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심유경(沈惟敬)의 적극 강화책(講和策).
沈遊擊惟敬 再入京城 誘賊退兵.
四月初七日 提督率兵 自平壤還開城府.
先是金千鎰陣中 有李藎*5)忠者 自請入京探候賊情 得見二王子及長溪君黃廷彧等 還言賊有講和意.
旣而賊投書於龍山舟師乞和 千鎰送其書於余.
余念提督已無戰意 或欲假此而卻賊 則未必不更還開城 庶幾了事. 以其書示査大受 査卽使家丁李慶 馳報平壤. 於是提督 又使惟敬來.
金命元見惟敬曰「賊忿平壤見欺 必有不善意 何可更入?」惟敬曰「賊自不速退 故敗 何預我也?」還入.
在賊中所言 雖不聞 大槩責還王子陪臣 還軍釜山 然後許和.
賊請奉約束 提督遂還開城.
余呈文提督 極言和好非計 不如擊之. 提督批示曰「此先得我心之所同然者.」無聽用意.
又使遊擊將軍周弘謨 往賊營. 余與金元帥 適在權慄陣中 遇於坡州. 弘謨使余等 入參旗牌. 余曰「此是入倭營旗牌 我何爲參拜? 且有宋侍郞禁殺賊牌文 尤不可承受.」弘謨强之三四 余不答 騎馬還東坡.
弘謨使人于提督言狀 提督大怒曰「旗牌乃皇命 雖㺚者 見輒拜之 何爲不拜? 我行軍法 然後回軍.」
接伴使李德馨 急報於余曰「朝日不可不來謝.」明日余與金元帥 往開城 詣門通名 提督怒不見. 金元帥欲退 余曰「提督應試余 姑待之.」
時小雨 余二人拱立門外 有頃 提督之人 出門覘視 而入者再 俄而許入 提督立于堂上.
余就前行禮 仍謝曰「小的雖甚愚劣 豈不知旗牌爲可敬? 但旗牌傍有牌文 不許我國人殺賊 私心竊痛之 不敢參拜 罪無所逃.」提督有慚色 乃曰「此言甚是 牌文乃宋侍郞令 不關吾事.」因曰「此間流言甚多 侍郞若聞陪臣不參旗牌 我容而不問 則必幷責我. 須爲呈文 略辨事情來 脫侍郞有問 我以此解之 不問則置之.」
余二人拜辭而退 依所言呈文.
自是提督遣人 往來倭陣相續.
一日余與元帥 往候提督 還東坡到天壽亭前 遇査將家丁李慶 自東坡入開城 馬上相揖而過.
至招賢里 有漢人三騎自後馳來 喝問體察使安在? 余應之曰「我是也.」叱回馬 一人手持鐵鎖 以長鞭亂捶余馬曰「走走.」
余不知何事 只得回馬向開城而走 其人從馬後鞭之不已. 從者皆落後 獨軍官金霽 從事辛慶晉 盡力追隨. 過靑郊驛 將至土城隅 又有一騎自城內走馬而至 謂三騎曰云云. 於是 三騎揖余曰「可去矣.」
余恍然不測而回. 翌日因李德馨通示 始知之 提督信任家丁 自外入謂提督曰「柳體察不欲講和 悉去臨津船隻 勿令通使於倭營.」
提督遽發怒 欲拿余梱打四十 當余之未至也 提督瞋*6)目奮臂 或坐或起 左右皆慄*7).
有頃 李慶至 提督問臨津有船否 慶曰「有船 往來無阻.」提督卽使人止追余者 謂家丁妄言 痛打數百 氣絶曳出 悔其怒余.
謂人曰「若體察使來到 吾當何以處之?」
蓋提督常謂余不肯和議 素有不平心 故纔聞人言 不復省察 暴怒如此 人皆爲余危之.
後數日 提督又使遊擊戚金⋅錢世禎二人 以旗牌至東坡 招余及金元帥⋅李觀察廷馨同坐 因從容言「賊請出二王子陪臣 退還京城而去 今當從其所請 紿*8)賊出城 然後行計追剿.」乃提督使之來探余意肯否也. 余猶執前議 往復不已.
世禎性躁*9) 發怒大罵曰「然則爾國王 何以棄城逃避耶?」
余徐曰「遷國圖存 亦或一道.」是時戚金 但數數視余與世禎 微笑而無言 世禎等遂回
四月十九日 提督領大軍至東坡 宿于査總兵幕 蓋賊已約退兵 故將入京城也.
余詣提督下處候間 提督不見 謂譯者曰「體察使不快於予 亦來問耶?」
유격장[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다시 서울로 들어가서 왜적(倭敵)들에게 군사를 물러가게 하라고 달래었다. 4월 7일에는 제독(提督 : 李如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부터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청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倭敵들의 적세를 탐지하고, 두 왕자[二王子 : 臨海君⋅順和君]와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倭敵들이 강화(講和)할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倭敵이 서한을 용산(龍山)의 우리 수군[舟師]에게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김천일은 그 서한을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제독[이여송]이 이미 싸울 의사가 없으니, 혹은 이 (강 화講和)를 빌어 倭敵을 물리치려 한다면 다시 개성(開城)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러면 거의 일을 끝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 다. 그 글을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였더니, 그는 곧 가정(家丁) 이경(李慶)으로 하여 빨리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알리게 하였다.
이에 있어서 제독 이여송은 또 심유경[惟敬]을 오게 한 것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심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倭敵들이 평양(平壤)에서 속임을 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것인데, 어찌 다시 적진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적 들이 스스로 빨리 물러가지 않았던 까닭으로 패(敗)하였는데,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하면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가 외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있으며 말한 것은 비록 듣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왕자(王子)와 배신(陪臣)*1)을 돌려보내라고 꾸짖고,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돌아간 연후에야 강화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으리라.
倭敵이 약속을 받들이겠다고 청하여 제독 이여송은 드디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정문(呈文)*2)을 보내어 <화호(和好)하는 것이 좋은 계획이 아니고, 이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제독 이여송은 회답하여 말하기 를, <우선 내 마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도 그 의견을 들어 쓸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격장군(遊擊將軍) 주홍모(周弘謨)로 하여금 倭敵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나는 김원수(金元帥 : 金命元)와 함께 마침 권율(權慄)의 진중에 있다가 그를 파주(坡州)에서 만났다. 주홍모는 우리들에게 들어와서 기패(旗牌)*3)에 참배하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것은 곧 倭敵의 진영으로 들어갈 기패(旗牌)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참배한다는 말이오? 또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이 倭敵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牌文)도 있으니 더욱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주홍모[弘謨]는 이를 세 번, 네 번 강요하였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타고 동파(東坡)로 돌아왔다.
주흥모가 사람을 시켜 제독 이여송에게 이런 일을 말하게 하니, 제독[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기패(旗牌)는 곧 황제의 명령이므로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보면 문득 절을 하는데,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 군법으로 처리한 연후에 회군하리라." 하였다. 접반사
(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이 이런 점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다음날 나는 김원수(金元帥)와 함께 개성(開城)으로 가서 영문[門]을 찾아 이름[名]을 통하였더니, 제독[이여송]은 노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김원수는 물러가려 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제독[이여송]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리니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하였다. 이때 비가 조금 왔다. 우리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문 밖에서 있으려니까, 조금 뒤에 제독[이여송]이 보낸 사람이 문을 나와 우리를 엿보고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하기를 두 번 되풀이하더니 조금 있다가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제독은 마루 위에 있었다.
내가 그 앞으로 나가서 예를 표하고 사과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다 하더라도 어찌 기패(旗牌)를 공경할 줄 알지 못하겠습 니까? 다만 기패의 곁에 패문(牌文)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倭敵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사사로운 마음이었으나 그윽 이 이를 통분하게 여겨 감히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벗어날 수는 없겠습니다." 하니, 제독[이여송]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지으면서, 곧 말하기를, "그 말은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패문(牌文)은 곧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의 명령이니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하고는 말하기를, "요사이에는 근거없는 소문[流言]이 많습니다. 송시랑[侍郞]이 만약 배신(陪臣)이 기패(旗牌)에 참배하지 않았는 데, 내가 이를 용서하고 문책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아울러 나까지도 책망을 당할 것이니, 모름지기 정문(呈文)을 만들어 대략 그 사정을 변명하여 보내오도록 하시오.
만약 송시랑이 문책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써 해명할 것이고, 묻지 않으면 이 문제를 그대로 놓아두리다." 하였다. 우리들 두 사람 은 인사하고 물러나와서 그 말대로 정문(呈文)을 만들어 보냈다. 이로부터 제독[이여송]은 사람을 파견하여 倭敵의 진영을 왕래하는 일이 잇따랐다. 하루는 내가 원수[金命元]와 함께 가서 제독[이여송]의 동정을 엿보고 동파(東坡)로 돌아오다가 천수정(天壽亭) 앞에 이르렀는데, 사장군[査將 : 査大受]의 가정(家丁)*4) 이경(李慶)을 만났다. 그는 동파로부터 개성(開城)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말 위에서 서로 읍(揖)하고 지나쳤다.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렀을 때 明나라 사람 셋이 말을 타고 내 뒤로부터 달려와서 큰 소리로 "체찰사(體察使)가 어디 계시오 ?" 하고 물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바로 체찰사다." 하였더니, 그들은 "말을 돌이키라."고 호통을 쳤다. 그중 한 사람이 손에 쇠사슬을 들고 긴 채찍으로 내가 탄 말을 막 후려갈기며 큰소리로, "달려라,달려라." 하며 길을 재촉하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뜻에 맡겨 개성으로 달리는데, 그 사람은 말 뒤에서 말에 채찍질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다 뒤에 떨어지고, 오직 군관(軍官) 김제(金霽)와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만이 힘을 다하여 뒤쫓아 따라왔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 장차 토성(土城)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의 기병(騎兵)이 성 안으로부터 말을 달려 와서 세 사람의 기병에 게 무슨 말인지 수군거렸다. 이에 이르러 세 사람의 기병은 나에게 읍하면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멍하니 무슨 까닭인
지 헤아리지 못하고 돌아섰는데, 그 다음날 이덕형(李德馨)이 통지한 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의 신임하는 가정(家丁) 한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독[이여송]에게 이르기를, "유체찰(柳體察 : 柳成龍)이 강화(講和)를 하지 않으려고 임진강(臨津江)의 배들을 모두 없애 버려 강화를 위한 사자들이 倭敵의 진영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제독[이여송]은 갑자기 성을 내며 나를 잡아다가 곤장 40대를 치려고 하였다는 것인데, 내가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제독[이여송]은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으며, 혹은 앉았다 혹은 일어났다 하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다 무서워 떨었다. 그 얼마 있다가 이경(李慶)이 이르렀는데, 제독[이여송]은 그에게 임진강(臨津江)에 배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므로, 이경이 말하기를, "배가 있어서 왕래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여송은 곧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을 그만두게 하고, 가정(家丁)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수백 대나 심한 매를 쳐서 숨이 끊어진 뒤에야 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노여워한 것을 뉘우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만약 체찰사(體察使 : 유성룡)가 온다면 내 어떻게 대처하랴?" 하였다.
이는 대개 제독 이여송이 늘 내가 화의(和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평소부터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까닭으로, 남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살펴볼 사이도 없이 갑자기 이같이 성을 내었다. 이때 사람들은 다 나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에 제독 이여송은 또 유격(遊擊) 척금(戚金)⋅전세정(錢世禎) 두 사람으로 하여금 기패(旗牌)를 가지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나와 김원수[金命元]와 관찰사(觀察使) 이덕형(李德馨)을 불러 함께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적이 두 분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 보내고 서울에서 물러나 돌아가 기를 청하니, 곧 그들의 청하는 바에 따라 속여 성을 나오게 한 뒤에 계책을 써서 추격합시다." 하였는데,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이 그들을 시켜 와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뜻을 탐색하게 한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전의 논의를 고집하여 서로 오가기를 마지않았다.
전세정[世禎]은 성질이 조급하여 성을 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 국왕은 어찌하여 도성(都城)을 버리고 도피하였는가?" 하였다. 나는 천천히 말하기를, "임시로 국도(國都 : 서울)를 옮겨 회복을 도모하는 것도 역시 한 가지 방도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척금(戚金)은 다만 나를 자주 살펴보며 전세정과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전세정 등은 드디어 돌아갔다. 4월 19일에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사총병(査總兵 : 査大受)의 막사에 유숙하였다. 이는 대개 倭敵이 벌써 퇴병(退兵)할 것을 약속하였 으므로 장차 서울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제독 이여송의 숙소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으나, 그는 만나 주지 않고 통역관에게 일러 말하기를,"체찰사(體察使 : 柳成龍)는 나에게 불쾌한 생각을 갖고 있을 터인데, 또 찾아와서 문안합니까?" 라고 할뿐이었다.
*1)배신(陪臣) : 황정욱(黃廷彧)과 김귀영(金貴榮) 등을 이름. 두 왕자(王子)와 함께 가등청정(加籐淸正)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어 있었다. 배신(陪臣)이란 말은 제후(諸侯)의 신하가 천자(天子)에게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明)나라가 우리나라를 제후의 나라로 인정했기에 배신(陪臣)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2)정문(呈文) : 공문의 한 형식. 하급기관이 상급기관에게, 또는 아래 관원이 위 관원에게 진정할 때 쓰는 공문.
*3)기패(旗牌) : 임금의 명령을 적은 깃발.
*4)가정(家丁) : 집에서 신임하고 부리는 복역(僕役)들을 말함.
*5)신(藎) : ①조개풀 신. 나아가다. 나머지. 타다. 남음. ②풀 이름 진. ※대법원 지정 인명용 한자의 음은 신이다. 동자
沈遊擊惟敬 再入京城 誘賊退兵.
四月初七日 提督率兵 自平壤還開城府.
先是金千鎰陣中 有李藎*5)忠者 自請入京探候賊情 得見二王子及長溪君黃廷彧等 還言賊有講和意.
旣而賊投書於龍山舟師乞和 千鎰送其書於余.
余念提督已無戰意 或欲假此而卻賊 則未必不更還開城 庶幾了事. 以其書示査大受 査卽使家丁李慶 馳報平壤. 於是提督 又使惟敬來.
金命元見惟敬曰「賊忿平壤見欺 必有不善意 何可更入?」惟敬曰「賊自不速退 故敗 何預我也?」還入.
在賊中所言 雖不聞 大槩責還王子陪臣 還軍釜山 然後許和.
賊請奉約束 提督遂還開城.
余呈文提督 極言和好非計 不如擊之. 提督批示曰「此先得我心之所同然者.」無聽用意.
又使遊擊將軍周弘謨 往賊營. 余與金元帥 適在權慄陣中 遇於坡州. 弘謨使余等 入參旗牌. 余曰「此是入倭營旗牌 我何爲參拜? 且有宋侍郞禁殺賊牌文 尤不可承受.」弘謨强之三四 余不答 騎馬還東坡.
弘謨使人于提督言狀 提督大怒曰「旗牌乃皇命 雖㺚者 見輒拜之 何爲不拜? 我行軍法 然後回軍.」
接伴使李德馨 急報於余曰「朝日不可不來謝.」明日余與金元帥 往開城 詣門通名 提督怒不見. 金元帥欲退 余曰「提督應試余 姑待之.」
時小雨 余二人拱立門外 有頃 提督之人 出門覘視 而入者再 俄而許入 提督立于堂上.
余就前行禮 仍謝曰「小的雖甚愚劣 豈不知旗牌爲可敬? 但旗牌傍有牌文 不許我國人殺賊 私心竊痛之 不敢參拜 罪無所逃.」提督有慚色 乃曰「此言甚是 牌文乃宋侍郞令 不關吾事.」因曰「此間流言甚多 侍郞若聞陪臣不參旗牌 我容而不問 則必幷責我. 須爲呈文 略辨事情來 脫侍郞有問 我以此解之 不問則置之.」
余二人拜辭而退 依所言呈文.
自是提督遣人 往來倭陣相續.
一日余與元帥 往候提督 還東坡到天壽亭前 遇査將家丁李慶 自東坡入開城 馬上相揖而過.
至招賢里 有漢人三騎自後馳來 喝問體察使安在? 余應之曰「我是也.」叱回馬 一人手持鐵鎖 以長鞭亂捶余馬曰「走走.」
余不知何事 只得回馬向開城而走 其人從馬後鞭之不已. 從者皆落後 獨軍官金霽 從事辛慶晉 盡力追隨. 過靑郊驛 將至土城隅 又有一騎自城內走馬而至 謂三騎曰云云. 於是 三騎揖余曰「可去矣.」
余恍然不測而回. 翌日因李德馨通示 始知之 提督信任家丁 自外入謂提督曰「柳體察不欲講和 悉去臨津船隻 勿令通使於倭營.」
提督遽發怒 欲拿余梱打四十 當余之未至也 提督瞋*6)目奮臂 或坐或起 左右皆慄*7).
有頃 李慶至 提督問臨津有船否 慶曰「有船 往來無阻.」提督卽使人止追余者 謂家丁妄言 痛打數百 氣絶曳出 悔其怒余.
謂人曰「若體察使來到 吾當何以處之?」
蓋提督常謂余不肯和議 素有不平心 故纔聞人言 不復省察 暴怒如此 人皆爲余危之.
後數日 提督又使遊擊戚金⋅錢世禎二人 以旗牌至東坡 招余及金元帥⋅李觀察廷馨同坐 因從容言「賊請出二王子陪臣 退還京城而去 今當從其所請 紿*8)賊出城 然後行計追剿.」乃提督使之來探余意肯否也. 余猶執前議 往復不已.
世禎性躁*9) 發怒大罵曰「然則爾國王 何以棄城逃避耶?」
余徐曰「遷國圖存 亦或一道.」是時戚金 但數數視余與世禎 微笑而無言 世禎等遂回
四月十九日 提督領大軍至東坡 宿于査總兵幕 蓋賊已約退兵 故將入京城也.
余詣提督下處候間 提督不見 謂譯者曰「體察使不快於予 亦來問耶?」
유격장[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다시 서울로 들어가서 왜적(倭敵)들에게 군사를 물러가게 하라고 달래었다. 4월 7일에는 제독(提督 : 李如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부터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에 이신충(李藎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청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倭敵들의 적세를 탐지하고, 두 왕자[二王子 : 臨海君⋅順和君]와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倭敵들이 강화(講和)할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倭敵이 서한을 용산(龍山)의 우리 수군[舟師]에게 보내어 화친하기를 청하므로, 김천일은 그 서한을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제독[이여송]이 이미 싸울 의사가 없으니, 혹은 이 (강 화講和)를 빌어 倭敵을 물리치려 한다면 다시 개성(開城)으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러면 거의 일을 끝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 다. 그 글을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였더니, 그는 곧 가정(家丁) 이경(李慶)으로 하여 빨리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알리게 하였다.
이에 있어서 제독 이여송은 또 심유경[惟敬]을 오게 한 것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심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倭敵들이 평양(平壤)에서 속임을 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지 않은 생각을 가졌을 것인데, 어찌 다시 적진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적 들이 스스로 빨리 물러가지 않았던 까닭으로 패(敗)하였는데, 나에게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이오?" 하면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가 외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있으며 말한 것은 비록 듣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왕자(王子)와 배신(陪臣)*1)을 돌려보내라고 꾸짖고,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돌아간 연후에야 강화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으리라.
倭敵이 약속을 받들이겠다고 청하여 제독 이여송은 드디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정문(呈文)*2)을 보내어 <화호(和好)하는 것이 좋은 계획이 아니고, 이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제독 이여송은 회답하여 말하기 를, <우선 내 마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라고 하면서도 그 의견을 들어 쓸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격장군(遊擊將軍) 주홍모(周弘謨)로 하여금 倭敵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나는 김원수(金元帥 : 金命元)와 함께 마침 권율(權慄)의 진중에 있다가 그를 파주(坡州)에서 만났다. 주홍모는 우리들에게 들어와서 기패(旗牌)*3)에 참배하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것은 곧 倭敵의 진영으로 들어갈 기패(旗牌)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참배한다는 말이오? 또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이 倭敵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牌文)도 있으니 더욱 받들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주홍모[弘謨]는 이를 세 번, 네 번 강요하였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타고 동파(東坡)로 돌아왔다.
주흥모가 사람을 시켜 제독 이여송에게 이런 일을 말하게 하니, 제독[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기패(旗牌)는 곧 황제의 명령이므로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보면 문득 절을 하는데,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 군법으로 처리한 연후에 회군하리라." 하였다. 접반사
(接伴使) 이덕형(李德馨)이 이런 점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다음날 나는 김원수(金元帥)와 함께 개성(開城)으로 가서 영문[門]을 찾아 이름[名]을 통하였더니, 제독[이여송]은 노하여 만나주지 않았다. 김원수는 물러가려 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제독[이여송]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리니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하였다. 이때 비가 조금 왔다. 우리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문 밖에서 있으려니까, 조금 뒤에 제독[이여송]이 보낸 사람이 문을 나와 우리를 엿보고 들어갔다 다시 나왔다 하기를 두 번 되풀이하더니 조금 있다가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어가니 제독은 마루 위에 있었다.
내가 그 앞으로 나가서 예를 표하고 사과하기를, "우리들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다 하더라도 어찌 기패(旗牌)를 공경할 줄 알지 못하겠습 니까? 다만 기패의 곁에 패문(牌文)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倭敵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사사로운 마음이었으나 그윽 이 이를 통분하게 여겨 감히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벗어날 수는 없겠습니다." 하니, 제독[이여송]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지으면서, 곧 말하기를, "그 말은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패문(牌文)은 곧 송시랑(宋侍郞 : 宋應昌)의 명령이니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입니다." 하고는 말하기를, "요사이에는 근거없는 소문[流言]이 많습니다. 송시랑[侍郞]이 만약 배신(陪臣)이 기패(旗牌)에 참배하지 않았는 데, 내가 이를 용서하고 문책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시 아울러 나까지도 책망을 당할 것이니, 모름지기 정문(呈文)을 만들어 대략 그 사정을 변명하여 보내오도록 하시오.
만약 송시랑이 문책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그것으로써 해명할 것이고, 묻지 않으면 이 문제를 그대로 놓아두리다." 하였다. 우리들 두 사람 은 인사하고 물러나와서 그 말대로 정문(呈文)을 만들어 보냈다. 이로부터 제독[이여송]은 사람을 파견하여 倭敵의 진영을 왕래하는 일이 잇따랐다. 하루는 내가 원수[金命元]와 함께 가서 제독[이여송]의 동정을 엿보고 동파(東坡)로 돌아오다가 천수정(天壽亭) 앞에 이르렀는데, 사장군[査將 : 査大受]의 가정(家丁)*4) 이경(李慶)을 만났다. 그는 동파로부터 개성(開城)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말 위에서 서로 읍(揖)하고 지나쳤다.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렀을 때 明나라 사람 셋이 말을 타고 내 뒤로부터 달려와서 큰 소리로 "체찰사(體察使)가 어디 계시오 ?" 하고 물으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바로 체찰사다." 하였더니, 그들은 "말을 돌이키라."고 호통을 쳤다. 그중 한 사람이 손에 쇠사슬을 들고 긴 채찍으로 내가 탄 말을 막 후려갈기며 큰소리로, "달려라,달려라." 하며 길을 재촉하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뜻에 맡겨 개성으로 달리는데, 그 사람은 말 뒤에서 말에 채찍질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다 뒤에 떨어지고, 오직 군관(軍官) 김제(金霽)와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만이 힘을 다하여 뒤쫓아 따라왔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 장차 토성(土城)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의 기병(騎兵)이 성 안으로부터 말을 달려 와서 세 사람의 기병에 게 무슨 말인지 수군거렸다. 이에 이르러 세 사람의 기병은 나에게 읍하면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멍하니 무슨 까닭인
지 헤아리지 못하고 돌아섰는데, 그 다음날 이덕형(李德馨)이 통지한 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의 신임하는 가정(家丁) 한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독[이여송]에게 이르기를, "유체찰(柳體察 : 柳成龍)이 강화(講和)를 하지 않으려고 임진강(臨津江)의 배들을 모두 없애 버려 강화를 위한 사자들이 倭敵의 진영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만듭니다."라고 하였다.
제독[이여송]은 갑자기 성을 내며 나를 잡아다가 곤장 40대를 치려고 하였다는 것인데, 내가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제독[이여송]은 눈을 부릅뜨고 팔을 걷으며, 혹은 앉았다 혹은 일어났다 하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은 다 무서워 떨었다. 그 얼마 있다가 이경(李慶)이 이르렀는데, 제독[이여송]은 그에게 임진강(臨津江)에 배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므로, 이경이 말하기를, "배가 있어서 왕래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여송은 곧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을 그만두게 하고, 가정(家丁)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수백 대나 심한 매를 쳐서 숨이 끊어진 뒤에야 끌어 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노여워한 것을 뉘우쳐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만약 체찰사(體察使 : 유성룡)가 온다면 내 어떻게 대처하랴?" 하였다.
이는 대개 제독 이여송이 늘 내가 화의(和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평소부터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까닭으로, 남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살펴볼 사이도 없이 갑자기 이같이 성을 내었다. 이때 사람들은 다 나를 위험하다고 생각하였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에 제독 이여송은 또 유격(遊擊) 척금(戚金)⋅전세정(錢世禎) 두 사람으로 하여금 기패(旗牌)를 가지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나와 김원수[金命元]와 관찰사(觀察使) 이덕형(李德馨)을 불러 함께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적이 두 분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 보내고 서울에서 물러나 돌아가 기를 청하니, 곧 그들의 청하는 바에 따라 속여 성을 나오게 한 뒤에 계책을 써서 추격합시다." 하였는데,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이 그들을 시켜 와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뜻을 탐색하게 한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전의 논의를 고집하여 서로 오가기를 마지않았다.
전세정[世禎]은 성질이 조급하여 성을 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 국왕은 어찌하여 도성(都城)을 버리고 도피하였는가?" 하였다. 나는 천천히 말하기를, "임시로 국도(國都 : 서울)를 옮겨 회복을 도모하는 것도 역시 한 가지 방도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척금(戚金)은 다만 나를 자주 살펴보며 전세정과 미소를 지을 뿐 말이 없었다. 전세정 등은 드디어 돌아갔다. 4월 19일에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사총병(査總兵 : 査大受)의 막사에 유숙하였다. 이는 대개 倭敵이 벌써 퇴병(退兵)할 것을 약속하였 으므로 장차 서울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제독 이여송의 숙소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으나, 그는 만나 주지 않고 통역관에게 일러 말하기를,"체찰사(體察使 : 柳成龍)는 나에게 불쾌한 생각을 갖고 있을 터인데, 또 찾아와서 문안합니까?" 라고 할뿐이었다.
*1)배신(陪臣) : 황정욱(黃廷彧)과 김귀영(金貴榮) 등을 이름. 두 왕자(王子)와 함께 가등청정(加籐淸正)에게 붙잡혀 인질이 되어 있었다. 배신(陪臣)이란 말은 제후(諸侯)의 신하가 천자(天子)에게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로, 여기서는 명(明)나라가 우리나라를 제후의 나라로 인정했기에 배신(陪臣)이란 말을 사용한 것이다.
*2)정문(呈文) : 공문의 한 형식. 하급기관이 상급기관에게, 또는 아래 관원이 위 관원에게 진정할 때 쓰는 공문.
*3)기패(旗牌) : 임금의 명령을 적은 깃발.
*4)가정(家丁) : 집에서 신임하고 부리는 복역(僕役)들을 말함.
*5)신(藎) : ①조개풀 신. 나아가다. 나머지. 타다. 남음. ②풀 이름 진. ※대법원 지정 인명용 한자의 음은 신이다. 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