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해 봄.
八月初一日 巡察使李元翼 巡邊使李薲等 率兵進攻平壤 不利而退.
時元翼與薲 將數千人往順安. 別將金應瑞等 率龍岡⋅三和⋅甑山⋅江西四邑之軍 作二十餘屯 在平壤之西. 金億秋率水軍 在大同江下流 以爲掎角之勢.
是日 元翼等 從平壤城北進兵 遇賊先鋒 射中二十餘賊. 旣而賊大至 軍士驚潰 江邊勇力之士 多折傷 遂還屯順安.
8월 1일에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이때 이원익은 이빈과 함께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가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1) 등은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네 고을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20여 개의 진둔[屯]을 만들어 평양(平壤)의 서쪽에 있고, 김억추(金億秋)*2)는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대동강(大同江)의 하류에 있으면서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날 이원익 등은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군사를 내보내었는데, 倭敵의 선봉을 만나서 20여 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倭敵들이 크게 이르니,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고, 강변(江邊)의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많이 죽고 상하였다. 우리 군사는 드디어 순안으로 되돌아와서 주둔하였다.
*1)김응서(金應瑞, 1564∼1624) : 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무과에 급제. 조선조 宣祖 때 별장(別將).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과 합류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고, 뒤에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산(釜山)을 수복함.
*2)김억추(金億秋, 1584∼1618) : 자는 방로(邦老), 시호는 현무(顯武), 본관은 청주(淸州). 평안도방어사(平安道防禦使).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34. 명(明)나라 심유경(沈惟敬)의 강화회담(講和會談).
九月 天朝遊擊將軍沈惟敬來.
初祖承訓旣敗 賊愈驕 投書我軍 有群羊攻一虎之語 羊喩天兵 虎以自詑.
聲言朝夕將西下 義州人皆荷擔而立.
惟敬本浙民 石尙書以爲素諳倭情 假遊擊將軍號出送.
旣至順安 馳書倭將 以聖旨責問 <朝鮮有何虧負於日本 日本如何擅興師旅?>
時倭變猝發 且殘毒甚 人人惴恐 莫敢有窺其營者. 惟敬以黃袱裏書 使家丁一人背負騎馬直馳 由普通門而入.
倭將行長 見其書 卽回報求面見議事.
惟敬將往 人皆危之 多勸止者 惟敬笑曰「彼焉能害我也?」從三四家丁赴之.
行長⋅平義智⋅玄蘇等 盛陳兵威 出會于城北十里外降福山下.
我軍登大興山頭望見 倭軍甚多 劎戟如雪. 惟敬下馬入倭陣中 群倭四面圍繞 疑被拘執. 日暮 惟敬還 倭衆送之甚恭.
翌日 行長遣書馳問 且曰「大人在白刃中 顔色不變 雖日本人 無以加也.」
惟敬答之曰「爾不聞唐朝有郭令公者乎? 單騎入回紇萬軍中 曾不畏懾 吾何畏爾也?」
因與倭約曰「吾歸報聖皇 當有處分 以五十日爲期 倭衆無得出平壤西北十里外搶掠 朝鮮人毋入十里內與倭鬪.」
乃於地界 立木爲禁標而去 我國人皆莫測.
1592년 9월에 명(明)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이 왔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전하고 돌아가자, 倭敵들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글을 우리 군사들에게 보내었는데 <염소떼가 한 호랑이를 친다[군양공일호(郡羊攻一虎)]>라는 말이 있었다. 염소는 明나라 군사를 비유함이고, 호랑이는 자기들을 자랑함이었다.
倭敵들은 가까운 시일에 서쪽 방면으로 내려간다고 떠들므로 의주(義州) 사람들은 다 피란할 짐을 지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심유경[惟敬]은 원래 절강성(浙江省) 백성[浙民]이었는데,석상서(石尙書 : 石星)는 평소 그가 倭國의 실정을 안다고 하여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이름을 빌어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순안(順安)에 이르러 급히 글을 倭敵의 장수에게 보내어 성지(聖旨)*1)로써 <조선(朝鮮)이 무슨 잘못을 日本에 저지른 일이 있는가? 日本은 어찌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느냐?> 하고, 문책하였다.
이때 倭敵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고, 또 그 잔인하고 혹독함을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심유경은 노란 보자기에 편지를 싸서 부하[家丁] 한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말을 달려 가게 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倭敵의 장수 소서행장[行長]은 그 편지를 보고 즉시 <직접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고 회답하여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다 위태로운 일이라 하여 그만 두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능히 나를 해칠 수 있으랴." 하고, 3, 4명의 부하[家丁]를 데리고 평양성(平壤城)으로 갔다.
小西行長⋅평의지(平義智)⋅현소(玄蘇) 등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베풀고 나와서 평양성 북쪽 십리 밖의 강복산(降福山) 밑에 모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大興山)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바라 보니, 倭敵의 군사는 매우 많고 창칼이 눈빛처럼 번득였다. 심유경이 말을 내려 倭敵의 진중으로 들어가니, 倭敵들이 떼를 지어 사면에 둘러서므로 붙잡히게 되는가 의심 하였다. 날이 저물어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倭敵들은 그를 전송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 다음날 小西行長은 글을 보내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대인(大人 : 沈惟敬)께서는 시퍼런 칼날 속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日本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당(唐)나라 때[唐朝] 곽영공(郭令公)*2)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혼자서 회흘(回紇)*3)의 만군(萬軍) 속으로 들어 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들 어찌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倭敵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 돌아가서 우리 황제[神宗]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을 기한 으로 하여 倭軍은 평양성 북쪽 십리 밖으로 나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朝鮮 군사도 그 십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싸우지 말도록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 그곳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 :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표식)를 만들어 세워 놓고 갔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1)성지(聖旨)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교지(敎旨).
*2)곽영공(郭令公) : 당(唐)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 唐, 697∼781)를 말함. 시호는 충무(忠武).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 곽분양(郭汾陽)이라고도 한다. 부귀공명과 다복(多福)을 누렸다고 하여 좋은 사람을 '곽분양 팔자'라고 한다. 그는 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평정하고, 회흘(回紇)의 후범(後犯)을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움.
*3)회흘(回紇) : 中國 동북쪽에 있는 부족. 본래는 흉노족(匈奴族)의 후예.
八月初一日 巡察使李元翼 巡邊使李薲等 率兵進攻平壤 不利而退.
時元翼與薲 將數千人往順安. 別將金應瑞等 率龍岡⋅三和⋅甑山⋅江西四邑之軍 作二十餘屯 在平壤之西. 金億秋率水軍 在大同江下流 以爲掎角之勢.
是日 元翼等 從平壤城北進兵 遇賊先鋒 射中二十餘賊. 旣而賊大至 軍士驚潰 江邊勇力之士 多折傷 遂還屯順安.
8월 1일에 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과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 평양성(平壤城)을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물러났다. 이때 이원익은 이빈과 함께 수천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순안(順安)으로 가고, 별장(別將) 김응서(金應瑞)*1) 등은 용강(龍岡)⋅삼화(三和)⋅증산(甑山)⋅강서(江西) 네 고을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20여 개의 진둔[屯]을 만들어 평양(平壤)의 서쪽에 있고, 김억추(金億秋)*2)는 수군(水軍)을 거느리고 대동강(大同江)의 하류에 있으면서 서로 호응하는 형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날 이원익 등은 평양성 북쪽으로부터 군사를 내보내었는데, 倭敵의 선봉을 만나서 20여 명의 적을 쏘아 죽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倭敵들이 크게 이르니, 군사들이 놀라 무너지고, 강변(江邊)의 용맹스러운 군사들이 많이 죽고 상하였다. 우리 군사는 드디어 순안으로 되돌아와서 주둔하였다.
*1)김응서(金應瑞, 1564∼1624) : 자는 성보(聖甫), 시호는 양의(襄毅), 본관은 김해(金海)이다. 무과에 급제. 조선조 宣祖 때 별장(別將). 임진왜란 때 명(明)나라 이여송(李如松)과 합류하여 평양성(平壤城)을 탈환하고, 뒤에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가 되어 부산(釜山)을 수복함.
*2)김억추(金億秋, 1584∼1618) : 자는 방로(邦老), 시호는 현무(顯武), 본관은 청주(淸州). 평안도방어사(平安道防禦使). 경상도우수사(慶尙道右水使)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이르렀다.
34. 명(明)나라 심유경(沈惟敬)의 강화회담(講和會談).
九月 天朝遊擊將軍沈惟敬來.
初祖承訓旣敗 賊愈驕 投書我軍 有群羊攻一虎之語 羊喩天兵 虎以自詑.
聲言朝夕將西下 義州人皆荷擔而立.
惟敬本浙民 石尙書以爲素諳倭情 假遊擊將軍號出送.
旣至順安 馳書倭將 以聖旨責問 <朝鮮有何虧負於日本 日本如何擅興師旅?>
時倭變猝發 且殘毒甚 人人惴恐 莫敢有窺其營者. 惟敬以黃袱裏書 使家丁一人背負騎馬直馳 由普通門而入.
倭將行長 見其書 卽回報求面見議事.
惟敬將往 人皆危之 多勸止者 惟敬笑曰「彼焉能害我也?」從三四家丁赴之.
行長⋅平義智⋅玄蘇等 盛陳兵威 出會于城北十里外降福山下.
我軍登大興山頭望見 倭軍甚多 劎戟如雪. 惟敬下馬入倭陣中 群倭四面圍繞 疑被拘執. 日暮 惟敬還 倭衆送之甚恭.
翌日 行長遣書馳問 且曰「大人在白刃中 顔色不變 雖日本人 無以加也.」
惟敬答之曰「爾不聞唐朝有郭令公者乎? 單騎入回紇萬軍中 曾不畏懾 吾何畏爾也?」
因與倭約曰「吾歸報聖皇 當有處分 以五十日爲期 倭衆無得出平壤西北十里外搶掠 朝鮮人毋入十里內與倭鬪.」
乃於地界 立木爲禁標而去 我國人皆莫測.
1592년 9월에 명(明)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 심유경(沈惟敬)이 왔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전하고 돌아가자, 倭敵들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글을 우리 군사들에게 보내었는데 <염소떼가 한 호랑이를 친다[군양공일호(郡羊攻一虎)]>라는 말이 있었다. 염소는 明나라 군사를 비유함이고, 호랑이는 자기들을 자랑함이었다.
倭敵들은 가까운 시일에 서쪽 방면으로 내려간다고 떠들므로 의주(義州) 사람들은 다 피란할 짐을 지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심유경[惟敬]은 원래 절강성(浙江省) 백성[浙民]이었는데,석상서(石尙書 : 石星)는 평소 그가 倭國의 실정을 안다고 하여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이름을 빌어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순안(順安)에 이르러 급히 글을 倭敵의 장수에게 보내어 성지(聖旨)*1)로써 <조선(朝鮮)이 무슨 잘못을 日本에 저지른 일이 있는가? 日本은 어찌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느냐?> 하고, 문책하였다.
이때 倭敵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고, 또 그 잔인하고 혹독함을 사람마다 두려워하여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심유경은 노란 보자기에 편지를 싸서 부하[家丁] 한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말을 달려 가게 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부터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倭敵의 장수 소서행장[行長]은 그 편지를 보고 즉시 <직접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고 회답하여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사람들은 다 위태로운 일이라 하여 그만 두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능히 나를 해칠 수 있으랴." 하고, 3, 4명의 부하[家丁]를 데리고 평양성(平壤城)으로 갔다.
小西行長⋅평의지(平義智)⋅현소(玄蘇) 등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베풀고 나와서 평양성 북쪽 십리 밖의 강복산(降福山) 밑에 모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大興山) 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바라 보니, 倭敵의 군사는 매우 많고 창칼이 눈빛처럼 번득였다. 심유경이 말을 내려 倭敵의 진중으로 들어가니, 倭敵들이 떼를 지어 사면에 둘러서므로 붙잡히게 되는가 의심 하였다. 날이 저물어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倭敵들은 그를 전송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 다음날 小西行長은 글을 보내 안부를 묻고, 또 말하기를, "대인(大人 : 沈惟敬)께서는 시퍼런 칼날 속에서도 낯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니, 비록 日本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당(唐)나라 때[唐朝] 곽영공(郭令公)*2)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혼자서 회흘(回紇)*3)의 만군(萬軍) 속으로 들어 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들 어찌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倭敵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 돌아가서 우리 황제[神宗]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을 기한 으로 하여 倭軍은 평양성 북쪽 십리 밖으로 나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朝鮮 군사도 그 십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싸우지 말도록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 그곳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 :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게 하는 표식)를 만들어 세워 놓고 갔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1)성지(聖旨) :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교지(敎旨).
*2)곽영공(郭令公) : 당(唐)나라의 명장 곽자의(郭子儀, 唐, 697∼781)를 말함. 시호는 충무(忠武). 분양왕(汾陽王)에 봉해져 곽분양(郭汾陽)이라고도 한다. 부귀공명과 다복(多福)을 누렸다고 하여 좋은 사람을 '곽분양 팔자'라고 한다. 그는 玄宗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평정하고, 회흘(回紇)의 후범(後犯)을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움.
*3)회흘(回紇) : 中國 동북쪽에 있는 부족. 본래는 흉노족(匈奴族)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