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의 元帥 李芳實이 젊을 때에 효용(驍勇: 사납고 날램)함이 매우 뛰어났다. 일찍이 서해도를 유람하다가 길에서 한 남자를 만나니 헌걸하고 장대하였다. 활과 화살을 잡고 말 앞에 마주서면서 말하기를 말하기를 令公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원컨대 모시고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이방실은 이것이 도적인줄 알았다. 그러나 또한 겁내지 않고 약 십여 리를 동행하였다. 밭 가운데 두 마리의 비둘기가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도적이 말하기를 ‘그대가 저것을 쏠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방실이 드디어 쏘아 한 화살에 두 마리를 잡았다.
날이 저물어 院舍에 들어갔다. 방실이 차고 있던 활과 화살을 풀어서 도적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내 잠깐 말을 보고 올테니 너는 잠깐 여기에 있으라’고 하였다. 방실이 변소가 앉으니 도적이 활을 들고 시위를 한껏 당겨서 방실을 쏘았다. 방실이 오는 화살을 잡고 변소의 한쪽에 두었다. 이와같이 하기를 열 몇 번 하여 전통의 화살이 다 없어졌다. 도적이 그의 용기에 굴복하여 절하고 사죄하면서 살려주기를 빌었다. 곁에 상수리 나무가 있었는데, 높이가 두어 길이나 되었다. 방실이 몸을 솟꾸쳐 바로 올라가 나무의 끝을 휘어잡고 한 손으로 도적의 머리를 움켜잡고 나무의 끝에 잡아매었다.
그리고 칼로 머리의 가죽을 그었다. 휘어진 나무가 올라가면서 머리의 털이 죄다 빠지고 몸은 땅에 떨어졌다. 방실이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만년에 지위 높아진 뒤에 거듭 그곳을 지나가다가 농가에 들려 유숙하였는데, 그 집이 매우 부자였다. 늙은 주인이 지팡이를 집고 맞아드려 크게 술과 찬을 마련하여 대접하였다. 술이 취한 뒤에 늙은이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내가 젊을 적에 勇力만 믿고 도적이 되어 행인을 죽이고 재물을 약탈한 것이 무수하였습니다. 그러나 한 소년을 만나니 뛰어난 용력이 비할바가 없었습니다. 내가 그를 살해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에게 해를 당하여 거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때부터 ‘허물을 뉘우치고 오직 농사만을 힘썼으며 다시는 사람을 죽여 재물을 빼앗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하고 모자를 벗어 보이는데 머리가 빤빤하여 털이라곤 없었다.
방실에게 누이가 있었으니 날래고 용맹스럽기가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항상 나뭇가지를 벽에 꽂아놓고 형제가 가지 위에 올라가서 방실이 지나가면 가지가 움직이고 누이가 지나가면 움직이지 아니했다. 누이가 하루는 파리한 어린 하인과 피곤한 말을 이끌고 강을 건너 남쪽으로 가는데 배 안의 사람들이 먼저 건너기를 다투어 누이를 들어 배 밖으로 내리니 누이가 크게 성내어 드디어 배의 삿대를 빼앗아 배 안의 사람들을 치니 그 굳세고 빠름이 나는 매와 같았다고 한다. *성현의 용재총화에서
*이방실의 생애 및 활동 사항
충목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호종(扈從)한 공으로 왕이 즉위하자 중랑장이 되었고, 이어 호군(護軍)이 되었으며, 아울러 전(田) 100결(結)도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대호군이 되어 용주(龍州)의 군사를 이끌고 선성(宣城)에서 민란을 일으켜 다루가치[達魯花赤] 노연상(魯連祥) 부자를 쳐서 진압하였다.
1359년 위평장(僞平章)·모거경(毛居敬) 등의 홍건적이 4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의주, 정주(靜州)·인주(麟州) 등을 함락한 뒤 인주에서 웅거하자, 안우(安祐)·이음(李蔭)·이인우(李仁祐) 등과 함께 철주(鐵州)에서 이를 격퇴시켰다. 이듬해 상장군이 되어 다시 철화(鐵化)에서 적을 격퇴하였고, 뒤이어 상만호가 되어 함종(咸從)에 들어온 적을 배후에서 공격하고 고선주(古宣州)에서 접전한 끝에 의주 쪽으로 퇴각시켰다.
홍건적 격퇴의 공으로 추성협보공신(推誠協輔功臣)에 봉해지고 추밀원부사에 올랐다. 뒤에 홍건적이 배 70척으로 서해도에 침입했을 때 풍주(豐州)에서 물리쳐 그 공으로 옥대(玉帶)와 옥영(玉纓)이 하사되었다.
1361년 사유(沙劉)·관선생(關先生) 등의 홍건적이 20여 만의 무리를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삭주 등지에 쳐들어오자, 추밀원부사로서 서북면도지휘사가 되어 상원수 안우, 병마절도사 김득배(金得培), 지휘사 김경제(金景磾) 등과 함께 개주(价州: 지금의 개천)·연주(延州: 지금의 영변)·박주(薄州: 지금의 삭천) 등지에서 요격했다. 그러나 안주와 절령(岊嶺)에서 참패해 공민왕은 복주(福州: 지금의 안동)로 피난하고 개경은 함락되었다. 1362년 총병관(摠兵官) 정세운(鄭世雲)·김득배·안우·안우경(安遇慶)·최영(崔瑩)·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개경을 수복하고 사유·관선생을 죽였다. 이어 중서시랑평장사에 올랐으나 김용(金鏞)의 간계에 의해 공민왕의 명을 받은 박춘(朴椿) 정지상(鄭之祥) 등에게 살해되었다. 인용: 한국 민족문학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