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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 2. 이일(李鎰) 대신 이빈(李薲)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함 ./ 3. 명(明)나라 군사가 벽제(碧蹄) 싸움에 지고 개성(開城)으로 물러섬.
23/08/06 16:11:13 金 鍾國 조회 1902
​ 2. 이일(李鎰) 대신 이빈(李薲)을 순변사(巡邊使)로 임명함.
遞李鎰巡邊使 更以李薲代之.
平壤之戰 天兵從普通門而入 李鎰及金應瑞等 從含毬門而入 及收兵 皆退屯城外 夜賊遁去 明朝始覺之. 李提督咎我軍不警守 使賊遁去而不知.
於是 天將之曾往來順安 與李薲相熟者 爭言鎰非將才 獨李薲可 提督移咨言狀 朝庭使左相尹斗壽 至平壤問鎰罪 欲行軍法 良久釋之 更李薲代鎰 選兵 三千騎 從 提督而南.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 직책에서 갈고, 이빈(李薲)을 그에 대신하게 하였다. 평양성[平壤]의 싸움에 명(明)나라 군사가 보통문(普通門)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가자, 이일(李鎰)과 김응서(金應瑞)는 함구문(含毬門)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갔었는데, 군사를 거두게 되자 다 물러나와 성 밖에 주둔해서 밤에 왜적(倭敵)들이 도망하여 가버려도 그 다음 날 아침에야 비로소 깨달았다. 이제독(李提督)은 우리 군사들이 잘 경비하여 지키지 않아서 倭敵으로 하여금 도망하여 가버리는 것도 알지 못하게 하였다고 나무랐다.
이때에 明나라 장수로서 일찍이 순안(順安)으로 왕래하며 이빈(李薲)과 서로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이 "이일은 장수 재목이 못 되고 오직 이빈이 좋겠다."고 다투어 말하니, 제독(提督)은 공문을 보내 그런 사정을 말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로 하여금 평양(平壤)에 이르러서 이일의 죄를 묻게 하고 군법(軍法)으로 다스리려 하였으나 얼마 뒤에 이를 풀어 주고, 다시 이빈으로 이일의 소임(순변사)을 대신하게 하고, 군사 3천 명을 뽑아 거느리고 제독 이여송(李如松)을 따라 남쪽으로 가게 하였다.
 
 
3. 명(明)나라 군사가 벽제(碧蹄) 싸움에 지고 개성(開城)으로 물러섬.
李提督進兵坡州 與賊戰於碧蹄南 不利 還屯開城.
初平壤旣復 大同以南沿道賊屯 皆遁去.
提督欲追賊 謂余曰「大軍方前進 而聞前路無糧草 議政旣爲大臣 當念國事 不可憚勞 宜急行 準備軍糧 勿致踈*11)誤.」余辭出.
時 天兵先鋒 已過大同江而南 莨搶塞路不可行 余委曲疾行出軍前 夜入中和至黃州 已三鼓矣.
時賊兵新退 一路荒虛 人民未集 計無所出 急移文于黃海監司柳永慶 使之催運 又移文于平安監司李元翼 調發金應瑞等所率軍人之不堪*12)戰陣者 自平壤負戴追隨 送至黃州 又令船運平安道三縣之穀 從靑龍浦輪運於黃海道 事非預辦 臨時猝急 而大軍隨之 恐乏軍興 爲之勞心焦思
永慶頗有儲峙 畏賊散置山谷間 督民輸至 沿途不至闕乏 旣而大軍入開城府.
正月二十四日 賊疑我民爲之內應 且忿平壤之敗 盡殺京城中民庶 焚燒公私閭舍殆盡. 而西路列屯之賊 皆會京城 謀拒王師.
余連請提督速進 提督遲回者*13)累日 進至坡州. 翌日副總兵査大受 與我將高彦伯 領兵數百 先行偵探 與賊相遇於碧蹄驛南礪石嶺 斬獲百餘級.
提督聞之 留大軍 濁與家丁騎馬者千餘 馳赴之 過惠陰嶺 馬蹶墮地 其下共扶起之 時賊匿大衆於礪石嶺後 只數百人在嶺上. 提督望見 揮其兵爲兩翼而前 賊亦自嶺而下 漸相逼 後賊從山後遽上山陣 幾萬餘 天兵望之心懼 而已接刃不可解.
時提督所領 皆北騎 無火器 只持短劎純劣 賊用步兵 刃皆三四尺 精利無比 與之突闘 左右揮擊 人馬皆靡 無敢當其鋒*14)者. 提督見勢危急 徵後軍未至 而先軍已敗 死傷甚多 賊亦收兵不急追.
日暮 提督還坡州 雖隱其敗 而神氣沮甚 夜以家丁親信者戰死痛哭
明日欲退軍東坡.
余與右議政兪泓 都元帥金命元 帥李薲等至帳下 提督出立帳外 諸將左右立 余力諍曰「勝負兵家常事 當觀勢更進 奈何輕動?」
提督曰「吾軍昨日多殺賊 無不利事. 但此地經雨泥濘 不便駐軍 所以欲還東坡 休兵進取耳.」
余及諸人爭之固 提督出示已奏本草 其中有曰「賊兵在都城者二十餘萬 衆寡不敵.」末又言「臣病甚 請以他人代其任.」
余駭而以手指點曰「賊兵甚少 何得有二十萬?」提督曰「我豈能知之? 乃汝國人所言也.」蓋託辭也.
諸將中張世爵 尤勸都督退兵. 以余等固爭不退 以足蹴巡邊使李薲叱退 聲色俱厲.
是時大雨連日 且賊燒道邊諸山 皆兀兀無蒿草 重以馬疫 數日間 倒*15)隕*16)者殆將萬匹.
是日三營還渡臨津 陣于東坡驛前 明曰自東坡 又欲還開城府.
余又力爭曰「大軍一退 則賊氣愈驕 遠近驚懼 臨津以北 亦不可保 願少住觀釁以動.」提督佯許之. 余旣退 而提督跨馬 遂還開城府 諸營悉退開城. 獨副總兵査大受 遊擊毋承宣軍數百 守臨津. 余猶留東坡 日遣人更請進兵 提督謾應之曰「天晴路乾 則當進.」然實無進意.
大軍到開城府日久 軍糧已盡 惟從水路 括粟及茭草於江華 又船運忠淸⋅全羅道稅糧 稍稍而至 隨到隨盡 其勢愈急.
一日諸將以糧盡爲辭 請提督旋師 提督怒 呼余及戶曹判書李誠中 京畿左監司李廷馨 跪庭下 大聲詰責 欲加以軍法. 余摧謝不已 因念國事至此 不覺流涕. 提督慜然 更怒諸將曰「汝等昔從我征西夏時 軍不食累日 猶不敢言歸 卒成大功. 今朝鮮偶數日不支糧 何敢遽言旋師耶? 汝輩欲去則去 我非滅賊不還,惟當以馬革裹尸耳.」諸將皆頓首謝.
余出門 以放糧不時 杖開城經歷沈禮謙 繼而糧船數十隻 自江華泊後西江 僅得無事. 是夕 提督使總兵 張世爵 召余慰之 且論軍事.
提督還平壤.
時賊將淸正 尙在咸鏡道 有人傳言 淸正將自咸興 踰陽德⋅孟山 襲平壤.
時提督有北還意 未得其機 因此聲言「平壤乃根本 若不守 大軍無歸路 不可不救.」遂回軍還平壤. 留王必迪守開城. 謂接伴使李德馨曰「朝鮮之軍 勢孤無援 宜悉還江北.」
是時 全羅道巡察使權慄 在高陽幸州 巡邊使李薲在坡州 高彦伯⋅李時言等 在蠏*17)踰嶺 元帥金命元在臨津南 余在東坡. 提督恐爲賊所乘 故云然.
余使從事官辛慶晉 馳見提督 陣不可退軍者五. 先王墳墓 皆在畿甸 淪於賊藪 神人望切 不忍棄去 一也. 京畿以南遺民 日望王師 忽聞退去 無復固志 相率而歸賊 二也. 我國境土 尺寸不可容易棄之 三也. 將士雖力弱 方欲倚仗天兵 共圖進取 一聞撒退之令 必皆怨憤離散 四也. 一退而賊乘其後 則雖臨津以北 亦不可保 五也. 提督默然而去.

이제독(李提督 : 李如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파주(坡州)로 나아가서 왜적(倭敵)과 벽제(碧蹄)*1)의 남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개성(開城)*2)으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성(平壤城)이 수복되자, 대동강(大同江) 이남의 연도에 주둔하고 있던 적도(敵徒)들은 다 군량 도망하여 가버렸다.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은 倭敵을 추격하려 하여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대군이 바야흐로 전진하려 하는데,앞길에 과 마초가 없다고 들립니다.  의정(議政 : 柳成龍)께서는 대신(大臣)으로서 마땅히 나랏일을 생각하여야 되겠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마시고 마땅히 급히 가서 군량을 준비하는 데 소홀하고 잘못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나는 그와 작별하고 나왔다.

이때 明나라 군사의 선봉(先鋒)은 벌써 대동강(大同江)을 지나서 가고 있었는데, 어지럽게 길이 막혀 잘 다닐 수 없으므로 나는 옆길로 돌아서 빨리 달려 군대의 앞에 나서서 밤에 중화(中和)로 들어갔다가 황주(黃州)에 이르렀는데, 때는 이미 삼고(三鼓 : 밤 12시경)이었다.
이때는 倭敵의 군사들이 금새 물러간 뒤라서 길마다 거칠고 텅 비어 백성들이 모이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할 아무런 계교가 나지 않았다. 이에 급히 공문을 황해감사(黃海監司) 유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군량의 운반을 독촉하게 하고, 또 공문을 평안감사(平安監司) 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 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서 싸움터에 나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조발하여 평양(平壤)으로부터 곡식을 운반하여 뒤따라와서 이를 황주(黃州)까지 보내라고 하고, 또 배로 평안도(平安道) 세 고을[三縣]의 곡식을 옮겨 청룡포(靑龍浦)로부터 황해도(黃海道)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일이 미리 준비하였던 것이 아니고 임시로 갑자기 급하게 서두르고 대군이 뒤따라 오므로 군량을 결핍시키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고 이때문에 애를 쓰고 속을 태웠다.

당시 유영경(柳永慶)이 자못 저축하여 두었던 곡식이 있었으나 倭敵들이 덮칠까 두려워하여 산골 사이에 분산시켜 두었는데, 이때 백성들을 독려하여 수송하여 왔으므로 연도에서 군량이 모자르는 데 이르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조금 뒤에 대군이 개성부(開城府)에 들어왔다, 정월
 24일에 서울에 온 倭敵들은 우리 백성들이 이에 내응할까 의심하고, 또 평양에서의 패한 것을 분하게 여겨 서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다 죽 이고 관청, 개인집 할 것 없이 다 불태워 거의 다 없애 버렸다. 그리고 서쪽 지방 여러 고을에 있던 倭敵들도 다 서울에 모여서 明나라 군사 에 항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연달아 속히 진군할 것을 청하였으나, 제독은 머뭇거리기 여러 날 만에 진군하여 파주(坡州)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부총병(副總兵) 사대수(査大受)는 우리 장수 고언백(髙彦伯)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倭敵의 동정을 탐정하다가 倭敵과 벽제역(碧蹄驛)의 남쪽 여석령(礪石嶺)에서 서로 만나 倭敵 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제독 이여송은 이 말을 듣고 대군(大軍)을 그대로 머물러 두고서 홀로 가정(家丁 : 집안에서 부리는 노복(奴僕 : 남자 종)으로 말 잘 타는 사람 천 여 명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오다가 혜음령(惠陰嶺)을 지나는데, 말이 넘어져서 땅에 떨어지니 그 부하들이 함께 이를 붙들어 일으켰다. 이때 倭敵은 많은 군사들을 여석령(礪石嶺) 뒤에 숨겨 놓고 다만 수백 명만 영마루(고개) 위에 나와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이를 바라보고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부대를 만들어 가지고 앞으로 나가니, 倭敵들도 역시 영으로부터 내려와서 점점 서로 가까워졌다.

그런데 뒤에 숨어 있던 倭敵이 산 뒤로부터 갑자기 산 위로 올라와서 진(陣)을 치니 그 수효가 몇만 명이나 되었다. 明나라 군사들은 이를 바라보고 마음속으로 두려워하였지만, 그러나 벌써 칼날을 맞댔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 이여송이 거느린 군사는 다 북방의 기병들이었으므로 화기(火器)는 없었고 다만 짧은 칼을 가졌으나 무딘 것인데, 倭敵들은 보병으로 칼이 다 3, 4척이나 되는 것을 써서 날카로운 것이 견줄 수가 없었고, 서로 맞부딪쳐 싸우는데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다 쓰러져 감히 그 날카로움을 당할 수가 없었다. 제독 이여송은 그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후군(後軍)을 불러 보았으나 안오고, 먼저 군사가 이미 패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았 는데, 倭敵도 지쳐 군사를 거두고 급히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때 제독 이여송은 파주(坡州)로 돌아와서 비록 그 패한 일을 숨겼으나, 그러나 신기(神氣)가 매우 저상(沮喪)*3)[기력이 꺾여서 기운을 잃음]하였고, 밤에는 가정(家丁)으로서 친히 믿던[親臣] 사람들이 전사한 것을 슬퍼하여 통곡하였다. 그 다음날 제독은 군사를 동파(東坡)로부터 후퇴시키려 하였다. 나는 우의정(右議政) 유홍(兪泓)⋅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장수 이빈(李薲) 등과 함께 그 장막 밑에 이르니, 제독 이여송은 일어서서 장막 밖으로 나가려 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좌우에 늘어서고, 나는 힘써 간하기를,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兵家)에게는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형세를 보아서 다시 나아갈 것이지, 어찌 가볍게 움직이리오?" 하니, 이여송은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어제 적을 많이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지만, 다만 이곳은 비가 온 뒤 진창이 돼서 군사를 주둔시키기에 불편하므로 동파(東坡)로 돌아가서 군사를 쉬었다가 진격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나와 여러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된다고 굳게 간하니, 제독 이여송은 이미 써놓은 본국에 상주(上奏)할 초고(草稿)*4)를 내보였다. 거기에 쓴 말 중에는, <적병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20여만 명이니,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라는 말도 있고, 그 끝에는 말하기 를, <신(臣)은 병이 심하오니,청컨대 다른사람으로그 소임(제독)을 대신하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손으로 그 글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倭敵의 군사는 아주 적은데,어찌 20만 명이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 이여송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네 나라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이지요."라고 하였으나, 이는 대개 핑계하는 말이었다.

그 여러 장수들 가운데 장세작(張世爵)은 더욱 제독 이여송에게 퇴병(退兵)하기를 권하였으며, 우리들이 굳이 간청하며 물러나가지 않는다 고 해서 발길로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을 차며 물러가라고 꾸짖었는데, 말소리와 낯빛이 다 격해 있었다. 이때에는 큰비가 날마다 연달아 왔다. 또한 倭敵들은 길가의 모든 산을 불태웠으므로 다 민둥산이 되어 풀포기 하나 없었고, 거기다가 말병까지 돌게 되어서 며칠 동안에 쓰러져 죽은 말이 거의 만 필이나 되었다. 이날 삼영(三營)의 군사들이 임진강(臨津江)을 건너 돌아가서 동파역(東坡驛) 앞에 주둔하였다. 그 다음날 동파역으로부터 또 개성부(開城府)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나는 또 간쟁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倭敵들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여지고,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또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니, 원컨대 좀 더 머물러 있으면서 틈을 보아서 이동하도록 하소서." 하니, 제독 이여송은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내가 물러나온 뒤에 제독 이여송은 곧 말을 타고 드디어는 개성부(開城府)로 돌아 가니 여러 병영이 모두 개성으로 물러갔다. 오직 부총병(副總兵) 사대수(査大受)와 유격(遊擊) 관승선(毋承宣)의 군사 수백 명이 임진강을 지켰다. 나는 그대로 동파(東坡)에 머물러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진병(進兵)할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 이여송은 거짓으로 이에 응낙하여 말하기를, "날씨가 개고 길이 마르면 마땅 히 진격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진격할 의사가 없었다.

대군이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여러 날이 되어 군량이 이미 다하였는데, 오직 수로(水路)로 조[栗]와 마초를 강화도[江華]에서 가져왔고, 또 배[船]로 충청도[忠淸]⋅전라도[全羅]의 세곡(稅穀)을 조금씩 옮겨 왔으나 그것은 이르는 대로 없어져서 그 형세가 급박하였다. 하루는 明나라 여러 장수들이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제독 이여송에게 군사를 돌리자고 청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노하여 나와 호조판서(戶曹判書) 이성중(李誠中)*5)과 경기좌감사(京畿左監司) 이정형(李廷馨)*6)을 불러 뜰 아래 꿇어 앉히고는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으로써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사과하기를 마지 않았으며 인하여 나랏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을 홀리니, 제독 이여 송이 민망하게 여기면서 다시 그 여러 장수들에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난날 나를 따라서 서하(西夏)*7)를 칠 때에는 군사들이 여러 날을 먹지 못하였어도 오히려 감히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고 싸워 마침내 큰 공을 세웠는데, 지금 조선(朝鮮)이 우연히 며칠 군량을 지급하지 못하였다고, 어찌 감히 갑자기 군사를 돌리겠다고 말하느냐?

너희들이 어디 가려면 가봐라. 나는 적을 멸망시키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 오직 말가죽으로 나의 시체를 싸가지고 고향에 돌아가려 할 따름이다[馬革裹尸]*8)"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나는 문밖으로 나온 다음,군량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한 죄로 개성경력(開城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杖]으로 다스렸더니 계속하여 군량을 실은 배 수십 척이 강화도[江華]로부터 와서 뒷 서강(西江)에 닿았으므로 겨우 아무런 일이 없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 이여송은 총병(總兵) 장세작(張世爵)을 시켜 나를 불러 위로의 뜻을 표한 다음, 또 군사(軍事)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제독 이여송이 평양(平壤)으로 돌아갔다. 이때 倭敵의 장수 가등청정[淸正]은 아직도 함경도(咸鏡道)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전하기를, "加籐淸正이 곧 함흥(咸興)으로부터 양덕(陽德)⋅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성(平壤城)을 습격 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때 제독 이여송은 북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가 이 말에 따라 성언하기를, "평양은 곧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만약 여기를 지키지 않으면 대군의 돌아갈 길이 없어질 것이니 여길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드디어는 군사를 돌려 평양성[平壤]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머물러 두어 개성(開城)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접반사(接伴使)*9) 이덕형(李德馨)에게 이르기를, "朝鮮의 군사도 형세가 외롭고 구원병도 없으니 마땅히 모두 임진강(臨津江)의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권율(權慄)*10)이 고양군[髙陽]의 행주(幸州)에 있고,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賓)이 파주(坡州)에 있고, 고언백(髙彦伯)과 이시언(李時言)이 해유령(蟹踰嶺)에 있고, 도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臨津江) 남쪽에 있고, 내가 동파(東坡)에 있었는데, 제독 이여송은 倭敵들이 틈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종사관(從事官) 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제독 이여송을 보고 군사를 물러가게 해서는 안 될 이유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을 들면, "첫째로, 선왕(先王)의 분묘(墳墓)가 다 경기[畿甸] 안에 있는데, 지금 倭敵들이 있는 곳에 빠졌으므로 신(神)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京畿] 이남에 있는 백성들은 날마다 구원병[王師]이 오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서로 거느리고 倭敵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 자 한 치[尺寸]라도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은 비록 힘이 약하다하더
라도 바야흐로 明나라 구원병의 힘을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하는데, 한 번 철퇴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면 반드시 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倭敵들이 그 뒤를 타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독 이여송은 이것을 보고도 아무말 없이 떠나갔다.

*1)벽제(碧蹄) : 서울의 서쪽 고양군(高陽郡)에 있는 지명. 옛날에는 여기에 역관(驛館)이 있어 中國 사신이 오갈 때 머무른 곳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倭敵과 격전한 곳.
*2)개성(開城) : 경기도 서북부에 위치한 지명. 옛날 高麗의 서울.
*3)저상(沮喪) : 기운이 없어짐. 기가 꺾여 약해짐. 沮 : 막을 저. 기가 꺾이다. 붕괴하다. 이루어지지 않고 깨지다. 두려워하다.
*4)초고(草槁) : 상주할 초고. 주초(奏草).

*5)이성중(李誠中, 1539∼1593)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본관은 전주(全州). 宣祖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통어사(統禦使)로 서울을 방어하다가 의주(義州)로 가서 임금을 모시고 호조판서(戶曹判書)가 되어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함창(咸昌)에서 과로로 순직함.
*6)이정형(李廷馨, 1548∼1607) : 조선조 宣祖 때 명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과 동각(東閣)이다. 본관은 경주(慶州).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는 개성유수(開城留守)로 활약하다가 벼슬이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대사헌(大司憲)에 이름.

*7)서하(西夏) : 中國 감숙성(甘肅省)에서 내몽고(內家古)의 서부에 걸친 지방.
*8)마혁과시(馬革裹尸) : 말가죽으로 자기의 시체를 쌈. 싸움터에 나가 살아 돌아오지 않겠다는 결의의 비유. [屍 주검 시. 尸 통자. 死 통자. 尸+死=屍. 주검(尸)과 죽다(死)라는 두 자를 합하여 '주검'의 뜻을 나타낸다.] 尸 : 주검 시. 시체. 위폐. 신주.
*9)접반사(接伴使) : 임금을 모시며 외국 사신의 접대를 맡은 임시직.
*10)권율(權慄, 1537∼1599) : 조선조 宣祖 때 도원수(都元帥).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晚翠堂)과 모악(暮嶽),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안동(安東). 宣祖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禮曹佐郎)⋅호조정랑(戶曹正郎)을 지내고,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광주목사(光州牧使)에서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가 되어 북상하여 수원(水原) 등지에서 倭敵을 쳐 그 서진(西進)을 막고,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승하고 도원수(都元帥)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

*11)소(踈) : 踈는 疎의 와자(譌字=바뀐 글자). 疎는 疏와 동자. 疏 : ①트일 소. 통하다. 멀어지다. 먼 친척. 갈라지다. 다스리다. 버리다. 채소(蔬). 빗질하다. ②거칠 소. 험하다. 상소하다. ③적을 소. 조목별로 써서 진술하다. 상소하다. 편지. 문체(文體) 이름. 주. 주석.
*12)감(堪) : 견딜 감. 참다. 뛰어나다. 하늘. 천도. 낮다. 불감(不堪) : 견디기가 어려움.
*13)자(者) : 놈 자. 사람. 것. 곳. ∼라고 하는 것은. ∼면. 어세(語勢)를 세게 하는 조사.
*14)봉(鋒) : 칼끝봉. 병기의 날. 날카로운 병기,칼,창 따위. 기세. 군대의 앞장. 선봉. 가래. 농기구의 한가지.
*15)도(倒) : 넘어지다. 자빠지다. 죽다.
*16)운(隕) : 떨어지다. 추락하다. 쓰러지다. 죽다. 둘레. 원주(圓周).
*17)해(蠏) : 게 해. 동자 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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