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正熙 대통령과의 마지막 5년
10·26 아침 “李군, 어제 입었던 그 양복과 구두 가져다주게”
글 : 이광형 박정희 전 대통령 비서
⊙ 朴 대통령, 1979년 2월 초부터 옛 문서 正書 지시, “타이핑 연습 많이 해두게”… 물러날 생각한 듯
⊙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다가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이니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
⊙ 초소 근무자에게 “발이 시리지 않으냐?”며 군화를 벗게 하고 양말까지 직접 확인
⊙ 집무실 전화기가 오래되어 교체하자 “아직 쓸 수 있는데 왜 바꿨나?”
⊙ “에어컨은 外貨를 벌어들이는 곳에서 사용하는 것”…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더운 날 땀을 훔치며 부채질
⊙ 여름날 창문으로 파리 날아들면 직접 파리채 들고 파리 잡아
이광형(李光炯·73) 전 (주)EG 부회장은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의 ‘마지막 부관(副官)’이다.
육사(陸士) 27기 출신으로 1975년 경호실에 들어가 1979년 2월까지 수행경호관으로 근무했다. 1978년 9월 육군 소령으로 예편하고, 이듬해 2월부터는 제1부속실 행정관으로 박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다.
이 시절 청와대 내에서는 그를 ‘이(李) 부관’이라고 불렀다.
10·26사태 후에는 최규하 대통령 비서실의 정무수석비서관실·민정수석비서관실에서 근무했다.
이후 KBS로 자리를 옮겨 사장비서실장·경영관리실장 등을 지냈다.
1993년 삼양산업(현 (주)EG) 상무로 박정희 대통령의 영식(令息)인 박지만 현 (주)EG 회장을 돕기 시작, (주)EG 대표이사 사장, 부회장 등을 역임했다.
오래전부터 주위 사람들로부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일들을 기록으로 남기라는 권유를 받아온 이광형 전 부회장은 우선 10·26사태 당일부터 박정희 대통령 국장(國葬)까지 있었던 일들과 1979년 봄에서 가을 사이에 있었던 박정희 대통령에 얽힌 일화들을 글로 써서 《월간조선》에 보내왔다. 한자를 덧붙이고 약물을 손본 것을 제외하면, 글의 구성과 내용, 중간 제목 등은 전부 필자가 보내온 글 그대로이다.
1979년 4월 12일 청와대 정원에서 벚꽃을 구경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부속실 직원들. 왼쪽부터 이광형 부관, 부속실 직원 이혜란, 박정희 대통령.
1970년대에 TV에서 김일성(金日成)에게 열광하는 북한 군중을 보면서 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그때 박정희(朴正熙) 대통령 각하를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그런 심정으로 모시고 있었으니까! 나는 그 당시 이 어른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목숨을 바칠 각오로 일했고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보릿고개도 넘기기 어려웠던 헐벗고 못 살던 우리나라를 이만큼 잘살게 만든 조국근대화, 민족중흥(民族中興)의 길에 벽돌 한 장이라도 놓을 수 있다면 자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었다.
소탈하고 정감 넘치던 모습과 자나 깨나 잘사는 나라 만드는 일에 자신을 바치며 희생했던 모습은 잊을 수가 없다. 자립경제·자주국방을 이루기 위해 일부의 비판을 받으면서도 강력하게 추진하면서 물러날 준비를 하고 계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국장(國葬)이 끝나고 집무실에 들어갔을 때 걸려 있던 달력이 ‘10월 26일’에 정지되어 있는 걸 보며 숨이 멎는 것 같았었다. 매일 아침 각하께서 직접 한 장씩 뜯어내던 일력(日曆)이 주인 없이 멈춰버린 것이었다. 42년이 지났지만 내 손을 흠뻑 적셨던 그날 각하의 붉은 피를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나는 내 손을 보면 그때가 떠오르기도 한다.
1부 그날 -
1979년 10월 26일 그날 아침
이광형 부관은 대통령 집무실 앞 前室에서 근무했다. 1979년 4월 4일 찍은 사진이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침 6시가 되자 침대 머리맡에 있는 인터폰이 울렸다.
“네, 이광형입니다”라고 인터폰을 받자 “운동하러 가자”라는 각하의 음성이 들려왔다.
나는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현관 앞에서 기다리니 각하께서 운동복 차림으로 내려오셨다. 나는 각하와 나란히 실내수영장에 있는 배드민턴장으로 가볍게 달려갔다.
석유파동 이후부터 각하께서는 골프를 나가면 경호원들이 많이 나오니 경비가 많이 든다며 배드민턴을 치기 시작하셨다. 어느 화창한 날 집무실 옆에 있는 잔디밭에 나가셔서 드라이버로 연습 스윙을 하시다가 “오늘 같은 날 골프 나가면 좋겠다” 하시더니 이내 “골프 나가면 경호차들이 많이 움직이니 기름도 많이 들겠다. 관두자”라고 혼잣말을 하실 때도 있었다.
처음에는 본관 옆 잔디밭에서 배드민턴을 치시다가 하루는 “수영장에 물을 넣어두고 관리하려면 돈도 많이 들 텐데 물을 빼고 그 위에 마루를 깔고 배드민턴장을 만들어보게”라고 말씀을 하셔서 이왕이면 시합도 가능할 정도의 규격에 맞춰서 배드민턴장을 만들게 되었다. (각하께서는 나 같은 아랫사람들에게도 반말을 쓰지 않으시고 ‘하게’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다.)
그날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약 40분간 각하와 1대 1로 운동을 하였다. 각하께서는 볼을 좌측으로 보냈다가 다시 우측으로 보냈다가 하였는데 30대 초반인 내가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는 모습에 웃으시면서 재미있어하셨다. 쉴 새 없이 치고 나면 온몸이 땀으로 젖게 되지만 운동을 마치고 가볍게 본관으로 돌아오는 기분은 상쾌하기 그지없었다.
그날 입은 운동복도 지난번 운동하러 나오실 때 각하께서 들고 나오셔서 “이거 내가 몇 번 입던 건데 이군한테 맞을지 몰라” 하시면서 슬그머니 건네주신 운동복이었다. 뿐만 아니라 가끔씩 티셔츠나 점퍼, 전기면도기, 볼펜 등을 직접 주실 때도 많았다.
각하께서 2층으로 올라가시고 나는 1층에 있는 부속실로 들어와서 곧바로 샤워를 하고 머리 손질을 하고 나면 주방에서 아침 식사를 가져다줬다. 식사를 마치고 용모와 복장을 단정히 하고 일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인터폰이 왔다. “이군, 어제 입었던 그 양복과 구두 가져다주게”라고 하셔서 다려놓은 양복과 닦아둔 구두를 들고 2층으로 올라가니 각하께서는 바지를 입지 않은 채 거울 앞에서 와이셔츠를 입고 넥타이를 매고 계셨다.
기분 좋은 표정으로 “어, 어, 이리 가져오게” 하셨고 그 양복을 입으시는 것을 보고 나는 내려왔다. 그 양복은 얼마 전에 각하께서 양복 하의를 들고 오셔서 손가락 한 마디 반 정도를 늘려달라고 하셔서 세기양복점에 보내서 늘려온 양복인데, 이유는 주치의가 코 수술 후 금연(禁煙)을 건의하여 담배를 끊으시고 나서 체중이 조금 늘었기 때문이다. 구두는 금강제화에서 구입한 것인데 얼마 전에 뒤축을 갈아드린 것이었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나는 8시40분에 집무실의 상태를 점검하고 전실(前室)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9시 정각에 각하께서는 연설문, 안경 등을 넣은 소형 가방을 들고 콧노래를 흥얼거리시며 집무실로 들어오셨다.
김계원 비서실장의 보고를 받으시고 중요한 일을 처리하신 후에 ‘삽교천 준공식’ 참석을 위해 집무실을 나설 때도 “삽교천에 다녀올게” 하시면서 흐뭇한 표정을 지으셨다. 농촌 지역, 특히 새마을 현장을 가실 때는 늘 그러셨듯이 각하의 기분은 최상의 상태임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오후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은 박정희 대통령의 마지막 공식행사가 되었다.
오후 2시 반경 헬리콥터 소리가 들리고 조금 지나서 각하께서 매우 흡족한 표정으로 집무실로 들어오셨다. 오후에는 별다른 일정 없이 집무실에서 수석비서관들의 보고를 받으시고 지시하거나 결재(決裁)를 하시며 보내셨다.
오후 6시경 차지철(車智澈) 경호실장이 전실에 도착하였고 곧이어 각하께서 나오셔서 보시던 책과 서류, 안경을 주시며 이거 2층 서재에 갖다 두라고 하시며 “근혜 인터폰 안 받던데 경호실장하고 저녁 먹고 올 테니 기다리지 말고 저녁 먹으라고 하게”라고 하시며 나가셨다.
가장 길었던 밤
10·26사태 궁정동 만찬 현장 검증 장면.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하는 모습이다.
나는 각하를 배웅하고 난 후 바로 집무실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전실 문도 잠근 후 열쇠는 부속실에 보관하였다. 각하께서 주신 책과 서류, 안경을 2층 서재에 가져다 놓고 큰 영애(令愛)에게 인터폰으로 “각하께서 저녁 식사하러 나가시면서 기다리지 말고 식사하라고 하셨습니다”라고 전했다. 그러고 간소복으로 갈아입고 잔무 처리를 하였다.
저녁 식사를 마친 후 TV를 켰다. KBS TV에서 보도 특집으로 ‘삽교천 준공식’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마침 그날 본관 경호 근무를 하고 있던 육사 동기생인 이정섭 경호계장이 와서 함께 보고 있었다.
오후 7시40분쯤에 본관 경호 데스크에서 인터폰이 왔다. “이정섭 계장님, 거기 계십니까?”라고 하여 인터폰을 건네주자 “뭐야? 뭐라고?” 하더니 나에게 “저기 12초소 쪽에서 총소리 같은 게 났는데 빨리 가서 알아보고 연락해줄게” 하며 뛰어나갔다.
12초소는 궁정동 부근에 있는 경찰과 군인들이 외곽 경비를 담당하던 초소인데 근무 중 가끔씩 오발(誤發)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었다.
약 10분 후 이정섭 경호계장이 전투복 차림으로 와서 “조금 이상한 거 같아”라고 하여 “무슨 일이야?” 하니 “아직 모르겠어. 확인 중이야. 일단 비상 경호 체제로 강화시켰어”라고 하고 급히 돌아갔다.
나는 은근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어찌 된 일인가?’
혼자 있는 부속실에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는 서둘러 TV를 끄고 본관 경호 데스크로 갔다. 교대 근무를 하고 있던 경호원 5명이 전투복 차림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하고 물으니 “아직 모릅니다. 확인 중입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데모가 심해져서 경계를 강화시키는 건가?’라는 생각을 하며 부속실로 돌아와서 밀린 일을 계속했지만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시계는 오후 8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대한 일이 일어난 것 같았다. 왠지 모르게 불안감이 몰려왔다. ‘부마(釜馬)사태로 나라 안이 복잡한데 혹시 청와대 인근에서 시위가 일어난 건가?’ 등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오후 8시20분경에 경호 데스크로부터 다시 인터폰이 왔다. “김계원(金桂元) 비서실장이 들어왔습니다” 하고는 속삭이듯이 “그런데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오셨어요” 하는 것이었다. (나중에 확인한 바에 의하면 김 실장이 총에 맞은 각하를 국군 서울지구 병원에 옮겨 놓은 뒤 택시를 타고 삼청동 쪽 입구를 통해 청와대로 돌아왔던 것이었다.)
잠시 후 비서실장이 본관에 있는 비서실장실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왔다는 연락이 왔다.
‘비서실장이 왜 이 밤에 와이셔츠 차림으로 들어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본관 2층에 있는 비서실장실에 가보기로 했다.
비서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실장실 문은 굳게 닫혀 있고 정기옥 비서관(의전비서실 소속)이 당직 비서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정기옥 비서관이 “비서실장이 최규하(崔圭夏) 총리, 국방장관 등 몇 분을 불러서 회의를 하고 있다”라고 말해주었다. 안보 관계 장관들을 불러 모으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들어가서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정기옥 비서관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자기도 모른다고 했다.
얼마쯤 시간이 지나자 최광수(崔侊洙) 의전수석비서관 등 수석비서관들이 속속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도착하는 대로 비서실 벽면에 놓여 있는 의자에 나란히 앉았다. 하지만 그들도 무슨 영문인지 몰라 답답해했다.
나는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혹시 가족들이 인터폰으로 찾지 않을까 조바심도 났다. 그러면서 정기옥 비서관의 책상 주위를 왔다 갔다 하다가 정 비서관과 눈이 마주쳤다. 정 비서관이 메모지 위에다 ‘쿠데타’라고 쓰더니 이내 후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강하게 흔들며 “아니, 아니, 아니 몰라, 몰라, 몰라” 하면서 자신이 쓴 메모를 볼펜으로 새까맣게 덧칠을 해 지워버렸다.
내가 “무슨 말이오?” 하니 “아, 아무것도 아니야!” 하며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어이가 없었고 궁금증을 풀기 위해 갔다가 오히려 불안감만 키운 채 부속실로 돌아왔다.
다시 경호 데스크로 가봤지만 거기도 역시 아는 게 없었다. 오직 비서실장실 방안에 모인 사람들만 아는 것 같았고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간은 흐르고 확실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점점 초조해지고 불안감이 몰려왔다. 나는 알아볼 수 있는 곳은 다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차지철 경호실장도 정인형 경호처장도 안재송 부처장도 찾았지만 연결되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속이 타들어갔다. ‘왜 각하께서는 들어오시지 않을까?’ 시간이 지날수록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이제는 각하 걱정이 앞서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2층, 비서실장실로 뛰어올라갔다. 그러나 정기옥 비서관과 수석비서관들만 의혹과 불안에 찬 눈동자를 굴리며 앉아 있을 뿐 김계원 실장과 최규하 총리, 장관들은 모두 나가버리고 없었다.
나는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 옆에 앉아서 나직하게 물어봤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라고 했더니 “영애님들은 지금 어디 계시냐?”고 하셨다. “지금 방에 계십니다”라고 했더니 “아무 연락 없었지?”라고 하여 “네”라고 대답했다.
“수석비서관님! 각하께서 아직도 안 들어오시는데 무슨 일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았더니 “응, 조금 늦으실 거야. 만약 영애분들이 물으시면 곧 들어오실 거라고 말씀드려”라고 했다.
나는 다시 부속실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부속실로 돌아온 나는 점점 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아무도 말해주지 않으니 답답할 뿐이었다.
혼자 감당하기가 불안해져서 박학봉 비서관을 찾았으나 연락이 되질 않았다. 본관 관리인인 우인철 관리관을 전화해서 좀 나오라고 했다.
나중에 부속실 출신인 전석영 총무비서관이 비상연락을 받고 부속실에 들어왔다. 박학봉 비서관이 자정이 다 되어서 비상연락을 받고 들어왔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씀드렸지만 알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계는 밤 12시30분을 넘어서고 있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속이 타들어가서 다시 경호 데스크에 가보았다.
무전기를 스피커에 연결해놓아서 긴급 보고되는 소리들로 인해 소란스럽고 분주했지만 긴박감만 더해질 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 무전기 스피커를 통해 “경호처장 차가 경부고속도로 톨게이트를 지나서 달려가고 있다”고 하였다. 이 밖에도 확인되지 않은 각종 루머성(性) 보고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경호실장도 경호처장도 연락이 두절된 상태에서 청와대 본관에서 노심초사하며 소식을 기다리던 나는 적막강산 같은 처절함을 체험하며 생애 가장 긴 밤을 보내고 있었다.
10월 27일 새벽 2시 무렵에 김계원 비서실장이 청와대로 다시 들어왔다.
와이셔츠 차림이었던 김 실장은 어느새 양복 차림으로 바뀌어 있었다. 침묵으로 일관하던 김 실장이 처음으로 실장 방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석비서관들을 불러 “각하께서 돌아가셨다”고 밝혔다. 그리고 부속실의 박학봉 비서관과 나를 불러 이 사실을 알려주었다. 순간 나는 온몸을 부르르 떨었고, 김 실장은 얼이 반쯤은 나간 표정을 지었다.
다시 “각하께서 돌아가셨다. 궁정동에서 만찬을 하다가 김재규(金載圭)하고 차지철이 다투다가 김재규가 잘못 쏜 총탄에 각하께서 맞으셨다”라고 말하고 더 이상의 아무 설명도 없었다.
나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자지러졌다. ‘그게 무슨 소리냐?’ 각하께 그런 일이 일어나다니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았다.
그 시각 큰 영애와 작은 영애는 이미 각자의 방에서 잠들어 있었고 영식(令息) 박지만 생도는 육군사관학교에 있었다.
김 실장은 “가족들에게 연락해라”고 지시했다. 그때 누군가가 “중대 사안이니 비서실장이 직접 보고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했고 곧이어 부속실에서 전석영 비서관이 큰 영애 방으로 인터폰을 했다. “급히 보고드릴 일이 있으니 옷을 입으시고 복도로 좀 나와주십시오”라고 보고했다. 김 실장과 전석영 비서관, 박학봉 비서관과 나는 2층에 있는 큰 영애 방 앞 복도에 올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잠시 후 큰 영애가 나오셨다. 김 실장이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보고하니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라고 했다. (그때까지 큰 영애는 아버지가 침실에서 주무시는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김 실장이 다시 “김재규 부장이 차지철 실장과 싸우다가 잘못 쏜 총탄에 맞아 돌아가셨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으로 망연자실(茫然自失)해하던 큰 영애가 잠시 후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세요?”라고 했고
“국군서울지구병원에 계십니다”라고 하자 “그럼 모셔와야 하지 않습니까?”라고 해 “그렇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 후 큰 영애는 작은 영애를 깨워서 알렸고 모두들 바쁘게 움직였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라 경황이 없었다. 어떻게 모셔오고 어디에 모셔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일단 소접견실을 임시 빈소(殯所)로 하기로 하고 작은 영애와 전석영 비서관과 경호원들은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가서 각하를 모셔오기로 했다.
작은 영애는 각하 침실로 가서 큰 영애가 준비해준 양복과 속옷을 챙겨 보자기에 싸서 품에 안고 전석영 비서관과 함께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갔다.
큰 영애는 안쪽에서 필요한 것들을 챙기고 나는 임시 빈소를 마련하는 일을 맡았다.
소접견실에 각하를 눕힐 곳을 마련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행사시에 사용하던 정사각형 탁자와 시트를 사용하기로 했다. 비상연락을 받고 들어온 본관 근무 직원들을 불러서 피아노방에 있던 사각탁자를 소접견실로 옮겨서 필요한 만큼 연결해 붙이고 그 위에 하얀 시트를 깔고 구김살이 펴지게 분무기로 물을 뿌리니 이내 팽팽하게 펴져서 하얀 제단(祭壇)이 완성됐다.
그리고 본관 지하실에 가서 평소 제사 지낼 때 쓰던 병풍과 향로, 향, 제기(祭器)들을 옮겨와서 제단 앞에 병풍을 치고 분향(焚香)할 수 있는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현관 밖으로 나가서 국화 화분 두 개를 옮겨와서 제단 양옆에 두었다. 그리고 부속실에 걸려 있는 각하 사진 액자를 가져와서 검은 리본을 붙이고 제단 앞에 세워놓았다.
임시 빈소를 마련하고 나니 새벽 3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바로 그때 현관 앞에서 차량 소리가 들려와 나가 보았다.
각하께서 군용(軍用) 앰뷸런스에 실려 돌아오셨다. 군용 들것에 실려 하차된 각하께서 경호원들에 의해 임시 빈소의 제단으로 옮겨졌다. 나는 경호원들과 함께 조금 전에 마련한 제단 위에 각하를 눕혔다. (머리가 접견실 입구 쪽을 향하게 하였다.)
1979년 10월 30일 박정희 대통령 빈소의 박근혜 큰 영애. 박정희 대통령의 관을 어루만지며 한동안 자리를 뜨지 못했다 큰 영애와 작은 영애가 처음으로 분향했다. 나는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가슴이 후벼 파는 듯 아팠고 눈물이 그치지 않고 흘러내렸다.
절간처럼 조용하던 청와대는 일순 통곡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한 사람이 흐느껴 울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왔고 경호원들은 엉엉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나는 병풍 뒤에 눕혀진 각하의 얼굴을 보고 눈물을 흘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었다. 살아계실 때처럼 평온한 모습을 하고 계셨다. 다만 왼쪽 콧등 부위가 약간 부어 있었다. 울면서 각하의 얼굴도 만져보고 손도 만져보았으나 총에 맞은 흔적은 발견할 수가 없었다. 새벽 3시 반이 지나고 있었다. 상주(喪主)가 되어야 할 영식은 육사 생도 신분이었다. 나는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지체 없이 박지만 생도를 불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화기를 드는 순간 비로소 대통령 서거(逝去) 사실에 대한 위기감을 느꼈다. ‘이 사실을 북한이 알게 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 보안 유지를 해야겠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나는 육사 교장 백석주(白石柱) 중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득이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박지만 생도를 급히 찾으시니 교장님 혼자만 아시고 박지만 생도를 깨워서 교장 차로 빨리 청와대로 보내주세요”라고 했다.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청와대 정문 초소에서 박지만 생도를 태운 차량이 정문을 통과했다는 연락이 왔다. 나는 현관으로 나가서 박지만 생도를 맞이했다. 현관에는 이른 새벽부터 비보(悲報)를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청와대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차에서 내린 박지만 생도는 눈을 둥그렇게 뜨고 어안이 벙벙한 채 “아니 왜 이래요?”라고 물었다. 나는 눈물을 훔치며 나지막이 말했다.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 이쪽으로 오십시오.” 박지만 생도는 순간 비틀거렸다. 나는 박지만 생도를 임시 빈소로 모셨다. 임시 빈소에서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아버지 영정(影幀) 앞에서 분향하며 통곡하는 모습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보는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파고 있었다.가까운 친인척들이 하나둘씩 비보를 받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각하의 누님이 현관으로 들어오더니 엉금엉금 기다시피 임시 빈소까지 와서는 “정희야! 이게 우짠 일이고!” 하시면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보던 친인척들이 함께 울면서 임시 빈소는 울음바다가 되었다.
國葬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의 운구 행렬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이 오열했다.
10월 27일 아침 김계원 실장이 임시 빈소에 나타났다. 분향을 마친 김 실장에게 기자들이 몰려와 질문을 쏟아냈다.
이날 오전부터 국무위원들과 정치인들이 오기 시작했다. 오전에 분향을 마친 최규하 총리와 김종필(金鍾泌) 전 총리 등 국무위원과 정치인들은 대식당에 모여 장례 절차를 의논하고 있었다. 친인척들은 부속실에 모여 울면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후 장례는 국장(國葬)으로 결정되고 9일장으로 치르기로 하였다고 가족과 친인척들에게 전달되었다. 나는 슬픈 가운데 바빠지기 시작했다. 각 방에 있는 손님 접대로 동분서주(東奔西走)해야 했고 무엇보다 비탄에 젖어계신 각하 가족들을 모시는 데 정성을 다해야 했다. 그리고 장례 준비를 위해 쉴 새 없이 뛰어다녀야 했다.
오후 2시경에 국장 기간 동안 시신의 방부(防腐) 처리를 위해 대통령 주치의 민헌기 박사(서울대 외과과장)가 전문의 2명과 함께 청와대로 들어왔다.
빈소 앞은 친인척과 가족이 지키고 있는 가운데 민 박사와 전문의 두 명과 나는 병풍 뒤에서 방부 처리를 위해 민첩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방부 처리를 위해 시트를 벗기고 각하의 손과 발을 만져보니 살아계신 것처럼 부드러웠고 얼굴도 너무나 평온해서 마치 잠들어 계신 것 같았다.
민 박사가 나에게 큰 대야에 물을 떠 오라고 했다. 그러고 각하의 옷을 벗겨달라고 했다. 내가 각하의 옷을 벗기기 위해 상체를 들어 올리려고 허리 아래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물컹한 것이 느껴졌다. 얼른 손을 빼내어 보니 붉은 피였다. 20여 시간이 지났는데도 각하의 오른쪽 옆구리 뒤편쪽에 핏덩이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순간 내 손에 흥건히 묻은 각하의 피를 보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며 숨이 가빠왔다.
나는 옷을 벗기고 피를 깨끗이 닦았다. 온몸의 피를 다 닦고 나서 보니 각하의 몸을 뚫고 들어간 총상(銃傷)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오른쪽 쇄골(鎖骨) 아래로 약 10cm 부근에 총탄이 들어간 자국이 보였다. 살점에 덮여 마치 작은 상처가 아문 듯이 보였다. 그리고 등 뒤로 총탄이 빠져나간 자리는 앞부분의 총상 위치보다 훨씬 아래쪽에 나 있었다. 뒷부분의 상처 난 구멍은 꽤 크게 보였다. 비로소 많은 피가 흐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각하의 온몸을 정성스레 닦으면서 살펴보니 오른쪽 귀 윗부분에도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총탄이 얼굴의 왼쪽 콧등과 광대뼈 사이에 박혀 있었다. 그래서 콧등 부위가 조금 부어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발견한 주치의 민 박사가 총알을 제거하는 문제를 잠시 고민하다가 가족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서 몸에 칼을 대는 것을 포기하고 얼굴에 박힌 총알을 그대로 둔 채 방부 처리를 하기로 했다.
내가 각하의 온몸을 깨끗이 닦은 후 의사들이 온몸을 소독했다. 그리고 전문의들이 방부 처리액(液)이 담긴 5갤런짜리 통을 가져와 스탠드에 걸고 각하의 허벅지 안쪽을 절개하고 정맥에 주삿바늘을 꽂자 방부액이 몸 안으로 주입되기 시작했다. 이 작업은 오후 내내 계속되었다. 그동안 나는 의사들이 요구하는 일들을 해결해주어야 했다.
오후 11시경 방부 처리가 끝나고 의사들이 절개된 곳을 봉합(縫合)했다.
그로부터 30분 뒤인 오후 11시30분경에 각하에게 수의(壽衣)를 입혔다.
대식당에서 장례 준비를 하던 각료들과 정치인들이 국장준비위원회를 발족시켰다. 국장준비위원장에 최규하 국무총리, 집행위원장에 신현확(申鉉碻) 부총리, 의전 담당에 박동진(朴東鎭) 외무부 장관, 재정 담당에 김원기(金元基) 재무부 장관, 홍보 담당에 김성진(金聖鎭) 문화공보부 장관, 묘지를 담당하는 치산(治山)은 노재현(盧載鉉) 국방부 장관이 맡았다. 국장준비위원회는 장례에 필요한 수의와 제반용품을 준비해주었다.
그리고 입관(入棺) 시각도 정해서 알려주었다. 수의를 입힌 후 즉시 입관하되 오후 11시30분이 길하다고 하여 정해졌다. 가족들은 국장준비위원회에서 결정한 대로 따랐다.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國葬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리는 유족들. 오른쪽부터 박근혜 큰 영애, 박지만 생도, 박근영 작은 영애.
소접견실에 차려진 임시 빈소는 국장 절차에 따라 넓은 대접견실로 옮겨 정식 빈소를 차리기로 결정됐다. 이 결정은 입관식 후 즉시 이행됐다. 빈소를 대접견실로 완전히 옮긴 시각은 10월 28일 02시 정각. 어전 용어로 재궁(齋宮)이라 불리는 정식 빈소가 차려졌다.
그리고 방부 처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패 방지를 위해 뒤편에 안치된 관 주위를 나무판자로 울타리를 만들고 관과 판자 사이에 드라이아이스를 채웠다.
그리고 병풍으로 가린 뒤 제단을 만들었다. 이때부터 대접견실에서 조문객을 맞게 되었다. 장지로 출발할 때까지 9일장 동안 매일 다섯 차례씩 제사를 지냈다. 매일 새벽, 아침, 점심, 저녁, 밤 시각을 정해 다섯 차례 제사를 지냈다. 이때는 가족과 친인척들이 다 모였다.
그리고 청와대 정문 우측에 위치한 비서실 건물 앞에 분향대를 크게 설치해 일반인도 분향할 수 있도록 했다. 친인척들과 장례를 돕는 청와대 직원들의 울음소리는 그칠 줄 모르고 제단의 각하 사진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 있었다. 나는 9일장을 지내는 내내 눈물을 줄줄 흘리며 분주하게 심부름을 하고 각종 수발을 들었다. 그때 현관에서 누군가 나를 찾았다. 고개를 돌려보니 “여기 구두 왔어요” 하며 전해주었다.
바로 그날 아침, 내가 닦아드린 각하의 그 구두였다. 와이셔츠 차림에 넥타이를 매시면서 양복바지와 구두를 기다리시던 각하께서 “어, 어. 이리 가져오게” 하시며 그날 아침 그렇게 기분 좋게 소풍 가는 소년처럼 밝은 표정을 지으시며 나가셨는데… 바로 그 신발이 돌아온 것이었다. 나는 부속실로 돌아온 그 구두를 끌어안고 주저앉아 오열(嗚咽)하기 시작했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제할 수가 없어 통곡하며 서럽게 울었다. 주위에 있던 친인척들이 ‘왜 저러지?’ 하며 의아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구두에 얽힌 사연을 모르니 갑자기 오열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박학봉 비서관이 “여러 사람 앞에서 왜 이래!” 하면서 “진정하라”고 했고, 친인척 중 누군가가 내 옆으로 와서 “오죽 서러우면 그러겠나” 하면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11월 3일 오전 9시 청와대 본관 앞에서 발인(發靷)을 했다. 발인을 마치고 운구(運柩) 행렬은 청와대를 뒤로한 채 중앙청 광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이날 오전 10시에 중앙청 광장에서 영결식(永訣式)을 가진 뒤 오후 2시에 동작동 국립묘지에서 안장식(安葬式)을 하였다. 나는 검은 리무진을 뒤따르며 오열하는 가족의 소리를 들으며 청와대에 남아 뒤처리를 하였다.
국장을 마치고 나는 박정희 대통령의 가족과 이사 준비를 시작했다. 11월 21일 오전 10시30분 큰 영애와 작은 영애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신당동 사저(私邸)로 출발하였다.
2부 그해 봄과 여름
서류 정리
1979년 2월 초에 각하께서 나에게 특별한 일을 시키셨다. 각하께서 평소에 일하시는 장소는 집무실 책상 우측에 있는 직사각형 테이블이었다. 그 자리에서 보고도 받으시고 회의도 많이 하셨다. 각하께서 앉으시는 의자 뒤편에 붙박이로 캐비닛이 설치되어 있었다. 하루는 각하께서 그 캐비닛 문을 열고 오래된 서류 한 뭉치를 주시면서 한문을 섞어서 글씨도 좀 크게 펜글씨로 다시 쓰라고 하셨다.
나는 정성을 들여 정자(正字)로 새 용지에 옮겨 쓰기 시작했다. 오후 퇴근 시각이 가까워 오자 각하께서 전실로 나오셔서 “이군,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내일 다시 내줄게. 내일 또 하게” 하시면서 서류를 가지고 들어가서 다시 그 캐비닛에 넣고 잠그셨다.
서류에는 5·16혁명 시절부터 매우 중요한 내용들이 실려 있었다. 매일 아침 캐비닛을 열고 하루 분량만큼의 서류를 내어주시고 오후 퇴근 무렵에는 다시 가져가셔서 캐비닛에 넣는 일이 반복되었다. 약 2주 정도 걸려서 마칠 수 있었다.
타이핑 연습
어느 날 각하께서 전실로 나오셔서 “이군, 타이핑 연습을 많이 해두게” 하셨다. 나는 속으로 ‘아! 나중에 회고록 쓰실 때 구술하시면 받아서 타이핑하게 하시려는구나’라고 생각하며 틈나는 대로 열심히 타이핑 연습을 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부속실에서 타이핑 연습을 하고 있을 때 각하께서 들어오셔서 “이군. 이 자리에서 시간에 쫓겨 지내다 보면 금방 지나가니까 틈나는 대로 책도 많이 읽고 공부 열심히 하게”라고 하시며 손을 잡고 어깨를 두드리시며 격려해주셨다.
각하께서 잡은 손을 놓으실 때 내 손에 담배 한 개 정도 크기의 도르르 말린 것이 있어서 놀라서 쳐다보았더니 “살림에 보태 쓰게”라고 하시고는 웃으시면서 2층으로 올라가셨다. 펴 보았더니 십만원권 수표 몇 장이 있었다. 눈물이 핑 돌며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이 자리에서 근무하면 많은 유혹의 손길이 뻗쳐올 수도 있으나 한눈팔지 말고 주어진 임무에만 충실하자고.
명절이 다가오면 각하께서는 본관과 주위에서 근무하고 있는 사람들을 파악해서 명단을 적어오라고 하셨다. 본관 지하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보일러실과 기계실 직원, 그리고 청소원, 주방근무자, 운전기사 등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하고 있는 직원들을 잊지 않으시고 명절 떡값(우리는 하사금이라고 했다)을 봉투에 넣어서 직접 챙겨 주셨다.
어느 추운 날 경내 산책을 하시다가 경비 근무하는 초소에 들어가셔서 “춥지 않으냐?”고 물어보시며 바닥에 손을 대 확인하시고 “발이 시리지 않으냐?”고 물어보시자 근무자가 “괜찮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어디 보자” 하시며 군화를 벗게 하시고 양말까지 직접 확인하신 일도 있었다.
집무실 정리 정돈
군부대 시찰 중 내무반에서 취침 중인 병사들을 살펴보는 박정희 대통령. 군 지휘관 뒤가 이광형 경호관. 그해 봄부터 각하께서는 여유가 생기면 직접 집무실을 정리하시는 시간을 가졌다. 조금이라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집무실서가(書架)에 꽂혀 있는 책들을 정리하셨다. 한 편에 책들을 수북이 쌓아놓고 버릴 것과 따로 보관할 책들을 분류하셨다. 가을 즈음에는 집무실 서가 정리가 거의 다 끝나 있었다.
각하께서 쓰시던 모든 것은 언제나 반듯하게 정리 정돈이 잘 되어 있었다. 집무실 책상 위에 있는 필기구, 서류 등도 제자리에 질서 정연하게 수시로 직접 정돈하시곤 하셨다.
책상 위나 회의용 탁자 위나 소파의 탁자 위에도 필기구와 메모지를 언제나 스스로 정돈하셔서 정위치에 반듯하게 두셨다.
의자에 앉아 일하실 때도 허리를 반듯하게 하여 일을 하셨고 한 번도 조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자동차나 기차, 비행기를 타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헬리콥터를 타실 때는 언제나 쌍안경으로 아래를 살펴보시다가 낯선 것이나 이상한 것을 발견하시면 주위 상공을 몇 바퀴 돌게 하시며 세세히 살피시고 물어보시거나 지시를 하셨다.
매달 정기적으로 월례(月例)경제동향보고회의와 수출진흥확대회의가 외부에서 개최되었는데 그곳에 참석하셨을 때도 자리에 앉자마자 메모지와 필기구를 반듯하게 다시 정리하곤 하셨다. 심지어 서빙하는 여직원이 커피 잔을 가져다 놓으면 손잡이가 오른쪽으로 위치하도록 다시 정돈하시기도 했다.
회의 시에는 보고를 받으시면서 일일이 메모하셨고 참석자들의 의견을 끝까지 경청하신 후에 마지막에 지시를 하셨는데 나중에 비서실에서 대통령 지시사항을 정리해서 해당 부처에 내려보내 참고하게 했다.
南北작전상황도
한번은 각하께서 부르시더니 ‘남북(南北)작전상황도’의 커튼을 벗기고 남한과 북한의 군(軍)부대 배치도를 보여주시며 (내가 육사 출신인 걸 아시고) “이군 이거 볼 줄 알지?”라고 하셔서 “네”라고 대답했더니 서종철(徐鐘喆) 안보특별보좌관에게 연락하여 변경된 것을 반영하여 최신 상황으로 다시 기재하게 하라고 분부하셨다. 나는 즉시 서종철 안보특별보좌관에게 연락해 신속히 고쳐놓았다.
카터 대통령 訪韓(1979년 6월 29일~7월 1일)
1979년 7월 10일 한국을 떠나기에 앞서 청와대를 예방한 카터 미국 대통령 일가족을 환송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박근혜 큰 영애. 뒤에 차지철 경호실장, 최광수 의전수석비서관의 모습이 보인다. 그해 6월 29일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다. 카터 대통령은 당선 후 거듭해 한국의 인권 문제와 주한미군(駐韓美軍) 철수 의지를 밝혀왔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선 카터 대통령을 영접하는 일에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각하께서 환영행사에 다녀오신 후 다음 날 청와대에서 있을 한미정상회담 준비 상황을 직접 살펴보시고 이것저것 지시를 하셨다.
회담 장소인 소접견실을 둘러보시고 의전비서실에 몇 가지 지시하시고 회담 장소 앞에 있는 화장실을 둘러보시더니 여자화장실이 별도로 없는 것을 아시고 그곳을 여자 전용 화장실로 꾸미고 스킨·로션 등 여성용 화장품도 비치해놓으라고 하셨다. 카터 대통령 영부인과 영애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한 세심한 배려였다.
그리고 집무실로 들어오셔서 카터 대통령과 단독 정상회담을 하기 위한 집기들의 자리 배치를 일일이 지시하시고 탁자와 의자들을 옮겨서 재(再)배치를 했는데 집기가 있던 자리의 카펫이 움푹 패 자국이 난 것을 보시더니 “이군, 주방에 가서 물 한 주전자 담아오게” 하셔서 얼른 가서 주전자에 물을 담아왔더니 자국 난 자리에 물을 부어보라고 하셔서 그렇게 하고 한참 지나니 자국 난 자리가 감쪽같이 편편해졌다. 나는 속으로 ‘이렇게 현장에서 체험적 학습을 통해 또 한 수 배웠구나’라고 생각하며 각하의 지혜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되었다.
욕실 버튼
부속실은 수시로 발생하는 모든 일을 감당해야 하므로 24시간 대기 상태로 빈틈없이 업무를 수행해야 했다. 2층의 각하 침실 옆에는 각하 전용 욕실이 있었다. 욕조 위의 천장에서 전선줄을 내려뜨려 조그만 버튼을 만들어놓았다. 이 버튼은 부속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
각하께서 욕조에서 어떤 생각이 떠오르면 버튼을 누르시는데 부저가 울리면 나는 즉시 메모 준비를 해서 욕실로 달려갔다.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욕조에서 “이군, 내가 말하는 것을 메모해서 2층 내 서재에 갖다 두게” 하셨다. 나는 메모한 것을 2층 서재에 가져다 두고 부속실로 내려오곤 했다.
가습기 소동
하루는 밤에 각하께서 인터폰으로 좀 올라오라고 하셔서 2층 침실로 갔더니 “이군, 가습기가 안 나와” 하시면서 가습기를 이리저리 만지고 계셨다. 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이리저리 조작해보아도 작동이 되지 않았다. 땀이 나기 시작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각하, 다른 것으로 바꿔 오겠습니다” 하고 1층 부속실로 내려와서 부속실에 켜져 있는 가습기를 가지고 가서 설치해드리고 내려왔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각하 방에서 가져온 가습기를 부속실에 와서 다시 켜보았더니 잘 나오는 것이었다. 기계도 각하 앞에서는 긴장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비름밥
1979년 4월 12일 벚꽃이 만발한 청와대 정원에 선 필자.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찍어준 사진이다. 그 당시 청와대 본관의 점심은 주로 우동이었다. 쌀이 부족할 때라 정부시책으로 분식 장려 운동을 하고 있을 때였는데 청와대가 솔선수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각하께서 비름밥 이야기를 하셔서 알아보았더니 국민소득이 높아지면서 비름나물이 시장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종묘시장에 가서 비름나물의 씨앗을 구해오게 해 본관 뒤편 약수터로 올라가는 산비탈에 소규모의 텃밭을 만들었다. 이내 씨를 뿌리고 가꾸었더니 싹이 트고 비름나물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텃밭에서 가꾼 비름나물을 캐다가 주방에서 비름나물 비빔밥을 만들 수 있었다. 밥 위에 비름나물을 얹고 참기름 한 방울과 고추장을 넣어서 비비면 비름밥이 되었다. 나도 어렸을 때 자주 먹었었는데 못 살고 배고플 때 시골에서는 늘 먹던 음식이었다.
각하께서 이 비름밥을 드시고 옛날을 회상하시면서 좋아하셨다.
勤儉節約과 국산품 애용
각하께서 지방 출장을 가시게 되면 부속실은 여러 가지 챙겨야 할 일로 분주해졌다. 평상시에 할 수 없었던 집무실과 침실 등의 수리와 보수 작업을 이때 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곳곳이 낡아서 비가 새는 곳도 있었다. 지붕 수리와 커튼 교체, 카펫 세탁, 창문 수리 등을 이 기간에 해야 했고 각하와 가족분들에게 필요한 것들도 챙겨야 했다.
각하께서 주로 사용하는 필기구는 모나미 플러스펜이었다. 결재를 하실 때는 검은색 플러스펜, 밑줄을 그으실 때는 파란색 플러스펜, 고쳐야 할 부분에는 붉은색 플러스펜을 사용하셨다.
그러나 친필(親筆) 서신을 쓰실 때는 휴대하고 계시는 만년필을 사용하셨다. 친필 서신은 엷은 색 노란 봉투에 넣어서 봉한 후에 장관들이나 어렵게 살고 있는 옛 동지 등에게 보내셨다. 장관들에게 보내는 서신은 부속실의 연락을 받고 장관 비서관이 직접 와서 가져갔고, 옛 동지 등은 담당 비서관을 보내서 전달하였다(장관들에게 보내는 친서는 주로 경고성 메시지와 참고하라는 내용들이었고, 어렵게 살고 있는 옛 동지들에게는 격려금과 함께 위로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집무실 전화기가 오래되어서 잡음이 많이 나기 때문에 안 계실 때 새로 나온 국산품 전화기로 교체하였는데 각하께서 출장에서 귀저(歸邸)하신 후에 전화기가 바뀐 것을 아시고 “아직도 쓸 수 있는데 왜 바꿨나”라고 하셔서 새 전화기를 반납하고 다시 쓰던 전화기로 되돌려놓은 적도 있었다.
각하 침실 옆에 있는 화장실은 혼자 사용하시는데도 물 절약을 위해 변기 뒤 물이 담겨 있는 통에 벽돌 2장을 넣으실 정도로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한번은 주말에 비서실장·경호실장·정보부장 수석비서관들을 불러서 배드민턴 시합을 하였다. 복식(複式)조를 짜서 시합을 하고 나는 심판을 보았다.
김재규 부장이 서브를 넣는데 라켓을 휘둘렀는데도 셔틀콕은 땅바닥에 떨어졌다. 몇 번을 그렇게 하니 각하께서 웃으시면서 “이군, 김 부장과 옆으로 나가서 연습 좀 시켜드리게”라고 말씀하셔서 내가 경기장 옆 공간에서 서브하는 방법과 스윙 연습을 개인 지도한 후에 시합에 임한 일도 있었다.
시합이 끝나고 오찬 준비가 되어 있는 상춘재(常春齋)로 함께 이동하였다. 각하께서 상춘재로 들어오시다가 그곳에 있는 밥솥을 보시고 살펴보시더니 “우리 국산 밥솥도 이렇게 잘 만드네” 하시며 매우 기뻐하셨다.
매월 실시하는 월례경제동향보고회의나 수출진흥확대회의 후에 전시되어 있는 국산 제품을 보실 때도 매우 흡족해하시며 기뻐하시곤 하셨다.
두 차례 만찬
대식당에서는 매달 두 차례의 만찬이 이루어졌는데 한 번은 비서실장을 포함하여 수석비서관들과 하고, 또 한 번은 특별보좌관들과 하였다(특히 장관급 경력의 연배 있는 특별보좌관들과의 만찬 시에는 자유롭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여서 시중에 오가는 모든 일을 가감 없이 자유롭게 다 말하는 것 같았다). 이때는 막걸리를 준비하라고 하셨다. 나는 하던 대로 원당에 있는 원당막걸리주점에 부속실 기사를 보내 사 오게 했다.
어느 날 만찬이 한창 무르익었을 때 만찬장에서 서빙하던 웨이터(본관 주방 근무자)가 막걸리 한 사발을 가지고 내 방에 들어왔다.
“각하께서 직접 따르셔서 갖다주라고 해서 가져온 하사주(下賜酒)니까 얼른 마셔요”라고 해서 나는 사발째 받아서 마셨는데 머리가 핑 돌았다. 누렇고 뻑뻑한 원당 막걸리는 꽤 독했다.
웨이터는 또 조그만 접시에 담긴 안주도 각하께서 주신 거니 먹으라고 했다. 안주는 청와대 주방에서 개발한 멸치에 밀가루를 약간 발라서 튀긴 것이었다.
부채와 파리채
그해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그러나 각하께서는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틀지 못하게 하셨다. 에어컨은 외화(外貨)를 벌어들이는 곳에서 사용하는 것이지 일반 사무실에서 에어컨을 켜는 것은 에너지 낭비라고 생각하셨다.
하루는 숨이 콱콱 막힐 정도로 더웠다. 땀을 훔치며 부채질을 하시는 각하의 모습을 보며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심지어 각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 같았다.
렇다고 에어컨을 틀 수도 없고 해서 관리관과 기술자를 불러서 상의해보았다. 나는 “집무실의 공기가 너무 후덥지근해서 숨쉬기가 어려울 정도인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하고 물었다. 그랬더니 “에어컨을 틀지 않아도 환기통을 통해 집무실의 더운 공기를 빼내고 대신 시원한 공기를 불어넣으면 어느 정도 해소된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라도 해보자고 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부속실에서 근무하고 있는데 큰 영애께서 “부속실 앞 복도로 좀 나오세요”라고 인터폰이 왔다.
잠시 후 복도로 나갔더니 큰 영애께서 오셔서 “오늘 집무실에 에어컨을 켜셨어요? 아버지께서 걱정하세요”라고 했다.
자초지종을 설명드렸더니 큰 영애는 “앞으로는 그런 것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라고 했다.
무더운 한여름에도 에어컨을 켜지 못하니 창문을 열어서 바람이 들어오게 했는데 어쩌다 파리가 들어오면 각하께서는 직접 파리채를 들고 파리를 잡기도 하셨다.
일국의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직접 부채와 파리채를 사용하는 것을 보통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