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姜邯贊과 廉貞星
24/04/04 12:41:41 金 鍾國 조회 637
 高麗侍中 姜邯贊은 한양판관이 되었을 때 府의 경내에 범이 많아서 아전과 백성들이 많이 잡아먹혔다. 府尹이 근심하니 감찬이 부윤에게 말하기를 ‘이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3, 4일 기다리면 내가 그것을 제거하겠습니다‘하고 종이에 전갈을 써서 아전에게 주먄서 ’내일 새벽에 北洞에 가면 마땅히 늙은 중이 돌 위에 웅크리고 앉아 있을 것이니 불러오도록 하라‘고 히였다. 아전 그 말대로 하여 가보니 과연 한 늙은 중이 남루한 옷을 입고 흰 건을 쓰고, 서리 속 돌 위에 앉아 있었다. 府 의 전갈을 보고 아전을 따라와서는 判官ㅔ게 절하고 있을 뿐이었다. 감찬이 중에게 제칙하여 말하기를 ’네가 비록 짐승이기는 하나 역시 영물인데 어째서 사람을 해침이 이에 이르느냐? ‘너와 약속하는 것이니 5일 안으로 너희 무리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라’ 그렇지 않으면 강력한 쇠뇌와 모진 화살로 다 죽여버리고 말겠다‘고 하니 중이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부윤이 큰 소리로 껄껄 웃으며 말하기를 ’판관이 잘 못이요, 중이 어찌 범이란 말이오‘라고 말했다. 감찬이 말하기를 ’네 형체를 변하여 보아라‘고 하니 중이 한소리를 크게 으르릉대며 화하여 한 마리의 큰 범이 되어 난간 기둥을 잡고 쳐다보는데 소리가 數里에 진동하였다. 부윤이 정신을 잃고 땅에 쓰러졌다. 감찬이 ’그만 그치라‘하니 범이 뒤치듯 형체를 중으로 고쳐가지고 머리가 땅에 닿도록 절하고 갔다. 이튿날 부윤이 아전에게 명령하여 동쪽 교외에 나가서 엿보게 하였더니 한 늙은 범이 앞서가고 작은 범 수십 마리가 뒤를 따라 강을 건너갔다. 그 뒤로부터는 한양부에 호환(虎患)이 없어졌다.
감찬의 첫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복시(復試)에 장원으로 합격하였고, 벼슬이 首相에 이르렀다. 사람의 생김새와 체구가 조그마하고 귀가 작았다. 한 가난한 사람이 있었으니, 얼굴 모양이 풍만하고 거대하였다. 가난한 사람이 의관과 띠를 정제하여 앞 열에 서 있게 하고 감찬은 떨어진 옷을 입고 그 아래에 서 있었다. 宋나라의 사신이 가난한 사람을 보고 말하기를 ’용모는 비록 풍만하나 귀에 성곽(귀바퀴)이 없으니 반드시 빈한한 사람이다’라 하고, 감찬을 보고는 두 손을 들고 땅에 엎드려 절하면서 말하기를 엄정성(廉貞한 것을 주제하는 별)이 오래도록 중국에 나타나지 않더니 이제 동방에 있는 군요‘라고 하였다. 

*廉貞星: 별의 이름, 탐랑(貪狼), 거문(巨門) 녹존(祿存) 문곡(文曲) 파군(破軍) 보필(補弼)과 함께 八星을 이룬다. 염정(廉貞)한 것을 주재한다.
                                                           참고자료: 성현(成俔)의 용재총화(慵齋叢話)

*강감찬: (948년 11월 19잉~ 1031년 8월 20일), 高麗 전기 서북면행영 도통사,, 상원수대장, 문하시중 등의  문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국사리에 묘가 있다.
*983년(성종 3) 과거에 장원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한림학사를 거쳐 평장사가 되었다. 요나라의 3차 침입을 격퇴하였고, 1019년(현종 10년)에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 문하평장사 천수현 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졌다. 1020년(현종 11년)에 특진 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가 되었고 1030년(현종 21년)에 문하시중이 되고 1031년(현종 22년)에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군개국후(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郡開國侯에 이르렀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현종의 묘정(廟廷)에 배향되고 문종(文宗) 때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에 추증되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산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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