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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4. 지세(地勢) 이용이 승패를 좌우함./ 5. 성을 굳게 지키는 묘법(妙法).
23/11/03 19:54:29 金 鍾國 조회 1227
 
4. 지세(地勢) 이용이 승패를 좌우함.
昔鼂錯上言兵事曰「用兵臨戰 合刃之急有三. 一曰 得地形 二曰 卒服習 三曰 器用利. 三者兵之大要 而勝負之所決 爲將者不可不知也.」倭奴習於攻戰 而器械精利 古無鳥銃 而今有之 其致遠之力 命中之巧 倍蓰於弓矢.
我若相遇於平原廣野 兩陣相對 以法交戰 則敵之極難. 蓋弓矢之技 不過百步 而鳥銃能及於數百步 來如風雹 其不能當必矣.
然先擇地形 得其山阨險阻林木茂密處 散伏射手 使賊不見其形 而左右俱發 則彼雖有鳥銃槍刀 皆無所施 而可大勝也.
今擧一事爲證 壬辰賊入京城 逐日分掠於城外 至園陵亦不保 有高陽人進士李櫓 稍解操弓有膽氣. 一日與同伴二人 各持弓矢 入昌敬陵 不意賊衆大出滿谷中 櫓等無以爲計 奔入於藤蘿蒙密叢中 賊來索之 徘徊窺覘 櫓等從其内輒射之 皆應弦而倒 又遷其處 往來倏忽*5) 賊尤莫能測.
自是所至 見叢薄 則遠遠走避 不敢近 二陵得全.
以此見之 地形得失 成敗隨之. 方賊在尙州 申砬⋅李鎰等 若知用此 先於兎遷鳥嶺三數十里間 伏射手數千人 使賊莫測多少 則可以制敵. 乃以烏合之卒不鍊之兵 棄其險塞 相角於平地 宜其敗也.
余於兵機 備言之 今又特記之 以爲後戒.

옛날에 조조(鼂錯)*1)가 병사(兵事)에 관하여 진언하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싸움터에 임하여 적과 싸우는 데 중요한 일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첫째로 지형(地形 : 地勢)을 잘 이용하는 것이요, 둘째로는 군사들이 명령을 잘 복종하고 익히는 것이요, 셋째로는 무기는 좋은 것과 예리한 것을 쓰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전쟁을 하는 데 가장 요긴한 것이고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라, 장수된 사람은 알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왜놈들은 공격하는 싸움에도 익숙하고 무기도 아주 예리하였으며, 옛날에는 조총(鳥銃)이 없었으나 지금은 그것이 있어서 그 멀리 가는 위력과 명중시키는 재주가 화살보다도 몇 갑절이나 되었다.

우리가 만약 평원의 넓은 들판에서 서로 만나 둘이 맞대어 진을 치고 병법에 따라 교전하였다면 그를 대적하기가 아주 어려웠을 것이다. 이는 대개 화살의 위력은 백 보(步)를 넘지 못하지만, 조총의 능력은 능히 수백 보에 이르고 그것도 폭풍과 우박처럼 쏟아지니, 그것을 당해 낼 수 없는 것은 뻔한 이치이다. 그러나 적보다 먼저 지형을 잘 가려서 그 산의 험하고 숲이 빽빽이 우거진 곳을 자리잡아 가지고 활 잘 쏘는 군사를 풀어 매복시켜 적으로 하여금 그 형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는 좌우에서 함께 활을 쏘게 한다면, 저들이 비록 조총(鳥銃)과 창칼이 있다 하더라도 다 쓸 수가 없게 되어 가히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

이제 그 한 가지 일을 들어 증명을 한다면, 임진년(1592)에 倭敵이 서울에 들어와서 날마다 성 밖에 흩어져 노략질을 하여 원릉(園陵)*2)도 역시 보전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렀다. 고양(高陽) 사람 진사(進士) 이노(李櫓)는 활을 좀 쏠 줄 알고 담력도 있었다. 하루는 동료 두 사람과 각각 활과 화살을 가지고 창릉⋅경릉[昌⋅敬陵]으로 들어갔는데, 뜻밖에 倭敵의 무리들이 크게 나와 산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노 등은 어찌할 계교가 없어서 등나무⋅칡덩굴이 빽빽이 우거진 숲 속으로 달려 들어갔더니, 倭敵들이 쫓아와서 찾느라고 돌아다니며 기웃거리므로, 이노 등은 그 속에서 문득 활을 쏘니 倭敵들은 화살을 맞고 거꾸러졌다. 그들은 또 그 장소를 옮겨 왔다갔다 하며 여기 번뜩 저기 번뜩 하니 倭敵들은 더욱 헤아릴 수가 없었다.

이로부터 倭敵들은 이르는 곳마다 우거진 숲만 보면 멀리멀리 도망하여 피하며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여 두 능[昌⋅敬陵]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점으로 보면 지세(地勢)를 잘 이용하고 못 이용하는 데 따라 성공과 실패가 따르게 된다고 하겠다. 그 당시 倭敵이 상주(尙州)에 있을 때 신립(申砬)⋅이일(李鎰) 등이 만약 이런 계교를 쓸 줄 알아서 먼저 토천(兎遷)*3)과 조령(鳥嶺)의 수 삼십 리 사이에 활 잘 쏘는 사람 수천 명을 매복시키고 倭敵으로 하여금 군사의 수가 많고 적은 것을 헤아릴 수 없게 만들어 놓았더라면 가히 적을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인데, 오합지졸(烏合之卒)*4) 곧 훈련하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그 험한 요새를 버리고는 평탄한 곳에서 서로 승부를 다투었으니, 그렇게 패한 것은 당연한 이치였으리라. 나는 전쟁의 기밀에 대하여 자세히 말하면서 지금 또 이를 특별히 기록하는 것은 뒷날의 경계를 삼으려는 까닭이다.

*1)조조(鼂錯) : 한(漢)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 때의 정치가. 신불해(申不害)⋅상앙(商鞅)의 형명학(刑名學)을 배워 문제 때 태자가령(太子家令)이 되고, 경제 때 벼슬은 어사대부(御史大夫)가 되어 더욱 중용되었다.
*2)원릉(園陵) : 능묘(陵墓) 임금의 무덤. 능(陵). 원격(園格)의 무덤과 능격(陵格)의 무덤.
*3)토천(兎遷) : 경상북도 문경(聞慶) 남쪽에 있으며,일명 곶갑천(串岬遷)이라고도 한다.
*4)오합지졸(烏合之卒) : 기율도 없이 되는대로 모여진 군세(軍勢)를 말함.
*5)숙홀(倏忽) : 갑자기. 재빨리. 극히 짧은 시간. 숙(倏) : 개가 재빨리 내닫음
 
5. 성을 굳게 지키는 묘법(妙法).
城者 禦暴保民之所 當以堅固爲主 古人言城制 皆曰雉 所謂千雉百雉者是也.
余平時讀書鹵莽*5) 不知雉爲何物 毎以垜當之. 嘗疑垜但千百 則其城至小 不能容衆 將何以哉? 及變後 始得戚繼光紀效新書 讀之 乃知雉非垜 卽今之所謂曲城⋅甕城者也.
蓋城無曲城⋅甕城 則雖人守一垜 而垜間立盾 以遮外面矢石 賊之來傅城下者 不可見而禦之也.
紀效新書 每五十垜置一雉 外出二三丈 二雉間相去五十垜 一雉各占地二十五垛 矢力方盛 左右顧眄 便於發射 敵無緣來附城下矣.
壬辰秋 余久留安州 念賊方在平壤 若一朝 西下 則行在前面 無一遮障處 不量其力 欲修安州城 而守之.
重陽曰 偶出晴[淸]川江上 顧視州城 默坐深念者久之 忽思得一策 城外當從形勢 別築凸城如雉制 而空其中 使容人 前面及左右 鑿出砲穴 可從中放砲 上建敵樓 樓相距千步以上 大砲中藏鐵丸如鳥卵者數斗 賊多集城外 砲丸從兩處交發 無論人馬 雖金石無不靡碎.
若是則他堞雖無守兵 只使數十人守砲樓 而敵不敢近矣. 此實守城妙法 其制雖倣於雉 而功勝於雉萬萬矣. 蓋千步之內 敵旣不敢近 則所謂雲梯⋅衝車者 皆不得用.
此事余偶思得之 其時卽啓聞行在 後於經席 屢發之. 又欲使人 見其必可用. 丙申春 京城東水口門外 擇地聚石 作之未成 而異論紛起 廢而不修.
後日如有遠慮者 勿以人廢言 修擧此制 則其於備禦之道 所益不少矣.

성(城)은 포악한 도둑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견고함을 으뜸으로 한다. 옛날 사람들은 성(城) 쌓는 법을 말할 때 다들 성윗담[치(雉)]을 말하였는데, 이른바 천치(千雉)니 백치(百雉)니 하는 것이 곧 이것이다. 나는 평상시에 책을 읽는 것이 거칠었으므로 성윗담[雉]이 어떠한 물건인지를 알지 못하고, 늘 살받이터[垜]*1)가 이에 해당하는 줄로 알아서 일찍이 의심하기를, "살받이터가 다만 천 개나 백 개면 그 성(城)이 지극히 작아서 능히 여러 사람을 수용할 수가 없겠으니 장차 어떻게 할까?" 하였더니, 倭亂의 변고가 일어난 뒤에 비로소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서 읽어 보고는, 곧 성윗담[雉]이란 살받이터[垜]가 아니고, 곧 지금의 이른바 곡성(曲城)*2)과 옹성(甕城)*3)이라는 것임을 알았다.

대개 성(城)에 곡성과 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이 하나의 살받이터 사이에 방패를 세우고 외면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는다 하더라도 적들이 와서 성 밑에 바짝 달라붙는 놈은 보고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효신서(紀效新書)≫에는 50개의 살받이터마다 하나의 성윗담을 만들어 놓되 밖으로 두세 길[丈] 나오게 하고, 두 성윗담 사이는 서로 50개의 살받이터를 떨어지게 만들고, 하나의 성윗담이 25개의 살받이터를 점령하게 하면 화살의 위력이 바야흐로 강성하고 좌우를 마음대로 돌아보면서 활을 쏘기에 편리하므로 적군이 와서 성 밑에 붙어 의지할 수가 없는 것이다.

임진년(1592) 가을에 나는 오랫동안 안주(安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생각하기를, 倭敵이 지금 평양성(平壤城)에 있으니, 만약 하루 아침에 이쪽으로 내려온다면 행재소(行在所)의 전면에서는 한 곳도 가로 막힐 곳이 없는데도 그 힘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안주성(安州城)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9월 9일[重陽日]에 우연히 청천강(晴[淸]川江)가로 나가서 주성(州城)을 돌아보며, 가만히 앉아서 깊이 생각한지 오랜 동안에 문득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었는데, 이것은 성 밖에 마땅히 형세를 따라서 따로 뾰족한 성[凸城]을 성윗담 제도[雉制]처럼 쌓고 그 속을 텅 비워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전면과 좌우에 대포구멍을 뚫어 내어 그 속으로부터 대포를 쏠 수 있게 만들고, 그 위에 대적할 다락을 세우되 다락과 다락은 서로 천 보(步) 이상 떨어지게 만들고,

대포 속에는 새알 같은 쇠탄환을 몇 말[斗] 넣어 두었다가 倭敵들이 성 밖에 많이 모여들 때에 대포 탄환을 두 곳에서 번갈아 쏘면 사람과 말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쇠와 돌이라도 다 부서져 가루가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른 성가퀴[堞]*4)에는 비록 지키는 군사가 없더라도 다만 수십명으로 하여금 포루(砲樓)를 지키게 하여도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실로 성(城)을 지키는 묘법(妙法)으로서 그 제도는 비록 성윗담을 본떴다 하더라도 그 공효(功效 : 공을 드린 보람)는 성윗담 보다도 나을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대개 천 보의 거리 안에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된다면 이른바 운제(雲梯 : 높은 사닥다리)⋅충거(衝車 : 병거(兵車=전쟁 때 쓰는 수레. 전차의 이름. 옆에서 적을 들이치는 병거.)와 같은 따위는 다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우연히 생각해 낼 수 있었는데, 그때 이를 즉시 행재소(行在所)에 아뢰고, 뒤에 경연(經筵) 자리에서도 여러 번 이 말을 내었었다. 또 사람을 시켜 그것이 반드시 쓸 만한 것임을 보이려 하여 병신년[宣祖 29年,1596] 봄에 서울 동쪽 수구문(水口門) 밖에 한 곳을 가려 돌을 모아 이것을 만들다가 완성하지도 못하였는데, 이론(異論)이 어지러이 일어나서 그만두고 만들지 않았다. 뒷날에 만약 원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버리지 말고 이런 제도를 들어 마련한다면, 그것이 적을 막는 방법으로서 이로운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1)타(垜) : 垛와 동자. 살받이 타. 살받이. 과녁의 앞뒤와 양쪽에 화살이 날아와서 꽂히도록 쌓은 것. 장벽(牆壁). 전쟁에서 화살과 돌을 막는 벽.
*2)곡성(曲城) : 성문을 밖으로 둘러 가려서 곱게 쌓은 성벽. 굽이지게 쌓은 성벽. 곱은 성.
*3)옹성(甕城) : 큰 성문을 지키기 위하여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철옹산성(鐵甕山城)의 준말. 큰 성문 밖의 작은 성. 원형(圓形)이나 방형(方形)으로 성문 밖에 부설하여 성문을 보호하고 성을 튼튼하게 지키기 위하여 만들었다. 둘러싸여 있는 모양이 매우 굳고 튼튼함.
*4)첩(堞) : 성카퀴 첩. 성가퀴. 성벽 위에 쌓은 나지막한 담.
*5)노무(노망鹵莽) : ①노무 ; 거침. 조잡함. ②노망 : ⑴소금기가 많은 땅과 잡초가 덮인 들. ⑵분명하지 않은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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