에도 ‘고구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자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에서 國史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예부터 써온 고구리를 버리고 ‘고구려’로 표기하여 그 원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2) 고구리(高句麗)인가 고리(高麗)인가?
먼저 나라 이름을 고구리로 한 것은 漢 원제 건소 2년(37), 부여의 추모(주몽)가 西漢의 玄菟郡 고구리현(高句麗縣)에서 세웠기 때문에 고구리(高句麗)라고 했다. 기원전 5세기 후 고구리는 ‘고리’라고 널리 줄여 썼고, 그 군주도 中國皇帝로부터 ‘고리왕(高麗王)’으로 책봉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구리가 망하고 200년 뒤 朝鮮半島에서 나타난 王氏는 그 계승국이 아니다.
추모(芻牟, 朱蒙)가 세운 고구리(高句麗)를 말한다. 고구리는 기원413년 長壽王이 즉위한 뒤 나라 이름을 고리(高麗)라고 바꾸었다<고구리 고리연구총서 2권>.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료는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 ‘고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길수 교수의 사료에 따르면 장수왕 이후의 것이므로 5세기 초반 이후에 낸 ( <삼국사기>를 뺀) 대부분 사료는 長壽王 이후의 것들임으로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 ‘고리(高麗)’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리(高麗)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舊唐書⸥에는 ‘고구리’와 ‘고리’가 각각 1회씩 나오고, ⸢新唐書⸥에는 208회가 모두 ‘고리’로 기록되어 있고, ⸢新唐書⸥는 ‘고구리’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고구리史 연구자들은 原史料에 있는 그대로 고리(고려)를 억지로 고구려로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高句麗를 고구리로 읽는 것은 麗자가 우리는 ‘아름다울 려’자 이므로 ‘려’라고 하지만 ‘麗’자가 巨聲으로 쓰일 때는 ‘려’이지만, ‘려’자가 平聲으로 될 때는 ‘리’로 읽어야 하므로 朝鮮朝에서 잘 못 읽어 고구려가 된 것이라고 서길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실제 고구리가 강성했던 장수왕 이후 무려 255년 동안 ‘고리(高麗)’라는 나라 이름을 썼다. 그러므로 고구리 후반의 역사를 기록할 때에는 당연히 ‘고리’라고 써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이미 1998년 ⸢고구려 유적답사⸥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2007년 ⸢고구려연구⸥에 ⸢高句麗와 高麗의 소릿값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여 학술적으로 뒷받침을 하였다. 학계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8년이 지나도 학술적인 반론 없어 2015년부터는 일반화할 단계라고 생각하여 학술논문에서 고구리(高句麗)⸳고리(高麗)로 쓰고 있으며, 2019년 두 권의 책을 내서 자세하게 밝혔다.( ⸢고구려 본디 이름 고구리(高句麗)⸥와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高麗)⸥ 여유당),
申叔舟 등이 1447년에 탈고하고 1448년에 東國正韻을 간행하였다. 한글을 반포한 뒤 韻書가 필요했기 때문에 明나라의 興武正韻을 대본으로 한글로 中國音을 달았다. 東國正韻이 ‘麗’를 ‘리’ 와 ‘례리’롤 읽음이 잘 나타나있다. 문제는 현재 중국어를 사람들이 보는 중국어 사전에 平聲과 去聲을 모두 ‘리’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화, 곧 北京音(중국은 2000년 10월 31일 북경어를 표준으로 삼았다)을 표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高’는 까오(gao), ‘꼬우(gou)’ ‘코(ku)/고kau)’로 읽는다. ‘高麗’는 티벧어의 꼬우리는 광동어의 꼬우리와 같다. 中古시대에는 ‘레이’로 읽고 上古시대는 ‘례’ 즉 ‘고리’로 읽었다는 것이다.
옆의 자료에서 보듯 1936년 중화민국에서 발행한 <사해>사전에서 ‘麗’의 읽기를 나라 이름일 때에는 ‘리’로 읽는 다고 되어있다.
‘高’자는 上古音‘ko(고)’, 古代音에서는 k며(가우)‘, 현대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보는 중국어 사전에 平聲과 去聲을 모두 ’리‘로 읽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普通話, 곧 북경음을 표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高’字는 上古音‘ko(고), 고대음’kau(가우), 현대 만다란에서 ‘kao(가오)’로 변천하여 변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三國時代로부터는 ‘高句驪’를 대개 ‘高句麗’로 쓰고 隨唐代로부터는 ⌜高麗⌟라고 약칭하여 지금까지도 한국인을 일반적으로 ‘kauli’라 부르고 있다.
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가 나온 1981년에 한국인들은 고구리(高句麗)를 ‘kauli’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병도 본인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 이 때 이미 모든 교과서에 한글로 ’고구려‘라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kauli’가 일반화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896년 시라또리 쿠라키치는 『고구리 명칭에 대한 고찰』에서 『魏志』권 30에 나라(고구리) 열전에 ‘溝漊者(구루자)’ 句麗名 城也라는 문구가 보이고, 또 고구리(高句麗)의 구리(句麗)는 구루와 소리가 서로 크게 닮았다면 城이란 뜻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4) 불교 서적이 풀어준 ‘고리’의 상징 닭깃털관(鷄羽冠)
아래 사진은 쌍기둥무덤(雙楹塚)에 그려진 깃털을 꽂은 모습
<大唐西域求法高僧傳(691)을 쓴 義淨(635~713)은 처음에는 신라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정관(627~649) 연간에 바른 가르침을 좇아 구하는 거룩한(붇다의) 자취를 찾아 예를 올리기 위해 長安의 廣脇, 산 이름)을 떠났다.
天竺國의 날란다寺에 머물면서 律과 논리를 많이 익히고, 뭇 경전을 베껴 썼으나 불행하게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바를 이루지 못하고 계귀(鷄貴) 동쪽 변두리에서 일어나 龍泉의 서쪽 끝에서 돌아가시니, 이국땅에서 덧없음(無常)을 느끼는구나. 나이는 70 남짓으로 마감하다. 鷄貴는 산크리스트어로 ‘꾸꾸떼스바라’矩矩吒㗨說羅(kukkutesvara)를 말한다. 꾸꾸다스는 닭을 말하고, 이스바라는 ‘귀하게 여기다’를 말하는데, 이곳이 바로 ‘고리’나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는 닭신(鷄神)을 공경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닭의 깃털을 꽂아 겉을 꾸민다고 한다. 날란다에 못이 있는데, 龍泉이라 하고 서방에서는 고리(句麗)를 ‘구구타스바라’라고 부른다.
고리에서 태어났는데 신라 사람이라고 한 것은 천축국에서 20년 쯤 뒤 668년에는 고리조정이 당나라에 항복한 뒤라서 신라인으로 표현한 것이고 原은 ‘고리人’인 것이다.
大唐西域求法高僧傳(691년)에는 鷄貴는 고리(高麗)이고 산스크리트로는 ‘구구타왜설라’라 한다. 해동고승전(1215)에는 鷄貴는 신라라 했으며 , 三國遺事(1281)에는 계귀= 海東을 표현 했으나 실은 구리(高句麗) 망한 다음에 이 책이 만들어져 신라 사람으로 된 것이다.
5) 하늘닭(天鷄)과 태양새(陽鳥)
東晉(317~419) 곽박(郭璞, 276~324)의 玄中記에서 蓬萊 동쪽에 대려(岱輿)라는 산이 있고 그 위에 扶桑이라는 나무기 있는데, 나무 높이가 萬길이나 된다. 이 나무 꼭대기에는 늘 하늘 닭(天鷄)이 있고, 나무 위에 집이 있다. 날마다 子時가 되면 하늘 닭이 운다. 하늘 닭이 울면 해속에 있는 태양 새(陽鳥)가 그 소리에 맞추어 울고 태양 새가 울면, 천하의 닭이 운다.
6세기 梁나라(464~549, 武帝 502~549) 職貢圖에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사절의 모습을 보면 옆의 그림과 같다. 양 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무제 즉위 40년(541)을 기념하여 梁나라에 조공하는 사절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보면 고리국의 사절 모자에 보면 닭신(鷄神)을 공경하는 의미의 닭 깃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 왼쪽부터 신라, 백제, 고구리 사
절을 나타낸 것 이고, 맨 오른 쪽 그림의 두 사신은 칼을 차고 있으며 닭깃털관을 쓰고 있어 무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표현한 예를 알아보자. 서길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구리(高麗)를 표현한 자료로 제시했다.
돌궐비문에는‘맥구리’, ‘맥고리’, 로마문자에서는 ‘무크리’, 산스크리트는 ‘무꾸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로 나타내면 모두 貊句麗로 되는 셈이다.
고구리는 장수왕 때인 413년에 ‘고구리’를 ‘고리’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세계 여러 곳에 있는 ‘고리’로 표현한 자료를 찾아보자.
6) 일본 法隆寺 불상 대좌에 그려진 닭 깃털 관<1992년 발견>
대좌 속에 그려진 그림의 정체에서 찾은 닭털 깃이 꽂힌 使者의 모자가 보인다. 좌우 사진에서 분명 고리의 使者임을 알 수 있다.
나가며
우리역사바로알기 모임의 서 길수 교수의 현지 탐방 연구 논문과 저서의 자료에서 고구려가 고리(高麗)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을 기술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字典에서 麗를 ‘려’로도 읽고, ‘리’로 읽으며 高麗를 ‘고리’로 읽는다고 되어있다. 또 고구려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사료에 따르면 廣開土大王代까지는 고구려라 했다가 國名이 바뀐 것은 기원 413년 장수왕 때 ‘고구리’로 바꾸었다. 이러한 대도 우리나라에서는 끄떡하지 않는 것이 무척 아쉽다.
이처럼 실크로드에 고구리 고리의 아바타(化身)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의정(義淨, 635~714)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그 나라는 닭신을 공경하고 우러러 보기 때문에 (닭의)깃털을 머리에 꽂아 겉을 장식했다고 한다. 서방에서는 고리(高麗)를 꾸꾸떼슈바라(닭신, 계신)이라고 부른다”라는 기록이 정확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고구리(高句麗), 고리(高麗)는 한문기록에 비하여 그 활동 범위가 실크로드를 넘어 로마까지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와 신라의 使臣들도 1만 리가 넘는 거리임에도 각 나라의 사신으로 사마르칸트까지 교역과 외교를 위해 왕래했었다는 벽화나 사리함, 使臣圖에 나타나 있음을 잘 확인해 보았다. 삼국 가운데 특히 고리의 사신이 돋보이며, 날마다 子時가 되면 하늘 닭(天鷄)이 울면, 태양 속에 있는 태양 새(三足烏)가 그 소리에 맞추어 천하의 닭이 모두 운다는 태양신(三足烏)을 숭배한 고구려인들의 삶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三足烏가 고리인(高麗人)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이 저져있었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특히 서길수 교수는 고리의 아바타인 닭깃털관을 쓰고 다녀 자랑과 긍지로 삼은 것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찾아 여러 권의 책을 쓰면서 증명해낸 탐구정신을 기리며 고마움을 전한다. 한편 우리나라 명칭을 정리해 보면 고리(高麗)가 돌궐에서는 구리, 고리이고, 로마에서는 크리, 산스크리트는 꾸리로 되어 전체적으로 ‘리’가되고 ‘고(高)’가 코로 되고 끝자리에 a가 붙으면 나라가 되니 “KOREA”가 國名이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벽화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使臣圖가 그려져 있다. 그 중에 고구리 사신의 머리에 닭깃털을 꽂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기 544년 고구리의 사신이 사마르칸트에 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세 분의 대통령이 이 벽화를 보시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과의 외교역사를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참고도서: 세계 속의 고리(高句麗) 서길수, 高句麗古墳壁畵 고구려연구회편, 서길수 교수의
고구리-고리연구(1~5)강좌 (사) 우리역사바로알기,
1) 들어가며
다음 내용들은 ‘(사) 우리 역사 바로 알기 단체의 서길수 교수의 연구 내용을 중심으로 고구려가 ’고구리‘ 또는 ’고리‘로 읽어야 함을 알아보자. 이 글은 ’세계 속의 고리(高句麗)‘라는 책을 접하면서 서경대 서길수 교수의 글을 읽으면서 고구려의 이름이 ’고구리‘ 혹은 줄여서 ’고리‘로 읽어야 된다는 사실을 고증을 통하고 세계 속의 고리를 찾아 중국 대륙 및 유럽대륙을 섭렵하면서 노고를 아끼지 않은 서 길수 교수님의 증거들을 접하면서 이 글을 소개하려 한다.
우선 사전에서 ‘麗’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를 찾아보겠다.
왼쪽의 사진은 우리나라 첫 옥편인 ‘전운옥편(1796,
1846)‘에 나와 있는 우리말 큰 사전에서 ’麗‘를 읽기를 소개하고 있고, 조선광문회 신사전(1915)에 나와 있는 것으로 ’麗‘字 가 東國名 고구려를 ’고리나라‘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으며 세 번째(1964년 정삼식의 大漢韓辭典)에도 나라 이름 ’리‘로 고구리, 고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 아래쪽 한글학회 큰 사전에도 이름씨로 高句麗가 이름씨로 ‘고구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1959년 일본 大漢和辭典에도 ‘고구리’로 읽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자료에도 불구하고 문교부에서 國史 교과서를 편찬하면서 예부터 써온 고구리를 버리고 ‘고구려’로 표기하여 그 원형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다.
2) 고구리(高句麗)인가 고리(高麗)인가?
먼저 나라 이름을 고구리로 한 것은 漢 원제 건소 2년(37), 부여의 추모(주몽)가 西漢의 玄菟郡 고구리현(高句麗縣)에서 세웠기 때문에 고구리(高句麗)라고 했다. 기원전 5세기 후 고구리는 ‘고리’라고 널리 줄여 썼고, 그 군주도 中國皇帝로부터 ‘고리왕(高麗王)’으로 책봉했다. 다만 주의해야 할 것은 고구리가 망하고 200년 뒤 朝鮮半島에서 나타난 王氏는 그 계승국이 아니다.
추모(芻牟, 朱蒙)가 세운 고구리(高句麗)를 말한다. 고구리는 기원413년 長壽王이 즉위한 뒤 나라 이름을 고리(高麗)라고 바꾸었다<고구리 고리연구총서 2권>. 그런데 이 책에서 다루는 모든 사료는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 ‘고리’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길수 교수의 사료에 따르면 장수왕 이후의 것이므로 5세기 초반 이후에 낸 ( <삼국사기>를 뺀) 대부분 사료는 長壽王 이후의 것들임으로 고구리(高句麗)가 아니라 ‘고리(高麗)’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리(高麗)라는 이름이 가장 많이 나오는 ⸢舊唐書⸥에는 ‘고구리’와 ‘고리’가 각각 1회씩 나오고, ⸢新唐書⸥에는 208회가 모두 ‘고리’로 기록되어 있고, ⸢新唐書⸥는 ‘고구리’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지금까지 고구리史 연구자들은 原史料에 있는 그대로 고리(고려)를 억지로 고구려로 바꾸어 인용하고 있다. 高句麗를 고구리로 읽는 것은 麗자가 우리는 ‘아름다울 려’자 이므로 ‘려’라고 하지만 ‘麗’자가 巨聲으로 쓰일 때는 ‘려’이지만, ‘려’자가 平聲으로 될 때는 ‘리’로 읽어야 하므로 朝鮮朝에서 잘 못 읽어 고구려가 된 것이라고 서길수 교수는 말하고 있다.
실제 고구리가 강성했던 장수왕 이후 무려 255년 동안 ‘고리(高麗)’라는 나라 이름을 썼다. 그러므로 고구리 후반의 역사를 기록할 때에는 당연히 ‘고리’라고 써야 할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이미 1998년 ⸢고구려 유적답사⸥에서 문제를 제기했고, 2007년 ⸢고구려연구⸥에 ⸢高句麗와 高麗의 소릿값에 관한 연구⸥를 발표하여 학술적으로 뒷받침을 하였다. 학계에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공식적으로 발표하여 8년이 지나도 학술적인 반론 없어 2015년부터는 일반화할 단계라고 생각하여 학술논문에서 고구리(高句麗)⸳고리(高麗)로 쓰고 있으며, 2019년 두 권의 책을 내서 자세하게 밝혔다.( ⸢고구려 본디 이름 고구리(高句麗)⸥와 ⸢장수왕이 바꾼 나라 이름 고리(高麗)⸥ 여유당),
申叔舟 등이 1447년에 탈고하고 1448년에 東國正韻을 간행하였다. 한글을 반포한 뒤 韻書가 필요했기 때문에 明나라의 興武正韻을 대본으로 한글로 中國音을 달았다. 東國正韻이 ‘麗’를 ‘리’ 와 ‘례리’롤 읽음이 잘 나타나있다. 문제는 현재 중국어를 사람들이 보는 중국어 사전에 平聲과 去聲을 모두 ‘리’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화, 곧 北京音(중국은 2000년 10월 31일 북경어를 표준으로 삼았다)을 표준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高’는 까오(gao), ‘꼬우(gou)’ ‘코(ku)/고kau)’로 읽는다. ‘高麗’는 티벧어의 꼬우리는 광동어의 꼬우리와 같다. 中古시대에는 ‘레이’로 읽고 上古시대는 ‘례’ 즉 ‘고리’로 읽었다는 것이다.
옆의 자료에서 보듯 1936년 중화민국에서 발행한 <사해>사전에서 ‘麗’의 읽기를 나라 이름일 때에는 ‘리’로 읽는 다고 되어있다.
‘高’자는 上古音‘ko(고)’, 古代音에서는 k며(가우)‘, 현대 중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보는 중국어 사전에 平聲과 去聲을 모두 ’리‘로 읽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普通話, 곧 북경음을 표준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高’字는 上古音‘ko(고), 고대음’kau(가우), 현대 만다란에서 ‘kao(가오)’로 변천하여 변천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에서도 三國時代로부터는 ‘高句驪’를 대개 ‘高句麗’로 쓰고 隨唐代로부터는 ⌜高麗⌟라고 약칭하여 지금까지도 한국인을 일반적으로 ‘kauli’라 부르고 있다.
李丙燾의 ‘한국고대사연구’가 나온 1981년에 한국인들은 고구리(高句麗)를 ‘kauli’라고 부르지 않았고, 이병도 본인도 그렇게 쓰지 않았다. 이 때 이미 모든 교과서에 한글로 ’고구려‘라고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kauli’가 일반화 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896년 시라또리 쿠라키치는 『고구리 명칭에 대한 고찰』에서 『魏志』권 30에 나라(고구리) 열전에 ‘溝漊者(구루자)’ 句麗名 城也라는 문구가 보이고, 또 고구리(高句麗)의 구리(句麗)는 구루와 소리가 서로 크게 닮았다면 城이란 뜻이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
4) 불교 서적이 풀어준 ‘고리’의 상징 닭깃털관(鷄羽冠)
아래 사진은 쌍기둥무덤(雙楹塚)에 그려진 깃털을 꽂은 모습
<大唐西域求法高僧傳(691)을 쓴 義淨(635~713)은 처음에는 신라 사람이라고 판단했다.
정관(627~649) 연간에 바른 가르침을 좇아 구하는 거룩한(붇다의) 자취를 찾아 예를 올리기 위해 長安의 廣脇, 산 이름)을 떠났다.
天竺國의 날란다寺에 머물면서 律과 논리를 많이 익히고, 뭇 경전을 베껴 썼으나 불행하게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고 단단히 마음먹은 바를 이루지 못하고 계귀(鷄貴) 동쪽 변두리에서 일어나 龍泉의 서쪽 끝에서 돌아가시니, 이국땅에서 덧없음(無常)을 느끼는구나. 나이는 70 남짓으로 마감하다. 鷄貴는 산크리스트어로 ‘꾸꾸떼스바라’矩矩吒㗨說羅(kukkutesvara)를 말한다. 꾸꾸다스는 닭을 말하고, 이스바라는 ‘귀하게 여기다’를 말하는데, 이곳이 바로 ‘고리’나라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나라는 닭신(鷄神)을 공경하고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닭의 깃털을 꽂아 겉을 꾸민다고 한다. 날란다에 못이 있는데, 龍泉이라 하고 서방에서는 고리(句麗)를 ‘구구타스바라’라고 부른다.
고리에서 태어났는데 신라 사람이라고 한 것은 천축국에서 20년 쯤 뒤 668년에는 고리조정이 당나라에 항복한 뒤라서 신라인으로 표현한 것이고 原은 ‘고리人’인 것이다.
大唐西域求法高僧傳(691년)에는 鷄貴는 고리(高麗)이고 산스크리트로는 ‘구구타왜설라’라 한다. 해동고승전(1215)에는 鷄貴는 신라라 했으며 , 三國遺事(1281)에는 계귀= 海東을 표현 했으나 실은 구리(高句麗) 망한 다음에 이 책이 만들어져 신라 사람으로 된 것이다.
5) 하늘닭(天鷄)과 태양새(陽鳥)
東晉(317~419) 곽박(郭璞, 276~324)의 玄中記에서 蓬萊 동쪽에 대려(岱輿)라는 산이 있고 그 위에 扶桑이라는 나무기 있는데, 나무 높이가 萬길이나 된다. 이 나무 꼭대기에는 늘 하늘 닭(天鷄)이 있고, 나무 위에 집이 있다. 날마다 子時가 되면 하늘 닭이 운다. 하늘 닭이 울면 해속에 있는 태양 새(陽鳥)가 그 소리에 맞추어 울고 태양 새가 울면, 천하의 닭이 운다.
6세기 梁나라(464~549, 武帝 502~549) 職貢圖에의 고구리, 백제, 신라의 사절의 모습을 보면 옆의 그림과 같다. 양 무제의 아들 소역(蕭繹)이 무제 즉위 40년(541)을 기념하여 梁나라에 조공하는 사절의 모습을 그린 그림에 보면 고리국의 사절 모자에 보면 닭신(鷄神)을 공경하는 의미의 닭 깃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아래 그림 왼쪽부터 신라, 백제, 고구리 사
절을 나타낸 것 이고, 맨 오른 쪽 그림의 두 사신은 칼을 차고 있으며 닭깃털관을 쓰고 있어 무관임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표현한 예를 알아보자. 서길수 교수는 다음과 같이 구리(高麗)를 표현한 자료로 제시했다.
돌궐비문에는‘맥구리’, ‘맥고리’, 로마문자에서는 ‘무크리’, 산스크리트는 ‘무꾸리’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한자로 나타내면 모두 貊句麗로 되는 셈이다.
고구리는 장수왕 때인 413년에 ‘고구리’를 ‘고리’로 바꾸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세계 여러 곳에 있는 ‘고리’로 표현한 자료를 찾아보자.
6) 일본 法隆寺 불상 대좌에 그려진 닭 깃털 관<1992년 발견>
대좌 속에 그려진 그림의 정체에서 찾은 닭털 깃이 꽂힌 使者의 모자가 보인다. 좌우 사진에서 분명 고리의 使者임을 알 수 있다.
나가며
우리역사바로알기 모임의 서 길수 교수의 현지 탐방 연구 논문과 저서의 자료에서 고구려가 고리(高麗)라는 이름으로 바뀌는 과정을 기술했다. 우리나라, 중국, 일본 字典에서 麗를 ‘려’로도 읽고, ‘리’로 읽으며 高麗를 ‘고리’로 읽는다고 되어있다. 또 고구려를 ‘고구리’로 읽어야 한다고 나와 있다. 사료에 따르면 廣開土大王代까지는 고구려라 했다가 國名이 바뀐 것은 기원 413년 장수왕 때 ‘고구리’로 바꾸었다. 이러한 대도 우리나라에서는 끄떡하지 않는 것이 무척 아쉽다.
이처럼 실크로드에 고구리 고리의 아바타(化身)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의정(義淨, 635~714)이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에서 “그 나라는 닭신을 공경하고 우러러 보기 때문에 (닭의)깃털을 머리에 꽂아 겉을 장식했다고 한다. 서방에서는 고리(高麗)를 꾸꾸떼슈바라(닭신, 계신)이라고 부른다”라는 기록이 정확하게 이어지고 있었고, 고구리(高句麗), 고리(高麗)는 한문기록에 비하여 그 활동 범위가 실크로드를 넘어 로마까지 알려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를 비롯한 백제와 신라의 使臣들도 1만 리가 넘는 거리임에도 각 나라의 사신으로 사마르칸트까지 교역과 외교를 위해 왕래했었다는 벽화나 사리함, 使臣圖에 나타나 있음을 잘 확인해 보았다. 삼국 가운데 특히 고리의 사신이 돋보이며, 날마다 子時가 되면 하늘 닭(天鷄)이 울면, 태양 속에 있는 태양 새(三足烏)가 그 소리에 맞추어 천하의 닭이 모두 운다는 태양신(三足烏)을 숭배한 고구려인들의 삶을 우리는 인식할 수 있다. 그래서 三足烏가 고리인(高麗人)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이 저져있었음을 넉넉히 알 수 있다.
특히 서길수 교수는 고리의 아바타인 닭깃털관을 쓰고 다녀 자랑과 긍지로 삼은 것을 세계 곳곳을 다니며 찾아 여러 권의 책을 쓰면서 증명해낸 탐구정신을 기리며 고마움을 전한다. 한편 우리나라 명칭을 정리해 보면 고리(高麗)가 돌궐에서는 구리, 고리이고, 로마에서는 크리, 산스크리트는 꾸리로 되어 전체적으로 ‘리’가되고 ‘고(高)’가 코로 되고 끝자리에 a가 붙으면 나라가 되니 “KOREA”가 國名이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 있는 벽화에 고구려, 백제, 신라의 使臣圖가 그려져 있다. 그 중에 고구리 사신의 머리에 닭깃털을 꽂은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서기 544년 고구리의 사신이 사마르칸트에 갔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 세 분의 대통령이 이 벽화를 보시고 한국과 우즈베키스탄과의 외교역사를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 문재인 대통령, 윤석열 대통령)
참고도서: 세계 속의 고리(高句麗) 서길수, 高句麗古墳壁畵 고구려연구회편, 서길수 교수의
고구리-고리연구(1~5)강좌 (사) 우리역사바로알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