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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14.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음./15. 왜적(倭敵)이 남원성(南原城)을 함락시킴.
23/10/01 20:53:11 金 鍾國 조회 1437
14. 이순신(李舜臣)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음.
復起李舜臣 爲三道水軍統制使.
閑山敗報至 朝野震駭.
上引見備邊諸臣 問之 群臣惶惑 不知所對. 慶林君金命元 兵曹判書李恒福 從容啓曰「此元均之罪 惟當起李舜臣爲統制使耳.」從之.
時權慄聞元均敗 已使李舜臣往收餘兵 賊方衝斥. 舜臣與軍官一人 自慶尙道入全羅道 晝夜潛行間關 達珍島 欲收兵禦賊.

다시 이순신(李舜臣)을 기용하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삼았다. 한산도(閑山島)가 왜적(倭敵)에게 패하였다는 보고가 이르자, 조정[朝]⋅민간[野]이 다 크게 놀라 어찌할 줄 몰랐다. 임금께서는 비변사(備邊司)의 여러 신하들을 불러 보시고 이에 대한 대책을 물으셨으나 여러 신하들은 너무도 당황해서 대답할 바를 알지 못하였다. 경림군(慶林君) 김명원(金命元)과 병조판서(兵曹判書) 이항복(李恒福)은 조용히 아뢰기를, "이것(수군이 한산도에서 패망한 것)은 원균(元均)의 죄이오니 마땅히 이순신(李舜臣)을 기용하여 통제사(統制使)로 삼을 방도뿐 입니다." 하니, 임금께서는 그 뜻을 따르셨다.

이때 권율(權慄)은 원균이 패하였다는 말을 듣고 벌써 이순신으로 하여금 가서 남아 있는 군사를 거두어 뒷일을 수습하게 하였는데, 왜적들 은 바야흐로 기세를 올리며 덤벼들었다. 이순신은 군관(軍官) 한 사람과 더불어 경상도(慶尙道)로부터 전라도(全羅道)로 들어갔는데, 밤낮을 가리지 않고 험악한 길을 더듬어 달려가 진도(珍島)에 이르러 군사를 거두어 倭敵을 막으려고 하였다.
 
15. 왜적(倭敵)이 남원성(南原城)을 함락시킴.
倭兵陷南原府. 天將楊元走還. 全羅兵使李福男⋅南原府使任鉉⋅助防將金敬老⋅光陽縣監李春元⋅唐將接伴使鄭期遠等皆死. 有軍器寺破陣軍十二人 隨楊元入南原 皆被兵死.
獨有金孝義者得脫. 爲余道城陷事甚詳.
楊總兵旣至南原 增築城一丈許 城外羊馬牆 多穿炮穴 城門安大炮數三坐 鑿深濠塹一二丈.
閑山旣敗 賊從水陸而至 報甚急 城中洶洶 人民逃散. 燭總兵所領遼東馬軍三千 在城內.
總兵檄召全羅兵使李福男同守 福男遷延不至 連發夜不收催之 不得已乃至 而所率纔數百. 光陽縣監李春元⋅助防將金敬老等繼至.
八月十三日 倭先鋒百餘 到城下放鳥銃. 頃刻而止 皆散伏田畝間 三三五五作隊 旣去復來. 城上人以勝字小炮應之. 倭大陣在遠 出遊兵交戰 踈行迭出 故炮發不能中. 而守城卒 往往中賊丸斃.
旣而倭到城下 叫城上人求與語 總兵使家丁一人 挾通事往倭營. 以倭書來 乃杓戰書也.
十四日 倭環城三面結陣 以銃炮迭攻如前日.
先是城南門外 民家稠密 賊臨至 總兵使焚之 而石牆土壁猶在 賊來依牆壁間自蔽 放丸多中城上人.
十五日 望見 倭衆刈城外雜草及水田中稻禾 作大束無數 積牆壁間 城中不測.
時遊擊將軍陣愚衷 領三千兵在全州 南原軍日望來援 以久不至 軍心益懼.
是日晩 守堞軍往往交頭耳語 準備馬鞍 有欲遁色. 夜一更 聞倭陣中囂聲大起 略相應和 有運物狀 而一面衆炮向城亂放. 飛丸集城上如雨雹 城上人縮頸不敢外窺.
經一二時 囂聲止 草束已平濠. 又堆積羊馬牆內外 頃刻與城齊 衆倭蹂躪*8)登城. 已聞城中大亂 云倭入城矣.
孝義初撥守南門外羊馬牆 慌忙入城 城上已無人 但見城內處處火起. 走至北門 唐軍悉騎欲出門 門堅閉不可易開 馬足如束 街路塡塞.
旣而門開 軍馬爭門而出. 倭兵在城外 圍匝數三重 各守要路 奮長刀亂斫*9)之 唐軍俛首受刃. 適月明得脫者無幾.
總兵與家丁數人 馳馬突出 僅以身免. 或云「倭知爲總兵 故使逸去也.」
孝義與同伴一人出門 一人遇賊死 孝義跳入水田伏草中 待倭收兵 乃逸云.
蓋楊乃遼將 徒知禦虜 不知禦倭 以至於敗.
亦知平地之城守之甚難 詳記孝義之言 使後之守禦者 知所戒云.
南原旣陷 而全州以北瓦解 不可爲矣.
後楊元竟以此伏罪 傳首徇示.

왜적(倭敵)이 남원부(南原府)를 함락시켰다. 이 싸움에 명(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도망하여 달아나고,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1)⋅남원부사(南原府使) 임현(任絃)*2)⋅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당장접반사(唐將接伴使) 정기원(鄭期遠)*3) 등은 다 전사하였다. 군기시(軍器寺)의 파진군(破陣軍) 12명도 양원(楊元)을 따라 남원(南原)에 들어갔다가 다 적병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다만 김효의(金孝義)라는 자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서 나에게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된 사실을 아주 자세하게 말하였다.
양총병(楊總兵 : 楊元)이 남원에 이르러서는 성을 한길 너머나 더 올려 쌓고 성 밖의 양마장(羊馬牆)에는 포(砲)를 쏠 구멍을 많이 뚫어 놓고, 성문에는 대포(大砲) 두세 대를 설치하고 깊은 참호(塹壕)를 한두 길이나 파놓았다.

한산도(閑山島)가 패한 뒤에 倭敵은 수륙(水陸)으로부터 남원성으로 달려와서 사태가 매우 급박하다는 보고가 들어오니, 성 안은 슬렁거리 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흩어지고, 다만 양총병이 거느린 요동마군(遼東馬軍) 3천 명만이 성 안에 있었다. 양총병은 격문으로 전라병사(全羅兵使) 이복남(李福男)을 불러 함께 지키자고 하였으나, 이복남은 날짜를 지연시키면서 이르지 않으므로 연달아 야불수(夜不收)*4)를 내어 오기를 재촉하니 그는 마지못하여 왔는데 거느리고 온 군사는 겨우 수백 명이었다. 광양현감(光陽縣監) 이춘원(李春元)과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등도 뒤를 이어 이르렀다.

8월 13일에 倭敵의 선봉 백여 명이 남원성에 이르러 조총(鳥銃)을 쏘다가 잠깐 뒤에 그만두고 다 흩어져 밭고랑 사이에 엎드려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갔다왔다하며 공격하였다. 성 위에 있는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砲)*5)로 이에 응사하였는데,倭敵의 대부대는 멀리 진을 치고 있으면서 유격병[遊兵]을 내어 교전하게 하고, 드문드문 줄을 지어 나와 싸우는 까닭으로 포를 쏴도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왕왕 倭敵이 쏜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조금 뒤에 倭敵이 성 밑에 이르러 성 위 사람에게 소리를 질러 함께 의논하기를 요구하므로, 양총병은 가정(家丁) 한 사람을 시켜 통사(通事)를 데리고 倭敵의 병영(兵營)으로 갔다가 倭敵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곧 싸움을 다짐하는 글[約戰書]이었다. 8월 14일에 倭敵은 남원성 을 3면으로 둘러싸 진을 치고는 총포를 번갈아 쏘며 전날처럼 공격하여 왔다. 이보다 먼저 성의 남문 밖에는 민가(民家)가 조밀하게 있었는 데, 倭敵들이 달려들 무렵에 양총병은 이를 불태워 버리게 하였으나 돌담이나 흙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倭敵들이 몰려와서는 이 담과 벽 속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는 총을 쏘아 성 위에 있는 사람이 많이 맞았다.

8월 15일에 바라보니, 倭敵들은 성 밖의 잡초와 논의 벼를 베어 큰 다발을 수없이 만들어 담벽 사이에 쌓아 놓았으나 성 안에서는 그것이 무슨 목적에서인지 헤아리지를 못하였다. 이때 明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진우충(陳愚衷)이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에 있었으므로, 남원성(南原城)의 군사들은 날마다 와서 도와주기를 바랐으나 오래도록 이르지 않았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두려워졌다.
이날 저녁 때에 성첩(城堞)을 지키던 군사들이 왕왕 머리를 맞대고 귓엣말로 수군거리더니, 말안장을 준비하는 등 도망하려는 기색이 있었 다. 밤 일경(一更 : 8시경)에 倭敵의 진중에서 떠드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서로 호응하며 물건을 운반하는 모양도 보이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포가 성을 향하여 어지럽게 쏘아 탄환이 날아와 성 위에 떨어지는데 마치 우박이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성 위 사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엿볼 수가 없었다.

한 두 시간쯤 지나서 떠드는 소리가 그쳤는데, 묶어 세웠던 풀 다발은 이미 호를 평평하게 메웠고, 또 풀다발을 양마장(羊馬牆) 안팎에도 무더기로 쌓아 올려 잠깐 동안에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였으며, 여러 倭敵들이 이것을 밟고 성으로 올라오니 이미 성 안은 크게 어지러워 지고 倭敵들이 성 안으로 들어섰다고들 떠들었다. 김효의(金孝義)는 처음에 남문 밖의 양마장(羊馬牆)을 지키고 있다가 황망히 성 안으로 들어와 보니 성 위에는 벌써 사람이 없었고, 다만 성 안의 곳곳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달아나서 북문에 이르렀는데, 明나라 군사는 모두 다 말을 타고 성문을 나가려 하였으나 문이 굳게 닫혀 쉽게 열 수가 없어서 말들의 발을 묶어 놓은 것과 같이 길거리를 꽉 메웠다.

조금 있다가 성문이 열리자 군마가 다투어 나갔는데, 倭兵들이 성 밖에서 두 겹 세 겹으로 둘러싸고 각각 요로를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휘둘러 어지럽게 내려찍으니 明나라 군사는 머리를 숙이고 칼을 받을 따름이었다. 마침 달이 밝아서 빠져 나간 사람은 얼마 안되었다.
이때 양총병은 가정(家丁) 몇 사람과 말을 달려 빠져 나가 겨우 죽음은 면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倭敵이 총병(總兵 : 양원楊元)인 줄 알면서도 짐짓 달아나게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김효의[孝義]는 동반한 한 사람과 함께 성문을 나오다가 그 한 사람은 倭敵을 만나서 죽고, 김효의 자신은 논[水田]으로 뛰어들어 풀 속에 엎드려 있다가 倭敵들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가는 것을 기다려서야 빠져나왔 다고 한다.

대개 양원은 곧 요동(遼東)의 장수[遼將]로서, 다만 오랑캐를 막을 줄만 알았을 뿐이지 倭敵을 막을 줄은 알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패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평지(平地)의 성(城)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겠으므로, 김효의가 말한 것을 자세히 적어서 뒷날에 성을 지키는 사람들로하여금 경계해야 할 것을 알리려 한다.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자 전주(全州) 이북의 성들은 와해되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뒤에
明나라 장수 양원(楊元)은 마침내 이 일로 죄를 얻어 참형(斬刑)*6)을 당하고, 베인 머리는 순시(徇示)*7)하였다.

*1)이복남(李福男, ?∼1597) : 본관은 우계(羽溪). 조선조 宣祖 때의 무관. 시호는 충장(忠壯).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倭敵이 남원성(南原城)을 치자 전라병사(全羅兵使)로 이를 구하려다가 전사함.
*2)임현(任鉉, 1549∼159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관. 자는 사애(士愛), 호는 애탄(愛灘), 본관은 풍천(豐川), 시호는 충간(忠簡). 문과에 급제하여 회양부사(淮陽府使)⋅길주목사(吉州牧使)⋅함경도병마절도사(咸鏡道兵馬節度使)를 지내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남원부사(南原府使)로 倭敵을 막다가 전사함.

3)정기원(鄭期遠, 1559∼159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관.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 본관은 동래(東萊). 시호는 충의(忠毅).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參判)에 이르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장(明將) 양원(楊元)의 접반사(接伴使)로 남원성전(南原城戰)에 참가하여 倭敵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4)야불수(夜不收) : 돈대초병(墩臺哨兵) 중 정찰대오(偵察隊伍)의 칭호. 요즘 군에서 수색대.
*5)승자소포(勝字小砲) : 무기 명. 화포의 일종.

*6)참형(斬刑) : 지난날,죄인의 목올 쳐서 죽이던 형벌. 단죄(斷罪).
*7)순시(徇示) : ①주의 주장을 앞장서서 부르짖을 순. 드러내 보이다. 두르다. 순행(巡行)하다. ②두루 순. 널리. 순시(徇示) : 돌아다니며 드러내 보이다. 조리 돌리다.(죄 지은 사람을 벌로 끌고다니며 망신을 시키다.)
*8)유린(蹂躪) : 함부로 짖밟음. 적진을 종횡으로 유린하다.
*9)작(斫) : 벨 작. 베다. 자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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