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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35). 경기감사(京畿監司) 심대(沈岱)의 죽음
23/07/11 07:44:21 金 鍾國 조회 2150
35. 경기감사(京畿監司) 심대(沈岱)의 죽음
京畿監司沈岱 爲賊所襲 死於朔寧.
岱爲人慷慨 自變後 當憤憤 奉使出入 不避夷險.
是年秋 代權徵爲京畿監司 從行朝赴任所 路出安州 見余于百祥樓上.
語國難慨然 觀其意直欲親犯矢石 以角賊. 余戒之曰「古人不云乎? 耕當問奴. 君書生 臨陣終非所能. 其處有楊州牧使高彦 伯者 勇力善闘 君但收拾軍兵 使彦伯將之 可有功 愼勿自將也.」岱唯唯 而不甚然之.
余又見其孤行入賊中 分軍官善射者義州人張某與俱.
岱旣去 數月間 每有京畿人 啓事行朝 經過安州者 未嘗不致書問余也. 余輒親問其人京畿賊勢及監司何爲?
對曰「畿甸創殘甚他道 賊日出焚掠 無乾淨地. 前監司及守令以下 悉從深僻處躱避 減去儀從 微服潛行 或屢遷徙 不定厥居 以防賊患. 今監司 殊不畏賊 每巡行 先文知委如平日 建旗鳴角而行.」
余聞而甚憂之 申書戒勅如前 岱不變.
旣乃聚集軍兵 悉以自隨 聲言欲復京城 日遣人入城中召募 約爲內應. 城中人 恐事定後 以附賊獲罪 連名結狀 出赴監司 自言能內應者 日以千百數.
名曰聽約束 曰輸軍器 曰報賊情 人人往來無阻. 其間亦有爲賊耳目 來察動靜者多 出沒相雜 而岱信之不疑.
至是 岱在朔寧郡 賊詗知之 潛渡大灘 夜襲之. 岱驚起披衣走出 賊追害之 軍官張姓者亦同死.
賊去 京畿人 權殯于朔寧郡中. 數日 賊復出取其首 懸於鐘樓街上 積五六十日 面色如生.
京畿人 哀其忠義 相與率財物 賂守倭贖出之 函送于江華 賊退後 與尸身還葬故山.
岱靑松人 字公望. 子大復 朝廷以岱故官之 至縣監.

경기감사(京畿監司) 심대(沈岱)*1)가 왜적(倭敵)의 습격을 당하여 삭녕(朔寧)*2)에서 사망하였다. 심대[岱]는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倭敵의 변고가 일어난 뒤로부터 항상 분함을 참지 못하였으며,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싸움터로 출입할 때에도 위험한 곳[夷險]*3)도 피하지 아니하였다. 이해(1592) 가을에 심대[岱]는 권징(勸徵)을 대신하여 경기감사(京畿監司)가 되어 행조(行朝)*4)로부터 임소(任所 : 임지任地)로 떠나가는데, 길이 안주(安州)로 나오게 되므로 나[柳成龍]를 (안주安州의) 백상루(百祥樓)에서 찾아보았다.

그는 국난(國難)을 말하면서 분개하고 있는데, 그 뜻을 살펴보니 강직하여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倭敵과 싸우려 하므로, 나는 그를 경계하여 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밭을 가는 일은 마땅히 종[農奴]에게 물으라.'고. 그대는 서생(書生)이므로 싸움터에 임하는 일은 결국 능숙하지 못할 것일세. 그곳[京畿道]에 양주목사(楊州牧使) 고언백(高彦伯)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용맹스러워 잘 싸울 것이니, 그대는 다만 군병을 수습하여 주어 고언백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만 한다면 가히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니, 스스로 삼가 군사를 거느리고 직접 덤비지는(싸음에 나서지는) 말도록 하게." 하니, 심대[岱]는 "예, 예" 하고 대답하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마땅하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또 그가 외롭게 떠나 倭敵이 있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군관으로서 활을 잘 쏘는 의주(義州) 사람 장모(張某)를 보내어 그와 함께 가게 하였다. 심대가 떠나간지 몇 달 동안 늘 경기도 사람으로 행재소[行朝]에 아뢸 일이 있어 갈 때 안주(安州)를 지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아닌 게 아니라 그는 꼭 편지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도 꼭 친히 그 사람에게 경기도의 倭敵의 형세와 감사(監司 : 심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경기도[畿甸]는 倭敵의 잔학한 피해가 다른 도(道)보다도 심합니다.

倭敵들은 날마다 나와서 불지르고 약탈을 하여 성한 곳이라고는 없는 형편입니다. 전에는 감사와 수령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다 깊은 벽지에 몸을 피하고 그를 따라다니는 사람들도 평복을 입고 몰래 다니고, 혹은 여기저기로 자주 옮겨 그 있는 곳을 정하지 않아서 倭敵들의 환난을 막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께서는 그와는 달리 倭敵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늘 순행(巡行)하실 때마다 먼저 공문을 보내 알리기를 평일처럼 하시고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며 다니십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거듭 글을 써 보내어 전에 말한 것같이 조심하라고 당부를 하였으나, 심대는 그 태도를 변경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군사를 모아 모두 스스로 거느리고 "서울을 회복하련다."라고 소리쳐 소문을 퍼뜨리고, 날마다 사람을 보내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 안에서 호응하라고 약속하니, 사람들은 난리가 진정된 뒤에 倭敵에게 붙었다는 것을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연명(連名)하여 글을 써 가지고 나와 감사에게 가서 스스로 성안에서 내응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이런 사람이 날로 천백 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이름하기를 "약속을 받는 패[聽約束]니, 군기를 옮기는 패[軍器]니, 적정을 알리는 패[報賊情]니 하여 사람마다 왕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니 그중에는 또한 倭敵의 앞잡이가 되어 와서 우리의 동정을 살펴 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나고 들고 서로 뒤섞여 날쳤으나 그러나 심대는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심대는 삭녕군(朔寧郡)에 있었는데, 倭敵들은 이것을 탐정 하여 알고는 몰래 대탄(大灘)을 건너와서 밤에 습격하였다. 심대는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달아나니 倭敵들이 쫓아와서 그를 죽였다. 군관(軍官) 장모(張某)도 역시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倭敵들이 물러간 뒤에 경기도(京畿道) 사람들은 그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삭녕군 안에 장사지냈다. 며칠 뒤에 倭敵이 다시 나와서 그 머리를 베어 가져다가 서울의 종루(鐘樓) 거리 위에 매달았는데, 5, 60일이 지나도 그 얼굴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경기도 사람들은 그 충의(忠義)를 애석하게 여겨 서로 재물을 모아 가지고 파수 보는 倭敵에게 뇌물을 주고 그 머리를 찾아 내어 함에 넣어 강화도(江華島)로 보냈다가 倭敵이 물러간 뒤에 그 시체와 함께 고향 산으로 환송하여 장사지냈다. 심대는 청송(靑松) 사람으로, 그의 자는 공망(公望)이다. 그 아들 대복(大復)은 조정에서 심대를 대신하여 벼슬을 주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1)심대(沈岱, 1546∼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文臣).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墩), 본관은 청송(靑松)이다. 시호는 충장(忠壯).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기감사(京畿監司)로 서울 수복을 꾀하다가 倭敵에게 죽음을 당함.
*2)삭녕(朔寧) : 지금 경기도 연천(漣川)의 옛 이름.
*3)이험(夷險) : 평탄한 곳과 험준한 곳을 이르는 말이나, 여기서는 안전한 곳과 위험한 곳을 말한다.
*4)행조(行朝) : 임금이 임시 거처하는 행재소(行在所)의 다른 이름. 행궁(行宮)이라고도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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