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황석산성(黃石山城)의 싸움.
倭兵陷黃石山城 安陰縣監郭䞭 前咸陽郡守趙宗道死之.
初體察使李元翼⋅元帥權慄 議修道內山城禦賊 築公山⋅金烏⋅龍紀⋅富山等城. 而公山⋅金烏用民力尤多 悉收旁郡器械糧餉實其中 督守令盡率老弱男婦入守. 遠近騷然.
及賊再動 淸正自西生浦 西向全羅 將與行長水路兵會攻南原.
元帥以下皆望風引去 傳令各處山城入守者 各散去避兵.
惟義兵將郭再祐 入昌寧火王山城 期死守. 賊到山下 仰見形勢斗絶 而城內人靜帖不動 不攻而去.
安陰縣監郭䞭 入黃石山城 前金海府使白士霖 亦入城中.
士霖武人 衆心倚以爲重 賊兵攻城一日 士霖先遁 諸軍皆潰.
賊入城 䞭與子履祥⋅履厚皆死.
䞭女嫁柳文虎. 文虎爲倭所擄 郭氏已出城 聞之 謂其婢曰「父死而不死 爲有夫在耳 今夫又執 吾何生爲?」自經死.
趙宗道嘗曰「吾嘗從大夫之後 不可與奔竄之徒 同死草間 死則當明白死耳.」率妻子入城中 作詩曰「崆峒山外生猶喜 巡遠城中死亦榮.」遂與䞭同被害.
왜적(倭敵)의 군사가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는데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1)과 전 함안군수(咸安郡守) 조종도(趙宗道)*2)가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도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도내(道內)의 산성(山城)을 수리하여 倭敵을 막을 것을 의논하고, 공산(公山 : 달성군達城郡)⋅금오(金烏 : 선산군善山郡)⋅용기(龍紀 : 운궁현韻宮縣)⋅부산(富山 : 월성군月城郡) 등의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공산산성(公山山城)과 금오산성(金烏山城)에는 백성들의 힘이 더욱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웃 고을의 기계와 양곡을 모두 거두어 그 속에 채워 두고, 그 수령(守令)들을 독려하여 늙은이, 어린이와 남자, 부녀자들을 다 거느리고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니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다 소란하였다.
倭敵이 다시 출동하게 되자, 가등청정[淸正]은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서쪽인 전라도(全羅道)로 향하여 장차 소서행장[行長]이 거느리고 수로(水路)로 오는 군사와 함께 모여 남원(南原)을 치려 하였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 權慄) 이하 모든 장병은 다 그 위풍만 바라보고 피하여 물러가고, 각처의 산성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령(傳令)하여 각각 흩어져 가서 적병을 피하게 하였다. 오직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만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王山城)으로 들어가서 죽기를 기하고 지키니, 倭敵들은 산성의 밑에 이르러 산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그리고 성 안 사람들이 고요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지키는 것을 쳐다보고는 공격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이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들어가니 전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도 또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백
사림(白士霖)은 무인(武人)이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든든하게 생각하였는데, 倭敵의 군사들이 성을 공격한지 하루 만에 백사림이 먼저 도망하여 가자 모든 군사들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倭敵이 성 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곽준은 그 아들 이상(履祥)⋅이후(履厚)와 함께 倭敵을 막아 싸우다가 다 전사하였다. 곽준의 딸은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갔는데, 유문호는 倭敵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곽씨(郭氏)는 이미 성 밖으로 나와 있었으나 이 말을 듣고 그 몸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까지 잡혔다고 하니, 내 어찌 살아 있겠는가?" 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종도(趙宗道)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던(벼슬하던) 사람인데, 도망하여 숨는 무리들과 함께 어울려 풀숲에서 헤매다가 죽을 수는 없다. 죽는다면 마땅히 떳떳하게(대장부의 죽음답게)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성 안으로 들어왔었는데, 시(詩)를 지어 읊기를, [崆峒山外生猶喜(공동산외생유희) : 공동산(崆峒山)*3) 밖이라면 삶이 오히려 기쁘겠고, 巡遠城中死亦榮(순원성중사역영) : 순원성(巡遠城)*4) 안이라면 죽음 역시 영광일세.]라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곽준과 함께 倭敵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1)곽준(郭䞭, 1550∼159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절사(節死)함. 저서는 ≪존재실기(存齋實記)≫가 있다.
*2)조종도(趙宗道, 1537∼1597)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시호는 충의(忠毅)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함안군수(咸安郡守)로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倭敵과 싸우다가 절사(節死)함. 저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3)공동산(崆峒山) : 中國의 서방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산명. 옛날 中國의 황제가 여기 왔다 갔다는 고사를 따라 宣祖께서 서방 평안도(平安道)로 피란한 것을 뜻함.
*4)순원성(巡遠城)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자 진원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은 동지 허원(許遠)과 함께수양성(睢陽城)을 지키다가 절사(節死)함. 그러므로 순원성은 장순과 허원이 사수한 수양성을 말함.
倭兵陷黃石山城 安陰縣監郭䞭 前咸陽郡守趙宗道死之.
初體察使李元翼⋅元帥權慄 議修道內山城禦賊 築公山⋅金烏⋅龍紀⋅富山等城. 而公山⋅金烏用民力尤多 悉收旁郡器械糧餉實其中 督守令盡率老弱男婦入守. 遠近騷然.
及賊再動 淸正自西生浦 西向全羅 將與行長水路兵會攻南原.
元帥以下皆望風引去 傳令各處山城入守者 各散去避兵.
惟義兵將郭再祐 入昌寧火王山城 期死守. 賊到山下 仰見形勢斗絶 而城內人靜帖不動 不攻而去.
安陰縣監郭䞭 入黃石山城 前金海府使白士霖 亦入城中.
士霖武人 衆心倚以爲重 賊兵攻城一日 士霖先遁 諸軍皆潰.
賊入城 䞭與子履祥⋅履厚皆死.
䞭女嫁柳文虎. 文虎爲倭所擄 郭氏已出城 聞之 謂其婢曰「父死而不死 爲有夫在耳 今夫又執 吾何生爲?」自經死.
趙宗道嘗曰「吾嘗從大夫之後 不可與奔竄之徒 同死草間 死則當明白死耳.」率妻子入城中 作詩曰「崆峒山外生猶喜 巡遠城中死亦榮.」遂與䞭同被害.
왜적(倭敵)의 군사가 황석산성(黃石山城)을 함락시켰는데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1)과 전 함안군수(咸安郡守) 조종도(趙宗道)*2)가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도원수[元帥] 권율(權慄)이 도내(道內)의 산성(山城)을 수리하여 倭敵을 막을 것을 의논하고, 공산(公山 : 달성군達城郡)⋅금오(金烏 : 선산군善山郡)⋅용기(龍紀 : 운궁현韻宮縣)⋅부산(富山 : 월성군月城郡) 등의 산성(山城)을 쌓았는데 공산산성(公山山城)과 금오산성(金烏山城)에는 백성들의 힘이 더욱 많이 들었다. 그리고 이웃 고을의 기계와 양곡을 모두 거두어 그 속에 채워 두고, 그 수령(守令)들을 독려하여 늙은이, 어린이와 남자, 부녀자들을 다 거느리고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게 하니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다 소란하였다.
倭敵이 다시 출동하게 되자, 가등청정[淸正]은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서쪽인 전라도(全羅道)로 향하여 장차 소서행장[行長]이 거느리고 수로(水路)로 오는 군사와 함께 모여 남원(南原)을 치려 하였다. 이때 도원수(都元帥 : 權慄) 이하 모든 장병은 다 그 위풍만 바라보고 피하여 물러가고, 각처의 산성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전령(傳令)하여 각각 흩어져 가서 적병을 피하게 하였다. 오직 의병장(義兵將) 곽재우(郭再祐)만이 창녕(昌寧)의 화왕산성(火王山城)으로 들어가서 죽기를 기하고 지키니, 倭敵들은 산성의 밑에 이르러 산성의 형세가 험준하고, 그리고 성 안 사람들이 고요히 움직이지 아니하고 지키는 것을 쳐다보고는 공격하지 아니하고 그대로 가버렸다.
안음현감(安陰縣監) 곽준(郭䞭)이 황석산성(黃石山城)으로 들어가니 전 김해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도 또한 성 안으로 들어왔다. 백
사림(白士霖)은 무인(武人)이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든든하게 생각하였는데, 倭敵의 군사들이 성을 공격한지 하루 만에 백사림이 먼저 도망하여 가자 모든 군사들이 다 무너지고 말았다. 倭敵이 성 안으로 몰려 들어오자, 곽준은 그 아들 이상(履祥)⋅이후(履厚)와 함께 倭敵을 막아 싸우다가 다 전사하였다. 곽준의 딸은 유문호(柳文虎)에게 시집갔는데, 유문호는 倭敵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곽씨(郭氏)는 이미 성 밖으로 나와 있었으나 이 말을 듣고 그 몸종에게 일러 말하기를, "아버지가 돌아가셨어도 내가 죽지 않은 것은 남편이 살아 있었기 때문인데 이제 남편까지 잡혔다고 하니, 내 어찌 살아 있겠는가?" 하고는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조종도(趙宗道)는 일찍이 말하기를, "나도 일찍이 대부(大夫)의 뒤를 따르던(벼슬하던) 사람인데, 도망하여 숨는 무리들과 함께 어울려 풀숲에서 헤매다가 죽을 수는 없다. 죽는다면 마땅히 떳떳하게(대장부의 죽음답게) 죽을 것이다." 하였다. 그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성 안으로 들어왔었는데, 시(詩)를 지어 읊기를, [崆峒山外生猶喜(공동산외생유희) : 공동산(崆峒山)*3) 밖이라면 삶이 오히려 기쁘겠고, 巡遠城中死亦榮(순원성중사역영) : 순원성(巡遠城)*4) 안이라면 죽음 역시 영광일세.]라고 하였다. 그는 드디어 곽준과 함께 倭敵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1)곽준(郭䞭, 1550∼159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양정(養靜), 호는 존재(存齋), 시호는 충렬(忠烈),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義兵)에 가담하여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황석산성(黃石山城)을 지키다가 절사(節死)함. 저서는 ≪존재실기(存齋實記)≫가 있다.
*2)조종도(趙宗道, 1537∼1597)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백유(伯由), 호는 대소헌(大笑軒), 본관은 함안(咸安)이다. 시호는 충의(忠毅)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함안군수(咸安郡守)로 황석산성(黃石山城)에서 倭敵과 싸우다가 절사(節死)함. 저서는 ≪대소헌집(大笑軒集)≫이 있다.
*3)공동산(崆峒山) : 中國의 서방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산명. 옛날 中國의 황제가 여기 왔다 갔다는 고사를 따라 宣祖께서 서방 평안도(平安道)로 피란한 것을 뜻함.
*4)순원성(巡遠城) : 당(唐)나라 현종(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이 난을 일으키자 진원현령(眞源縣令) 장순(張巡)은 동지 허원(許遠)과 함께수양성(睢陽城)을 지키다가 절사(節死)함. 그러므로 순원성은 장순과 허원이 사수한 수양성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