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부: 1. 맥족의 돌무덤과 예족의 토광묘
1) 쌍요(雙遼)지역의 後太平)문화
최근에 동요하유역의 双遼市 東明鎭 후太平문화에서 백금보문화의 내용이 포함된 37기의 後太平古墳群이 발굴되었다. 후태평문화의 제 1기는 기원전 1780~1520년, 제2기는 기원전 1000~600년이다. 이 고분군은 모두 순수한 순수 토광묘이므로 부장유물은 청동기,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고분형식과 장례방법뿐 아니라 백금보문화의 특징적 요소인 비점기하문까지 나오고 있어 이 지역까지 백금보문화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평원지대와 구릉지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白金寶文化와 凉泉文化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서요하와 동요하가 만나는 雙遼市로 그 관내의 동요하유역에서 후태평유적 2지점, 西山灣子遺蹟, 盤山遺蹟, 孤家子遺蹟과 서요하유역의 勃山屯遺蹟 등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되었다.
2) 쌍요지역은 문화의 교차로
♦쌍요지역에서는 북쪽 눈강유역의 백금보문화, 동북쪽 제2송화강 유역의 保山문화와 西團山문화
♦서쪽의 서요하유역의 夏家店문화, 요하유역의 마성자문화와 高臺山문화,
♦서남쪽의 요동반도지역ㅇ의 雙房문화 등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유물로는 銅泡, 銅耳飾, 銅環, 銅刀, 동촉(銅鏃) 등이 나오고 있다.
3) 맥족의 고분문화
♦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어 金銀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고 하여 고구려가 ‘積石爲封’하는 積石塚이라는 돌무덤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後漢書』 동아열전 고구려조에 “句麗는 일명 貊이라고 부른다. 별종이 있는데, 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小水貊이라고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貊弓이 그것이다“라고 하여 고구려가 맥족이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도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돌무덤들은 기원전 6200~기원전5200년 興隆窪文化의 임서현 白音長汗 유적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기원전 4500~기원전3000년 紅山文化의 우하량유적에서는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이 대형 계단식석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후 요동반도 남단의 기원전 20세기~기원전 11세기의 雙砣子文化의 적석총과 기원전 11세기~기원전 3세기의 서단산문화의 석관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더나아가 고구려, 맥국(지금 춘천), 백제 등까지 나타나고 있다.
♦ 『舊唐書』 권63, 裴矩열전에 “배구가 주청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孤竹國으로, 周나라가 箕子를 朝鮮으로 삼았다. 漢나라 때에는 三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晉나라는 遼東으로 통설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高夷”이라고도 불리웠던 원시 고구려족이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의 전신이며 그 기층을 이루고 있는 卒本扶餘는 ‘句麗’라고 부르던 맥족으로, 이들은 바로 졸본부여를 세운 東明의 고향이던 요서의 槀離國지역에서 이동해 온 것이다. 그 외의 민족은 高句麗, 小水貊, 梁貊뿐만 아니라 하납ㄴ도 춘천의 麥麴, 百濟까지 퍼져있으며 모두 적석층을 비롯한 돌무덤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이 나타나게 되는데, 요녕지역은 기원전 15세기 기림과 한반도 지역은 기원전 10세기에 고인돌이 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맥족은 석관묘, 적석총, 고인돌 등의 돌무덤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해 말 씀 올림니다. : 오순제 교수의 부여사 강좌를 3회로써 끝내려 합니다. 김종국 올림
1) 쌍요(雙遼)지역의 後太平)문화
최근에 동요하유역의 双遼市 東明鎭 후太平문화에서 백금보문화의 내용이 포함된 37기의 後太平古墳群이 발굴되었다. 후태평문화의 제 1기는 기원전 1780~1520년, 제2기는 기원전 1000~600년이다. 이 고분군은 모두 순수한 순수 토광묘이므로 부장유물은 청동기, 토기, 석기, 골각기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고분형식과 장례방법뿐 아니라 백금보문화의 특징적 요소인 비점기하문까지 나오고 있어 이 지역까지 백금보문화가 확장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평원지대와 구릉지가 교차하는 지역으로 白金寶文化와 凉泉文化의 요소가 동시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은 서요하와 동요하가 만나는 雙遼市로 그 관내의 동요하유역에서 후태평유적 2지점, 西山灣子遺蹟, 盤山遺蹟, 孤家子遺蹟과 서요하유역의 勃山屯遺蹟 등에서 청동기시대 유적이 분포되었다.
2) 쌍요지역은 문화의 교차로
♦쌍요지역에서는 북쪽 눈강유역의 백금보문화, 동북쪽 제2송화강 유역의 保山문화와 西團山문화
♦서쪽의 서요하유역의 夏家店문화, 요하유역의 마성자문화와 高臺山문화,
♦서남쪽의 요동반도지역ㅇ의 雙房문화 등의 영향을 받은 청동기시대 유물이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유물로는 銅泡, 銅耳飾, 銅環, 銅刀, 동촉(銅鏃) 등이 나오고 있다.
3) 맥족의 고분문화
♦ 『三國志』 동이전 고구려조에 “장례를 성대하게 지내어 金銀을 모두 장례에 소비하며, 돌을 쌓아서 봉분을 만들고 소나무, 잣나무를 그 주위에 벌려 심는다”고 하여 고구려가 ‘積石爲封’하는 積石塚이라는 돌무덤을 사용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後漢書』 동아열전 고구려조에 “句麗는 일명 貊이라고 부른다. 별종이 있는데, 小水에 의지하여 사는 까닭에 이를 小水貊이라고 부른다. 좋은 활이 생산되니 이른바 貊弓이 그것이다“라고 하여 고구려가 맥족이였음을 증명해주고 있다.
♦『南齊書』 동남이열전, 고구려조에서도 고구려를 ‘맥족’이라고 칭하고 있다.
이러한 돌무덤들은 기원전 6200~기원전5200년 興隆窪文化의 임서현 白音長汗 유적에서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기원전 4500~기원전3000년 紅山文化의 우하량유적에서는 고구려의 장군총과 같이 대형 계단식석총들이 나타나고 있다.
그 후 요동반도 남단의 기원전 20세기~기원전 11세기의 雙砣子文化의 적석총과 기원전 11세기~기원전 3세기의 서단산문화의 석관묘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더나아가 고구려, 맥국(지금 춘천), 백제 등까지 나타나고 있다.
♦ 『舊唐書』 권63, 裴矩열전에 “배구가 주청하기를 ‘고구려는 본래 孤竹國으로, 周나라가 箕子를 朝鮮으로 삼았다. 漢나라 때에는 三郡으로 나누어 설치하였으며, 晉나라는 遼東으로 통설하였다”고 한다. 이들을 “高夷”이라고도 불리웠던 원시 고구려족이다.
♦이것을 보면 고구려의 전신이며 그 기층을 이루고 있는 卒本扶餘는 ‘句麗’라고 부르던 맥족으로, 이들은 바로 졸본부여를 세운 東明의 고향이던 요서의 槀離國지역에서 이동해 온 것이다. 그 외의 민족은 高句麗, 小水貊, 梁貊뿐만 아니라 하납ㄴ도 춘천의 麥麴, 百濟까지 퍼져있으며 모두 적석층을 비롯한 돌무덤을 사용하고 있다.
♦특히 만주와 한반도에서는 고인돌이 나타나게 되는데, 요녕지역은 기원전 15세기 기림과 한반도 지역은 기원전 10세기에 고인돌이 축조되고 있다. 그러므로 맥족은 석관묘, 적석총, 고인돌 등의 돌무덤을 선호하였음을 알 수 있다.
***양해 말 씀 올림니다. : 오순제 교수의 부여사 강좌를 3회로써 끝내려 합니다. 김종국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