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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10. 이순신(李舜臣)의 하옥(下獄)
23/09/10 10:50:20 金 鍾國 조회 1542
 
10. 이순신(李舜臣)의 하옥(下獄).
逮水軍統制使李舜臣下獄.
初元均德舜臣來救 相得甚歡 旣而爭功 漸不相能. 均性險詖 且多連絡於中外 搆誣舜臣 不遺餘力 毎言「舜臣初不欲來 因我固請乃至 勝敵我爲首功.」
時朝論分岐 各有所主.
薦舜臣初爲余 不悅余者 與元均合 攻舜臣甚力. 惟右相李元翼 明其不然 且曰「舜臣與元均 各有分守之地 初不卽進 未足深非.」
先是賊將平行長 使卒倭要時羅 往來慶尙右兵使金應瑞陣 致慇懃 方淸正欲再出也 時羅密語於應瑞曰「我將行長言 今此和事不成 由於淸正 吾甚疾之. 某日 淸正當渡海 朝鮮善水戰 若要諸海中 可以敗殺 愼毋失也.」應瑞上其事 朝議信之.
海平君尹根壽 尤踊躍以爲機會難失 屢啓之 連催舜臣前進. 舜臣疑賊有詐 遲徊者累日.
至是要時羅又至曰「淸正今已下陸 朝鮮何不要截?」佯致恨惜之意.
事聞 廷議皆咎舜臣 臺諫請拿鞫 玄風人前縣監朴惺者 亦承望時論 上疏極言舜臣可斬. 遂遣義禁府都事拿來 元均代爲統制使.
上猶疑所聞不盡實 特遣成均司成南以信 下閑山廉察. 以信旣入全羅道 軍民遮道訟舜臣寃者 不可勝數. 以信不以實聞 乃曰「淸正留海島七日 我軍若往 可縛來 而舜臣逗遛失機.」
舜臣至獄 命大臣議罪.
獨判中樞府事鄭琢言「舜臣名將 不可殺 軍機利害 難可遙度 其不進 未必無意 請寬恕 以責後效.」
拷問一次 減死削職充軍.
舜臣老母在牙山 聞舜臣下獄 憂悸而死. 舜臣出獄 道過牙山 成服 卽往權慄帳下從軍 人聞而悲之.

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옥에 가두었다. 이보다 먼저 원균(元均)은 이순신이 와서 구원해 준 것을 은덕으로 여겨서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얼마 안 가서 공을 다투어 점차 서로 잘 어울리지 않았다. 원균은 성품이 험악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지방[中外]의 인사들과 많이 연락하면서 이순신을 모함하는 데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며, 늘 말하기를, "이순신이 처음에는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내가 굳이 청함으로 인하여 왔으니, 적을 이긴 것은 내가 수공(首功 : 으뜸 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은 두 갈래로 나누어 져서 저마다 주장하는 것이 달랐다. 이순신을 추천한 사람은 처음에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원균과 어울려서 이순신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강력하였다.

오직 우상(右相) 이원익(李元興)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또 말하기를, "이순신과 원균은 제각기 나누어 지키는 지역이 있었 으니, 처음에 곧 나아가 구원하지 않았다 해도 족히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보다 먼저 倭敵의 장수 평행장(平行長 : 小西行長)은 자기의 졸개 요시라(要時羅)로 하여금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응서(金應瑞)의 진(陣)으로 왕래하게 하여 은근히 정을 통하고 있었는데, 바야흐로 가등청정(加籐淸正)이 다시 출정하려고 하자, 요시라[時羅]는 비밀히 김응서에게 말하기를, "우리 장수 소서행장[行長]의 말이 '이번에 화의를 맺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은 가등청정[淸正]의 잘못에 연유된 것이므로 나도 몹시 그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무 날에는 加籐淸正이 꼭 바다를 건너올 것입니다. 朝鮮에서는 수전(水戰)을 잘하니, 만약 바다 가운데서 맞아 친다면 틀림없이 쳐부수고 잡아죽일 수 있을 것이니 삼가 실패하지 말도록 하시오." 하였다. 김응서는 그런 일을 상주하니 조정의 의논은 이것을 믿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1)는 더욱 좋아 날뛰면서 이런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누차 이를 임금에게 아뢰고 연달아 이순신에게 전진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여기에는 倭敵들의 간사한 속임수가 있는 것을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고 머뭇거리 기를 여러 날 동안 하였다. 이에 이르자 요시라는 또 와서 말하기를, "가등청정[淸正]이 지금 이미 육지에 내렸는데, 朝鮮에서는 어찌하여 막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거짓으로 한탄하고 애석해 하는 뜻을 보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의 의논은 다 이순신을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대간(臺諫)은 그를 잡아올려 국문하자고 청하였고, 현풍(玄風) 사람 박성(朴惺)*2)이라는 자도 그때의 논의에 영합하여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을 목 베어야 옳겠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파견하여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元均)을 대신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오히려 들리는 말이 다 진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고, 성균사성(成均司成)*3) 남이신(南以信)*4)을 파견하여 한산도[閑山]로 내려가서 사실을 조사 하고 살펴오게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全羅道)에 들어서자 군민(軍民)들은 길을 막고 이순신이 원통하게 잡혔다는 것을 호소했는데, 그런 사람의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가등청정[淸正]이 해도(海島)에 머무르는 7일 동안에 우리 군사가 만약 나갔다고 할 것 같으면 가히 적장을 잡아올 수 있었겠사오나, 이순신은 머뭇거리고 나가지 않아서 그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옥에 이르자, 임금께서는 대신에게 명하여 그 죄를 논의하게 하였다. 이때 홀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5)정탁(鄭琢)*6)이 간하기를, "이순신[舜臣]은 명장(名將)이오니 죽여서는 아니됩니다. 군사상 기밀[軍機]의 이해(利害) 관계는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싸우러 나아가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생각하는 점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오니, 청하읍건대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뒷날에 공효를 이루도록 하시옴소서." 하였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拷問)을 행한 후에 사형을 감하여 관직을 삭탈(削奪)한 다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의 늙은 어머니는 아산(牙山)*7)에 있었는데,이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으로 애를 태우다가 사망하였다.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가는 길에 성복(成服)*8)하고는, 곧 권율(權慄)의 막하[帳下]로 가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는데 사람들은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1)윤근수(尹根壽, 1537∼1616)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시호는 문정(文貞), 본관은 해평(海平)이다. 영의정(領議政)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다. 明宗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大司成)⋅부제학(副提學)⋅경기관찰사(京畿觀察使)⋅이조참판(吏曹參判)을 거쳐 호조판서(戶曹判書)⋅예조판서(禮曹判書)⋅좌찬성(左贊成)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좌찬성(左贊成)으로 明나라 구원병 문제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의금부사(義禁府使)에 임명됨. 저서는 ≪월정집(月汀集)≫이 있다.

2)*박성(朴惺, 1549∼1606) : 조선조 宣祖 때 사람. 자는 덕응(徳凝), 호는 대암(大菴),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막하(幕下)에 있었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막하에서 일하다가 뒤에 안양현감(安陽縣監)을 지냈다. 저서에 ≪대암집(大菴集)≫이 있다.
*3)성균사성(成均司成) : 성균관(成均館)에 속한 관직. 사성(司成)은 종3품 벼슬.
*4)남이신(南以信, 1562∼1608) : 자는 자유(自有), 호는 직곡(直谷), 본관은 의령(宜寧)이다. 조선조 宣祖 때 문신.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간(大司諫)에 이름.

*5)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 중추부(中樞府)는 조선조 때 중앙관청의 하나. 부사(府事)는 계복(啓復)⋅왕명출납(王命出納)⋅병기(兵機)⋅군정(軍政)⋅숙위(宿衛)⋅경비(警備) 등의 군국(軍國) 업무들을 관장하는 관직으로 정2품 벼슬.
*6)정탁鄭琢, 1526∼1605) : 조선조 宣祖 때의 대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淸州)이다. 저서에서는 ≪약포집(藥圃集)≫과 ≪용만견문록(龍灣見聞錄)≫이 있다. 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에 이름. 경사(経史)⋅천문⋅지리⋅병서 등에 정통하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호종공신(扈從功臣)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파봉됨.
*7)아산(牙山) : 충청남도 북부에 위치한 지명.
*8)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상복을 입는 것. 보통 초상이 난지 4일부터 입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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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 1부를 시작하면서 論語반에서 수강하고 있는 萬峰 丁 珉榮 붕우가 제공하였다고 알려드린 바 있습니다. 싣는 작업은 작성자가 한 것으로 朋友에게 감사는 마음으로 이어가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김종국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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