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이일(李鎰)이 순변사(巡邊使)가 됨.
以李鎰爲巡邊使 召李薲還行在.
鎰初守江灘 平壤旣陷 渡江而南 入黃海道 從安岳至海州. 又自海州至江原道伊川 從世子募得兵數百. 聞賊入平壤久不出 而天兵將至 遂還平壤 結陣于林原坪 在平壤東北十餘里 與義兵將高忠卿等連勢 頗有斬獲.
而李薲在順安 每進兵輒北 撫軍司從官 皆欲以鎰代薲 元帥金命元 獨主李薲. 與撫軍司論議不協 頗有相激之端.
朝廷使余往順安軍中 使之鎭調輯.
旣而朝議皆言鎰勝薲 又聞天兵將出 恐薲不勝任 遂以鎰代之. 朴名賢代領鎰軍 而薲還行在.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이빈(李薲)을 불러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일은 이보다 먼저 대동강(大同江) 여울을 지키다가 평양성[平壤]이 함락되자,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황해도(黃海道)로 들어가서 안악(安岳)으로부터 해주(海州)에 이르렀다. 그는 또 해주로부터 강원도(江原道)의 이천(伊川)에 이르렀다. 그는 세자(世子)를 모시고 군사 수백 명을 모은 다음, 倭敵이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명(明)나라 구원병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는 평양으로 돌아와서 진을 임원역(林原驛)에 쳤는데, 여기는 평양성 동북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의병장(義兵將) 고충경(高忠卿) 등과 함께 세력을 연합하여 倭敵을 쳐서 자못 많이 베어 죽였다.
이때 이빈(李薲)은 순안(順安)에 있었는데, 늘 군사를 내보내 싸울 때 마다 번번이 패배하니 무군사(撫軍司)*1)의 종관(從官)들이 다 이일을 이빈과 교체시키려 하였다. 도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은 홀로 이빈을 그대로 맡겨두자고 주장하여 무군사와의 논의가 맞지 않아 자못 서로 격돌할 기색까지 엿보였다. 조정에서는 나로 하여금 순안(順安) 군중으로 가서 이를 진정(鎭定), 조집(調輯)시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당시 조정의 공론이 다 이일이 이빈보다도 낫다고들 말하고, 또 明나라 구원병이 곧 나온다는 말이 들리므로, 그렇다면 이빈이 그 임무를 이겨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게 되므로, 드디어는 이일을 그에 대신하게 하고, 박명현(朴名賢)*2)이 대신 이일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그리고 이빈을 행재소[行在]로 돌아오게 하였다.
*1)무군사(撫軍司) : 임진왜란 때 비변사(備邊司)에 두었던 한 관청. 왕세자(王世子)가 있는 곳에 분조(分朝 : 分備邊司)를 설치했는데, 이것을 나중에 무군사(撫軍司)라고 고쳐 불렀다. 현지에서 발생하는 각종 업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게 했다.
*2)박명현(朴名賢) : 본관은 죽산(竹山). 조선조 宣祖 때 무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충청도방어사(忠淸道防禦使)가 됨.
(41). 왜적(倭敵의 첩자(諜者) 김순량(金順良) 등을 잡아 죽임.
獲賊諜金順良.
余自安州 遣軍官成男 持傳令密約進取事于水軍將金億秋.
時十二月初二日也. 戒曰「六日內回繳.」過期不繳 追成男詰之. 成男云「已使江西軍人金順良還納.」又捕順良來 問傳令安在 其人故作迷罔狀 言辭流遁.
成男曰「此人持傳令出數日 還軍中 牽一牛來 與同伴屠食. 人問牛何來 順良答曰「吾牛而寄養於族人家 故還取耳.」今聞其言 蹤跡可疑.」
余始令栲椋 而嚴鞫之 乃吐實曰「小人爲賊間 其日受傳令及秘密公文 直入平壤示賊 賊將置傳令案上 公文則見卽扯裂. 賞一牛 同爲間者徐漢龍 賞紬五疋 約更探外事 期十五日來報 故聽出矣.」
余問「爲間者獨汝乎? 更有幾人?」對曰「凡四十餘輩 每散出順安⋅江西諸陣 以至肅川⋅安州⋅義州 無不貫穿行走 隨事輒報.」
余大駭 卽狀啓 又按名急通諸陣 捕之 或得或逸 斬順良於城外.
不久天兵至 而賊不知 蓋其類駭散故耳. 茲亦事機之偶然者 莫非天也.
왜적(倭敵)의 간첩 김순량(金順良)을 사로잡았다. 내가 안주(安州)로부터 군관(軍官) 성남(成男)을 파견하여 전령(傳令)을 가지고 적을 나가 칠 일을 수군장군(水軍將軍) 김억추(金億秋)에게 비밀히 약속하게 하였다. 그때가 12월 2일이었는데, 이때 경계하여 말하기를, "6일 이내에 전령을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 기일이 지나도록 전령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성남(成男)에게 그 이유를 추궁하여 따졌더니, 성남은 말하기를, "벌써 강서(江西) 군인 김순량(金順良)으로 하여금 돌려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나는 또 김순량을 잡아오게 하여 그 전령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니, 그 사람은 고의로 전혀 모른다는 모양을 하는데 말하는 것이 꾸며대는 듯하였다.
성남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령을 가지고 나간지 며칠 뒤에 군중(軍中)으로 돌아왔는데,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가족과 그 동무들과 함께 잡아먹으므로 사람들이 '소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물으니, 김순량은 대답하기를, '내 소인데 친척집에 맡겨 기르다가 지금 도로 찾아왔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들으니, 행동이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제야 고문을 하여 그를 엄중히 국문하게 하였더니, 곧 사실대로 고백하여 말하기를, "소인이 적의 간첩이 되어 그날 전령과 비밀 공문을 받아가지고, 곧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가서 이를 적에게 보였더니, 적장은 전령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비밀공문을 보고 나서 찢어 없앴으며 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간첩이 된 서한룡(徐漢龍)에게는 명주[紬] 다섯 필을 상으로 주면서 다시 다른 비밀을 탐지하여 15일 안으로 와서 보고하라기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간첩이 된 사람이 홀로 너뿐이냐? 또 몇 사람이나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모두 40여 명이나 되는데 순안(順安), 강서(江西)의 여러 진영에 흩어져 나와 있으며, 또 숙천(肅川)⋅안주(安州)⋅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뚫고 들어가서 돌아다니지 않는 데가 없으며, 일이 있는 대로 곧 알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크게 놀라서 즉시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올리고, 또 그들의 이름을 조사하여 여러 진(陣)에 급히 알려 이를 잡게 하였는데, 혹은 잡히고 혹은 도망하였다. 그리고 성 밖에서 김순량의 목을 베었다. 이 일이 있은지 오래지 않아 명(明)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倭敵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그 간첩의 무리들이 놀라 도망한 까닭이었다. 이것도 역시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우연한 것이었으나,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
以李鎰爲巡邊使 召李薲還行在.
鎰初守江灘 平壤旣陷 渡江而南 入黃海道 從安岳至海州. 又自海州至江原道伊川 從世子募得兵數百. 聞賊入平壤久不出 而天兵將至 遂還平壤 結陣于林原坪 在平壤東北十餘里 與義兵將高忠卿等連勢 頗有斬獲.
而李薲在順安 每進兵輒北 撫軍司從官 皆欲以鎰代薲 元帥金命元 獨主李薲. 與撫軍司論議不協 頗有相激之端.
朝廷使余往順安軍中 使之鎭調輯.
旣而朝議皆言鎰勝薲 又聞天兵將出 恐薲不勝任 遂以鎰代之. 朴名賢代領鎰軍 而薲還行在.
이일(李鎰)을 순변사(巡邊使)로 삼고, 이빈(李薲)을 불러 행재소(行在所)로 돌아오게 하였다. 이일은 이보다 먼저 대동강(大同江) 여울을 지키다가 평양성[平壤]이 함락되자, 대동강을 건너 남쪽으로 내려가 황해도(黃海道)로 들어가서 안악(安岳)으로부터 해주(海州)에 이르렀다. 그는 또 해주로부터 강원도(江原道)의 이천(伊川)에 이르렀다. 그는 세자(世子)를 모시고 군사 수백 명을 모은 다음, 倭敵이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와서 오랫동안 나오지 않고, 명(明)나라 구원병이 장차 이른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는 평양으로 돌아와서 진을 임원역(林原驛)에 쳤는데, 여기는 평양성 동북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는 여기서 의병장(義兵將) 고충경(高忠卿) 등과 함께 세력을 연합하여 倭敵을 쳐서 자못 많이 베어 죽였다.
이때 이빈(李薲)은 순안(順安)에 있었는데, 늘 군사를 내보내 싸울 때 마다 번번이 패배하니 무군사(撫軍司)*1)의 종관(從官)들이 다 이일을 이빈과 교체시키려 하였다. 도원수[元帥] 김명원(金命元)은 홀로 이빈을 그대로 맡겨두자고 주장하여 무군사와의 논의가 맞지 않아 자못 서로 격돌할 기색까지 엿보였다. 조정에서는 나로 하여금 순안(順安) 군중으로 가서 이를 진정(鎭定), 조집(調輯)시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당시 조정의 공론이 다 이일이 이빈보다도 낫다고들 말하고, 또 明나라 구원병이 곧 나온다는 말이 들리므로, 그렇다면 이빈이 그 임무를 이겨내지 못할 것을 염려하게 되므로, 드디어는 이일을 그에 대신하게 하고, 박명현(朴名賢)*2)이 대신 이일의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그리고 이빈을 행재소[行在]로 돌아오게 하였다.
*1)무군사(撫軍司) : 임진왜란 때 비변사(備邊司)에 두었던 한 관청. 왕세자(王世子)가 있는 곳에 분조(分朝 : 分備邊司)를 설치했는데, 이것을 나중에 무군사(撫軍司)라고 고쳐 불렀다. 현지에서 발생하는 각종 업무를 독자적으로 처리하게 했다.
*2)박명현(朴名賢) : 본관은 죽산(竹山). 조선조 宣祖 때 무신.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는 충청도방어사(忠淸道防禦使)가 됨.
(41). 왜적(倭敵의 첩자(諜者) 김순량(金順良) 등을 잡아 죽임.
獲賊諜金順良.
余自安州 遣軍官成男 持傳令密約進取事于水軍將金億秋.
時十二月初二日也. 戒曰「六日內回繳.」過期不繳 追成男詰之. 成男云「已使江西軍人金順良還納.」又捕順良來 問傳令安在 其人故作迷罔狀 言辭流遁.
成男曰「此人持傳令出數日 還軍中 牽一牛來 與同伴屠食. 人問牛何來 順良答曰「吾牛而寄養於族人家 故還取耳.」今聞其言 蹤跡可疑.」
余始令栲椋 而嚴鞫之 乃吐實曰「小人爲賊間 其日受傳令及秘密公文 直入平壤示賊 賊將置傳令案上 公文則見卽扯裂. 賞一牛 同爲間者徐漢龍 賞紬五疋 約更探外事 期十五日來報 故聽出矣.」
余問「爲間者獨汝乎? 更有幾人?」對曰「凡四十餘輩 每散出順安⋅江西諸陣 以至肅川⋅安州⋅義州 無不貫穿行走 隨事輒報.」
余大駭 卽狀啓 又按名急通諸陣 捕之 或得或逸 斬順良於城外.
不久天兵至 而賊不知 蓋其類駭散故耳. 茲亦事機之偶然者 莫非天也.
왜적(倭敵)의 간첩 김순량(金順良)을 사로잡았다. 내가 안주(安州)로부터 군관(軍官) 성남(成男)을 파견하여 전령(傳令)을 가지고 적을 나가 칠 일을 수군장군(水軍將軍) 김억추(金億秋)에게 비밀히 약속하게 하였다. 그때가 12월 2일이었는데, 이때 경계하여 말하기를, "6일 이내에 전령을 돌려보내도록 하라." 하였는데, 그 기일이 지나도록 전령을 돌려보내지 않으므로, 성남(成男)에게 그 이유를 추궁하여 따졌더니, 성남은 말하기를, "벌써 강서(江西) 군인 김순량(金順良)으로 하여금 돌려 드리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나는 또 김순량을 잡아오게 하여 그 전령이 어디 있는지를 물으니, 그 사람은 고의로 전혀 모른다는 모양을 하는데 말하는 것이 꾸며대는 듯하였다.
성남은 말하기를, "이 사람이 전령을 가지고 나간지 며칠 뒤에 군중(軍中)으로 돌아왔는데, 소 한 마리를 끌고 와서 가족과 그 동무들과 함께 잡아먹으므로 사람들이 '소를 어디서 가져왔느냐?'고 물으니, 김순량은 대답하기를, '내 소인데 친척집에 맡겨 기르다가 지금 도로 찾아왔을 따름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말을 들으니, 행동이 의심스럽습니다." 하였다. 나는 그제야 고문을 하여 그를 엄중히 국문하게 하였더니, 곧 사실대로 고백하여 말하기를, "소인이 적의 간첩이 되어 그날 전령과 비밀 공문을 받아가지고, 곧 평양성(平壤城)으로 들어가서 이를 적에게 보였더니, 적장은 전령을 책상 위에 놓아두고 비밀공문을 보고 나서 찢어 없앴으며 소 한 마리를 상으로 주었습니다. 그리고 같이 간첩이 된 서한룡(徐漢龍)에게는 명주[紬] 다섯 필을 상으로 주면서 다시 다른 비밀을 탐지하여 15일 안으로 와서 보고하라기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하고 나왔습니다." 하였다.
나는 "간첩이 된 사람이 홀로 너뿐이냐? 또 몇 사람이나 있느냐?" 하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모두 40여 명이나 되는데 순안(順安), 강서(江西)의 여러 진영에 흩어져 나와 있으며, 또 숙천(肅川)⋅안주(安州)⋅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 뚫고 들어가서 돌아다니지 않는 데가 없으며, 일이 있는 대로 곧 알리고 있습니다." 하였다. 나는 크게 놀라서 즉시 임금에게 장계(狀啓)를 올리고, 또 그들의 이름을 조사하여 여러 진(陣)에 급히 알려 이를 잡게 하였는데, 혹은 잡히고 혹은 도망하였다. 그리고 성 밖에서 김순량의 목을 베었다. 이 일이 있은지 오래지 않아 명(明)나라 군사가 이르렀는데 倭敵들은 알지 못하였다. 이는 대개 그 간첩의 무리들이 놀라 도망한 까닭이었다. 이것도 역시 중요한 일을 처리하는 우연한 것이었으나, 하늘의 도움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