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서울이 수복(收復)됨.
四月二十日 京城復 天兵入城 李提督館於小公主宅(後稱南別宮). 前一日 賊已出城矣.
余隨入城 見城中遺民 百不一存 其存者 皆飢羸*5)疲困 面色如鬼. 時日氣烘熟 人死及馬死者 處處暴露 臭穢滿城 行者渰鼻方過.
公私廬舍一空 獨自崇禮門以東 循南山下一帶 賊所止舍處稍存. 宗廟三闕及鐘樓各司館學在大街以北者 蕩然 惟餘灰燼而已. 小公主宅 亦倭將秀嘉所止 故見遺.
余先詣宗廟痛哭 次至提督下處 見伺候諸臣 號慟良久.
明朝更詣提督門下問起居 且言「賊兵纔退 去此應不遠 願發軍急追.」提督曰「吾意固然 所以不急追者 以漢江無船故耳.」
余曰「如老爺欲追賊 卑職當先出江面 整備舟艦.」提督曰「甚善.」
余出漢江. 先是 余行文京畿右監司成泳 水使李蘋 令賊去 急收江中大小船 毋失俱會漢江. 是時 船已到者八十隻.
余使人報提督船已辦. 食頃 營將李如柏 率萬餘兵 出江上 軍士半渡 日已向暮.
如柏忽稱足疾 乃曰「當還城中 醫疾可進.」乘轎而回. 已在漢南軍 皆還渡入城. 余痛心而無如之何 蓋提督實無意追賊 但以謾辭紿應而已.
二十三日 余遂病臥.
五月 李提督追賊 至聞慶而回. 宋侍郞始發牌文於提督 使之追賊. 時賊去已數十日 侍郞恐人議己縱賊不追 故作如此擧止以示之 其實畏賊 不敢進而回 賊在途緩緩而去 或留或行.
我軍之在沿途者 皆左右屛跡 無敢出擊者.
4월 20일에 서울이 수복(收復)되었다. 명(明)나라 군사가 도성[城]으로 들어오고 이제독(李提督 : 李如松)이 소공주(小公主)의 저택(邸宅 : 지난날 왕후의 집, 소공주의 저택은 뒤에 남별궁南別宮이라고 칭하였다.)에 객관을 정하였다. 이보다 하루 전에 왜적(倭敵)은 벌써 도성(都城)을 빠져나갔다. 나도 明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그 살아 있는 사람도 다 굶주리어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낯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公]과 사사[私]집 할 것 없이 하나도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1)으로부터 동쪽에서 남산(南山) 밑 일대에 倭敵들이 거처하던 곳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三闕] 및 종루(鐘樓)⋅각사(各司)⋅관학(館學)*2)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소공주댁(小公主宅)은 역시 倭敵의 장수 수가(秀嘉)가 머물러 있던 곳이었으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이여송]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들 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제독[이여송]을 찾아 가서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倭敵들의 군사가 겨우 물러갔으나,여기서 떠나갔다 해도 반드시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원컨대 군사를 일으켜 급히 추격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하니, 제독[이여송]은 말하기를, "나도 실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급히 추격하지 않는 까닭은 한강(漢江)에 배가 없는 때문일 따름입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만약 노야(老爺)*3)가 왜적을 추격하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한강 방면으로 나가서 배를 징발하겠습니다." 하니, 제독[이여송]은, "그러면 아주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한강으로 달려나갔다. 이보다 먼저 나는 공문을 경기우감사(京畿右監司) 성영(成泳)⋅수사(水使) 이빈(李蘋)에게 보내 倭敵들이 물러 간 뒤에는 급히 강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을 거두어 실수하는 일이 없이 다 한강에 모이도록 마련하라고 명령하였더니, 이때에 이미 도착한 배가 80여 척이나 되었다. 나는 곧 사람을 시켜 제독[이여송]에게 "배가 벌써 준비되었다."고 알렸더니, 조금 뒤에[식경(食頃) : 밥을 먹는 동안. 잠깐 동안] 영장(營將) 이여백(李如柏)이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변으로 나왔는데, 군사들이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 해가 이미 저물려 했다.
이때 이여백은 갑자기 발병이 났다고 칭하면서 이어 말하기를, "성 안으로 돌아가서 발병을 고쳐야만 진격하겠다."라고 하며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그러자 이미 한강의 남쪽으로 건너가 있는 군사들도 다 돌아와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통분하였 지만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는 대개 제독[이여송]은 실제로는 倭敵을 추격할 의사가 없으면서 다만 거짓말로 응하는 것처럼 속이는 수작이었다. 4월 23일에 나는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웠다. 5월에 이제독(李提督 : 李如松)은 倭敵을 추격한다면서 문경(聞慶)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은 비로소 패문(牌文)*4)을 제독[이여송]에게 발송하여 그로 하여금 倭敵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倭敵들은 떠나 간지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시랑[송응창]은 남들이 자기가 倭敵을 놓아 보내고 추격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여 보인 것이나, 실상은 제독[이여송]이 倭敵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倭敵들은 길에서 천천히 가면서 머무르기도 하고 혹은 가기도 하였는데, 우리 군사로서 연도를 지키던 자들도 다 왼쪽, 오른쪽으로 자취를 감추고 감히 나와서 공격하는 자가 없었다.
*1)숭례문(崇禮門) : 지금 서울의 남대문(南大門).
*2)관학(館學) :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 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을 총칭하는 말.
*3)노야(老爺) : 중국말로 높고 귀한 분에 대한 존칭. 우리말로는 대감이란 경칭(敬稱)과 같으며, 여기서는 이여송(李如松)을 가리킨다.
*4)패문(牌文) : 옛날 中國 공문의 한 가지. 中國에서 朝鮮에 칙사(勅使)를 파견할 때, 칙사의 파견 목적과 일정 등 칙사와 관련된 제반사항을 기록해 사전에 보내던 통지문(通知文).
*5)리(羸) : 여윌 리. 여위다. 약하다. 앓다. 피로하다. 괴로워하다. 고달프다
四月二十日 京城復 天兵入城 李提督館於小公主宅(後稱南別宮). 前一日 賊已出城矣.
余隨入城 見城中遺民 百不一存 其存者 皆飢羸*5)疲困 面色如鬼. 時日氣烘熟 人死及馬死者 處處暴露 臭穢滿城 行者渰鼻方過.
公私廬舍一空 獨自崇禮門以東 循南山下一帶 賊所止舍處稍存. 宗廟三闕及鐘樓各司館學在大街以北者 蕩然 惟餘灰燼而已. 小公主宅 亦倭將秀嘉所止 故見遺.
余先詣宗廟痛哭 次至提督下處 見伺候諸臣 號慟良久.
明朝更詣提督門下問起居 且言「賊兵纔退 去此應不遠 願發軍急追.」提督曰「吾意固然 所以不急追者 以漢江無船故耳.」
余曰「如老爺欲追賊 卑職當先出江面 整備舟艦.」提督曰「甚善.」
余出漢江. 先是 余行文京畿右監司成泳 水使李蘋 令賊去 急收江中大小船 毋失俱會漢江. 是時 船已到者八十隻.
余使人報提督船已辦. 食頃 營將李如柏 率萬餘兵 出江上 軍士半渡 日已向暮.
如柏忽稱足疾 乃曰「當還城中 醫疾可進.」乘轎而回. 已在漢南軍 皆還渡入城. 余痛心而無如之何 蓋提督實無意追賊 但以謾辭紿應而已.
二十三日 余遂病臥.
五月 李提督追賊 至聞慶而回. 宋侍郞始發牌文於提督 使之追賊. 時賊去已數十日 侍郞恐人議己縱賊不追 故作如此擧止以示之 其實畏賊 不敢進而回 賊在途緩緩而去 或留或行.
我軍之在沿途者 皆左右屛跡 無敢出擊者.
4월 20일에 서울이 수복(收復)되었다. 명(明)나라 군사가 도성[城]으로 들어오고 이제독(李提督 : 李如松)이 소공주(小公主)의 저택(邸宅 : 지난날 왕후의 집, 소공주의 저택은 뒤에 남별궁南別宮이라고 칭하였다.)에 객관을 정하였다. 이보다 하루 전에 왜적(倭敵)은 벌써 도성(都城)을 빠져나갔다. 나도 明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왔는데, 성 안에 남아있는 백성들을 보니 백 명에 한 명 꼴도 살아남아 있지 않았고, 그 살아 있는 사람도 다 굶주리어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낯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난 채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이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다.
관청[公]과 사사[私]집 할 것 없이 하나도 없이 다 없어져 버리고, 오직 숭례문(崇禮門)*1)으로부터 동쪽에서 남산(南山) 밑 일대에 倭敵들이 거처하던 곳에만 조금 남아 있었다. 종묘(宗廟)와 세 대궐[三闕] 및 종루(鐘樓)⋅각사(各司)⋅관학(館學)*2) 등 큰 거리 이북에 있는 것들은 모두 다 타서 없어지고 오직 재만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소공주댁(小公主宅)은 역시 倭敵의 장수 수가(秀嘉)가 머물러 있던 곳이었으므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나는 먼저 종묘를 찾아가서 통곡하였다. 다음으로 제독[이여송]이 거처하는 곳에 이르러, 문안하려고 온 여러 사람들 을 보고 한참 동안이나 소리치며 통곡하였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제독[이여송]을 찾아 가서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倭敵들의 군사가 겨우 물러갔으나,여기서 떠나갔다 해도 반드시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원컨대 군사를 일으켜 급히 추격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하니, 제독[이여송]은 말하기를, "나도 실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급히 추격하지 않는 까닭은 한강(漢江)에 배가 없는 때문일 따름입니다."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만약 노야(老爺)*3)가 왜적을 추격하려고 한다면 내가 먼저 한강 방면으로 나가서 배를 징발하겠습니다." 하니, 제독[이여송]은, "그러면 아주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곧 한강으로 달려나갔다. 이보다 먼저 나는 공문을 경기우감사(京畿右監司) 성영(成泳)⋅수사(水使) 이빈(李蘋)에게 보내 倭敵들이 물러 간 뒤에는 급히 강 속에 있는 크고 작은 배들을 거두어 실수하는 일이 없이 다 한강에 모이도록 마련하라고 명령하였더니, 이때에 이미 도착한 배가 80여 척이나 되었다. 나는 곧 사람을 시켜 제독[이여송]에게 "배가 벌써 준비되었다."고 알렸더니, 조금 뒤에[식경(食頃) : 밥을 먹는 동안. 잠깐 동안] 영장(營將) 이여백(李如柏)이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강변으로 나왔는데, 군사들이 절반쯤 강을 건넜을 때 해가 이미 저물려 했다.
이때 이여백은 갑자기 발병이 났다고 칭하면서 이어 말하기를, "성 안으로 돌아가서 발병을 고쳐야만 진격하겠다."라고 하며 가마를 타고 돌아갔다. 그러자 이미 한강의 남쪽으로 건너가 있는 군사들도 다 돌아와서 성 안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나는 마음속으로 통분하였 지만 그러나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는 대개 제독[이여송]은 실제로는 倭敵을 추격할 의사가 없으면서 다만 거짓말로 응하는 것처럼 속이는 수작이었다. 4월 23일에 나는 병이 나서 자리에 누웠다. 5월에 이제독(李提督 : 李如松)은 倭敵을 추격한다면서 문경(聞慶)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은 비로소 패문(牌文)*4)을 제독[이여송]에게 발송하여 그로 하여금 倭敵을 추격하게 하였다. 이때 倭敵들은 떠나 간지 수십 일이나 되었는데, 시랑[송응창]은 남들이 자기가 倭敵을 놓아 보내고 추격하지 않는다고 비난을 할까 두려워한 까닭으로 이와 같은 행동을 하여 보인 것이나, 실상은 제독[이여송]이 倭敵을 두려워하여 감히 진격을 하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었다. 이때 倭敵들은 길에서 천천히 가면서 머무르기도 하고 혹은 가기도 하였는데, 우리 군사로서 연도를 지키던 자들도 다 왼쪽, 오른쪽으로 자취를 감추고 감히 나와서 공격하는 자가 없었다.
*1)숭례문(崇禮門) : 지금 서울의 남대문(南大門).
*2)관학(館學) : 성균관(成均館)과 사학(四學 : 중학中學⋅동학東學⋅남학南學⋅서학西學)을 총칭하는 말.
*3)노야(老爺) : 중국말로 높고 귀한 분에 대한 존칭. 우리말로는 대감이란 경칭(敬稱)과 같으며, 여기서는 이여송(李如松)을 가리킨다.
*4)패문(牌文) : 옛날 中國 공문의 한 가지. 中國에서 朝鮮에 칙사(勅使)를 파견할 때, 칙사의 파견 목적과 일정 등 칙사와 관련된 제반사항을 기록해 사전에 보내던 통지문(通知文).
*5)리(羸) : 여윌 리. 여위다. 약하다. 앓다. 피로하다. 괴로워하다. 고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