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句麗의 平壤 城은 어디였을까?
다음 글은 고대사 TV에서 ‘고구려의 평양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卒 本은 현재 중국 랴오닝성 桓因縣 五女山城이었으며, 琉璃王이 천도한(AD 3년) 國內城은 중국 길림성 集安 일대였고, 長壽王(AD427)이 천도한 평양성은 지금 북한의 平壤지역이라고 합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수업하고 있는 국사 교과서가 모두 아래에 나온 지도에서처럼 모두 우리나라 평양지역을 고구려의 도읍지도 정하고 수업해 오고 있다.
그러나 졸본으로 추정되는 중국 遼寧省 桓因縣 오녀산성 일대 및 國內城으로 비정되는 중국 길림성 集安일대 그리고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북한 평양 일대에서는 고구려 도읍지가 존재했었다는 명확한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평양성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발굴 조사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발굴된 성곽이 석각에는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니라 漢城이었다는 것이다.
五女山城에는 BC1세기 유물은 없다.
그리고 國內城이라고 추정하는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에서는 2009년과 2011년 발굴조사 결과 3세기 이전의 고구려 유물이 전혀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평양으로 알고 추정하는 북한의 평양지역의 성곽에서는 고구려의 유적임은 확인하였으나 그것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그 어떤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평양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발굴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 쪘습니다.
발굴된 성곽의 石刻에서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니라, 漢城이었던 것이다.
*‘丙戌年 12월 ’한성(漢城)‘ 下後部의 小兄 文達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맡는다’.
*『周書』 「異域列傳」 高句麗:北周 正史 636년 편찬, 고구려의 도읍지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東西가 6里이다. 그 밖의 國內城과 漢城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리이며, 國都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三京이라 일컫는다.
지금 보는 것과 같이 고구려는 평양성 외에 별도로 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도 또한 중요한 거점의 큰 성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양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 모두 都會地이며 도회지는 사람이 많이 살고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고, 상공업 등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국내성이라고 추정하는 중국의 吉林省, 集安지역은 평야지대도 없으며, 물자 운송도 불가능한 첩첩산중 속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역대왕조 조상들의 공동묘지로서의 용도 밖에 사용할 수 없으며, 절대 도회지라고 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유리왕 때부터 장수왕이전까지 국가를 운영했던 도읍지인 國內城이 있었던 곳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卒本의 위치를 중국 遼寧省 환인현 오녀산성이라고 하거나, 국내성의 위치를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島庫吉, 1865生)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및 쓰디 소키치(津田左右吉) 등이 고구려의 평양성 및 한사군이 지금 북한의 평양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그 어떤 역사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 및 평양성,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 등에 대하여는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역사책인 ‘朝鮮史’의 내용을 가지고 그대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과거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역사기록물들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일수록 역사해석의 그 기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 당시에 기록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이란 역사적 기록과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과거의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과학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역사적 사건을 추측, 추정, 비정 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도읍지인 平壤도 지금의 북한 평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압록강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지금 보이는 지도에서 압록강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 북한의 평양이 보입니다
『大明一統志』 권25 「遼東都指揮使司」에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다. 일명 왕검성이라 한다. 곧 箕子의 옛 나라이다. 城밖에 기자의 묘가 있다. 漢나라 樂浪郡의 治所이다. 東晉 安帝 義熙(405 ~ 418) 이후로 고구려 장수왕(高璉)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평양성은 후에 西京이라 불렀다. 元나라 때는 東寧路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고구려 평양성 = 고조선 왕검성 = 기자조선 = 고려 서경 = 원의 동녕로, 평양은 압록강 동쪽에 있다.
지금, 『大明一統志』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잎에서 살펴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북한 평양지역에 있다 하였으니, 역사기록에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大明一統志』를 정리하면,
1. 고구려 평양성 = 압록강 동쪽에 있다.(북한 평양 – 압록강 남쪽 = 고구려 평양이 아님
2. 고구려 평양성 = 고조선의 王劍城 = 기자조선 = 한나라 樂浪郡= 고려 西京 = 元나라 東寧路
▲ 235km = 600리,
북한 평양은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다! ∵ 압록강 ↔ 평양성 = 200리 … 아니다.
『舊唐書』 권 67 「열전」 제17 이 적(李勣)
이 적: 총장(總章) 원년(668년) 이적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2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땅을 공격해서 鴨綠水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그 동생을 보내와서 싸웠는데, 이적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해서 패퇴시키고 2백 리를 급하게 쫓아가 평양성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패수(浿水)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국학중아연구원』에 따르면 “패수는 고조선 때에는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을 지칭한다. 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지방의 옛 요세를 수리하고 浿水를 요동의 고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 그 뒤 줄곧 중국 세력과 경계선이었다”고 한다.
∎ 패수(浿水) = 중국 세력과 우리민족(고조선 등)의 경계선
『史記』 권115 「朝鮮列傳」 제55 古朝鮮에 조선왕 衛滿은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眞蕃朝鮮 지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城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나라를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韓이 일어나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要塞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소속시켰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학계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압록강설, 청천강설, 대동강설, 예성강설 등의 견해가 있다.
『漢書』 권95 「서남이월남조선전(西南以南越朝鮮傳)」 제65 古朝鮮에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장수 衛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1천 여명을 모아 만이(蠻夷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변경)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옛 공지인 上下障에 살
았다. 점차 眞蕃朝鮮의 만이와 옛 燕나라, 齊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읍하였다.
▲위만의 王險城은 樂浪郡 浿水 동쪽에 있다. 『漢書』 권28하 「地理志」 제8下: 요동군은 秦나라 때 설치하였다. 18개 현이 속해있다. 혐독현(險瀆縣): 응소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거세게 흐르므로 험독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2 四夷-東夷-朝鮮: 衛滿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왕험은 지명이며, 浿水의 동쪽에 있다.
▲『大明一統志』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
앞에서 살펴본 역사교과서는 분명히 고구려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역사의 기록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며, 황당하기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평양성은 浿水(遼河 = 遼水)는 중국 동북부 내몽골자치구의 대흥안령 남쪽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다가 지린·랴오닝부근에서 랴오허강과 합치고, 동랴오허강과 합쳐서 남하하다가 훈허강과 합류하여 발해만으로 흘러가는 1,390km의 큰 강이다. 그러므로 북한 평양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아니다.
▲지금 三國遺事에서는 압록강 즉 鴨綠水를 遼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요수는 고대로부터 隨, 唐나라 당시까지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지금의 遼河를 가리키는 江입니다. 그런데 고대의 압록강을 요수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백두산을 개마대산(개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三國志』 「魏書」 30 東夷傳: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漢書地理志에 玄菟郡의 서개마현이 있다. 唐高宗의 장희태자의 주석에 의하면 蓋馬는 현의 이름이며,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 즉 개마대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성은 지금의 왕험성이다.
지금 삼국지에서 개마대산이 펴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면, 개마산은 바다에 빠지게 되니 고구려 평양성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다. 또한 백두산도 삼국시대의 개마대산이 아닌 것이다.
▲『三國遺事」 권 第一 紀異第一 「고조선」 왕검조선: 唐의 裵矩傳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시 孤竹國인데, 周나라가 箕子를 봉하고 朝鮮이라 하였다. 漢나라가 3군으로 나누었으니, 玄菟, 樂浪, 帶方이다”라고 하였다.
▲『通典』권186 변방 東夷下 高句麗( 唐 宰相 杜佑 편찬<801>
고구려는 東晉 이후 그 왕이 평양성에 거주했는데, 즉 한나라 낙랑군의 왕험성이다. 지금 萬里長城이 동쪽으로 遼水를 끊고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다. 마자수(馬訾水)는 곧 일명 압록수라고 한다. 그 물은 원래 동북의 말갈(靺鞨)의 白山으로부터 나온다.
지금 통전에서 말하기를 만리장성(長城)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곳이 고구려 지역이라 합니다. 아래 지도는 진나라 당시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西晉郡國圖』이다.
고구려 지역이라 합니다. 아래 지도는 진나라 당시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西晉郡國圖』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위에 요수가 보이며, 요수가 만리장성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곳에 樂浪이 보인다. 通典에서 고구려의 낙랑군 안에 있는 왕험성이라고 하였으니, 지도에서 보이는 낙랑군 지역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던 위치인 것이다.
▲『三國志』 「위서」 30 동이전 東沃沮: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한서지리지에 현도군의 서개마현에 있다. 唐 高宗의 장회태자의 주석에 의하면, 蓋馬는 현의 이름이며,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 즉 개마대산은 지금 펴양성 동쪽에 있다. 평양성은 지금의 王險城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요수(遼水)가 압록강이라고 했음으로, 지금 지도에서 보이는 요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를 보면 말리장성 아래에 압록강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있습니다. 山海關도 보이고 갈석산도 보이고, 영평부도 보이고 있다.
▲『海東歷史續』에 보면 권2 地理考2 조선: 조선 純祖(1780~1834) 한진서 편찬: 조선이란 이름은 단군에서 비롯된다. 『山海經』에 의하면 동해(우리로는 西海)의 안쪽 북해(渤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한다. 곽박(郭璞)의 주석에 의하면, 조선은 지금 晉나라 당시의 낙랑현이며, 箕子를 봉한 곳이라고 한다.
▲『東史』에 이르기를 檀君은 堯임금 당시 戊辰年에 平壤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하였다.
▲『戰國策』에, 蘇秦 이야기에서 燕文侯가 말하기를, 燕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한다. 『尙書大傳』을 보면, 箕子가 조선으로 갔는데, 武王이 이를 기자를 朝鮮에 봉했다.
* 고대사TV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만 윗글은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 일제가 주도한 우리의 역사가 잘못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현재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 자신도 옳은 내용을 손자손녀에게 발설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언제인가 바로잡은 참 국사 교육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옮긴이 드림
다음 글은 고대사 TV에서 ‘고구려의 평양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우리나라의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고구려의 첫 도읍지인 卒 本은 현재 중국 랴오닝성 桓因縣 五女山城이었으며, 琉璃王이 천도한(AD 3년) 國內城은 중국 길림성 集安 일대였고, 長壽王(AD427)이 천도한 평양성은 지금 북한의 平壤지역이라고 합니다.
현재 고등학교에서 수업하고 있는 국사 교과서가 모두 아래에 나온 지도에서처럼 모두 우리나라 평양지역을 고구려의 도읍지도 정하고 수업해 오고 있다.
그러나 졸본으로 추정되는 중국 遼寧省 桓因縣 오녀산성 일대 및 國內城으로 비정되는 중국 길림성 集安일대 그리고 고구려 평양성이라고 주장하는 북한 평양 일대에서는 고구려 도읍지가 존재했었다는 명확한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에 고구려의 수도가 있었다는 그 어떤 기록도 없습니다.
그런데, 평양성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발굴 조사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발굴된 성곽이 석각에는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니라 漢城이었다는 것이다.
五女山城에는 BC1세기 유물은 없다.
그리고 國內城이라고 추정하는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에서는 2009년과 2011년 발굴조사 결과 3세기 이전의 고구려 유물이 전혀출토되지 않았다.
또한 평양으로 알고 추정하는 북한의 평양지역의 성곽에서는 고구려의 유적임은 확인하였으나 그것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는 그 어떤 유물도 출토되지 않았다.
그런데 평양으로 추정하는 성곽의 발굴조사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 쪘습니다.
발굴된 성곽의 石刻에서 이곳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아니라, 漢城이었던 것이다.
*‘丙戌年 12월 ’한성(漢城)‘ 下後部의 小兄 文達이 여기서부터 서북방향을 맡는다’.
*『周書』 「異域列傳」 高句麗:北周 正史 636년 편찬, 고구려의 도읍지는 평양성으로, 그 성은 東西가 6里이다. 그 밖의 國內城과 漢城이 있으니, 별도의 도읍지이다.
그 나라는 동서가 2천 리이며, 國都는 평양성으로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또 국내성과 한성이 있는데, 모두 도회지로서 그 나라에서는 三京이라 일컫는다.
지금 보는 것과 같이 고구려는 평양성 외에 별도로 한성이 존재하고 있었다. 한성도 또한 중요한 거점의 큰 성이었지만 그렇다고 평양성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 모두 都會地이며 도회지는 사람이 많이 살고 물류의 유통이 활발하고, 상공업 등이 발달한 번잡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인데,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 국내성이라고 추정하는 중국의 吉林省, 集安지역은 평야지대도 없으며, 물자 운송도 불가능한 첩첩산중 속에 있는 작은 시골 마을입니다. 역대왕조 조상들의 공동묘지로서의 용도 밖에 사용할 수 없으며, 절대 도회지라고 볼 수 없는 위치입니다. 따라서 고구려 유리왕 때부터 장수왕이전까지 국가를 운영했던 도읍지인 國內城이 있었던 곳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고구려의 첫 도읍지 卒本의 위치를 중국 遼寧省 환인현 오녀산성이라고 하거나, 국내성의 위치를 중국 길림성 집안 일대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인 학자 시라토리 구라키치(白島庫吉, 1865生)이었으며, 조선총독부의 이마니시 류(今西龍) 및 쓰디 소키치(津田左右吉) 등이 고구려의 평양성 및 한사군이 지금 북한의 평양지역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는 그 어떤 역사기록도 전혀 없습니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고구려의 첫 도읍지 및 평양성, 그리고 한사군의 위치 등에 대하여는 과거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역사책인 ‘朝鮮史’의 내용을 가지고 그대로 지금까지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학이라는 것은 과거 역사적 사건을 기록한 역사기록물들을 확인하는 작업인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기록일수록 역사해석의 그 기준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적 사건 당시에 기록한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역사학이란 역사적 기록과 출토된 유물을 가지고, 과거의 사실을 실증적으로 확인하는 과학입니다. 따라서 아무런 과학적 근거 없이 역사적 사건을 추측, 추정, 비정 하는 것은 역사학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역사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도읍지인 平壤도 지금의 북한 평양지역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혹시 압록강이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지금 보이는 지도에서 압록강이 표시되어 있고 그 아래 북한의 평양이 보입니다
『大明一統志』 권25 「遼東都指揮使司」에 평양성은 압록강 동쪽에 있다. 일명 왕검성이라 한다. 곧 箕子의 옛 나라이다. 城밖에 기자의 묘가 있다. 漢나라 樂浪郡의 治所이다. 東晉 安帝 義熙(405 ~ 418) 이후로 고구려 장수왕(高璉)이 거주하기 시작했다. 이 평양성은 후에 西京이라 불렀다. 元나라 때는 東寧路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이렇게 정리해볼 수 있다.
고구려 평양성 = 고조선 왕검성 = 기자조선 = 고려 서경 = 원의 동녕로, 평양은 압록강 동쪽에 있다.
지금, 『大明一統志』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했는데, 잎에서 살펴본 역사 교과서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북한 평양지역에 있다 하였으니, 역사기록에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大明一統志』를 정리하면,
1. 고구려 평양성 = 압록강 동쪽에 있다.(북한 평양 – 압록강 남쪽 = 고구려 평양이 아님
2. 고구려 평양성 = 고조선의 王劍城 = 기자조선 = 한나라 樂浪郡= 고려 西京 = 元나라 東寧路
▲ 235km = 600리,
북한 평양은 고구려 평양성이 아니다! ∵ 압록강 ↔ 평양성 = 200리 … 아니다.
『舊唐書』 권 67 「열전」 제17 이 적(李勣)
이 적: 총장(總章) 원년(668년) 이적을 요동도 행군총관으로 삼아 2만 군사를 거느리고 고구려 땅을 공격해서 鴨綠水에 이르렀다. 고구려가 그 동생을 보내와서 싸웠는데, 이적이 고구려 군사를 공격해서 패퇴시키고 2백 리를 급하게 쫓아가 평양성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패수(浿水)에 대해 알아보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및 『한국학중아연구원』에 따르면 “패수는 고조선 때에는 중국과 경계를 이루던 강을 지칭한다. 漢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요동지방의 옛 요세를 수리하고 浿水를 요동의 고조선과의 경계로 삼았다. 그 뒤 줄곧 중국 세력과 경계선이었다”고 한다.
∎ 패수(浿水) = 중국 세력과 우리민족(고조선 등)의 경계선
『史記』 권115 「朝鮮列傳」 제55 古朝鮮에 조선왕 衛滿은 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나라의 전성기로부터 眞蕃朝鮮 지역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城과 요새를 쌓았다.
秦이 燕나라를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韓이 일어나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要塞를 수리하고 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燕에 소속시켰다.
패수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학계는 패수가 청천강이라는 것이 통설이라고 한다. 우리나라 학계에서는 압록강설, 청천강설, 대동강설, 예성강설 등의 견해가 있다.
『漢書』 권95 「서남이월남조선전(西南以南越朝鮮傳)」 제65 古朝鮮에 燕王 盧綰이 漢나라에 반역하여 흉노로 들어가자 연나라 장수 衛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1천 여명을 모아 만이(蠻夷 )복장을 하고 동쪽으로 도망하여 요새(변경)를 나와 浿水를 건너 秦의 옛 공지인 上下障에 살
았다. 점차 眞蕃朝鮮의 만이와 옛 燕나라, 齊나라의 망명자를 복속시켜 거느리고 왕이 되었으며, 王險에 도읍하였다.
▲위만의 王險城은 樂浪郡 浿水 동쪽에 있다. 『漢書』 권28하 「地理志」 제8下: 요동군은 秦나라 때 설치하였다. 18개 현이 속해있다. 혐독현(險瀆縣): 응소는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다. “물이 거세게 흐르므로 험독이라 하였다”라고 한다.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권172 四夷-東夷-朝鮮: 衛滿이 왕이 되어 왕험성에 도읍하였는데, 왕험은 지명이며, 浿水의 동쪽에 있다.
▲『大明一統志』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동쪽에 있다.
앞에서 살펴본 역사교과서는 분명히 고구려 평양성이 북한의 평양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는데, 역사의 기록에서는 고구려 평양성이 압록강 남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압록강 동쪽에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며, 황당하기만 합니다.
▲결론적으로 평양성은 浿水(遼河 = 遼水)는 중국 동북부 내몽골자치구의 대흥안령 남쪽에서 발원하여 동으로 흐르다가 지린·랴오닝부근에서 랴오허강과 합치고, 동랴오허강과 합쳐서 남하하다가 훈허강과 합류하여 발해만으로 흘러가는 1,390km의 큰 강이다. 그러므로 북한 평양은 고조선의 도읍지가 아니다.
▲지금 三國遺事에서는 압록강 즉 鴨綠水를 遼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요수는 고대로부터 隨, 唐나라 당시까지 중국 하북성 일대에 있었으며, 고구려가 멸망한 이후에는 지금의 遼河를 가리키는 江입니다. 그런데 고대의 압록강을 요수라고 불렀다고 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에 의하면 삼국시대에는 백두산을 개마대산(개마산)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 『三國志』 「魏書」 30 東夷傳: 東沃沮는 고구려 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漢書地理志에 玄菟郡의 서개마현이 있다. 唐高宗의 장희태자의 주석에 의하면 蓋馬는 현의 이름이며,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 즉 개마대산은 지금 평양성 서쪽에 있다. 평양성은 지금의 왕험성이다.
지금 삼국지에서 개마대산이 펴양성의 서쪽에 있다고 합니다. 역사학자들의 주장대로 북한 평양이 고구려의 평양성이라면, 개마산은 바다에 빠지게 되니 고구려 평양성은 북한의 평양이 아니다. 또한 백두산도 삼국시대의 개마대산이 아닌 것이다.
▲『三國遺事」 권 第一 紀異第一 「고조선」 왕검조선: 唐의 裵矩傳에 이르기를 “고구려는 본시 孤竹國인데, 周나라가 箕子를 봉하고 朝鮮이라 하였다. 漢나라가 3군으로 나누었으니, 玄菟, 樂浪, 帶方이다”라고 하였다.
▲『通典』권186 변방 東夷下 高句麗( 唐 宰相 杜佑 편찬<801>
고구려는 東晉 이후 그 왕이 평양성에 거주했는데, 즉 한나라 낙랑군의 왕험성이다. 지금 萬里長城이 동쪽으로 遼水를 끊고 고구려 땅으로 들어간다. 마자수(馬訾水)는 곧 일명 압록수라고 한다. 그 물은 원래 동북의 말갈(靺鞨)의 白山으로부터 나온다.
지금 통전에서 말하기를 만리장성(長城)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안으로 들어오는데, 그곳이 고구려 지역이라 합니다. 아래 지도는 진나라 당시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西晉郡國圖』이다.
고구려 지역이라 합니다. 아래 지도는 진나라 당시의 행정구역을 표시한 『西晉郡國圖』이다. 만리장성의 동쪽 위에 요수가 보이며, 요수가 만리장성을 뚫고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곳에 樂浪이 보인다. 通典에서 고구려의 낙랑군 안에 있는 왕험성이라고 하였으니, 지도에서 보이는 낙랑군 지역이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던 위치인 것이다.
▲『三國志』 「위서」 30 동이전 東沃沮: 동옥저는 고구려 개마대산(蓋馬大山)의 동쪽에 있다. 한서지리지에 현도군의 서개마현에 있다. 唐 高宗의 장회태자의 주석에 의하면, 蓋馬는 현의 이름이며, 현도군에 속한다. 그 산 즉 개마대산은 지금 펴양성 동쪽에 있다. 평양성은 지금의 王險城이다. 그리고 『삼국유사』에서는 요수(遼水)가 압록강이라고 했음으로, 지금 지도에서 보이는 요수가 압록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보이는 大明九邊萬國人跡路程全圖를 보면 말리장성 아래에 압록강이라는 글자가 보이고 있습니다. 山海關도 보이고 갈석산도 보이고, 영평부도 보이고 있다.
▲『海東歷史續』에 보면 권2 地理考2 조선: 조선 純祖(1780~1834) 한진서 편찬: 조선이란 이름은 단군에서 비롯된다. 『山海經』에 의하면 동해(우리로는 西海)의 안쪽 북해(渤海)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한다. 곽박(郭璞)의 주석에 의하면, 조선은 지금 晉나라 당시의 낙랑현이며, 箕子를 봉한 곳이라고 한다.
▲『東史』에 이르기를 檀君은 堯임금 당시 戊辰年에 平壤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朝鮮이라 하였다.
▲『戰國策』에, 蘇秦 이야기에서 燕文侯가 말하기를, 燕나라 동쪽에 조선과 요동이 있다고 한다. 『尙書大傳』을 보면, 箕子가 조선으로 갔는데, 武王이 이를 기자를 朝鮮에 봉했다.
* 고대사TV에서 강의하는 내용을 담은 것입니다만 윗글은 전체의 1/3 정도에 불과합니다. 최종적으로 일제가 주도한 우리의 역사가 잘못되고 올바르지 못한 것을 현재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저 자신도 옳은 내용을 손자손녀에게 발설하지 못하는 심정을 이해해 주시기 바라며, 언제인가 바로잡은 참 국사 교육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합니다. 옮긴이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