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왜적(倭敵)들은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晉州城)을 침.
賊退分屯於海邊 自蔚山西生浦 至東萊⋅金海⋅熊川⋅巨濟 首尾相連 凡十六屯 皆依山憑海 築城掘塹 爲久留計 不肯渡海.
天朝又使泗川摠兵劉綎 率福建⋅西蜀⋅南蠻等處召募兵五千繼出屯星州⋅八莒. 南將吳惟忠 屯善山⋅鳳溪 李寧⋅祖承訓⋅葛逢夏 屯居昌. 駱尙志⋅王必迪 屯慶州 環四面而相持不進. 糧餉取之兩湖 踰越險阻 散給諸陣 民力益困.
提督又使 沈惟敬往諭倭令渡海 又使徐一貫⋅謝用梓 入朗古耶 見關白.
六月 賊始還兩王子臨海君⋅順和君 及宰臣黃廷彧⋅黃赫等 遣沈惟敬歸報.
而一面進圍晉州 聲言報前年戰敗之怨. 蓋賊於壬辰 圍晉州 牧使金時敏禦之 不克而退 故云然也.
八日而城陷 牧使徐禮元⋅判官成守璟⋅倡義使金千鎰⋅本道兵使崔慶會⋅忠淸兵使黃進⋅義兵復讎將高從厚等皆死. 軍民死者六萬餘人 牛馬鷄犬不遺. 賊皆夷城塡壕 堙井刊木 以快前憤 時六月二十八日也.
初朝廷聞賊南下 連下旨督諸將追賊. 都元帥金命元 巡察使權慄以下官義兵 皆聚於宜寧.
慄狃於幸州之捷 欲渡歧江前進. 郭再祐⋅高彦伯曰「賊勢方盛 我軍多烏合 敢戰者少 前頭又無糧餉 不可輕進.」他人依違而已.
李薲從事成好善 騃不曉事 奮臂責諸將逗遛. 與權慄議合 遂過江進至咸安 城空無所得 諸軍乏食 摘靑柿實以食 無復鬪心矣.
明日諜報賊從金海大至 衆或言當守咸安 或言退守鼎津 紛紜*11)不決而已. 聞賊炮響 人人洶懼 爭出城墮弔橋*12) 死者甚多.
還渡鼎津 望見賊兵從水陸來 蔽野塞川. 諸將各自散去 權慄⋅金命元⋅李薲⋅崔遠等 先向全羅道. 惟金千鎰⋅崔慶會⋅黃進等 入晉州 賊隨至圍之.
牧使徐禮元⋅判官成守璟 以唐將支待差使員 久在尙州 聞賊向本州 狼狽而還 纔二日矣.
州城本四面據險 壬辰移東面下就平地.
至是賊立飛樓八座 俯瞰城中 刈城外竹林 作大束 環列自蔽 以防矢石 從其內發鳥銃如雨 城中人不敢出頭. 又千鎰所率 皆京城市井召募之徒 千鎰又不知兵事 而自用太甚 且素惡禮元 主客相猜 號令乖違 是以甚敗.
惟黃進守東城 戰數日 爲飛丸所中死. 軍人奪氣 而外援不至 適天雨城壞 賊蟻附而入. 城內人方束荊投石 極力禦之 賊幾卻 千鎰軍守北門 意城已陷先潰. 賊在山上 望見軍潰 一擁而登 諸軍大亂. 千鎰在矗石樓 與崔慶會攜手*13)痛哭 赴江死. 軍民得脫者 數人而已.
自有倭變以來 人死未有如此戰之甚者.
朝廷以千鎰死義 贈以崇秩議政府右贊成 父以權慄敢戰不畏賊 代命元爲元帥.
劉總兵綎 聞晉陷 自八莒馳至陝川,吳惟忠自鳳溪至草溪 以護右道.
賊亦旣破晉州 還釜山 聲言待天朝許和 及渡海云.
왜적(倭敵)들은 물러가서 바닷가에 나누어 진을 쳤다. 그들은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浦)로부터 동래(東萊)⋅김해(金海)⋅웅천(熊川)⋅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졌는데, 무릇 16둔진[十六屯]이나 되었고, 이들은 다 산과 바다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고는 오래도록 머무를 계획을 마련하며 바다를 건너 돌아가기를 좋아하지 않았다.(돌아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명(明)나라 조정에서는 또 사천총병(泗川總兵) 유정(劉綎)*1)으로 하여금 복건(福建)⋅서촉(西蜀)⋅남만(南蠻) 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5천 명을 거느리고 계속 나와서 성주(星州)의 팔거(八莒)에 주둔하게 하고, 남장(南將) 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의 봉계(鳳溪)에 주둔하게 하고, 이영(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주둔하게 하고, 낙상지(駱尙志)⋅왕필적(王必迪)은 경주(慶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사면으로 둘러싸고 서로 버티기만 하며 진격하지 않았다.
그들의 군량은 호서(湖西)지방과 호남(湖南)지방[兩湖]에서 가져왔는데, 험준한 산길을 넘어와서 여러 진둔(陣屯)으로 나눠 공급하게 되니 백성들의 힘이 더욱 곤궁하여졌다. 제독(提督 : 이여송)은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가서 倭敵을 타일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라고 하였다. 그는 또 서일관(徐一貫)과 사용재(謝用梓)로 하여금 낭고야(郞古耶 : 名古屋)로 들어가서 관백(關白 : 豊臣秀吉)을 만나보게 하였다. 6월에 倭敵은 비로소 두 분 왕자(王子)님 임해군(臨海君)⋅순화군(順和君)과 재신(宰臣) 황정욱(黃廷彧)⋅황혁(黃赫) 등을 돌려보내고, 심유경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倭敵은 나아가 진주성[晉州]을 포위하고 '지난해 싸움에 패한 원수를 갚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대게 倭敵이 임진년[壬辰 : 1592]에 진주를 포위하였으나, 목사(牧使) 김시민(金時敏)이 이를 잘 막아내어 패배하고 물러갔던 까닭으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진주성은 倭敵이 포위한지 8일 만에 함락되었는데,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2)⋅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경상병사〔本道兵使〕최경회崔慶會*3)⋅충청병사(忠淸兵使) 황진(黃進)*4)⋅의병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髙從厚) 등이 다 전사하고, 군인과 백성 6만여 명이 죽고, 닭⋅개 짐승들까지도 남지 않았다. 倭敵들은 성을 무너뜨리고 참호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베어 버리는 등의 만행으로 지난해 패전했던 분풀이를 제멋대로 하였는데, 이때가 1593년 계사년 6월 28일이었다.
이보다 먼저 조정에서는 倭敵이 남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왕명을 내리고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倭敵을 추격하게 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순찰사(巡察使) 권율(權慄) 이하 관군과 의병은 다 의령(宜寧)에 모였다. 이때 권율(權慄)은 행주(幸州)싸움에 이긴 데 자신을 가지고 기강(岐江)*5)을 건너 앞으로 나아가 치려 하였다. 곽재우(郭再祐)⋅고언백(髙彦伯)은 말하기를, "倭敵의 세력은 바야흐로 강성한데 우리 군사들은 쓸모없는 군사들[烏合之卒]이 많아서 싸움을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적으며, 앞길에는 또 군량도 없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자, 다른 사람들도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이빈(李薲)의 종사관[從事] 성호선(成好善)*6)은 어리석어 사세를 똑똑히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팔을 휘두르면서 여러 장수들이 머뭇거리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는 권율(權慄)과 의논이 맞아 드디어는 군사를 거느리고 기강을 건너 나아가 함안(咸安)에 이르렀는데, 성은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모든 군사들은 식사를 못하고 익지도 않은 푸른 감을 따서 먹었으니 다시 싸울 마음조차 없어졌다.
그 다음날 첩자가 "倭敵들이 김해(金海)로부터 크게 오고 있다."고 알려 왔다. 이때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마땅히 함안(咸安)을 지켜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러가서 정진(鼎津)을 지켜야 한다."는 등으로 의논이 분분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고 있었는데, 倭敵의 포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앞을 다투어 성 밖으로 나가다가 적교(弔橋)*7)에서 떨어져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하며 돌아와 정진(鼎津)을 건너 바라보니 倭敵들은 강물과 육지로부터 몰려오는데, 들판을 덮고 강물을 메워 덤벼들므로 여러 장수 들은 그만 저마다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권율(權慄)⋅김명원(金命元)⋅이빈(李薲)⋅최원(崔遠) 등은 먼저 전라도(全羅道)를 향하여 가고, 오직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 등은 진주(晉州)로 들어갔는데 倭敵은 뒤따라 와서 성을 포위하였다. 진주목사(晉州牧使) 서예원(徐禮元)과 판관(判官) 성수경(成守璟)은 明나라 장수의 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8)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상주(尙州)에 있다가 倭敵들이 진주[本州]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낭패하여 돌아왔는데, 겨우 2일 뒤에 倭敵이 쳐들어온 것이다. 진주성[州城]은 본래 사면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있었는데, 임진년[壬辰 : 1592]에 동쪽으로 내려다 평지에 옮겨 쌓았다.
이때에 倭敵들은 비루(飛樓)*9) 여덟 개를 세워 놓고 그 위로 올라가서 성 안을 내려다보며 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성 밖의 대 밭에서 대를 베어다가 큰 다발을 만들어 둘러 가리워 시석(矢石 : 화살과 돌)을 막게 하고, 그 안에서 조총(鳥銃)을 빗발치듯 쏘았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은 감히 밖으로 머리를 내놓지도 못하였다. 또 김천일(金千鎰)이 거느린 군사들은 다 서울의 시정(市井)에서 불러 모아온 무리들이고, 김천일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고집이 너무 심하였다. 또 그는 평소에 서예원(徐禮元)을 미워하여 주인과 나그네 사이에 서로 시기를 하는 터였으므로 호령이 어긋나니, 이로 해서 더욱 패하였던 것이다.
오직 황진(黃進)은 동쪽 성을 지켜 며칠 동안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때 군인들은 기운이 빠지고 그리고 밖에서 돕는 군사도 오지 않았는데, 마침 비가 와서 성이 무너지니 倭敵들이 개미떼처럼 기어 들어왔다. 성 안 사람들은 가시나무를 묶어 세우고 돌을 던지며 힘을 다하여 막아내어 倭敵이 거의 물러갔는데, 이때 김천일(金千鎰)이 거느린 군사는 북쪽문을 지키다가 성이 이미 함락된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무너져 버렸다. 倭敵은 산 위에 있다가 우리 군사들이 무너지는 것을 바라보고 일제히 성으로 기어오르니 여러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때 김천일은 촉석루(矗石樓)*10)에 있다가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손을 붙들고 통곡하면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군사나 백성들로서 성 안에서 빠져나와 살아난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다.
倭敵의 변란이 일어난 이래 사람이 죽은 것이 이 싸움처럼 심한 것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의를 위하여 죽었다고 해서 벼슬을 높여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贊成)을 추증(追贈)하였다. 그리고 또 권율(權慄)이 용감하게 싸우며 倭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해서 김명원(金命元)을 대신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明나라 장수인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팔거(八莒)로부터 합천(陝川)으로 달려가고,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로부터 초계(草溪)에 이르러 경상우도[右道]를 수호하였다. 한편 倭敵들도 역시 진주(晉州)를 쳐부수고 난 뒤에는 부산(釜山)으로 돌아가서, 明나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는 것을 기다려 바다를 건너 돌아가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1)유정(劉綎) :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를 구원하러 왔던 명(明)나라 장수.
*2)성수경(成守璟 ?∼1593) : 본관은 창년(昌寧)이다. 조선조 宣祖 때의 문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진주판관(晉州判官)으로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을 지키다가 전사함.
*3)최경회(崔慶會, 1532∼1593) : 조선조 宣祖 때 무신.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시호는 충의(忠毅). 宣祖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의병장(義兵將)으로 각처에서 倭敵을 쳐부수고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진주성(晉州城)에서 倭敵을 막다가 전사함.
*4)황진(黃進, ?∼1593) : 조선조 宣祖 때 무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아술당(蛾述堂), 본관은 장수(長水). 무과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근왕병(勤王兵)을 모집하여 각처에서 倭敵을 격파하고, 충청병사(忠淸兵使)가 되어 진주성(晉州城)에서 倭敵을 막다가 전사함. 시호는 무민(武愍)이다.
*5)기강(岐江) : 진주(晉州) 남강(南江)의 하류. 낙동강(洛東江)과 합류하기 전 의령(宜寧) 동쪽을 흐르는 강.
*6)성호선(成好善, 1552∼?) : 조선조 중기의 무신. 자는 칙우(則優), 호는 월사(月蓑), 본관은 창녕(昌寧)이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일하고 뒤에 충주목사(忠州牧使)가 되었다.
*7)적교(弔橋) : 성(城)이나 참호(塹壕) 위에 설치하는 다리. 밧줄이나 쇠사슬로 매어 내리게 만든 것.
*8)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 : 공사에 복무하는 높은 벼슬아치의 식사나 용품을 공급하는 소임을 맡은 중앙에서 파견한 임시직.
*9)비루(飛樓) : 높게 만든 다락. 성을 공격할 때 성에 기대놓고 오르게 만든 공성기구(攻城器具).
*10)촉석루(矗石樓) : 진주(晉州)에 있는 누각.
*11)운(紜) : 어지러울 운. 사물이 많아서 어지러운 모양.
*12)적교(弔橋) : 와서 닿다. 적(弔) : ①조상할 조. 영혼을 위로하다. 안부를 묻다. 위문하다. 매어달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때에 음을 '적'으로 읽는다. ②이를 적.
*13)휴수(攜手) : 손을 마주 잡음. 친밀(親密)함. 휴(攜) : 携의 본자. 끌 휴. 이끌다. 잇다. 손에 가지다. 동자 㩦. 속자 㩗, 속자 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