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救濟)함.
請發軍糧餘粟 賑救*6)飢民 許之.
時賊據京城已二年 鋒焰所被 千里蕭然 百姓不得耕種 餓死殆盡. 城中餘民 聞余在東坡 扶携擔負而至者 不計其數.
査總兵於馬山路中 見小兒匍匐飲死母乳 哀而收之 育於軍中 謂余曰「倭賊未退 而人民如此 將奈何?」乃歎息曰「天愁地慘矣.」余聞之 不覺流涕.
時大兵將再至 糧船之自南方來者 皆列泊江岸 不敢他用. 適全羅道召募官安敏學 募得皮穀千石 船運而至. 余喜甚 卽狀啓 請以此賑救飢民 以前郡守南宮悌爲監賑官 取松葉爲屑 每松屑十分 合米屑一合 投水而飲之. 人多穀少 所活無幾. 唐將亦哀之 自分所食軍糧三十石賑給 百不能及一.
一日夜大雨 飢民在余左右 哀吟呻*7)礎*8) 不可忍聞. 朝起視之 狼藉而死者甚多.
慶尙右道監司金誠一 亦遣前典籍李魯 吿急于余曰「欲糴*9)全羅左道之穀 賑濟飢民 且爲春耕種子 而全羅都事崔鐵堅 不肯賑貸.」時知事金瓚 爲體察副使 在湖西. 余卽移文于瓚 令馳下全羅 自發南原等倉 移一萬石于嶺南以救之.
大抵自京都至南邊 賊兵橫貫 時方四月 人民皆登山入谷 無一種麥之處 使賊更數月不退 則生類盡矣.
군량의 나머지 곡식을 내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임금에게 청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셨다. 이때 왜적(倭敵)은 서울을 점거한지 이미 2년이나 되었으므로 병화(兵禍)로 인한 피해 때문에 천리 지방이 쓸쓸하였고,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굶어 죽고 거의 다 없어지는 상태였다. 성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가 동파(東坡)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서 온 사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총병(査總兵 : 査大受)이 마산(馬山 : 파주坡州에 있는 역)으로 가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기어가면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이를 데려다가 군중에서 기르면서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倭敵들이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면서 이어 탄식하기를, "하늘도 탄식하고 땅도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흘렀다.
이때 명(明)나라 대병(大兵)이 곧 다시 온다고 하므로, 군량을 실은 배가 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을 다 강언덕에 벌여 대놓게 하고 감히 달리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때마침 전라도소모관(全羅道召募官)*1) 안민학(安敏學)*2)이 겉곡식 1천 석(石)을 모아가지고 배에 싣고 왔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곧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이것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청하고, 전 군수(前 郡守)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삼아 솔잎을 따다가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푼중[十分]에 쌀가루 한 홉[一合]씩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하였 는데,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인명을 살려낸 것이 얼마 안 되었다. 이를 본 明나라 장수들 역시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네들이 먹을 군량 30석을 나누어 내어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나, 이는 능히 백분의 1에 미치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비가 왔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내가 있는 곳의 좌우에 와서 기둥 밑 주춧돌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 김성일(金誠一)도 역시 전 전적(前 典籍) 이노(李魯)를 파견하여 급박한 사정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전라좌도(全羅左道)의 곡식을 꾸어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또 그 곡식으로 봄 밭갈이 종자로 하려고 하나 전라도사(全羅都事) 최철견(崔鐵堅)이 빌려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 지사(知事) 김찬(金瓚)*3)이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어 호서(湖西)*4)에 있었으므로, 나는 즉시 공문을 김찬에게 보내 전라도로 달려 내려가서 몸소 남원(南原)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嶺南)*5)으로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이때는 서울부터 남쪽 해변에 이르 기까지 倭敵의 군사들이 가로질러 꿰뚫고 있었고, 때는 바야흐로 4월인데 백성들은 다 산에 오르고 골짜기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하나도 보리를 심는 곳이 없었으니, 倭敵들이 다시 몇 달 동안 더 물러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백성들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1)소모관(召募官) : 전시에 군량⋅마필⋅정병 등을 모집하는 벼슬. 소모사(召募使)라고도 함.
*2)안민학(安敏學, 1542∼1601)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이다. 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뽑혀 감찰(監察)⋅현감(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함.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김찬(金瓚, 1543∼1599)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庵), 시호는 효헌(孝獻),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宣祖를 호종(扈從)하고 체찰부사(體察副使)로 활약함.
*4)호서(湖西) : 충청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5)영남(嶺南) : 경상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6)구(救) : 건질 구. 구원하다. 치료하다. 도움.
*7)신(呻) : 끙끙거릴 신. 병으로 앓는 소리를 내다.
*8)초(礎) : 주춧돌 초. 기둥을 떠받치는 주춧돌.
*9)조(糴) : 쌀 내어 팔 조. 환곡(還穀) : 백성에게 봄에 꾸어 주고,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곡식.
請發軍糧餘粟 賑救*6)飢民 許之.
時賊據京城已二年 鋒焰所被 千里蕭然 百姓不得耕種 餓死殆盡. 城中餘民 聞余在東坡 扶携擔負而至者 不計其數.
査總兵於馬山路中 見小兒匍匐飲死母乳 哀而收之 育於軍中 謂余曰「倭賊未退 而人民如此 將奈何?」乃歎息曰「天愁地慘矣.」余聞之 不覺流涕.
時大兵將再至 糧船之自南方來者 皆列泊江岸 不敢他用. 適全羅道召募官安敏學 募得皮穀千石 船運而至. 余喜甚 卽狀啓 請以此賑救飢民 以前郡守南宮悌爲監賑官 取松葉爲屑 每松屑十分 合米屑一合 投水而飲之. 人多穀少 所活無幾. 唐將亦哀之 自分所食軍糧三十石賑給 百不能及一.
一日夜大雨 飢民在余左右 哀吟呻*7)礎*8) 不可忍聞. 朝起視之 狼藉而死者甚多.
慶尙右道監司金誠一 亦遣前典籍李魯 吿急于余曰「欲糴*9)全羅左道之穀 賑濟飢民 且爲春耕種子 而全羅都事崔鐵堅 不肯賑貸.」時知事金瓚 爲體察副使 在湖西. 余卽移文于瓚 令馳下全羅 自發南原等倉 移一萬石于嶺南以救之.
大抵自京都至南邊 賊兵橫貫 時方四月 人民皆登山入谷 無一種麥之處 使賊更數月不退 則生類盡矣.
군량의 나머지 곡식을 내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임금에게 청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셨다. 이때 왜적(倭敵)은 서울을 점거한지 이미 2년이나 되었으므로 병화(兵禍)로 인한 피해 때문에 천리 지방이 쓸쓸하였고,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굶어 죽고 거의 다 없어지는 상태였다. 성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가 동파(東坡)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서 온 사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총병(査總兵 : 査大受)이 마산(馬山 : 파주坡州에 있는 역)으로 가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기어가면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고 있는 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이를 데려다가 군중에서 기르면서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倭敵들이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면서 이어 탄식하기를, "하늘도 탄식하고 땅도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흘렀다.
이때 명(明)나라 대병(大兵)이 곧 다시 온다고 하므로, 군량을 실은 배가 남쪽으로부터 오는 것을 다 강언덕에 벌여 대놓게 하고 감히 달리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때마침 전라도소모관(全羅道召募官)*1) 안민학(安敏學)*2)이 겉곡식 1천 석(石)을 모아가지고 배에 싣고 왔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곧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올려 이것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청하고, 전 군수(前 郡守) 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삼아 솔잎을 따다가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푼중[十分]에 쌀가루 한 홉[一合]씩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하였 는데,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인명을 살려낸 것이 얼마 안 되었다. 이를 본 明나라 장수들 역시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네들이 먹을 군량 30석을 나누어 내어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나, 이는 능히 백분의 1에 미치지도 못하였다.
하루는 밤에 큰비가 왔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내가 있는 곳의 좌우에 와서 기둥 밑 주춧돌을 부여잡고 신음하고 있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죽은 사람이 매우 많았다.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 김성일(金誠一)도 역시 전 전적(前 典籍) 이노(李魯)를 파견하여 급박한 사정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전라좌도(全羅左道)의 곡식을 꾸어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또 그 곡식으로 봄 밭갈이 종자로 하려고 하나 전라도사(全羅都事) 최철견(崔鐵堅)이 빌려주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 지사(知事) 김찬(金瓚)*3)이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어 호서(湖西)*4)에 있었으므로, 나는 즉시 공문을 김찬에게 보내 전라도로 달려 내려가서 몸소 남원(南原) 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嶺南)*5)으로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이때는 서울부터 남쪽 해변에 이르 기까지 倭敵의 군사들이 가로질러 꿰뚫고 있었고, 때는 바야흐로 4월인데 백성들은 다 산에 오르고 골짜기에 들어가 있었으므로 하나도 보리를 심는 곳이 없었으니, 倭敵들이 다시 몇 달 동안 더 물러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백성들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1)소모관(召募官) : 전시에 군량⋅마필⋅정병 등을 모집하는 벼슬. 소모사(召募使)라고도 함.
*2)안민학(安敏學, 1542∼1601)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 본관은 광주(廣州)이다. 이이(李珥)의 문인(門人)이다. 宣祖 때 학행(學行)으로 뽑혀 감찰(監察)⋅현감(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함.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3)김찬(金瓚, 1543∼1599)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庵), 시호는 효헌(孝獻),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大司憲)⋅이조판서(吏曹判書)에 이름.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宣祖를 호종(扈從)하고 체찰부사(體察副使)로 활약함.
*4)호서(湖西) : 충청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5)영남(嶺南) : 경상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6)구(救) : 건질 구. 구원하다. 치료하다. 도움.
*7)신(呻) : 끙끙거릴 신. 병으로 앓는 소리를 내다.
*8)초(礎) : 주춧돌 초. 기둥을 떠받치는 주춧돌.
*9)조(糴) : 쌀 내어 팔 조. 환곡(還穀) : 백성에게 봄에 꾸어 주고,가을에 이자를 붙여 거두던 곡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