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
全羅道巡察使權慄 敗賊于幸州 移軍坡州. 先是慄以光州牧使 代李洸爲巡察使 率兵勤王.
懲李洸等野戰而敗 至水原 據禿城山城 賊不敢攻 及聞天兵將入京城 渡江陣于幸州山城.
至是賊從京城大出攻之 軍中洶懼欲散 而江水在後無走路 不得已還入城力戰 矢雨下 賊分爲三陣 迭進皆敗 會日暮 賊還入京城. 慄令軍士 収賊屍磔裂肢體 散掛林木 以泄其愤.
旣而聞賊欲更出期必報 甚懼毀營栅 率軍至臨津 從都元帥金命元.
余聞之 單騎馳去 登坡州山城 觀形勢 以爲當大路之衝 而地形斗絶可據. 卽令權慄與巡邊使李薲 合軍據守 以遏賊兵西下. 防禦使高彦伯⋅李時言 助防將鄭希玄⋅朴名賢等 爲遊兵遮蠏踰嶺. 義兵將朴惟仁⋅尹先正⋅李山輝等 從右路伏於昌⋅敬陵之間 各以其兵 出沒抄擊 賊多出則避而不戰 少出則隨處邀搫.
自是賊不得出城樵採 馬死者甚多.
又令倡義使金千鎰 京畿水使李蘋 忠淸水使丁傑等 乘舟從龍山西江 以分賊勢. 忠淸道巡察使許頊 在陽城 令還護本道 以備賊南衝之勢. 移文京畿⋅忠淸⋅慶尙官義兵 使各在其處 從左右邀截賊路. 楊根郡守李汝讓 守龍津.
凡諸將所斬賊首 皆懸掛於開城府南門之外. 提督參軍呂應鍾 見之喜曰「朝鮮人 今則取賊首 如割毬矣.」
一日賊從東門大出搜山 自楊州積城 至大灘無所得.
査大受恐賊來襲 報余曰「有體探人來言 賊欲得査總兵柳體察云 姑避開城如何?」
余答之曰「體探人所言 恐無此理 賊方疑大軍住近 豈敢輕易渡江? 我等一動 則民心必搖 不如靜以待之.」査笑曰「此言甚是 假令有賊 吾與體察 死生同之 豈敢獨去?」遂分所率勇士數十餘人來護余 雖雨甚 達夜警守不暫怠 至聞賊入城乃罷.
其後 賊探知權慄在坡州 欲報怨 率大軍從四路而出 至廣灘 去山城數里 住兵不進 自午至未 不攻還退 後不復出
蓋賊知地形 見慄所據險絶故耳.
余移書 王必迪言「賊方據險固未易攻 大兵當進住東坡 坡州躡其尾 以牽綴之 選南兵一萬 從江華出於漢南 乘賊不意 擊破諸屯 則京城之賊 歸路斷絶 必向龍津而走 因以後兵 覆諸江津 可一擧掃滅.」必迪擊節稱奇策 發偵探軍三十六名 馳往忠淸道義兵將李山謙陣 察賊形勢.
時賊精兵 皆在京城 而後屯皆羸疲寡弱. 偵卒踊*7)躍還報云 不須一萬 只得二三千可破.
李提督北將也 是役也 痛抑南軍 恐其成功不許.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이 왜적(倭敵)을 행주(幸州)*1)에서 격파하고 군사를 파주(坡州)로 옮겼다. 이보다 먼저 권율은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다가 이광(李洸)을 대신하여 순찰사(巡察使)가 되어 근왕군(勤王軍 : 임금을 가까이서 지키는 군, 부대)을 거느리게 되어 임금을 돕게 되었다. 그는 이광 등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실패한 것을 경계하여 수원(水原)에 이르러 독성산성(禿城山城)*2)에 의거하 니 倭敵들은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는 명(明)나라 구원병이 장차 서울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는 한강(漢江)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陣)을 쳤다.
이때에 이르러 倭敵들은 서울로부터 크게 일어나 나와서 공격하여 왔는데, 군중(軍中)의 인심은 흉흉하여지고 두려워하여 흩어지려 하였 으나 그러나 강물이 뒤에 있어서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도로 성으로 들어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니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倭敵들은 부대를 세 진[三陣]으로 나누어 번을 갈아가며 쳐들어왔으나 모두 패하고 말았다. 때마침 날이 저물자 倭敵들은 돌아서서 서울로 들어갔다. 권율은 군사들로 하여금 倭敵의 시체들을 가져다가 그 사지를 찢어 나뭇가지에 헤쳐 걸어놓아 그 맺혔던 한을 풀었다.
얼마 뒤에 권율은 倭敵이 다시 나와서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여 병영(兵營)과 목책[營栅]을 헐고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러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을 따랐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파주산성((坡州山城)*3)으로 올라가 그 형세를 살펴보니, 큰 길의 요충으로서 그 지형이 험준하여 가히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권율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가지고 굳게 지켜 倭敵의 군사들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도록 하고,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髙彦怕)⋅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 정희현(鄭希玄)⋅박명현(朴名賢) 등을 유격병[遊兵]으로 삼아 해유령(蠏踰嶺)을 막도록 하고, 의병장(義兵將) 박유인(朴惟仁)⋅윤선정(尹先正)⋅이산휘(李山輝) 등으로 하여금 오른쪽 길목을 따라 창릉(昌陵)과 경릉(敬陵)*4) 사이에 복병을 베풀고 각각 그 군사를 거느리고 출몰(出沒)하면서 공격하되 倭敵이 많이 나오면 피하여 싸우지 말고, 적게 나오는 곳에 따라 맞아 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倭敵들은 성을 나와서 마음대로 땔나무와 마초도 뜯어갈 수 없어 말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또 창의사(倡義使)*5) 김천일(金千鎰)⋅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 이빈(李蘋)*6)⋅충청수사(忠淸水使) 정걸(丁傑) 등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용산(龍山)⋅서강(西江)을 따라 倭敵의 세력을 분산시키도록 하고, 충청도순찰사(忠淸道巡察使) 허욱(許頊)이 양성(陽城)에 있으므로 돌아가 충청도(忠淸道)를 지키게 하여 倭敵이 남쪽으로 부딪치려는 기세에 대비하도록 하고, 공문을 경기도[京畿]⋅충청도[忠淸]⋅경상도[慶尙]의 관군과 의병[官義兵]에게 보내어 각각 자기들이 맡은 그곳에 있으면서 좌우로부터 倭敵의 가는 길목을 막고 끊어놓도록 하게 하고, 양근군수(楊根郡守) 이여양(李汝讓)으로 하여금 용진(龍津)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은 벤 왜적의 머리를 다 개성부(開城府)의 남문(南門) 밖에 매달아 놓게 하였더니, 제독 이여송과 참군(參軍) 여응종(呂應鍾)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 사람[朝鮮人]도 이제는 적의 머리 자르는 것을 공을 쪼개는 것같이 합니다, 그려." 하였다.
하루는 倭敵이 동문(東門)으로부터 많이 나와서 산을 수색하는데 양주(楊州)⋅적성(積城)으로부터 대탄(大灘)까지 이르렀으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明나라 장수 사대수(査大受)는 倭敵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나에게 알리기를,"정탐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적들은 사총병(査總兵 : 査大受)과 유체찰(柳體察 : 柳成龍)을 사로잡으려 한다.'고 말한다니, 잠시 동안 개성(開城)으로 피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정탐하는 사람이 말한 것은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倭敵들은 지금 우리 대군이 가까이 와서 있게 될까 근심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강을 건너오겠습니까? 우리들이 한 번 움직이면 민심이 반드시 동요될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 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사대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말은 아주 옳은 말입니다. 가령 적이 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체찰(體察 : 柳成龍)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같이 하지, 어찌 감히 혼자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는 거느리고 있는 군사 수십 명을 나누어 보내와서 나를 보호하였는데, 비록 비가 심하게 온다 하더라도 밤새도록 경비하여 지키며 잠시도 게을리하지 않다가 倭敵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서야 곧 그만두었다.
그 뒤에 倭敵들은 권율(權慄)이 파주산성(坡州山城)에 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원한을 갚으려고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 길로부터 나와 광탄(廣灘)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파주산성에서 몇 리쯤 떨어졌으나 군사를 머물러 두고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倭敵들은 오시(午時 : 오전 11시∼오후 1시)로부터 미시(未時 : 오후 1시∼오후 3시)까지 공격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서 물러간 뒤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는 대개 倭敵이 지형을 살필 줄 알아서 권율(權慄)이 의거하는 데가 매우 험절함을 보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었다. 나는 공문을 왕필적(王必迪)에게 보내 말하기를, <倭敵은 방금 험고한 데 의거하고 있으니, 아직은 쉽사리 치지 못하겠습니다. 대군은 마땅히 동파(東坡)로 나와 머무르고, 파주(坡州)에서는 그 뒤를 밟아 이를 견제하고, 남쪽의 군사 1만 명을 뽑아 강화도[江華]로부터 한강(漢江)의 남쪽에 나와 倭敵의 뜻밖의 틈을 타서 여러 둔진(屯陣)을 격파하면 서울의 倭敵들은 돌아갈 길이 끊어져서 반드시 용진(龍津)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럴 때에 뒤에 있는 군사로써 여러 강나루를 덮친다면, 가히 한 번 군사를 일으켜 倭敵을 소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왕필적[必迪]은 격절(擊節 : 감탄하여 손뼉을 친다는 말, 또는 무릎을 친다는 말이다.)하여 무릎을 치며 신기한 전략이라고 칭찬하면서 정탐꾼 36명을 충청도(忠淸道) 의병장(義兵將) 이산겸(李山謙)의 진(陣)으로 달려가서 倭敵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때 倭敵의 정예부대는 다 서울에 있고, 후방에 주둔한 군사는 다 약하고 파리한 소수의 군사들이었다. 정탐하러 갔던 군사들이 좋아 날뛰면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꼭 1만 명의 군사까지도 필요하지 않고, 다만 2, 3천 명이면 쳐부술 수가 있겠습니다." 하였다. 이제독(李提督)은 북방 출신의 장수였다. 그는 이 싸움에서 남방 출신의 군사를 아주 억압하였는데, 그는 이번에도 그들의 성공을 꺼려 뜻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행주(幸州) : 경기도 고양군(高陽郡)에 있는 지명.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권율(權慄)이 왜적(倭敵)을 쳐 크게 숭리한 곳.
*2)독성산성(禿城山城) : 경기도 수원(水原)의 독산성(禿山城).
*3)파주산성(坡州山城) : 경기도 파주(坡州)에 있는 산성.
*4)창릉(昌陵)과 경릉(敬陵) : 창릉(昌陵)은 朝鮮의 제8대왕인 예종(睿宗)과 비(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이고, 경릉(敬陵)은 덕종(德宗)과 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능이다. 모두 경기도 고양군(高陽郡) 신도면(神道面) 용두리(龍頭里)에 있다.
*5)창의사(倡義使) : 나라에 큰 난(亂)이 일어나거나 했을 때 이에 맞서 의병(義兵)을 일으킨 사람들에게 주던 임시 벼슬.
*6)이빈(李蘋, 1537∼1603) : 1591년(선조 25년) 무과(武科)에 급제, 경기도수군절도사(京畿道水軍節度使). 1596년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 1599년 순천부사(順天府使), 1600년 제주목사(濟州牧使), 1601년 경상도병마절도사(慶尙道兵馬節度使), 1602년 전라도수군절도사(全羅道水軍節度使). 앞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는 공주(公州)에서 전공을 세웠다.
*7)용(踊) : 뛸 용. 踴과 동자. 도약하다. 춤추다. 오르다. 미리. 사전에. 용약(踊躍) : 뛰어 일어나 기세 좋게 나아감. 춤추듯이 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