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漢四郡 設置와 位置問題
종래 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 韓百謙의 《東國地理志》 이후 1930년대 주장되고 있는 韓半島내 存在說이 유력하게 되었고, 安鼎福의 《東史綱目》 〈朝鮮四郡三韓圖〉에서는 半島內에 명기 했던 것이며, 日帝의 官學者들은 소위 樂浪遺物을 발견함으로써 漢四郡縣中 樂浪郡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굳혀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丹齋는 전통적인 유학자들이 가졌던 漢四郡의 한반도내 존재설이나 소위 平壤中心說을 모두 거부했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丹齋의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는 漢四郡의 한반도내 不置說 즉 遼東半島내 設置說을 분명히 했다. 이에 관한
언급은 《讀史新論》에서이다. 漢四郡의 위치와 관련, 주목되는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丹齋의 四郡위치의 異說原因은 地名의 同異를 잘 구별하지 못한 점, 기록의 眞僞를 잘 辨別하지 못한 점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로 이렇게 歷史硏究方法論을 심화시킨 바탕 위에서 광범위하게 史料를 섭렵할 수 있었던 丹齋는 이제 漢四郡 문제에 대한 일대 결단을 선언한다. 종래까지 그가 견지해왔던 漢四郡 實置說 대신 紙上假定說 내지는 玄菟‧樂浪의 遼東郡內의 僑設說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漢四郡은 紙上에 그린 假定이니 樂浪郡을 멸하거든 樂浪郡을 만들리라하는 紙上假定說뿐이요, 다른 하나는 玄菟‧樂浪의 임시로 설치한 설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丹齋가 취한 史料解釋을 定說化하기에는 거쳐야 할 많은 단계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한편 日本人 학자들이 古蹟調査가 학문적인 목적보다는 정치적인 動機에서 이루어진 것을 지적했다. 또한 日帝官學者들의 考古學的 주장에 丹齋는 동의하지 않았다. 丹齋가 동의하지 않은 것은 첫째로 漢四郡 설치와 高句麗의 削減年代 還元에 따른 兩國間의 관계이다. 漢 武帝의 滄海郡 설치에 대한 高句麗의 九年血戰과 그 혈전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 大朱留王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漢四郡이 設置되자 高句麗는 다시 對漢鬪爭의 가장 강력한 先鋒이 되었다. 통설에 의하면 BC108~107년에 四郡이 설치되고 그 후에 고구려의 對漢鬪爭이 전개되어 BC 82년에 眞番‧臨屯이 없어지고, BC75년에는 玄菟가 移置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丹齋는 高句麗와 漢의 전쟁이 衛氏가 멸망하던 BC108년에 시작되어 BC 82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싸움에서 漢이 패배하여 四郡의 實置의 희망이 永絶되었음으로, 眞番‧臨屯 兩郡은 그 명칭까지도 폐지하고 玄菟‧樂浪 兩 郡은 遼東郡내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丹齋의 漢四郡 위치설정에 대해 현재 강단사학들의 四庫全書 등의 中國 측 史料를 인용하여 遼東半島에서 더 멀리 떨어진 渤海灣 영역으로 더 들어가 앞에서(古代史의 領域問題) 언급한 것을 다시 인용하여 보겠다. ‘『史記』 「朝鮮列傳」에서 浿水는 燕-朝鮮, 漢-朝鮮의 국경선이라 했다. 衛滿은 서쪽에서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고, 涉何는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다가 中國으로 도망쳤다. 이는 浿水가 中國과 朝鮮 양국 사이의 國境線이긴 하지만 朝鮮에 속하는 朝鮮河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朝鮮河=潮河=浿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한 지도에서 보듯이 盧龍縣에 있는 朝鮮城은 弊城으로 지금도 남아있으니, 潮河와 朝鮮城이 곧 고조선의 영토이며 중국과의 국경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라고 확신하고 있다. 丹齋가 표현한 地名 판단이 잘 못되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며, 四庫全書와 같은 서적을 丹齋가 그 당시 읽었다면 보다 정확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浿水가 大同江이 아니고 古朝鮮과 中國의 국경선에 흐르는 朝鮮河요 지금은 潮河로 이름이 바뀌어져 있음을 植民史學者들이 어찌 알리오. 필자가 알고 있는 견해로는 四庫全書가 북경대학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丹齋가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연구하실 때 그 책을 읽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四庫全書는 중국 네 곳에 비치한 것으로 한 권은 소실되었고, 한 권은 대만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종래 漢四郡 문제는 漢 武帝가 東方侵掠政策의 하나로 滿洲의 孫右渠를 치고 그곳에 漢의 直轄領地로서 樂浪‧眞番‧臨屯‧玄菟郡을 설치하고 그곳에 중앙에서 행정관으로 太守를 직접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을 것으로, BC108~107년에 오늘날 平安‧黃海‧江原北部‧咸鏡南녘 및 鴨綠江 中流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理解되어왔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李丙燾가 만든 現國史冊에 실려 있는 내용)
그러나 上古時代에 있어서 중국에 대한 韓民族의 文化的‧政治軍事的 對決 내지는 그 優位性을 주장해 오던 丹齋는 漢四郡문제에 대하여 종래의 학설을 거부하고 新說을 내세웠다. 丹齋가 전개한 漢四郡 位置의 고증, 高句麗年代削減論 순으로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의 대동강 주변으로 배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위의 지도에서 보듯 사뭇 다르다. 서길수 교수의 방증을 알아보자.
1) 『漢書』 권65, 古朝鮮條에 元封3년(BC108) 마침내 朝鮮을 평정하고 眞番, 臨屯, 樂浪, 玄菟(현도) 등 四郡을 설치하였다.
2) 『漢書』 권28 지리지에는 낙랑군은 漢武帝 원봉3년(BC108), 현도군은 원봉 4년(BC107) 에 설치했다고 한다.
3) 『漢書』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에 漢武帝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군과 낙랑군으로 삼았다. 진번과 임둔은 생긴 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BC 82).
4) 『漢書』 지리지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고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4만 5,006戶로 22만 1,845명과 高句麗, 上殷台 西蓋馬 등 3縣이다. 樂浪郡은 6만 2,817戶로 40만6,748명이며, 朝鮮, 儼邯(엄감) , 浿水, 含資 등 25縣이다.
5) 『後漢書』 郡國志에 현도군은 6성으로 1,594戶에 4만 3,163명이며 高句麗, 西蓋馬, 上殷台, 高顯, 候城, 遼陽이다. 樂浪郡은 18城으로 6만 1,492戶로 25만 7,050명이며 朝鮮, 탕감, 浿水, 함자, 점선 수성 등 18현이다.
6) 『後漢書』 권 85 東夷列傳 예조에는 소제 시원 5년(BC 82)에 이르러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된 26년 만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08년대에 이미 高句麗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漢書』 권6 武帝紀 3년(BC 108)에 주석에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茂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東夷縣으로 長安에서 6,138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으로 長安에서 7,640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고 하였다..
8) 『後漢書』 군국지에서 현도군은 낙양(雒陽) 동북쪽 5천리에 있다. 이것을 보면 漢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를 일시적으로 설치하였으나, BC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파했다고 하였다. 즉 진번군과 임둔군은 26년간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해졌기 때문에 『後漢書』 지리지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漢四郡의 설치가 갈석산과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던 것을 한국 땅 평양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엉터리 국사를 지금도 학교에서 교육하고 있으니 嗚呼痛哉라.
『漢書』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낙랑군, 현도군의 위치가 갈석산의 동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갈석은 하북성 창여현에 있는 중요한 산으로 이것을 기점으로 심게 된다면 학계에서 거론하는 바다를 건너 평양까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갈석산은 요동을 거론할 때에 꼭 등장하는 지표 지명이었기 때문에 낙랑군 현도군 등이 요동을 벗어날 수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요동의 기준이 되고 있는 지표명인 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이것은 遼나라 이후에 생긴 기준점이다. 이전에는 갈석산 부근을 흐르던 난하(灤河)가 遼水로 그 동쪽을 遼西, 그 동쪽을 遼東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낙랑군은 동부도위와 남부도위, 직할시로 세 개로 나뉘었는데, 그 기준이 되는 單單大嶺인데, 현재 한반도의 개마고원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요서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의무려산맥으로 비정한다. 이 산맥은 남북으로 비스듬히 흐르고 있어 난하와 요하 사이의 넓은 지역을 둘로 나누어주고 있는 지형학적 요충지였기에 요동의 鎭山으로 수양제도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서길수 교수가 답사하였을 때에도 고구려의 성을 조사한 적이 있어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역사적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10) 漢郡縣의 이동설치
『三國志』 동이전, 예조 BC82년에 임둔군은 낙랑군에, 진번군이 현도군에 병합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임둔군의 치소는 동시현이였는데, 병합된 이후에는 낙랑군의 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臨屯太守章’이라는 封泥가 산해관 동쪽 해안에 있는 요녕성(胡蘆島市) 邰集屯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후일 낙랑군 동이현이 되는 것이다. 원래 연나라가 설치한 상곡군, 우부평군, 어양군 요소군, 요동군 등 5군은 산해관과 만리장성의 서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후에 전한의 무제가 산해관과 요하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면서 낙랑군, 현도군이 신설되면서 요동군도 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위의 자료는 ‘우리역사 바로 알기’ 단체의 오순제 교수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종래 漢四郡의 위치에 대하여 韓百謙의 《東國地理志》 이후 1930년대 주장되고 있는 韓半島내 存在說이 유력하게 되었고, 安鼎福의 《東史綱目》 〈朝鮮四郡三韓圖〉에서는 半島內에 명기 했던 것이며, 日帝의 官學者들은 소위 樂浪遺物을 발견함으로써 漢四郡縣中 樂浪郡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다는 것으로 굳혀지는 듯하였다.
그러나 丹齋는 전통적인 유학자들이 가졌던 漢四郡의 한반도내 존재설이나 소위 平壤中心說을 모두 거부했다. 漢四郡의 위치에 대한 丹齋의 주장이 일관된 것은 아니지만, 시간의 경과에 따라 그는 漢四郡의 한반도내 不置說 즉 遼東半島내 設置說을 분명히 했다. 이에 관한
언급은 《讀史新論》에서이다. 漢四郡의 위치와 관련, 주목되는 몇 가지 점이 있다. 첫째, 丹齋의 四郡위치의 異說原因은 地名의 同異를 잘 구별하지 못한 점, 기록의 眞僞를 잘 辨別하지 못한 점이라고 판단하였다. 둘째로 이렇게 歷史硏究方法論을 심화시킨 바탕 위에서 광범위하게 史料를 섭렵할 수 있었던 丹齋는 이제 漢四郡 문제에 대한 일대 결단을 선언한다. 종래까지 그가 견지해왔던 漢四郡 實置說 대신 紙上假定說 내지는 玄菟‧樂浪의 遼東郡內의 僑設說을 주장했다는 점이다. 漢四郡은 紙上에 그린 假定이니 樂浪郡을 멸하거든 樂浪郡을 만들리라하는 紙上假定說뿐이요, 다른 하나는 玄菟‧樂浪의 임시로 설치한 설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는 丹齋가 취한 史料解釋을 定說化하기에는 거쳐야 할 많은 단계가 있음을 지적할 수 있겠다.
한편 日本人 학자들이 古蹟調査가 학문적인 목적보다는 정치적인 動機에서 이루어진 것을 지적했다. 또한 日帝官學者들의 考古學的 주장에 丹齋는 동의하지 않았다. 丹齋가 동의하지 않은 것은 첫째로 漢四郡 설치와 高句麗의 削減年代 還元에 따른 兩國間의 관계이다. 漢 武帝의 滄海郡 설치에 대한 高句麗의 九年血戰과 그 혈전의 승리로 이끈 주역이 大朱留王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미 앞에서 보았다. 漢四郡이 設置되자 高句麗는 다시 對漢鬪爭의 가장 강력한 先鋒이 되었다. 통설에 의하면 BC108~107년에 四郡이 설치되고 그 후에 고구려의 對漢鬪爭이 전개되어 BC 82년에 眞番‧臨屯이 없어지고, BC75년에는 玄菟가 移置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丹齋는 高句麗와 漢의 전쟁이 衛氏가 멸망하던 BC108년에 시작되어 BC 82년까지 계속되었고, 이 싸움에서 漢이 패배하여 四郡의 實置의 희망이 永絶되었음으로, 眞番‧臨屯 兩郡은 그 명칭까지도 폐지하고 玄菟‧樂浪 兩 郡은 遼東郡내에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丹齋의 漢四郡 위치설정에 대해 현재 강단사학들의 四庫全書 등의 中國 측 史料를 인용하여 遼東半島에서 더 멀리 떨어진 渤海灣 영역으로 더 들어가 앞에서(古代史의 領域問題) 언급한 것을 다시 인용하여 보겠다. ‘『史記』 「朝鮮列傳」에서 浿水는 燕-朝鮮, 漢-朝鮮의 국경선이라 했다. 衛滿은 서쪽에서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고, 涉何는 浿水를 건너 朝鮮에 왔다가 中國으로 도망쳤다. 이는 浿水가 中國과 朝鮮 양국 사이의 國境線이긴 하지만 朝鮮에 속하는 朝鮮河였음을 말해준다. 따라서 朝鮮河=潮河=浿水라는 등식이 성립한다. 또한 지도에서 보듯이 盧龍縣에 있는 朝鮮城은 弊城으로 지금도 남아있으니, 潮河와 朝鮮城이 곧 고조선의 영토이며 중국과의 국경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라고 확신하고 있다. 丹齋가 표현한 地名 판단이 잘 못되었음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며, 四庫全書와 같은 서적을 丹齋가 그 당시 읽었다면 보다 정확하게 주장했을 것이다. 浿水가 大同江이 아니고 古朝鮮과 中國의 국경선에 흐르는 朝鮮河요 지금은 潮河로 이름이 바뀌어져 있음을 植民史學者들이 어찌 알리오. 필자가 알고 있는 견해로는 四庫全書가 북경대학에 보존되어 있는 것으로 아는데, 丹齋가 북경대학 도서관에서 연구하실 때 그 책을 읽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四庫全書는 중국 네 곳에 비치한 것으로 한 권은 소실되었고, 한 권은 대만에 소장된 것으로 알고 있다.
종래 漢四郡 문제는 漢 武帝가 東方侵掠政策의 하나로 滿洲의 孫右渠를 치고 그곳에 漢의 直轄領地로서 樂浪‧眞番‧臨屯‧玄菟郡을 설치하고 그곳에 중앙에서 행정관으로 太守를 직접 파견하여 다스리게 했을 것으로, BC108~107년에 오늘날 平安‧黃海‧江原北部‧咸鏡南녘 및 鴨綠江 中流의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고 理解되어왔다.(※ <조선사편수회>에 참여했던 李丙燾가 만든 現國史冊에 실려 있는 내용)
그러나 上古時代에 있어서 중국에 대한 韓民族의 文化的‧政治軍事的 對決 내지는 그 優位性을 주장해 오던 丹齋는 漢四郡문제에 대하여 종래의 학설을 거부하고 新說을 내세웠다. 丹齋가 전개한 漢四郡 位置의 고증, 高句麗年代削減論 순으로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한사군의 위치가 평양의 대동강 주변으로 배워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위의 지도에서 보듯 사뭇 다르다. 서길수 교수의 방증을 알아보자.
1) 『漢書』 권65, 古朝鮮條에 元封3년(BC108) 마침내 朝鮮을 평정하고 眞番, 臨屯, 樂浪, 玄菟(현도) 등 四郡을 설치하였다.
2) 『漢書』 권28 지리지에는 낙랑군은 漢武帝 원봉3년(BC108), 현도군은 원봉 4년(BC107) 에 설치했다고 한다.
3) 『漢書』 엄주오구주부서엄종왕가전에 漢武帝가 동쪽으로 갈석산을 지나 현도군과 낙랑군으로 삼았다. 진번과 임둔은 생긴 지 오래지 않아 폐지되었다(BC 82).
4) 『漢書』 지리지에는 진번군과 임둔군은 보이지 않고 현도군과 낙랑군만 기록되어 있다. 현도군은 4만 5,006戶로 22만 1,845명과 高句麗, 上殷台 西蓋馬 등 3縣이다. 樂浪郡은 6만 2,817戶로 40만6,748명이며, 朝鮮, 儼邯(엄감) , 浿水, 含資 등 25縣이다.
5) 『後漢書』 郡國志에 현도군은 6성으로 1,594戶에 4만 3,163명이며 高句麗, 西蓋馬, 上殷台, 高顯, 候城, 遼陽이다. 樂浪郡은 18城으로 6만 1,492戶로 25만 7,050명이며 朝鮮, 탕감, 浿水, 함자, 점선 수성 등 18현이다.
6) 『後漢書』 권 85 東夷列傳 예조에는 소제 시원 5년(BC 82)에 이르러 임둔군과 진번군을 폐지하여 낙랑군과 현도군에 병합하였다고 한다. 여기서 임둔군과 진번군은 설치된 26년 만에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원전 108년대에 이미 高句麗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漢書』 권6 武帝紀 3년(BC 108)에 주석에 “신찬(臣瓚)이 말하기를 <茂陵書>에 임둔군의 치소는 東夷縣으로 長安에서 6,138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 진번군의 치소는 삽현(霅縣)으로 長安에서 7,640리에 있으며 15현이 있다고 하였다..
8) 『後漢書』 군국지에서 현도군은 낙양(雒陽) 동북쪽 5천리에 있다. 이것을 보면 漢武帝가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진번, 임둔 낙랑, 현도를 일시적으로 설치하였으나, BC 82년에 진번군과 임둔군을 파했다고 하였다. 즉 진번군과 임둔군은 26년간 일시적으로 존재했다가 낙랑군과 현도군에 합해졌기 때문에 『後漢書』 지리지에는 수록되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漢四郡의 설치가 갈석산과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던 것을 한국 땅 평양에 낙랑군을 설치했다는 엉터리 국사를 지금도 학교에서 교육하고 있으니 嗚呼痛哉라.
『漢書』의 기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낙랑군, 현도군의 위치가 갈석산의 동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갈석은 하북성 창여현에 있는 중요한 산으로 이것을 기점으로 심게 된다면 학계에서 거론하는 바다를 건너 평양까지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갈석산은 요동을 거론할 때에 꼭 등장하는 지표 지명이었기 때문에 낙랑군 현도군 등이 요동을 벗어날 수 없음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요동의 기준이 되고 있는 지표명인 요수는 현재의 요하가 아니라 이것은 遼나라 이후에 생긴 기준점이다. 이전에는 갈석산 부근을 흐르던 난하(灤河)가 遼水로 그 동쪽을 遼西, 그 동쪽을 遼東으로 불리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가장 큰 낙랑군은 동부도위와 남부도위, 직할시로 세 개로 나뉘었는데, 그 기준이 되는 單單大嶺인데, 현재 한반도의 개마고원으로 비정하고 있다. 그러나 요서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인 의무려산맥으로 비정한다. 이 산맥은 남북으로 비스듬히 흐르고 있어 난하와 요하 사이의 넓은 지역을 둘로 나누어주고 있는 지형학적 요충지였기에 요동의 鎭山으로 수양제도 이 산에서 제사를 지냈던 것이다. 서길수 교수가 답사하였을 때에도 고구려의 성을 조사한 적이 있어 이것이 우리 민족에게 매우 역사적인 지역임을 알 수 있다
10) 漢郡縣의 이동설치
『三國志』 동이전, 예조 BC82년에 임둔군은 낙랑군에, 진번군이 현도군에 병합시켰다고 한다. 그런데 임둔군의 치소는 동시현이였는데, 병합된 이후에는 낙랑군의 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臨屯太守章’이라는 封泥가 산해관 동쪽 해안에 있는 요녕성(胡蘆島市) 邰集屯에서 출토된 것으로 보아 후일 낙랑군 동이현이 되는 것이다. 원래 연나라가 설치한 상곡군, 우부평군, 어양군 요소군, 요동군 등 5군은 산해관과 만리장성의 서쪽에 설치되어 있었다. 그 후에 전한의 무제가 산해관과 요하 사이를 차지하고 있었던 위만조선을 멸망시키면서 낙랑군, 현도군이 신설되면서 요동군도 이 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위의 자료는 ‘우리역사 바로 알기’ 단체의 오순제 교수의 자료를 인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