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왜적(倭敵)을 무찌름.
時 各道起義兵討賊者甚衆.
在全羅道者 前判決事金千鎰 僉知高敬命 前寧海府使崔慶會.
千鎰字士重 率兵先至京畿 朝廷嘉之 賜其軍號曰倡義 已而不能軍 入江華.
敬命字而順 孟英之子 有文才 亦率鄕兵 移檄郡縣討賊 與賊戰敗死. 其子從厚. 代領其衆 名曰復讎軍.
慶會後爲慶尙右兵使 死於晉州.
其在慶尙道者 玄風人郭再祐 高靈人前佐郞金沔 陝川人前掌令鄭仁弘 禮安人前翰林金垓 校書正字柳宗介 草溪人李大期 軍威校生張士珍.
再祐 越之子 頗有才略 累與賊戰 賊憚之 固守鼎津 使賊不得入宜寧界 人以爲再祐之功.
沔故武將世文之子 禦賊于居昌牛脊峴 累卻賊 事聞 擢爲右兵使 病卒於軍中.
宗介起兵未久 遇賊而死 朝廷嘉其志 贈禮曹參議.
士珍 前後射殺賊兵甚多 賊稱爲張將軍 不敢入軍威界. 一日賊設伏誘之 士珍窮追陷伏中 猶大呼力戰 矢盡 賊擊斷士珍一臂 士珍獨以一臂 奮擊未已 遂死 事聞 贈水軍節度使.
其在忠淸道者 僧人靈圭 前都督官趙憲 前淸州牧使金弘敏 庶孽李山謙 士人朴春茂 忠州人趙德恭 內禁衞趙雄 淸州人李逢.
靈圭 勇力善闘 與憲復淸州 後爲賊所敗皆死.
雄尤勇敢 能馬上立馳 殺賊頗多 戰死.
其在京畿者 前司諫禹性傳 前正鄭叔夏 水原人崔屹 髙陽人進士李魯 李山輝 前牧使南彦經 幼學金琢 前正郞兪大進 忠義衞李軼 庶孽洪季男 士人王玉.
季男最驍勇 其餘各聚鄕里 或百餘人 或數十餘人 以義爲名者 不可勝數 而無可紀之績 皆遷徙日闋而已.
又有僧人惟政 在金剛山表訓寺 賊入山中 寺僧皆走 惟政不動 賊不敢逼 或合掌致敬而去.
余在安州 移文四方 使各起兵赴難 文至山中 惟政展佛卓上 呼諸僧讀之流涕.
遂起僧軍 西赴勤王 比至平壤 衆千餘人 屯平壤城東 與順安軍作爲形勢.
又有宗室湖城監 率百餘人赴行在 朝廷陞秩爲湖城都正 使屯順安 與大軍合勢.
其在北道者 評事鄭文孚 訓戎僉使高敬民 功最多云.
이때 각 도(道)에서는 의병(義兵)*1)이 일어나서 왜적(倭敵)을 토벌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전라도(全羅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판결사(前 判決事 : 장예원掌隷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노예문서와 소송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서) 김천일(金千鎰)*2)과 첨지(僉知) 고경명(高敬命)*3)과 전영해부사(前 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였다. 김천일[千鎰]의 자(字)는 사중(士重)이다.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먼저 경기도(京畿道)에 이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군호(軍號)를 주어 창의군(倡義軍)이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군세(軍勢 : 군대君隊의 형세形勢, 勢(형편이나 상태)를 잘 정비할 수 없었으므로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고경명(髙敬命)의 자(字)는 이순(而順)이다. 그는 맹영(孟英)의 아들로 글재주가 있었다. 그도 또한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격문[檄]을 여러 군현(郡縣)으로 보내 倭敵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倭敵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그 아들 종후(從厚)는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름하기를 '복수군(復讎軍)'이라고 하였다. 최경회(崔慶會)는 뒤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晉州)에서 倭敵과 싸우다 가 전사하였다. 경상도(慶尙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현풍(玄風) 사람 곽재우(郭再祐)*4)와 고령(高靈) 사람 전좌랑(前 佐郞 : 六曹의 정6품 벼슬) 김면(金沔)*5)과 합천(陝川) 사람 전장령(前 掌令 : 사헌부司憲府 : 조선 때 삼사三司의 하나. 정사를 비판하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가려내어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리는 관청의 정4품 벼슬) 정인홍(鄭仁弘)*6)과 예안(禮安) 사람 전한림(前 翰林 : 조선왕조 때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정9품 벼슬) 김해(金垓)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 조선왕조 때 교서관校書館의 정9품 벼슬. 교서관은 경서인행經書印行⋅향축香祝⋅인전印篆 등을 말은 관아) 유종개(柳宗介)와 초계(草溪) 사람 이대기(李大期)와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등이었다.
곽재우(郭再祐)는 곽월(郭越)의 아들로 자못 재략(才略)이 있었다. 그는 여러 번 倭敵과 싸워 이겼는데, 倭敵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정진(鼎津 : 鼎巖나루터)을 굳게 지켜 倭敵으로 하여금 의령(宜寧)의 지경(地境)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는 다 곽재우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김면(金沔)은 전에 무장이었던 김세문(金世文)의 아들로 倭敵을 맞아 거창(居昌)의 우척현(牛脊峴)에서 막고, 여러 번 倭 敵을 물리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발탁하여 우병사(右兵使)를 삼았다. 그는 병으로 싸움터에서 사망하였다. 유종개[宗介]는 의병을 일으킨지 오래 되지 않아 倭敵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조정 에서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예조참의(禮曹參議, 참의 : 육조 六曹의 판서判書⋅참판參判 다음가는 벼슬, 정3품)를 추증(追贈)하였다.
장사진(張士珍)은 전후(前後)에 倭敵의 군사를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는데, 倭敵들은 그를 장장군(張將軍)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군위(軍威)의 경계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倭敵들이 복병(伏兵)을 설치하고 그를 유인하였다. 장사진은 倭敵을 끝까지 쫓아 가다가 그 복병 속에 빠져들어 갔다. 그래도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힘써 싸우다가 화살이 다 떨어졌다. 倭敵들은 달려들어 장사진의 한 팔을 끊었으나,그는 남은 한 팔만으로 힘써 싸우기를 마지않다가 드디어는 전사하였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충청도(忠淸道)에서 활약했던 사람은 중[僧] 영규(靈圭)*7)와 전제독관(前 提督官 : 조선 宣祖 때, 교육을 감독⋅장려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아치) 조헌(趙憲)*8)과 전청주목사(前 淸州牧使) 김홍민(金弘敏)과 서얼(庶孽 : 서자庶子와 그 자손) 이산겸(李山謙)과 사인(士人 :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박춘무(朴春茂)와 충주(忠州) 사람[忠州人] 조덕공(趙德恭)과 내금위(內禁衞 : 조선 때,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지키는 금군錦軍 이 딸린 관청) 조웅(趙雄)과 청주(淸州) 사람[淸州人] 이봉(李逢)이었다. 영규(靈圭)는 용맹과 힘이 있어 싸움을 잘하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를 회복하였으나 뒤에 倭敵과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다 전사하였다.
조웅(趙雄)은 더욱 용감하여 능히 말 위에 일어서서 달렸고, 倭敵을 죽인 것이 자못 많았으나 전사하였다. 경기도(京畿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사간(前 司諫 : 조선 때, 사간원司諫院의 종3품 벼슬) 우성전(禹性傳)*9)과 전정(前 正 : 봉상시奉常寺⋅내의원內醫院⋅내자시內資寺⋅예빈시禮賓寺 등 관아의 으뜸 벼슬. 정3품) 정숙하(鄭叔夏)와 수원(水原) 사람[水原人] 최흘(崔屹)과 고양(高陽) 사람[高陽人] 진사(進士 : 조선 때, 소과小科와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한 사람을 일컫던 말) 이노(李魯)⋅이산휘(李山輝)와 전목사(前 牧使 : 高麗 중기 이후와 조선조 때, 관찰사觀察使 아래서 지방의 각 목牧을 맡아 다스리던 정3품의 외직문관外職文官. 목관牧官) 남언경(南彦經)과 유학(幼學 : 지난날, '벼슬을 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이다.
김탁(金琢)과 전정랑(前 正郞 : 조선 때, 육조六曹의 정5품 벼슬) 유대진(兪大進)과 충의위[忠義衞 : 조선조 충좌위(忠佐衛)에 속했던 군대. 공신(功臣)의 적실(嫡室) 자손과 첩(妾) 자손으로서 승중(承重 : 아버지와 할아버지 대신 제사를 받드는 일.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거나, 소종(小宗)의 사람이 대종가를 잇거나, 적자(嫡子)가 없어 서자가 가통(家統)을 잇는 경우 등을 이름.)된 사람으로 조직함. 世宗 즉위년(卽位年)에 베풀어서 高宗 31년에 폐하였음. 성중관(成衆官)의 하나] 이질(李軼)과 서얼(庶孽) 홍계남(洪季男)*10)과 사인(士人) 왕옥(王玉)이었다.
이 중에서 홍계남이 가장 날래고 용감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각 향리(鄕里)에서 혹은 백여 명, 혹은 수십 명을 모아 거느리고 의병(義兵)이라 이름한 자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시일만 보낼 따름 이었다. 또 중[僧]으로 유정(惟政)*11)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다. 倭敵들이 이 산속으로 돌아 오자 절에 있던 중들은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惟政)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倭敵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합장을 하고 공경하는 뜻을 표하면서 가버렸다.
내[柳成龍]가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공문을 사방으로 보내 각각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하러 나오라고 하였는데, 그 공문이 금강산(金剛山) 안에까지 이르자, 유정(惟政)은 그 공문을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들을 불러 놓고 이를 읽으며 눈물을 홀렸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승군(僧軍)을 일으켜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와서 국난을 구하려 힘썼는데, 그가 평양(平壤)에 올 무렵에는 그 무리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유정은 평양의 동쪽에 주둔하고 순안(順安)에 있던 관군[軍]과 함께 굳건한 형세를 만들었다.
또 종실(宗室)의 호성감[湖城監 : 종실의 작호(爵號). 감(監)은 종친부(宗親府)의 정6품 벼슬. 여기서 호성감은 이주(李柱)이다.]은 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行在]로 달려가니, 조정에서는 그의 벼슬을 올려 호성도정(湖城都正 : 종실의 작호. 도정은 종친부. 돈령부敦寧府⋅훈련원訓鍊院의 정3품 당상관)으로 삼아 순안에 주둔하여 대군(大軍)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북도(北道 : 咸鏡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12)와 훈융첨사[訓戎僉使 :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의 국경 취락(聚落 : 인가가 집단으로 모여있는 촌락)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선조 때, 절도사(節度使)의 지휘 아래 있던 정3품의 군직. 준 첨사(첨사僉使)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
*1)의병(義兵) :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던 민병(民兵). 임진왜란 때 그 활약이 매우 컸다.
*2)김천일(金千鎰, 1537∼1593)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시호는 문열(文烈).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감. 그 뒤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倭敵을 무찌르다가 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과 진주 남강(南江)에 투신 자살했다.
*3)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蜂), 시호는 충열(忠烈), 본관은 장흥(長興).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6, 7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行在所)를 향하여 북상하다가 금산전(錦山戰)에서 전사함.
*4)곽재우(郭再祐, 1552∼1617)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계수(李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倭敵들이 가장 두려워하였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저서에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5)김면(金沔, 1541∼1593)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임진왜란 때 거창(居昌)⋅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거창 우척현(牛脊峴)에서 倭敵을 파하여 공을 세우고 합천군수(陝川郡守)가 되고, 의병대장(義兵大將)의 호를 받았다.
*6)정인홍(鄭仁弘, 1535∼1623)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임진왜란 때 합천(陝川)에서 의병을 일으킴. 나중에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까지 역임되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참형(斬刑)되었다.
*7)영규(靈圭, ?∼1592) : 조선조 宣祖 때 승병장(僧兵將). 성은 박씨(朴氏), 호는 기허(騎虛),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倭敵과 싸워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함.
*8)조헌(趙憲, 1544∼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門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현감(縣監)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憎) 영규(靈圭)와 함께 칠백의사(七百義士)를 거느리고 금산(錦山)에서 倭敵을 무찌르다가 전사함. 저서에 ≪중봉집(重峰集)≫이 있다.
*9)우성전(禹性傅, 1542∼1593)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문과에 급제함. 임진왜란 때 경기도(京畿道)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의군(秋義軍)이라 이름하고, 倭敵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름.
*10)홍계남(洪季男, 생몰연대 미상) : 본관은 남양(南陽). 수원(水原) 출신. 조선조 宣祖 때의 무신. 임진왜란 때 아버지 홍언수(洪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倭敵을 무찌르는 데 공이 컸고,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는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활약이 컸다.
*11)유정(惟政, 1544∼1610)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호는 사명당(泗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경남 밀양(密陽) 출신. 속성(俗姓)은 임씨(任氏), 자는 이환(離幻), 유정은 법명(法名).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가서 휴정(休静)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휘하에서 활약하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平壤)을 수복하고 日本과의 강화에 힘쓰는 등 많은 공을 세움. 저서에 ≪사명집(四溟集)≫이 있다.
*12)정문부(鄭文孚, 1565∼1624) :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 본관은 해주(海州).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성(鏡城)에서 이붕수(李鵬壽)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길주(吉州)에서 倭敵을 크게 파하고, 뒤에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저서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
時 各道起義兵討賊者甚衆.
在全羅道者 前判決事金千鎰 僉知高敬命 前寧海府使崔慶會.
千鎰字士重 率兵先至京畿 朝廷嘉之 賜其軍號曰倡義 已而不能軍 入江華.
敬命字而順 孟英之子 有文才 亦率鄕兵 移檄郡縣討賊 與賊戰敗死. 其子從厚. 代領其衆 名曰復讎軍.
慶會後爲慶尙右兵使 死於晉州.
其在慶尙道者 玄風人郭再祐 高靈人前佐郞金沔 陝川人前掌令鄭仁弘 禮安人前翰林金垓 校書正字柳宗介 草溪人李大期 軍威校生張士珍.
再祐 越之子 頗有才略 累與賊戰 賊憚之 固守鼎津 使賊不得入宜寧界 人以爲再祐之功.
沔故武將世文之子 禦賊于居昌牛脊峴 累卻賊 事聞 擢爲右兵使 病卒於軍中.
宗介起兵未久 遇賊而死 朝廷嘉其志 贈禮曹參議.
士珍 前後射殺賊兵甚多 賊稱爲張將軍 不敢入軍威界. 一日賊設伏誘之 士珍窮追陷伏中 猶大呼力戰 矢盡 賊擊斷士珍一臂 士珍獨以一臂 奮擊未已 遂死 事聞 贈水軍節度使.
其在忠淸道者 僧人靈圭 前都督官趙憲 前淸州牧使金弘敏 庶孽李山謙 士人朴春茂 忠州人趙德恭 內禁衞趙雄 淸州人李逢.
靈圭 勇力善闘 與憲復淸州 後爲賊所敗皆死.
雄尤勇敢 能馬上立馳 殺賊頗多 戰死.
其在京畿者 前司諫禹性傳 前正鄭叔夏 水原人崔屹 髙陽人進士李魯 李山輝 前牧使南彦經 幼學金琢 前正郞兪大進 忠義衞李軼 庶孽洪季男 士人王玉.
季男最驍勇 其餘各聚鄕里 或百餘人 或數十餘人 以義爲名者 不可勝數 而無可紀之績 皆遷徙日闋而已.
又有僧人惟政 在金剛山表訓寺 賊入山中 寺僧皆走 惟政不動 賊不敢逼 或合掌致敬而去.
余在安州 移文四方 使各起兵赴難 文至山中 惟政展佛卓上 呼諸僧讀之流涕.
遂起僧軍 西赴勤王 比至平壤 衆千餘人 屯平壤城東 與順安軍作爲形勢.
又有宗室湖城監 率百餘人赴行在 朝廷陞秩爲湖城都正 使屯順安 與大軍合勢.
其在北道者 評事鄭文孚 訓戎僉使高敬民 功最多云.
이때 각 도(道)에서는 의병(義兵)*1)이 일어나서 왜적(倭敵)을 토벌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전라도(全羅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판결사(前 判決事 : 장예원掌隷院의 으뜸 벼슬. 정3품. 노예문서와 소송에 관한 업무를 맡은 관서) 김천일(金千鎰)*2)과 첨지(僉知) 고경명(高敬命)*3)과 전영해부사(前 寧海府使) 최경회(崔慶會)였다. 김천일[千鎰]의 자(字)는 사중(士重)이다.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먼저 경기도(京畿道)에 이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군호(軍號)를 주어 창의군(倡義軍)이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군세(軍勢 : 군대君隊의 형세形勢, 勢(형편이나 상태)를 잘 정비할 수 없었으므로 강화(江華)로 들어갔다.
고경명(髙敬命)의 자(字)는 이순(而順)이다. 그는 맹영(孟英)의 아들로 글재주가 있었다. 그도 또한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격문[檄]을 여러 군현(郡縣)으로 보내 倭敵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倭敵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그 아들 종후(從厚)는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름하기를 '복수군(復讎軍)'이라고 하였다. 최경회(崔慶會)는 뒤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晉州)에서 倭敵과 싸우다 가 전사하였다. 경상도(慶尙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현풍(玄風) 사람 곽재우(郭再祐)*4)와 고령(高靈) 사람 전좌랑(前 佐郞 : 六曹의 정6품 벼슬) 김면(金沔)*5)과 합천(陝川) 사람 전장령(前 掌令 : 사헌부司憲府 : 조선 때 삼사三司의 하나. 정사를 비판하고 벼슬아치의 잘못을 가려내어 백성의 억울함을 다스리는 관청의 정4품 벼슬) 정인홍(鄭仁弘)*6)과 예안(禮安) 사람 전한림(前 翰林 : 조선왕조 때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 정9품 벼슬) 김해(金垓)와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 : 조선왕조 때 교서관校書館의 정9품 벼슬. 교서관은 경서인행經書印行⋅향축香祝⋅인전印篆 등을 말은 관아) 유종개(柳宗介)와 초계(草溪) 사람 이대기(李大期)와 군위교생(軍威校生) 장사진(張士珍) 등이었다.
곽재우(郭再祐)는 곽월(郭越)의 아들로 자못 재략(才略)이 있었다. 그는 여러 번 倭敵과 싸워 이겼는데, 倭敵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정진(鼎津 : 鼎巖나루터)을 굳게 지켜 倭敵으로 하여금 의령(宜寧)의 지경(地境)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는 다 곽재우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김면(金沔)은 전에 무장이었던 김세문(金世文)의 아들로 倭敵을 맞아 거창(居昌)의 우척현(牛脊峴)에서 막고, 여러 번 倭 敵을 물리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발탁하여 우병사(右兵使)를 삼았다. 그는 병으로 싸움터에서 사망하였다. 유종개[宗介]는 의병을 일으킨지 오래 되지 않아 倭敵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조정 에서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예조참의(禮曹參議, 참의 : 육조 六曹의 판서判書⋅참판參判 다음가는 벼슬, 정3품)를 추증(追贈)하였다.
장사진(張士珍)은 전후(前後)에 倭敵의 군사를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는데, 倭敵들은 그를 장장군(張將軍)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군위(軍威)의 경계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倭敵들이 복병(伏兵)을 설치하고 그를 유인하였다. 장사진은 倭敵을 끝까지 쫓아 가다가 그 복병 속에 빠져들어 갔다. 그래도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힘써 싸우다가 화살이 다 떨어졌다. 倭敵들은 달려들어 장사진의 한 팔을 끊었으나,그는 남은 한 팔만으로 힘써 싸우기를 마지않다가 드디어는 전사하였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충청도(忠淸道)에서 활약했던 사람은 중[僧] 영규(靈圭)*7)와 전제독관(前 提督官 : 조선 宣祖 때, 교육을 감독⋅장려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 아치) 조헌(趙憲)*8)과 전청주목사(前 淸州牧使) 김홍민(金弘敏)과 서얼(庶孽 : 서자庶子와 그 자손) 이산겸(李山謙)과 사인(士人 : 벼슬을 하지 않은 선비) 박춘무(朴春茂)와 충주(忠州) 사람[忠州人] 조덕공(趙德恭)과 내금위(內禁衞 : 조선 때,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지키는 금군錦軍 이 딸린 관청) 조웅(趙雄)과 청주(淸州) 사람[淸州人] 이봉(李逢)이었다. 영규(靈圭)는 용맹과 힘이 있어 싸움을 잘하였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청주(淸州)를 회복하였으나 뒤에 倭敵과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다 전사하였다.
조웅(趙雄)은 더욱 용감하여 능히 말 위에 일어서서 달렸고, 倭敵을 죽인 것이 자못 많았으나 전사하였다. 경기도(京畿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사간(前 司諫 : 조선 때, 사간원司諫院의 종3품 벼슬) 우성전(禹性傳)*9)과 전정(前 正 : 봉상시奉常寺⋅내의원內醫院⋅내자시內資寺⋅예빈시禮賓寺 등 관아의 으뜸 벼슬. 정3품) 정숙하(鄭叔夏)와 수원(水原) 사람[水原人] 최흘(崔屹)과 고양(高陽) 사람[高陽人] 진사(進士 : 조선 때, 소과小科와 진사과進士科에 급제한 사람을 일컫던 말) 이노(李魯)⋅이산휘(李山輝)와 전목사(前 牧使 : 高麗 중기 이후와 조선조 때, 관찰사觀察使 아래서 지방의 각 목牧을 맡아 다스리던 정3품의 외직문관外職文官. 목관牧官) 남언경(南彦經)과 유학(幼學 : 지난날, '벼슬을 하지 아니한 유생儒生'을 이르던 말이다.
김탁(金琢)과 전정랑(前 正郞 : 조선 때, 육조六曹의 정5품 벼슬) 유대진(兪大進)과 충의위[忠義衞 : 조선조 충좌위(忠佐衛)에 속했던 군대. 공신(功臣)의 적실(嫡室) 자손과 첩(妾) 자손으로서 승중(承重 : 아버지와 할아버지 대신 제사를 받드는 일.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의 상속자가 되거나, 소종(小宗)의 사람이 대종가를 잇거나, 적자(嫡子)가 없어 서자가 가통(家統)을 잇는 경우 등을 이름.)된 사람으로 조직함. 世宗 즉위년(卽位年)에 베풀어서 高宗 31년에 폐하였음. 성중관(成衆官)의 하나] 이질(李軼)과 서얼(庶孽) 홍계남(洪季男)*10)과 사인(士人) 왕옥(王玉)이었다.
이 중에서 홍계남이 가장 날래고 용감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각 향리(鄕里)에서 혹은 백여 명, 혹은 수십 명을 모아 거느리고 의병(義兵)이라 이름한 자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다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 시일만 보낼 따름 이었다. 또 중[僧]으로 유정(惟政)*11)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금강산(金剛山) 표훈사(表訓寺)에 있었다. 倭敵들이 이 산속으로 돌아 오자 절에 있던 중들은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惟政)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倭敵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합장을 하고 공경하는 뜻을 표하면서 가버렸다.
내[柳成龍]가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공문을 사방으로 보내 각각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하러 나오라고 하였는데, 그 공문이 금강산(金剛山) 안에까지 이르자, 유정(惟政)은 그 공문을 불탁(佛卓) 위에 펴놓고 여러 중들을 불러 놓고 이를 읽으며 눈물을 홀렸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승군(僧軍)을 일으켜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와서 국난을 구하려 힘썼는데, 그가 평양(平壤)에 올 무렵에는 그 무리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유정은 평양의 동쪽에 주둔하고 순안(順安)에 있던 관군[軍]과 함께 굳건한 형세를 만들었다.
또 종실(宗室)의 호성감[湖城監 : 종실의 작호(爵號). 감(監)은 종친부(宗親府)의 정6품 벼슬. 여기서 호성감은 이주(李柱)이다.]은 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行在]로 달려가니, 조정에서는 그의 벼슬을 올려 호성도정(湖城都正 : 종실의 작호. 도정은 종친부. 돈령부敦寧府⋅훈련원訓鍊院의 정3품 당상관)으로 삼아 순안에 주둔하여 대군(大軍)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북도(北道 : 咸鏡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12)와 훈융첨사[訓戎僉使 : 함경북도 온성군(穩城郡)의 국경 취락(聚落 : 인가가 집단으로 모여있는 촌락)의 첨절제사(僉節制使). 조선조 때, 절도사(節度使)의 지휘 아래 있던 정3품의 군직. 준 첨사(첨사僉使) 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
*1)의병(義兵) :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던 민병(民兵). 임진왜란 때 그 활약이 매우 컸다.
*2)김천일(金千鎰, 1537∼1593)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본관은 언양(彦陽)이다. 시호는 문열(文烈).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水原城)을 거쳐 강화도(江華島)로 들어감. 그 뒤 진주성(晉州城) 싸움에서 倭敵을 무찌르다가 성이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과 진주 남강(南江)에 투신 자살했다.
*3)고경명(高敬命, 1533∼1592)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蜂), 시호는 충열(忠烈), 본관은 장흥(長興).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유팽로(柳彭老)와 함께 6, 7천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行在所)를 향하여 북상하다가 금산전(錦山戰)에서 전사함.
*4)곽재우(郭再祐, 1552∼1617)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계수(李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현풍(玄風)이다. 임진왜란 때 의령(宜寧)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倭敵들이 가장 두려워하였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렀다. 저서에 ≪망우당집(忘憂堂集)≫이 있다.
*5)김면(金沔, 1541∼1593)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본관은 고령(高靈)이다. 임진왜란 때 거창(居昌)⋅고령(高靈)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거창 우척현(牛脊峴)에서 倭敵을 파하여 공을 세우고 합천군수(陝川郡守)가 되고, 의병대장(義兵大將)의 호를 받았다.
*6)정인홍(鄭仁弘, 1535∼1623)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임진왜란 때 합천(陝川)에서 의병을 일으킴. 나중에 좌의정(左議政)에서 영의정(領議政)까지 역임되었으나 인조반정(仁祖反正)이 일어나 참형(斬刑)되었다.
*7)영규(靈圭, ?∼1592) : 조선조 宣祖 때 승병장(僧兵將). 성은 박씨(朴氏), 호는 기허(騎虛), 본관은 밀양(密陽)이다.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倭敵과 싸워 청주(淸州)를 수복하고, 금산(錦山)에서 싸우다가 칠백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함.
*8)조헌(趙憲, 1544∼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시호는 문열(文烈)이며, 본관은 백천(白川)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門人)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현감(縣監)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憎) 영규(靈圭)와 함께 칠백의사(七百義士)를 거느리고 금산(錦山)에서 倭敵을 무찌르다가 전사함. 저서에 ≪중봉집(重峰集)≫이 있다.
*9)우성전(禹性傅, 1542∼1593)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의병장(義兵將).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연암(淵庵). 시호는 문강(文康), 본관은 단양(丹陽)이다. 문과에 급제함. 임진왜란 때 경기도(京畿道)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의군(秋義軍)이라 이름하고, 倭敵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사성(大司成)에 이름.
*10)홍계남(洪季男, 생몰연대 미상) : 본관은 남양(南陽). 수원(水原) 출신. 조선조 宣祖 때의 무신. 임진왜란 때 아버지 홍언수(洪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倭敵을 무찌르는 데 공이 컸고,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는 경기조방장(京畿助防將)으로 활약이 컸다.
*11)유정(惟政, 1544∼1610) :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호는 사명당(泗溟堂)⋅송운(松雲)⋅종봉(鍾峯).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본관은 풍천(豊川)이다. 경남 밀양(密陽) 출신. 속성(俗姓)은 임씨(任氏), 자는 이환(離幻), 유정은 법명(法名). 임진왜란 때 승군(僧軍)을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가서 휴정(休静) 서산대사(西山大師)의 휘하에서 활약하고,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을 따라 명(明)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平壤)을 수복하고 日本과의 강화에 힘쓰는 등 많은 공을 세움. 저서에 ≪사명집(四溟集)≫이 있다.
*12)정문부(鄭文孚, 1565∼1624) : 자는 자허(子虛), 호는 농포(農圃), 시호는 충의(忠毅), 본관은 해주(海州). 조선조 宣祖 때 의병장(義兵將). 문과에 급제하여 북평사(北評事)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경성(鏡城)에서 이붕수(李鵬壽) 등과 의병을 일으켜 길주(吉州)에서 倭敵을 크게 파하고, 뒤에 길주목사(吉州牧使)가 되었다. 저서에 ≪농포집(農圃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