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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가를 찾아서-안동김씨 사촌마을
23/08/04 09:50:51 김정현 조회 1944
명가를 찾아서
안동김씨 의성 사촌(沙村)마을
 
 
안동김씨는 경순왕의 손자 김숙승(金叔承)을 시조로 하는 선안동김씨(舊安東金氏)와 고려 개국공신 김선평(金宣平)을 시조로 하는 후안동김씨(新安東金氏)로 구분된다. 선안동김씨는 시조의 6세손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 1212~1300)을 중시조로 하는 가문으로 흔히 상락김씨(上洛金氏)로 불리기도 한다. 김방경(金方慶)은 고려 원종때 명장으로 애민선정을 펼쳤으며 상락군 개국공 (上洛君開國公)에 봉해졌으며 무신이면서 무신정권에 가담하지 않았고, 철저히 대몽 항전을 벌였으며 뒤에는 삼별초 토벌과 일본정벌에 공을 세운 분으로 시호는 충렬로 예천 물계서원에 주향(主享)으로 모셔진 분이다.
사촌의 안동김씨 입향조는 김자첨(金子瞻 1369~1454)이다. 그는 김방경의 5세손이며 파조인 도평의지인 김구정의 외아들로 태종(太宗)이 고려 명신의 후예라는 이유로 함경도 감목관(咸吉道 監牧官)에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았으며, 조선개국(1392) 당시 안동 풍산 회곡에서 의성 사촌으로 이거하여 600년 사촌 안동김씨의 기반을 조성했다. 중국의 沙眞村을 본따서 沙村이라고 마을 이름을 지었다고 여러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행정면의 명칭인 점곡은 증자의 아버지 증점(曾點)의 점자를 따라 점실[點谷]이라 부르다가 나중에 점곡으로 변했다고 한다.
입향조의 증손인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는 지취(志趣)가 고상하고 식견(識見)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일찍이 성균관에 유학을 했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목격하고 마침내 과거 준비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후학을 지도했으며 장대서원에 제향되었다. 그는 서애 류성룡의 외조부이기도 하다. 예로부터 사촌은 3정승이 난다는 명당터로 알려져 있으며 특히 외손이 잘된다고 소문이 난 곳이다. 松隱 김광수의 다섯째 딸은 입암 류중영에게 출가하였다. 출산하기 위해 친정에 왔으나 媤家로 돌아가라는 분부가 내려져 하회로 돌아가다가 미처 사촌을 벗어나지 못하고 서림에서 서애 류성룡 선생을 출산하였는데, 그 덕분에 정승까지 오를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송은의 증손 만취당(晩翠堂) 김사원(金士元)은 퇴계선생의 고제(高弟)로서 임진왜란 때에는 사림(士林)의 추대로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이 되어 두 동생 김사형(金士亨), 김사정(金士貞)을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보내 창의(倡義)토록 하였다. 그는 이덕홍(李德弘), 금난수(琴蘭秀)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집 서쪽에 만년송(萬年松)이 한 그루 있어 자호로 삼고 이 소나무 아래에 당을 짓고 ‘만취(晩翠)’라고 편액을 걸어 세한(歲寒)의 지조를 드러내었다.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 : 1724∼1797)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大山 이상정 선생의 문하에서는 세칭 湖門三老(川沙 김종덕과 동암 류장원, 후산 이종수를 가리키는 말임)의 한 사람으로 명성이 널리 알려진 분이다. 그는 퇴계선생의 정맥을 이은 학자로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를 지냈을 뿐 평생 과업에 뜻을 두지 않고 오직 위기지학에 열중하였다. 그 세 아우 苟齋 宗敬, 容淵 宗發, 濟庵 宗燮도 함께 학업에 힘써 4형제가 四棣先生으로 불리며 사촌의 번성을 구가한다. 유자정(孺子亭)은 천사선생이 강학을 하던 곳이다. 100여년 전에 불탄 건물을 주손 김창회씨가 최근 복원하였지만 이곳은 조선후기 영남유학의 중심이 되어 유림을 길렀냈던 곳이다. 사촌의 안동김씨 문중은 조선시대에 대과 13명, 소과 28명의 과거 합격자를 내었는데 특히 영․정조 재위기간 에는 川沙선생 4형제와 그의 종반 2형제가 대과와 소과에 급제하는 등 모두 대과 6명, 소과 8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여 가문을 빛낸 것도 천사선생의 강학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사촌은 한 때 영남의 와해(瓦海)로 불렸다. 즐비한 기왓골이 바다처럼 펼쳐졌다는 말이니 사촌의 명성을 알만 하다. 가구수도 500이 넘었다고 한다. “三亂을 겪었다.”는 사촌마을의 주민들의 이야기가 있는데 三亂이란 1592년 임진왜란, 1896년 丙申亂(병신의병), 그리고 6․25 전쟁을 말한다. 임란당시에는 만취당 3형제가 창의를 하였으며, 丙申亂(병신의병) 당시에는 김상종(金象鍾 1848~1908)이 의성의 의병대장에 추대(推戴)되어 사촌 안동김문 출신의 선봉장 김수담, 소모장 김수욱, 관향장 김수협 등과 아우 김회종과 함께 왜적과 싸우다가 황산전투에서 참패를 당하고 27명이 함께 죽음을 맞이했으며, 의병대장의 마을이라 하여 마을 전체가 도륙을 당했다. 6․25 전쟁 때는 인민군이 미군대위를 사살하자 화가 난 미군들이 일제히 마을에 불을 질러 백여호가 소실되고 말았다고 한다.
다행히 1585년에 완공된 만취당(보물 제1825호)이 한 번도 병화를 입지 않고 아직 옛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으며, 사촌 가로숲, 유자정, 후송재, 후산정사, 영귀정 등 옛 사촌마을의 영광을 엿볼 수 있는 전통 건축물과 사촌마을 자료전시관이 잘 정비되어 있다. 사촌은 아직까지 살아 있는 선비의 고장이다. 안동김씨의 영화와 3난의 고초가 함께하고 있는 사촌마을 유자정(孺子亭)강당에서 천사의 주손 김창회씨를 보면서 서유자(徐孺子)와 안동김문의 유현을 떠올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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