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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26). 임금은 정주(定州)⋅선천(宣川)으로 향하고 민심은 어지러워짐.
23/06/20 08:12:52 金 鍾國 조회 2283
26. 임금은 정주(定州)⋅선천(宣川)으로 향하고 민심은 어지러워짐.
車駕次于定州 自駕出平壌 人心崩潰 所過亂民 輒入倉庫 搶掠穀物 順安⋅肅川⋅安州⋅寧邊⋅博川 以次皆敗.
是日 駕發嘉山 郡守沈信謙謂余曰「此郡糧穀頗優 官廳亦有 白米一千石 欲以此餉天兵 不幸事至於此 公若少留鎭定 則邑人不敢動 不然亂作 小人亦不敢留此 將向海邊躱避矣.」時信謙已不能令其下矣.
獨余所帶軍官六人 及路中所 收潰卒十九人 余約束使之自隨 故各帶弓箭在傍. 信謙欲藉此自護 故云然. 余不忍遽發 少坐大門 日已過午. 更念無上命 而擅留不行 於義未安 遂與信謙別 行上曉星嶺 回望嘉山 則郡中已亂矣. 信謙盡失倉榖而逃.
翌日 車駕出定州向宣川. 命臣留定州 州人已四散避亂 獨老吏白鶴松等數人 在城中而已. 余伏路邊 送駕出城 掩泣坐延薰樓下. 軍官數人 在左右階下 所收潰卒十九人猶不去 繫馬路邊柳木 相還而坐.
向晚見南門 有執杖者 自外連絡而來 向左邊去 使軍官視之 聚於倉下者已數百. 余念已所率寡弱 若亂民益多 而與之爭闘 則難制 不如先攻弱者 使之驚散爲可.

於是視城門 又有繼至者十餘人. 余急呼軍官 從十九卒馳捕之 其人望見奔走 追及捕九人而至. 卽令披髮反接 而赤脫之 徇于倉邊道路 十餘卒隨其後 大呼曰「擒㥘倉賊 將行刑梟首.」城中人見之 於是已聚倉下者 望而惶駭 悉從西門散去.
由是定州倉穀僅全 而龍川⋅宣川⋅鐵山等邑 怯*5)倉者亦絶.
定州判官金榮一 武人也. 自平壤奔還 置其妻子於海邊 偸出倉穀欲送之. 余聞而數之曰「汝爲武將 敗軍不死 其罪可誅. 又敢偸出官穀耶? 此穀將餉天兵 非汝所得私者.」杖之六十.
旣而尹左相⋅金元帥⋅武將李薲等 自平壤皆至定州. 上出定州時 有命「左相若來 亦留駐定州.」
及尹至 余傳上命 尹不答 直向行在. 余亦留金命元⋅李薲等守定州 追及乘輿於龍川.
時郡邑人民 聞平壤陷 意賊隨後至 盡竄山谷 路上不見一人. 聞江邊列邑 如江界等地皆然.
余行至郭山山城下 見有岐路 問下卒曰「此向何處路?」曰「此走龜城路也.」

余駐馬呼從事官洪宗祿曰「沿道倉儲一空 天兵雖來 何以接濟? 此間 惟龜城一邑 儲峙頗優 而亦聞吏民盡散 輸運無策. 君久在龜城. 其處人如聞君至 雖隱山谷中 必有來見 欲聞賊勢者. 君從此急去龜城 諭之曰「賊入平壤尙不出 天兵方大至 收復不遠 所患一路糧餉不足耳. 爾輩無論品官人吏 悉一境之力 輸運軍糧 不乏軍興 則後日必有重賞.」若此則庶幾同心協力 輸到定州⋅嘉山 可以濟事.」宗祿慨然應諾 分路而去 余自向龍川.
蓋宗祿坐己丑獄 謫在龜城 車駕至平壤後 始收叙爲司饔正. 爲人忠實 有忘身徇國 不避夷險之志.

임금께서 정주(定州)로 행차하셨다. 임금께서 평양성(平壤城)을 나온 뒤로부터 인심이 허물어져서 지나는 곳마다 난민(亂民)들이 문득 창고로 들어가서 곡물(穀物)을 약탈하여 순안(順安)⋅숙천(肅川)⋅안주(安州)⋅영변(寧邊)⋅박천(博川)의 창고가 차례로 다 허물어져 버렸다.
이날에 임금께서는 가산(嘉山)을 출발하셨는데, 이때 가산군수(嘉山郡守) 심신겸(沈信謙)은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 고을에는 양곡이 자못 넉넉하고, 관청에도 또한 백미(白米) 일천석(一千石)이 있습니다. 이것을 명(明)나라 군사에게 먹이려 했는데 불행히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공(公)이 만약 조금만 머물러 진정시킨다면 고을 사람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동이 일어날 것이오니, 소인도 또한 여기에 머무를 수가 없겠으므로 장차 해변(海邊)을 향하여 몸을 피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심신겸은 이미 그 부하들에게 명령할 수가 없었다.

홀로 내가 데리고 있는 군관 6명과 도중에서 거둬 모은 패잔병 19명은 나와 약속하고 스스로 따라오게 하였으므로 각각 활과 화살을 휴대하고 나의 곁에 있었다. 심신겸이 이를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갑자기 떠날 수가 없어서 얼마 동안 대문(大門)에 앉아 있으니 해는 벌써 한낮이 지났다. 다시 생각해 보니 임금의 명령도 없는데 마음대로 머물러 떠나가지 않는 것이 도리에 미안하므로, 드디어 심신겸과 헤어져 길을 떠나 효성령(嘵星嶺)에 올라서 머리를 돌려 가산(嘉山)을 바라보니 고을 안은 이미 어지러워졌다. 심신겸은 창고의 곡식을 다 잃어버리고 도망 하였다.

그 다음날에 임금께서는 정주(定州)를 떠나서 선천(宣川)으로 향하시며 나에게 정주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이때 고을 사람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피란하고, 다만 늙은 아전 백학송(白鶴松) 등 몇 사람이 성 안에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길가에 엎드려서 임금께서 성을 떠나시는 것을 전송하고 눈물을 닦고서 연훈루(延薰樓) 아래 앉아 있는데, 군관(軍官) 몇 사람이 좌우의 섬돌 밑에 있고 거두어 모은 패잔병 19명도 오히려 가지 않고서 말을 길가의 버드나무에 매어 놓고 서로 둘러앉아 있었다. 저녁때가 될 무렵에 남문(南門)을 바라보니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밖으로부터 연달아 와서 왼쪽 방면을 향하여 가므로 군관(軍官)을 시켜 이를 살펴보게 하였더니, 창고 밑에 모여든 사람이 벌써 몇 백 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나는 내가 거느린 군사는 적고 약한데 만약에 난민이 더 많아져 그들과 싸운다면 제어하기가 어려울 것이니, 먼저 그 약한 자를 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 폴어지도록 하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성문을 보았더니, 또 이어 오는 사람이 10여 명이나 있었다. 나는 급히 군관을 불러 19명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가서 그들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바라보고 도망하는 것을 뒤쫓아 가서 9명을 잡아왔다. 나는 곧 그들의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손을 뒤로 돌려 묶고 벌거벗기게 한 다음에 창고 옆 길가로 조리 돌려 보이며, 10여 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가면서 큰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창고를 약탈하려는 도둑을 사로잡아서 곧 사형에 처하여 효시(梟示)*1)하련다." 하니, 성 안의 사람들이 이를 보게 되고, 이때 이미 창고 아래 모여든 사람들도 이를 바라보고 모두 놀라서 다 서문(西門)으로부터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로부터 정주 창고에 있는 곡식은 겨우 보전되었고, 그리고 용천(龍川)⋅선천(宣川)⋅철산(鐵山) 등 여러 고을도 창고를 덮치 려는 사람이 또한 없어졌다. 정주판관(定州判官) 김영일(金榮一)은 무인(武人)이었다. 그는 평양(平壤)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그 처자를 바닷가에 두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내어 이를 보내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를 잡아들여 죄를 하나하나 들춰내어 말하기를, "너는 무장(武將)의 몸으로 싸움에 패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만 하여도 죽일만한데, 또 감히 관곡(官穀)을 훔쳐내려느냐? 이 곡식은 장차 明나라 구원병을 먹이려는 것이지, 네가 사사로이 가져다 먹을 것이 아니다." 하고 곤장[杖] 60대를 때렸다.

좀 뒤에 윤좌상(尹左相 : 尹斗壽)⋅김원수(金元帥 : 金命元)와 무장(武將) 이빈(李薲)*2) 등이 평양으로부터 다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정주를 떠나실 때 명령하시기를, "좌상이 만약 올 것 같으면 또한 정주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고 하셨다.
윤두수가 이르렀기에 나는 그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하였으나, 윤두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행재소(行在所)로 향하여 갔다. 나도 역시 김명원과 이빈 등을 머물러 정주를 지키게 하고 임금님의 수레를 뒤쫓아 용천(龍川)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고을의 백성들은 평양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倭敵들이 뒤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모두들 산골짝으로
숨어 버려 길에는 한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강변의 여러 고을중에서 강계(江界) 등지 같은 곳도 다 그러하다고 들었다.

나는 길을 떠나 곽산산성(郭山山城) 밑에 이르렀는데, 보니 두 갈래 길이 있으므로 하졸(下卒)에게 묻기를,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구성(龜城)으로 달리는 길입니다." 하였다. 나는 말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 홍종록(洪宗祿)을 불러 말하기를, "연도(沿道)의 창고가 하나같이 비어 있으니, 明나라 구원병이 비록 온다고 하더라도 무엇으로써 식량을 공급하겠는가? 이 부근에서는 오직 구성 한 고을만 창고에 저장한 곡식이 자못 넉넉한 모양이나, 그러나 또한 아전과 백성들이 다 흩어졌다고 들리니 그것을 옮겨 낼 계책이 없구나. 그대는 오랫동안 구성에 있었으니,그곳 사람들이 만약 그대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산골짝 안에 숨어 있더라도 반드시 나와서 보고 倭敵의 형세를 들으려 할 것이니, 그대는 여기서 급히 구성으로 달려가서 그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倭敵들이 평양성으로 들어왔으나 아직 나오지 않았고, 明나라 구원병이 방금 크게 오고 있어서 이의 수복이 멀지 않았다.

하나 근심스러운 것은 군량이 부족한 것뿐인데, 너희들은 품관(品官)이든 아전이든 논할 것 없이 모두 온 고을의 힘을 다하여 군량을 옮겨다가 군용에 모자라지 않게 한다면 뒷날에 반드시 중한 상이 있을 것이다.' 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아마도 마음과 힘을 합해서 군량을 정주(定州)⋅가산(嘉山)까지 운반하여 가히 뜻하는 바를 성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홍종록은 감개하여 승낙하고는 길을 나누어 떠나가고, 내 자신은 용천으로 향하였다. 대개 홍종록은 기축년의 옥사[己丑獄]*3)에 관련되어 구성에 귀양을 가서 있었는데, 임금께서 평양에 오신 뒤에 비로소 거두어 용서하여 사옹정(司饔正)으로 삼았다. 그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성실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의 일을 위하여는 순국(殉國)할 마음으로 이험(夷險)*4)을 피하지 않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1)효시(梟示) :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달아매고 여러 사람에게 보여 경계하는 것.
*2)이빈(李薲, 1537∼1603) : 조선조 宣祖 때 무신. 자는 문원(聞遠),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왕족 덕천군(徳川郡) 후생(厚生)의 4대손. 1570년(선조 3년) 무과(武科)에 급제. 임진왜란 때 경상병사(慶尙兵使)⋅평안병사(平安兵使)⋅순찰사(巡察使) 등을 지냄.
*3)기축옥(己丑獄) : 조선조 宣祖 때(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獄事).
*4)이험(夷險) : 지리적으로 평탄하고 험악한 곳, 또는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을 말함.
*5)겁(怯) : 겁낼 겁. 무서워하다. 약하다. 비겁하다. 피하다. 회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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