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명(明)나라 군사가 내원(來援)함.
天朝以兵部侍郎邢玠 爲總督軍門 遼東布政司楊鎬 爲經理朝鮮軍務 麻貴爲大將 楊元⋅劉綎⋅董一元等 相繼而出.
丁酉五月 楊元領三千兵先至 留京城數日 下全羅道 駐守南原.
蓋南原據湖嶺之衝 城頗堅完 往時駱尙志 又增築可守故也.
城外有蛟龍山城 衆議欲守山城 楊元以爲本城可守 增埤浚濠 濠內又設羊馬墻 晝夜董役 月餘粗完.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 형개(邢玠)*1)를 총독군문(總督軍門)으로, 요동포정사(遼東布政司) 양호(楊鎬)*2)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마귀(麻貴)*3)를 대장(大將)으로 삼고, 양원(楊元)⋅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의 장수들이 서로 잇달아 우리나라로 나왔 다. 정유년[丁酉 : 宣祖 30年, 1597] 5월에 양원(楊元)이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왔는데, 그는 서울에 며칠 동안 머무르다가 전라도(全羅道)로 내려가 남원(南原)에 주둔하여 지켰다. 대개 남원은 호남[湖]⋅영남[嶺]의 요충이 되는 곳으로 성(城)도 자못 견고하고 완전하였는 데, 이는 지난날에 낙상지(駱尙志)가 또 성을 증축하여 지킬 만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이 남원성 밖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산성(山城)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양원은 본성(本城)을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성 위에 담을 더 쌓고 호(壕)를 팠으며, 호 안에 양마장(羊馬墻)*4)을 설치했는데 밤낮으로 일을 돌려 하여 한 달이 넘어 겨우 완성되 었다.
*1)형개(邢玠) : 명(明)나라 장수. 병부시랑(兵部恃郞)으로 있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총독군문(璁督軍門)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함.
*2)양호(楊鎬) : 명(明)나라 장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로 구원병을 거느리고 왔으나 울산성(蔚山城) 공격에 실패하여 파면됨.
*3)마귀(麻貴) : 명(明)나라 장수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제독(提督)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잘 싸워 양장(良將)이라 이름.
*4)양마장(羊馬墻) : 밖의 호(壕)인데,작은 성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여장(女牆 : 성 위에 쌓은 담)의 담을 세운 것. 장(墻)은 장(牆)과 동자. 본자 牆. 간체 墙. 담 장. 담. 경계.
12. 원균(元均)이 패하여 한산도(閑山島) 수군(水軍)이 무너짐.
八月初七日 閑山舟師潰. 統制使元均⋅全羅右水使李億祺死 慶尙右水使裴楔走免.
初元均 旣至閑山 盡變舜臣約束 凡褊*5)裨*6)士卒 稍爲舜臣所任使者 皆斥去. 以李英男詳知已前曰奔敗狀 尤惡之 軍心怨憤.
舜臣在閑山時 作堂名曰運籌 日夜處其中 與諸將共論兵事. 雖下卒欲言軍事者 許來吿. 以通軍情 每將戰 悉招褊裨問計 謀定而後戰 故無敗事.
均挈愛妾居其堂 以重籬隔內外 諸將罕見其面 又嗜酒 日事酗怒 刑罰無度. 軍中竊語曰「若遇賊 惟有走耳.」諸將私相譏笑 亦不復禀畏 故號令不行.
時賊將再入寇 平行長又遣要時羅 紿金應瑞曰「倭船某日當添至 朝鮮舟師 猶可邀擊.」
都元帥權慄 尤信其說 且以李舜臣以逗遛已得罪 日促元均進兵. 均亦常言舜臣 見賊不進 以此陷舜臣 而已得代其任 至是雖知其勢難 而慙無以爲辭 只得盡率舟艦進前.
倭營之在岸上者 俯視船行 互相傳報.
均至絶影島 風作浪起 日已昏 船無止泊處.
望見倭船出沒海中 均督諸軍進前. 舟中人自閑山終日搖櫓 不得休息 又困飢渴疲不能運船 諸船縱橫進退 乍前乍卻.
倭欲疲之 與我船相近 輒倘*7)佯引避而去 不與交鋒. 夜深風盛 我船四散分漂 不知去向.
均艱收餘船 還至加德島 軍士渇甚 爭下船取水. 倭兵從島中突出揜之 失將士四百餘人 均又引退 至巨濟漆川島.
權慄在固城 以均無所得 檄召均杖之 督令更進. 均還到軍中 益忿懣飮酒醉臥. 諸將欲見均言事不得.
夜半 倭船來襲之 軍大潰. 均走至海邊 棄船登岸欲走 而體肥鈍 坐松樹下. 左右皆散 或言爲賊所害 或言走免 終不得其實.
李億祺從船上投水.
裴楔 先是屢諫均必敗 是日又言漆川島淺窄 不利行船 宜移陣他處 均皆不聽.
楔私約所領船 戒嚴待變 見賊來犯 奪港先走 故其軍獨全.
楔還至閑山島 縱火焚廬舍糧穀軍器 徙餘民之留在島中者 使避賊而去.
閑山旣敗 賊乘勝西向. 南海⋅順天次第陷沒
賊船至豆恥津下陸 進圍南原 兩湖大震.
蓋賊自壬辰入我境 惟見敗於舟師 平秀吉憤之 責行長必取舟師. 行長佯輸款於金應瑞 使李舜臣得罪 又誘元均出海中 盡得其虛實 因行掩襲. 其計至巧 而我悉堕其計中 哀哉!
8월 7일[宣祖 30年,1597]에 한산도(閑山島) 수군[舟師]이 무너지고,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사망하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1)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보다 먼저 원균은 이미 한산도[閑山]에 이르렀었는데, 그는 이순신[舜臣]이 정하여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모든 장수와 군사들도 거의 이순신이 신임하여 부리던 사람들은 다 내쫓아 버렸으며, 이영남(李英男)이 자기[元均]가 전날에 패하여 도망하였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서 더욱 그를 미워하니 군사들의 마음은 그를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에 한 집을 지어 운주당(運籌堂)*2)이라고 이름하고, 밤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부하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야 싸운 까닭으로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運籌堂]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으니, 여러 장수들도 그의 낯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이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는 비밀히[몰래] 수군거려 말하기 를, "만약 倭敵을 만날 것 같으면 오직 도망하는 수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여러 장수들은 몰래 서로 그를 비웃으며, 또한 다시 품의하거 나[일을 보고하거나] 두려워하지도[복종하지] 않았으므로 호령[명령과 지휘]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이럴 때 倭敵의 군사가 다시 침구(侵寇 : 침략)하였는데, 적장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또 요시라(要時羅)를 파견하여 김응서(金應瑞)를 속여 말하기를, "왜선(倭船)이 아무 날[모일(某日)]에는 꼭 더 들어을 것이니 朝鮮의 수군은 아마도 중간에서 맞아 쳐부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더욱 그 말을 믿었고, 또 이순신이 머뭇거리다가 이미 죄를 받았으므로 해서 날마다 원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치라고 재촉하였다. 원균도 항상 이순신이 倭敵을 보고도 나아가 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것으로써 이순신을 모함하여 자기가 그 소임을 대신할 수 있었으니, 이에 이르러 비록 그 형세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 다만 전함(戰艦)을 다거느리 고 앞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언덕 위에 있는 倭敵의 병영에서는 우리 배가 가는 것을 굽어 보고는 서로 전하여 알리며 그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원균이 절영도(絶影島)*3)에 이르니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나 거세지고 날은 벌써 저물어 어두워지는데 배는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倭敵의 배가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 것이 바라보이자 원균은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앞으로 진격하였는데, 배 안의 군사들은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쉴 수도 없었고, 또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려 제대로 배를 운전할 수가 없었다. 여러 배들이 풍랑에 가로세로 밀려 드나들기도 하고, 잠깐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곧 뒤로 밀려나가기도 하였다. 倭敵들은 우리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려고 우리 배와 가까워졌다가는 문득 허둥지둥 피하여 달아나며 맞부딪쳐 싸우지는 않았다. 밤이 깊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표류하여 그 가는 방향도 알지 못하였다.
원균은 간신히 남은 배를 수습하여 거느리고 돌아와 가덕도(加德島)*4)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너무도 목이 말라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 을 마셨다. 그런데 倭敵의 배가 섬 속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덮치므로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또 물러나와서 거제도[巨濟]의 칠천도(漆川島)에 이르렀다. 권율은 이때 고성(固城)에 있었는데,원균이 출동한 뒤 실패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해서 격서(檄書)를 보내 불러다가 곤장을 치고, 다시 진격하라고 독촉하였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분하고 화가 치밀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버렸 다.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만나보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려 하였으나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날 밤중에 倭敵의 배가 와서 습격하여 우리 군사는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몸집이 비둔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는데 좌우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은 그가 倭敵에게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고도 말하는데,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억기(李億祺)는 배 위로부터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裵楔)은 이보다 먼저 여러 번 원균에게 "이러다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간하였으며, 이날에도 또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부리기가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진을 다른 곳에 옮겨 치는 것이 좋겠다."고 간하였으나 원균은 다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배설은 가만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배와 약속하여 계엄을 하고(경계를 펴면서) 사변을 기다리고 있다가(적의 공격에 대비하다), 倭敵이 와서 침범하는 것을 보고는 항구를 벗어나서 먼저 달아난 까닭으로 그 군사들은 홀로 온전하였다. 배설은 한산도(閑山島)로 돌아 와서 불을 질러 병사(兵舍)와 양곡(糧穀)과 군기(軍器)를 태워 버리고, 남아 있던 백성들로써 섬 안에 있는 사람을 옮겨 倭敵을 피하여 떠나 가게 하였다. 한산도가 패하고 나자, 倭敵들은 이긴 기세를 타서 서쪽으로 향하여 쳐들어가니 남해(南海)⋅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몰되었다.
倭敵의 배들은 섬진강(蟾津江) 하류의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육지에 내려서 나아가 남원(南原)을 포위하니, 호남⋅호서[兩湖 : 全羅道⋅忠淸道]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대개 倭敵이 임진년(1592)에 우리나라 땅에 들어온 뒤로부터 오직 수군[舟師]에게만 패하였으므로, 평수길(平秀吉 : 豊臣秀吉)은 이를 분 하게 여겨 소서행장[行長]에게 반드시 朝鮮의 수군[舟師]을 쳐부술 것을 책임지웠다. 이에 小西行長은 전략적으로 거짓 정성을 김응서(金應瑞)에게 보여 호감을 사는 한편 이순신(李舜臣)이 죄를 짓도록 만들고, 또 원균(元均)을 꾀어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그 허실(虛實)을 다 알고 나서 덮쳐 습격하였다. 그의 계략은 지극히 교묘하여 그 계획한 꾀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1)배설(裵楔, ?∼1599) :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조선조 宣祖 때의 무장.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로, 원균(元均)이 패한 뒤에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로 들어왔으나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앞두고 도망하였으므로 뒤에 잡혀 처벌됨.
*2)운주당(運籌堂) : 한산도(閑山島)의 제승당(制勝堂)에 있던 집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왜적(倭敵)을 치기 위한 전략(戰略)을 마련하던 곳.
*3)절영도(絶影島) : 지금 부산(釜山) 영도(影島의 옛 이름.
*4)가덕도(加徳島) : 경상남도에 속한 섬. 부산(釜山)과 거제도(巨濟島) 사이에 있음.
*5)편(褊) : ①좁을 편. 도량이 좁다. 성급하다. ②옷이 날릴 변. 옷이 펄렁펄렁 날리는 모양. 동자 惼.
*6)비(裨) : 도울 비. 보좌하다. 보태다. 주다. 천하다. 작다.
*7)상(倘) : ①혹시 당. 아마. ②어정거릴 상. 배회하다. 상양(倘佯) : 어정거림. 배회(徘徊)
天朝以兵部侍郎邢玠 爲總督軍門 遼東布政司楊鎬 爲經理朝鮮軍務 麻貴爲大將 楊元⋅劉綎⋅董一元等 相繼而出.
丁酉五月 楊元領三千兵先至 留京城數日 下全羅道 駐守南原.
蓋南原據湖嶺之衝 城頗堅完 往時駱尙志 又增築可守故也.
城外有蛟龍山城 衆議欲守山城 楊元以爲本城可守 增埤浚濠 濠內又設羊馬墻 晝夜董役 月餘粗完.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 형개(邢玠)*1)를 총독군문(總督軍門)으로, 요동포정사(遼東布政司) 양호(楊鎬)*2)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마귀(麻貴)*3)를 대장(大將)으로 삼고, 양원(楊元)⋅유정(劉綎)⋅동일원(董一元) 등의 장수들이 서로 잇달아 우리나라로 나왔 다. 정유년[丁酉 : 宣祖 30年, 1597] 5월에 양원(楊元)이 3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왔는데, 그는 서울에 며칠 동안 머무르다가 전라도(全羅道)로 내려가 남원(南原)에 주둔하여 지켰다. 대개 남원은 호남[湖]⋅영남[嶺]의 요충이 되는 곳으로 성(城)도 자못 견고하고 완전하였는 데, 이는 지난날에 낙상지(駱尙志)가 또 성을 증축하여 지킬 만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이 남원성 밖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산성(山城)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양원은 본성(本城)을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성 위에 담을 더 쌓고 호(壕)를 팠으며, 호 안에 양마장(羊馬墻)*4)을 설치했는데 밤낮으로 일을 돌려 하여 한 달이 넘어 겨우 완성되 었다.
*1)형개(邢玠) : 명(明)나라 장수. 병부시랑(兵部恃郞)으로 있다가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총독군문(璁督軍門)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활약함.
*2)양호(楊鎬) : 명(明)나라 장수. 1597년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략조선군무사(經略朝鮮軍務使)로 구원병을 거느리고 왔으나 울산성(蔚山城) 공격에 실패하여 파면됨.
*3)마귀(麻貴) : 명(明)나라 장수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제독(提督)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잘 싸워 양장(良將)이라 이름.
*4)양마장(羊馬墻) : 밖의 호(壕)인데,작은 성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여장(女牆 : 성 위에 쌓은 담)의 담을 세운 것. 장(墻)은 장(牆)과 동자. 본자 牆. 간체 墙. 담 장. 담. 경계.
12. 원균(元均)이 패하여 한산도(閑山島) 수군(水軍)이 무너짐.
八月初七日 閑山舟師潰. 統制使元均⋅全羅右水使李億祺死 慶尙右水使裴楔走免.
初元均 旣至閑山 盡變舜臣約束 凡褊*5)裨*6)士卒 稍爲舜臣所任使者 皆斥去. 以李英男詳知已前曰奔敗狀 尤惡之 軍心怨憤.
舜臣在閑山時 作堂名曰運籌 日夜處其中 與諸將共論兵事. 雖下卒欲言軍事者 許來吿. 以通軍情 每將戰 悉招褊裨問計 謀定而後戰 故無敗事.
均挈愛妾居其堂 以重籬隔內外 諸將罕見其面 又嗜酒 日事酗怒 刑罰無度. 軍中竊語曰「若遇賊 惟有走耳.」諸將私相譏笑 亦不復禀畏 故號令不行.
時賊將再入寇 平行長又遣要時羅 紿金應瑞曰「倭船某日當添至 朝鮮舟師 猶可邀擊.」
都元帥權慄 尤信其說 且以李舜臣以逗遛已得罪 日促元均進兵. 均亦常言舜臣 見賊不進 以此陷舜臣 而已得代其任 至是雖知其勢難 而慙無以爲辭 只得盡率舟艦進前.
倭營之在岸上者 俯視船行 互相傳報.
均至絶影島 風作浪起 日已昏 船無止泊處.
望見倭船出沒海中 均督諸軍進前. 舟中人自閑山終日搖櫓 不得休息 又困飢渴疲不能運船 諸船縱橫進退 乍前乍卻.
倭欲疲之 與我船相近 輒倘*7)佯引避而去 不與交鋒. 夜深風盛 我船四散分漂 不知去向.
均艱收餘船 還至加德島 軍士渇甚 爭下船取水. 倭兵從島中突出揜之 失將士四百餘人 均又引退 至巨濟漆川島.
權慄在固城 以均無所得 檄召均杖之 督令更進. 均還到軍中 益忿懣飮酒醉臥. 諸將欲見均言事不得.
夜半 倭船來襲之 軍大潰. 均走至海邊 棄船登岸欲走 而體肥鈍 坐松樹下. 左右皆散 或言爲賊所害 或言走免 終不得其實.
李億祺從船上投水.
裴楔 先是屢諫均必敗 是日又言漆川島淺窄 不利行船 宜移陣他處 均皆不聽.
楔私約所領船 戒嚴待變 見賊來犯 奪港先走 故其軍獨全.
楔還至閑山島 縱火焚廬舍糧穀軍器 徙餘民之留在島中者 使避賊而去.
閑山旣敗 賊乘勝西向. 南海⋅順天次第陷沒
賊船至豆恥津下陸 進圍南原 兩湖大震.
蓋賊自壬辰入我境 惟見敗於舟師 平秀吉憤之 責行長必取舟師. 行長佯輸款於金應瑞 使李舜臣得罪 又誘元均出海中 盡得其虛實 因行掩襲. 其計至巧 而我悉堕其計中 哀哉!
8월 7일[宣祖 30年,1597]에 한산도(閑山島) 수군[舟師]이 무너지고, 통제사(統制使) 원균(元均)⋅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 이억기(李億祺)가 사망하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 배설(裵楔)*1)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보다 먼저 원균은 이미 한산도[閑山]에 이르렀었는데, 그는 이순신[舜臣]이 정하여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모든 장수와 군사들도 거의 이순신이 신임하여 부리던 사람들은 다 내쫓아 버렸으며, 이영남(李英男)이 자기[元均]가 전날에 패하여 도망하였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서 더욱 그를 미워하니 군사들의 마음은 그를 원망하고 분해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에 한 집을 지어 운주당(運籌堂)*2)이라고 이름하고, 밤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부하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러서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야 싸운 까닭으로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運籌堂]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으니, 여러 장수들도 그의 낯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는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이 법도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는 비밀히[몰래] 수군거려 말하기 를, "만약 倭敵을 만날 것 같으면 오직 도망하는 수가 있을 뿐이다."라고 하며, 여러 장수들은 몰래 서로 그를 비웃으며, 또한 다시 품의하거 나[일을 보고하거나] 두려워하지도[복종하지] 않았으므로 호령[명령과 지휘]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이럴 때 倭敵의 군사가 다시 침구(侵寇 : 침략)하였는데, 적장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또 요시라(要時羅)를 파견하여 김응서(金應瑞)를 속여 말하기를, "왜선(倭船)이 아무 날[모일(某日)]에는 꼭 더 들어을 것이니 朝鮮의 수군은 아마도 중간에서 맞아 쳐부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은 더욱 그 말을 믿었고, 또 이순신이 머뭇거리다가 이미 죄를 받았으므로 해서 날마다 원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치라고 재촉하였다. 원균도 항상 이순신이 倭敵을 보고도 나아가 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것으로써 이순신을 모함하여 자기가 그 소임을 대신할 수 있었으니, 이에 이르러 비록 그 형세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 다만 전함(戰艦)을 다거느리 고 앞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언덕 위에 있는 倭敵의 병영에서는 우리 배가 가는 것을 굽어 보고는 서로 전하여 알리며 그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원균이 절영도(絶影島)*3)에 이르니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나 거세지고 날은 벌써 저물어 어두워지는데 배는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倭敵의 배가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 것이 바라보이자 원균은 여러 군사를 독려하여 앞으로 진격하였는데, 배 안의 군사들은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쉴 수도 없었고, 또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려 제대로 배를 운전할 수가 없었다. 여러 배들이 풍랑에 가로세로 밀려 드나들기도 하고, 잠깐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곧 뒤로 밀려나가기도 하였다. 倭敵들은 우리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려고 우리 배와 가까워졌다가는 문득 허둥지둥 피하여 달아나며 맞부딪쳐 싸우지는 않았다. 밤이 깊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표류하여 그 가는 방향도 알지 못하였다.
원균은 간신히 남은 배를 수습하여 거느리고 돌아와 가덕도(加德島)*4)에 이르렀는데, 군사들은 너무도 목이 말라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 을 마셨다. 그런데 倭敵의 배가 섬 속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덮치므로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또 물러나와서 거제도[巨濟]의 칠천도(漆川島)에 이르렀다. 권율은 이때 고성(固城)에 있었는데,원균이 출동한 뒤 실패만 하고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해서 격서(檄書)를 보내 불러다가 곤장을 치고, 다시 진격하라고 독촉하였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분하고 화가 치밀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버렸 다. 여러 장수들이 원균을 만나보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려 하였으나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날 밤중에 倭敵의 배가 와서 습격하여 우리 군사는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몸집이 비둔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는데 좌우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다. 어떤 사람은 그가 倭敵에게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고도 말하는데,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억기(李億祺)는 배 위로부터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裵楔)은 이보다 먼저 여러 번 원균에게 "이러다가는 반드시 패할 것이다."라고 간하였으며, 이날에도 또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부리기가 이롭지 못하니 마땅히 진을 다른 곳에 옮겨 치는 것이 좋겠다."고 간하였으나 원균은 다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배설은 가만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배와 약속하여 계엄을 하고(경계를 펴면서) 사변을 기다리고 있다가(적의 공격에 대비하다), 倭敵이 와서 침범하는 것을 보고는 항구를 벗어나서 먼저 달아난 까닭으로 그 군사들은 홀로 온전하였다. 배설은 한산도(閑山島)로 돌아 와서 불을 질러 병사(兵舍)와 양곡(糧穀)과 군기(軍器)를 태워 버리고, 남아 있던 백성들로써 섬 안에 있는 사람을 옮겨 倭敵을 피하여 떠나 가게 하였다. 한산도가 패하고 나자, 倭敵들은 이긴 기세를 타서 서쪽으로 향하여 쳐들어가니 남해(南海)⋅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몰되었다.
倭敵의 배들은 섬진강(蟾津江) 하류의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육지에 내려서 나아가 남원(南原)을 포위하니, 호남⋅호서[兩湖 : 全羅道⋅忠淸道] 지방이 크게 진동하였다.
대개 倭敵이 임진년(1592)에 우리나라 땅에 들어온 뒤로부터 오직 수군[舟師]에게만 패하였으므로, 평수길(平秀吉 : 豊臣秀吉)은 이를 분 하게 여겨 소서행장[行長]에게 반드시 朝鮮의 수군[舟師]을 쳐부술 것을 책임지웠다. 이에 小西行長은 전략적으로 거짓 정성을 김응서(金應瑞)에게 보여 호감을 사는 한편 이순신(李舜臣)이 죄를 짓도록 만들고, 또 원균(元均)을 꾀어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그 허실(虛實)을 다 알고 나서 덮쳐 습격하였다. 그의 계략은 지극히 교묘하여 그 계획한 꾀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다.
*1)배설(裵楔, ?∼1599) : 본관은 성주(星州)이다. 조선조 宣祖 때의 무장.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로, 원균(元均)이 패한 뒤에 이순신(李舜臣)의 막하(幕下)로 들어왔으나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앞두고 도망하였으므로 뒤에 잡혀 처벌됨.
*2)운주당(運籌堂) : 한산도(閑山島)의 제승당(制勝堂)에 있던 집으로,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이 왜적(倭敵)을 치기 위한 전략(戰略)을 마련하던 곳.
*3)절영도(絶影島) : 지금 부산(釜山) 영도(影島의 옛 이름.
*4)가덕도(加徳島) : 경상남도에 속한 섬. 부산(釜山)과 거제도(巨濟島) 사이에 있음.
*5)편(褊) : ①좁을 편. 도량이 좁다. 성급하다. ②옷이 날릴 변. 옷이 펄렁펄렁 날리는 모양. 동자 惼.
*6)비(裨) : 도울 비. 보좌하다. 보태다. 주다. 천하다. 작다.
*7)상(倘) : ①혹시 당. 아마. ②어정거릴 상. 배회하다. 상양(倘佯) : 어정거림. 배회(徘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