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절차탁마(切磋琢磨)
절차탁마에 대한 전문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학문을 이야기하자면 孔子(BC551년, 중국 산동성 곡부 출생, 73세 졸)를 빼놓을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최초의 사학(私學) 운영자이자 대중의 敎師였다. 물론 이전에 학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향학(鄕學)으로 하(夏)대에 교(校), 은(殷)대에 상(庠), 주(周)대에 서(序)가 있었으며, 주대의 대학으로 벽옹(辟雍)이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관학(官學)으로 왕실과 귀족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관학은 주로 식자(識字)교육과 예(禮: 예절과 儀式) ㆍ 악(樂: 음악과 무용) ㆍ 사(射: 활쏘기) ㆍ 어(御: 마차 몰기) ㆍ 서(書: 글자 쓰기) ㆍ 수(數: 계산하기) 등 육예(六藝)의 지식을 배웠다. 孔子 역시 六藝를 가르쳤으나, 이러한 소학(小學)의 지식보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본령(本領)을 습득하는 것을 교육의 근본 취지(趣旨)로 삼았다. 본시 그의 교육 목표는 小人이 아닌 君子가 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군자의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이가 그리 많지 않았나 보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이렇게 한탄한 것이 아닐까?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으나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즉 고지학자(古之學者) 위기(爲己), 금지학자,(今之學者), 위인(爲人 )” (論語ㆍ憲問)
공자는 유독 詩를 좋아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산시(刪詩)’, 즉 주대의 노래를 정리하여 전체 305편으로 새롭게 편찬한 것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그의 어록집인 [논어]에 보면, 시와 관련된, 또는 시에서 인용된 구절이 적지 않다. 제자와 대화를 할 때도 시의 한 대목을 읊기도 하고, 제자 또한 시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 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가난해도 아부하지 않고(貧而無諂)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富而無驕) 어떻습니까?” 그러자 孔子는 그만하면 괜찮지만 “가난해도 즐거워하고(若貧而樂)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富而好禮)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자공이 다시 말했다. “[詩]에서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하였는데, 그런 뜻입니까?” 공자가 그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말했다.
“비로소 내가 너와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어렵다. 자공이 인용한 시가 어떠하기에 공자가 저리 좋아하는 것일까? ‘여정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는 우리에게 익숙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원본이다.
상아(象牙)를 다루는 것처럼 세밀하게 자르고 다듬으며, 옥석을 다루듯이 세세하게 쪼고 가는 것처럼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 자공이 말한 내용은 주로 상대에 대한 자세에 관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가난하면 富者에게 아부하기 마련이고, 부유하면 교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부나 교만은 결코 좋은 덕성이 아니다. 그래서 子貢은 학문을 통해 부유나 빈궁과 관계없이 자신의 올바른 德性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孔子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는가? 부유해도 예를 통해 적절하게 절제할 수 있는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자공이 말한 ‘절차탁마’는 바로 이를 위한 길이다. 갈고 닦고 쪼고 다듬는 것은 자신이고, 그 결과는 환경이 어떠하든 자신에게 충실함이다. 다시 말해 자공이 상대에 대한 것이라면, 공자의 답은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孔子는 스스로 ‘호학(好學)’하는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덕성이나 위엄, 명예 등등 사람들이 중시하는 여러 가지는 잘 모르겠으나,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자신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평생 배우고 익히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자공이 이를 간파하고 ‘절차탁마’의 시를 인용하니 공자가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는 이렇듯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계발(啓發)하는 교육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위대한 敎育者로 세계 四大 聖人의 한 분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
절차탁마에 대한 전문자료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학문을 이야기하자면 孔子(BC551년, 중국 산동성 곡부 출생, 73세 졸)를 빼놓을 수가 없다. 주지하다시피 공자는 최초의 사학(私學) 운영자이자 대중의 敎師였다. 물론 이전에 학교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향학(鄕學)으로 하(夏)대에 교(校), 은(殷)대에 상(庠), 주(周)대에 서(序)가 있었으며, 주대의 대학으로 벽옹(辟雍)이 설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는 모두 관학(官學)으로 왕실과 귀족의 자제를 위한 교육기관이었다. 관학은 주로 식자(識字)교육과 예(禮: 예절과 儀式) ㆍ 악(樂: 음악과 무용) ㆍ 사(射: 활쏘기) ㆍ 어(御: 마차 몰기) ㆍ 서(書: 글자 쓰기) ㆍ 수(數: 계산하기) 등 육예(六藝)의 지식을 배웠다. 孔子 역시 六藝를 가르쳤으나, 이러한 소학(小學)의 지식보다 수신(修身),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의 본령(本領)을 습득하는 것을 교육의 근본 취지(趣旨)로 삼았다. 본시 그의 교육 목표는 小人이 아닌 君子가 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의 제자들 가운데 진정 군자의 학문을 배우고자 했던 이가 그리 많지 않았나 보다. 그런 까닭에 공자는 이렇게 한탄한 것이 아닐까? “옛날의 학자들은 자신을 위해 학문을 하였으나 지금의 학자들은 남을 위한 학문을 한다. 즉 고지학자(古之學者) 위기(爲己), 금지학자,(今之學者), 위인(爲人 )” (論語ㆍ憲問)
공자는 유독 詩를 좋아했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산시(刪詩)’, 즉 주대의 노래를 정리하여 전체 305편으로 새롭게 편찬한 것이 바로 그였다고 한다. 그의 어록집인 [논어]에 보면, 시와 관련된, 또는 시에서 인용된 구절이 적지 않다. 제자와 대화를 할 때도 시의 한 대목을 읊기도 하고, 제자 또한 시를 인용하기도 했는데 그 한 장면을 살펴보도록 하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물었다. “가난해도 아부하지 않고(貧而無諂)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으면(富而無驕) 어떻습니까?” 그러자 孔子는 그만하면 괜찮지만 “가난해도 즐거워하고(若貧而樂) 부유해도 예를 좋아하는 것(富而好禮)만 못하다”라고 대답했다. 자공이 다시 말했다. “[詩]에서 ‘여절여차, 여탁여마(如切如磋, 如琢如磨)’라고 하였는데, 그런 뜻입니까?” 공자가 그의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져서 이렇게 말했다.
“비로소 내가 너와 함께 시를 이야기할 수 있겠구나.”
어렵다. 자공이 인용한 시가 어떠하기에 공자가 저리 좋아하는 것일까? ‘여정여차(如切如磋), 여탁여마(如琢如磨)’는 우리에게 익숙한 ‘절차탁마(切磋琢磨)’의 원본이다.
상아(象牙)를 다루는 것처럼 세밀하게 자르고 다듬으며, 옥석을 다루듯이 세세하게 쪼고 가는 것처럼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는 뜻이다. 처음 자공이 말한 내용은 주로 상대에 대한 자세에 관한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가난하면 富者에게 아부하기 마련이고, 부유하면 교만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아부나 교만은 결코 좋은 덕성이 아니다. 그래서 子貢은 학문을 통해 부유나 빈궁과 관계없이 자신의 올바른 德性을 지키는 것에 대해 언급한 것이다. 그러나 孔子는 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가난해도 즐거울 수 있는가? 부유해도 예를 통해 적절하게 절제할 수 있는가? 쉽지 않다.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는가? 자공이 말한 ‘절차탁마’는 바로 이를 위한 길이다. 갈고 닦고 쪼고 다듬는 것은 자신이고, 그 결과는 환경이 어떠하든 자신에게 충실함이다. 다시 말해 자공이 상대에 대한 것이라면, 공자의 답은 자신에 대한 것이라는 뜻이다. 孔子는 스스로 ‘호학(好學)’하는 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덕성이나 위엄, 명예 등등 사람들이 중시하는 여러 가지는 잘 모르겠으나, 배우는 것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자신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그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고 평생 배우고 익히며 가르치는 일에 몰두하였던 것이다. 자공이 이를 간파하고 ‘절차탁마’의 시를 인용하니 공자가 어찌 칭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공자는 이렇듯 제자가 스스로 깨닫도록 계발(啓發)하는 교육방식을 선호했다. 그는 위대한 敎育者로 세계 四大 聖人의 한 분으로 추앙 받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