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임금이 평양성(平壤城)을 떠남
六月十一日 車駕出平壤 向寧邊. 大臣崔興源⋅兪泓⋅鄭澈等扈從 左相與金元帥 李巡察元翼 留守平壌. 余亦以接待唐將留.
是日 賊攻城 左相⋅元帥⋅巡察及余 在練光亭 本道監司宋言愼 守大同城門樓 兵使李潤德 守浮碧樓以上江灘 慈山郡守尹裕後等 守長慶門.
城中士卒民夫 合三四千 分配城堞 而部伍不明 城上人或踈*10)或密 或人上有人 肩背相磨 或連數垛無一人
散掛衣服於乙密臺近處松樹間 名曰疑兵.
隔江望賊兵 亦不甚多 東大院岸上 排作一字陣 列竪紅白旗 如我國挽章樣
出十餘騎向羊角島 入江中 水沒馬服 皆按轡列立 示將渡江之狀
其餘往來江上者 或一二或三四 荷大劎 日光下射 閃閃如電 或云非眞劎 以木爲之 沃以白獵 以眩人眼者 然遠不可辨.
又六七賊 持鳥銃到江 邊向城放 聲響甚壯 丸過江入城 遠者入大同館 散落瓦上 幾千餘步 或中城樓柱 深入數寸.
有紅衣賊 見練光亭上諸公會坐 知爲將帥 挾鳥銃邪睨 漸進至沙渚上 放丸中亭上二人 然遠故不重傷.
余令軍官姜士益,從防牌內,以片箭射之 矢及沙上 賊逡巡而卻 元帥發善射者 乘快船中流射賊 船稍近東岸 賊亦退避
我軍從船上發玄字銃 火箭如椽過江. 倭衆仰視 皆叫噪而散 箭落地 爭聚觀之.
是日以不卽整兵船 斬工房吏一人.
時久不雨 江水日縮 曾分遣宰臣 禱雨檀君箕子東明王廟 猶不雨.
余謂尹相曰「此處水深無船 賊終不能渡 惟水上多淺灘 早晩賊必由此渡 渡則城不可守 何不嚴備?」金元帥性緩 但曰「已命李潤德守之矣.」
余曰「潤德輩何可倚仗?」指李巡察曰「公等會坐一處如宴集 無益於事 不可往護江灘耶?」李曰「若令往見 敢不盡力?」
於是尹相謂李曰「公可往.」李起出.
余時承命只應接唐將 不參軍務. 默念必敗 不如早迎唐將於中路 速進一步來救 庶可有濟.
日暮 遂與從事官洪宗祿⋅辛慶晉出城 夜深到順安. 路中逢李陽元從事官金廷睦自淮陽來 聞賊兵至鐵嶺矣.
明日過肅川至安州 遼東鎭撫林世祿又來 接受咨文送行在.
翌日聞車駕已離寧邊次博川 余馳詣博川.
上御東軒引見臣問「平壤可守乎?」臣對曰「人心頗固 似可守 但援兵不可不速進 故臣爲此以來 欲迎着天兵 請速馳援 而至今未見兵至 茲以爲憫.」上手取尹斗壽狀啓示臣曰「昨日已令老弱出城云 人心必搖 何以能守?」臣對曰「誠如聖慮 臣在彼時 未見此事 大槪觀其處形勢 賊必由淺灘以渡 宜多布菱鐵於水中 以備之.」上使問此縣亦有菱鐵否 對「有數千介.」上曰「急募人送之平壤.」
臣又啓曰「平壤以西江西⋅龍岡⋅甑山⋅咸從等邑 倉穀多人民衆 聞賊兵已近 則必驚駭散失. 宜急遣侍從一人 自此馳去 鎭撫之 且收兵爲平壤繼援便.」上曰「誰人可去?」對曰「兵曹正郞李幼澄 有計慮可遣.」又啓「臣事急不可遲滯 當達夜馳去 以迎見唐將爲期.」遂辭退出 見李幼澄 言上前所達 幼澄愕然曰「此乃賊藪 何可進?」余責之曰「食祿不避亂 臣子之義 今國事危急如此 雖湯火不可避 顧以此一行爲難乎?」幼澄默然有恨色.
余旣拜辭出 至大定江邊 日已平西矣. 回望廣通院 野有散卒 絡繹而來. 疑平壤失守 使軍官數輩 馳往收之 得十九人而至. 乃義州龍川等處之軍 而往平壤守江灘者也.
言「昨日賊已從王城灘渡江 江上軍潰 兵使李潤德遁走.」
余大驚 卽於路中 爲書狀 遣軍官崔允元 馳報行在.
夜入嘉山郡 是日夕 內殿至博川 蓋在路聞賊兵已入北道 故不前而回. 通川郡守鄭逑 遣使進物膳.
6월 11일에 임금께서 평양성[平壤]을 떠나 영변(寧邊)으로 향하셨다. 대신(大臣) 최홍원(崔興源)⋅유홍(兪泓)⋅정철(鄭澈) 등이 호종(扈從)하고,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은 머물러 평양성(平壤城)을 지켰다. 나도 또한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하여 함께 머물렀다. 이날 적군이 성을 공격하였다. 좌상[尹斗壽]⋅원수[金命元]⋅순찰사[李元翼]와 나는 연광정(練光亭)에 있었고, 본도감사(本道監司) 송언신(宋言愼)은 대동성(大同城)의 문루(門樓)를 지키고, 병사(兵使) 이윤덕(李潤德)은 부벽루(浮碧樓) 위쪽의 강여울을 지키고, 자산군수(慈山郡守) 윤유후(尹裕後) 등은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성 안의 군사[士卒]와 민부(民夫 : 民丁)는 합하여 3, 4천 명인데, 이 인원으로 성첩(城堞)을 나누어 배치하였으나 부오(部伍)가 분명하지(대오가 정돈되지) 못하고, 성 위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혹은 빽빽하며, 혹은 사람의 위에 사람이 서서 그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치고, 혹은 연달아 몇 살받이 터[垛]에는 한 사람도 없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근처의 소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이를 <의병(疑兵)*1)>이라고 말하였다. 대동강(大同江) 건너 적병을 바라보니 역시 매우 많지는 않았다. 동대원(東大院) 언덕 위에 벌려 한 일자(一字)처럼 한 줄로 진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벌려 세웠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만장(挽章)을 세워놓은 모양과 같았다.
倭敵은 10명의 기병을 내어 양각도(羊角島)를 향하여 강물 속으로 들어가니, 물이 말의 배에 잠기는데 그들은 모두 말고삐를 잡고 벌여 서서 , 곧 말을 건너 강을 건너오려는 모양을 보였다. 그 나머지 적들도 강 위를 왕래하는 자들은 혹은 한두 명, 혹은 3, 4명씩 짝지어 큰 칼을 메었는데 칼날이 햇빛에 비쳐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어떤 사람은 이는 진짜 칼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칼에 백랍(白蠟)을 칠하여 남의 눈을 어찔어찔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멀어서 잘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6, 7명의 倭敵이 조총(鳥銃)을 가지고 강변에 이르 러서 평양성을 향하여 총을 쏘니, 그 소리가 매우 크고 탄환이 강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왔고, 먼 것은 대동관(大同館)으로 들어오고 기와 위에 쏟아졌으며 거의 1천 보 거리나 날아왔는데, 혹 성루(城樓) 기둥에 맞은 것은 깊이가 몇 치쯤 틀어박혔다.
그중에 붉은 옷을 입은 倭敵 하나가 연광정(練光亭) 위에 제공(諸公)들이 모여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장수인 줄 알고 조총을 들고 겨누면서 차츰차츰 나와 모래벌판까지 이르러 탄환을 쏘아 정자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맞혔으나, 그러나 거리가 먼 까닭으로 중상은 아니었다. 나는
군관(軍官) 강사익(姜士益)으로 하여금 방패(防牌) 안에서 편전(片箭)*2)을 쏘게 하니, 화살이 모래벌판 위에까지 나가 적들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물러갔다. 이를 본 원수(元帥) 김명원은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서 날랜 배를 타고 강의 중류에 나가 倭敵을 쏘며, 배가 점점 동쪽 언덕에 가까워지자 적들도 또한 물러나 피하였다. 우리 군사는 배 위로부터 현자총(玄字銃)*3)을 쏘고 화전(火箭)*4)이 서까래 같이 쭉쭉 뻗어 강을 지나가 떨어지니, 倭敵의 무리들은 이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졌다가 화전이 떨어진 곳으로 다투어 모여 이를 구경하였다.
이날 즉시 병선(兵船)을 정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공방리(工房吏) 한 사람을 베어 죽였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강물이 날마다 줄어들므로 일찍이 재신(宰臣)을 나누어 보내 단군(檀君)⋅기자(箕子)⋅동명왕묘(東明王廟)에서 비를 빌었으나,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윤상(尹相 : 尹斗壽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곳은 강물이 깊고 배도 없으니 倭敵들이 능히 건널 수 없겠으나, 오직 강물의 상류엔 얕은 여울이 많으니 멀지 않아서 倭敵들이 반드시 여기로부터 건너오리라. 건너오게 되면 성을 지킬 수 없으리니, 어찌 엄중히 방비하지 않으리 오?" 하니, 김원수(金元帥 : 金命元)는 성품이 느린지라 다만 말하기를, "이윤덕(李潤德)에게 명령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윤덕 같은 사람을 어떻게 의지한단 말이오?" 하고,이순찰(李巡察 : 李元翼)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공(公)들이 한자리 에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잔치 모임과 같아서 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공이 나가서 강여울을 지켜서는 안되겠는지요?" 하니, 이원익은 말하기를, "만약 가보라고 명령하신다면 감히 힘을 다하지 않으오리까." 하였다. 이에 윤상(尹相 : 尹斗壽)이 이원익에게 일러 말하 기를, "공이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오." 하니, 이원익은 일어나서 나갔다. 나는 그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다만 明나라 장수만 접대하고 군 사적 일에는 참여하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반드시 패망할 것만 같아, 빨리 明나라 장수를 중도에서 맞아서 한 걸음이라 도 속히 와서 구원하여 도움이 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날이 저물 때 드디어 종사관(從事官) 홍종록(洪宗祿)⋅신경진(辛慶晉)과 더불어 성을 떠나와 밤이 깊어서야 순안(順安)에 도착하였는 데, 도중에 이양원(李陽元)의 종사관인 김정목(金廷睦)이 회양(淮陽)으로부터 오는 것을 만나 적병이 철령(鐵嶺)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날 숙천(肅川)을 지나 안주(安州)에 이르렀는데,요동진무(遼東鎭撫) 임세록(林世祿)이 또 왔으므로 그 자문(咨文)을 접수하여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5)로 보냈다. 그 다음날에 임금께서 이미 영변(寧邊)을 떠나 박천(博川)에 행차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박천으로 달려 갔다. 임금께서는 동헌(東軒)*6)에 나오시어 나를 불러 보시고, "평양성[平壤]을 지킬 수 있겠더냐?"고 물으시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들 의 마음이 자못 굳건하여 지킬 것 같았습니다. 다만 구원병을 빨리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 일을 위하여 와서 明나라 군사를 맞아 속히 달려가 구원하기를 청하려 하오나, 그러나 지금까지 구원병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나이다." 하니, 임금께서는 손수 윤두수의 장계(狀啓)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면서, "어제 이미 늙은이와 어린이들로 하여금 성을 나가게 하였다고 하니,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하시므로, 나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실로 성상(聖上)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그곳에 있을 때에는 아직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었습니다. 대개 그곳의 형세를 보면 倭敵들은 반드시 얕은 여울로부터 건너왔을 것이오니, 마땅히 마름쇠[능철(菱鐵)]*7)를 물속에 많이 늘어놓고 이를 방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 고을[縣]에 마름쇠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게 하시므로, 곧 알아보아 "수천 개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임금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급히 사람을 모아 이것을 평양(平壤)으로 보내라." 하셨다.
내가 또 아뢰기를, "평양 서쪽의 강서(江西)⋅용강(龍岡)⋅증산(甑山)⋅함종(咸從) 등 여러 고을에는 창고에 곡식도 많고 백성들도 많사온데, 적병 이 가까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놀라서 흩어질 것이오니, 급히 시종(侍從) 한 사람을 여기로부터 보내어 달려가서 이들을 진무(鎭撫)하게 하시고, 또 군사를 수습하여 평양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니,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가 갈만한가?" 하시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유징(李幼澄)이 계략이 있사오니 그를 보낼만하다고 생각되나이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사세가 급박하와 지체할 수가 없사옵니다. 마땅히 밤새도록 달려가서 明나라 장수를 맞아 구원군이 올 때를 의논하겠나이다." 하고, 드디어 하직하고 물러나와서 이유징을 보고 임금님 앞에서 아뢴 말대로 말하니, 이유징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곳은 곧 적의 소굴 인데, 어떻게 간다는 말씀입니까?" 하므로, 나는 꾸짖어 말하기를, "국록[祿]을 먹고 있으면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의리이다.
지금 나랏일의 위험하기가 이와 같으니, 비록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하더라도 피해서는 안 되겠는데, 이 한 번 가는 것을 가지고 서 어렵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유징은 아무 말은 안하면서도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다. 나는 임금에게 하직하고 나와서 대정강(大定江) 가에 이르니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졌었다. 고개를 돌려 광통원(光通院) 쪽을 바라보니 들판에 흩어진 군사들이 잇달아 오고 있으므로 평양성이 함락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군관 몇 사람을 시켜 달려가서 거두어 오게 하였더니, 그들은 열 아홉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곧 의주(義州)⋅용천(龍川) 등지의 군사로서 평양에 가서 강 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제 倭敵들이 이미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강을 건너왔으므로 강가를 지키던 군사들이 다 무너지고 병사(兵使) 이윤덕(李潤德)이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나는 크게 놀라,곧 도중에서 서장(書狀)을 만들어 군관(軍官) 최윤원(崔允元)을 파견하여 행재소에 급히 알리게 하였다.
밤에 가산군(嘉山郡)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에 내전(內殿)*8)께서 박천(博川)에 이르셨다. 이는 대개 북으로 향하시다가 적병이 벌써 북도(北道)로 들어간 까닭으로 더 앞으로 나가시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때 통천군수(通川郡守) 정구(鄭逑)*9)가 사자를 파견하여 찬(음식물)을 올렸다(진상해 왔다).
*1)의병(疑兵) : 적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군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
*2)편전(片箭) : 짧고 작은 화살로 살촉이 날카로워서 갑옷이나 투구에 잘 박혔다.
*3)현자총(玄字銃) : 불화살을 쏘는 대포의 한 가지.
*4)화전(火箭) : 불을 달아 쏘는 화살.
*5)행재소(行在所) : 거동 때에 임금의 연(輦 :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 '덩' 비슷한데, 좌우와 앞에 주렴이 있고 채가 썩 긺.)이 머무는 곳.
*6)동헌(東軒) : 고을의 원님이 공사를 다스리던 관청집.
*7)마름쇠[능철(菱鐵)] :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고 서너 갈래가 지게 무쇠로 만든 물건. 옛날에 도둑이나 적군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깔아서 방어하는 데 썼음.
*8)내전(內殿) :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 곧 왕비를 가리켜 말함.
*9)정구(鄭逑, 1543∼1620) : 조선조 宣祖⋅光海君 때의 문신, 학자.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청주(淸州)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강릉부사(江陵府使)⋅강원감사(江原監司)⋅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산수(算數)⋅병진(兵陣)⋅의학(醫學)⋅풍수(風水) 등에 능통하며 ≪심경발휘(心經發揮)≫⋅≪역대기년(歷代紀年)≫⋅≪한강집寒岡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0)소(踈) : 踈는 疎의 와자(譌字=바뀐 글자). 疎는 疏와 동자. 疏 : ①트일 소. ②거칠 소. ③적을 소. (1)멀다. 드물다. 길다. 트이다. 통하다. 멀다. 넓다. (2)험하다. (3)조목 별로 써서 진술하다. 적다. 상소하다. 쓰다. 기록하다. 주. 주석. 편지. 문체(文體) 이름. 상소. 주소(奏疏) 따위.
六月十一日 車駕出平壤 向寧邊. 大臣崔興源⋅兪泓⋅鄭澈等扈從 左相與金元帥 李巡察元翼 留守平壌. 余亦以接待唐將留.
是日 賊攻城 左相⋅元帥⋅巡察及余 在練光亭 本道監司宋言愼 守大同城門樓 兵使李潤德 守浮碧樓以上江灘 慈山郡守尹裕後等 守長慶門.
城中士卒民夫 合三四千 分配城堞 而部伍不明 城上人或踈*10)或密 或人上有人 肩背相磨 或連數垛無一人
散掛衣服於乙密臺近處松樹間 名曰疑兵.
隔江望賊兵 亦不甚多 東大院岸上 排作一字陣 列竪紅白旗 如我國挽章樣
出十餘騎向羊角島 入江中 水沒馬服 皆按轡列立 示將渡江之狀
其餘往來江上者 或一二或三四 荷大劎 日光下射 閃閃如電 或云非眞劎 以木爲之 沃以白獵 以眩人眼者 然遠不可辨.
又六七賊 持鳥銃到江 邊向城放 聲響甚壯 丸過江入城 遠者入大同館 散落瓦上 幾千餘步 或中城樓柱 深入數寸.
有紅衣賊 見練光亭上諸公會坐 知爲將帥 挾鳥銃邪睨 漸進至沙渚上 放丸中亭上二人 然遠故不重傷.
余令軍官姜士益,從防牌內,以片箭射之 矢及沙上 賊逡巡而卻 元帥發善射者 乘快船中流射賊 船稍近東岸 賊亦退避
我軍從船上發玄字銃 火箭如椽過江. 倭衆仰視 皆叫噪而散 箭落地 爭聚觀之.
是日以不卽整兵船 斬工房吏一人.
時久不雨 江水日縮 曾分遣宰臣 禱雨檀君箕子東明王廟 猶不雨.
余謂尹相曰「此處水深無船 賊終不能渡 惟水上多淺灘 早晩賊必由此渡 渡則城不可守 何不嚴備?」金元帥性緩 但曰「已命李潤德守之矣.」
余曰「潤德輩何可倚仗?」指李巡察曰「公等會坐一處如宴集 無益於事 不可往護江灘耶?」李曰「若令往見 敢不盡力?」
於是尹相謂李曰「公可往.」李起出.
余時承命只應接唐將 不參軍務. 默念必敗 不如早迎唐將於中路 速進一步來救 庶可有濟.
日暮 遂與從事官洪宗祿⋅辛慶晉出城 夜深到順安. 路中逢李陽元從事官金廷睦自淮陽來 聞賊兵至鐵嶺矣.
明日過肅川至安州 遼東鎭撫林世祿又來 接受咨文送行在.
翌日聞車駕已離寧邊次博川 余馳詣博川.
上御東軒引見臣問「平壤可守乎?」臣對曰「人心頗固 似可守 但援兵不可不速進 故臣爲此以來 欲迎着天兵 請速馳援 而至今未見兵至 茲以爲憫.」上手取尹斗壽狀啓示臣曰「昨日已令老弱出城云 人心必搖 何以能守?」臣對曰「誠如聖慮 臣在彼時 未見此事 大槪觀其處形勢 賊必由淺灘以渡 宜多布菱鐵於水中 以備之.」上使問此縣亦有菱鐵否 對「有數千介.」上曰「急募人送之平壤.」
臣又啓曰「平壤以西江西⋅龍岡⋅甑山⋅咸從等邑 倉穀多人民衆 聞賊兵已近 則必驚駭散失. 宜急遣侍從一人 自此馳去 鎭撫之 且收兵爲平壤繼援便.」上曰「誰人可去?」對曰「兵曹正郞李幼澄 有計慮可遣.」又啓「臣事急不可遲滯 當達夜馳去 以迎見唐將爲期.」遂辭退出 見李幼澄 言上前所達 幼澄愕然曰「此乃賊藪 何可進?」余責之曰「食祿不避亂 臣子之義 今國事危急如此 雖湯火不可避 顧以此一行爲難乎?」幼澄默然有恨色.
余旣拜辭出 至大定江邊 日已平西矣. 回望廣通院 野有散卒 絡繹而來. 疑平壤失守 使軍官數輩 馳往收之 得十九人而至. 乃義州龍川等處之軍 而往平壤守江灘者也.
言「昨日賊已從王城灘渡江 江上軍潰 兵使李潤德遁走.」
余大驚 卽於路中 爲書狀 遣軍官崔允元 馳報行在.
夜入嘉山郡 是日夕 內殿至博川 蓋在路聞賊兵已入北道 故不前而回. 通川郡守鄭逑 遣使進物膳.
6월 11일에 임금께서 평양성[平壤]을 떠나 영변(寧邊)으로 향하셨다. 대신(大臣) 최홍원(崔興源)⋅유홍(兪泓)⋅정철(鄭澈) 등이 호종(扈從)하고, 좌상(左相) 윤두수(尹斗壽)⋅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순찰사(巡察使) 이원익(李元翼)은 머물러 평양성(平壤城)을 지켰다. 나도 또한 명(明)나라 장수를 접대하기 위하여 함께 머물렀다. 이날 적군이 성을 공격하였다. 좌상[尹斗壽]⋅원수[金命元]⋅순찰사[李元翼]와 나는 연광정(練光亭)에 있었고, 본도감사(本道監司) 송언신(宋言愼)은 대동성(大同城)의 문루(門樓)를 지키고, 병사(兵使) 이윤덕(李潤德)은 부벽루(浮碧樓) 위쪽의 강여울을 지키고, 자산군수(慈山郡守) 윤유후(尹裕後) 등은 장경문(長慶門)을 지켰다.
성 안의 군사[士卒]와 민부(民夫 : 民丁)는 합하여 3, 4천 명인데, 이 인원으로 성첩(城堞)을 나누어 배치하였으나 부오(部伍)가 분명하지(대오가 정돈되지) 못하고, 성 위에 사람들이 드문드문 혹은 빽빽하며, 혹은 사람의 위에 사람이 서서 그 어깨와 등이 서로 부딪치고, 혹은 연달아 몇 살받이 터[垛]에는 한 사람도 없는 곳도 있었다. 그리고 옷가지를 을밀대(乙密臺) 근처의 소나무 사이에 걸어놓고, 이를 <의병(疑兵)*1)>이라고 말하였다. 대동강(大同江) 건너 적병을 바라보니 역시 매우 많지는 않았다. 동대원(東大院) 언덕 위에 벌려 한 일자(一字)처럼 한 줄로 진을 치고 붉고 흰 깃발을 벌려 세웠는데, 마치 우리나라의 만장(挽章)을 세워놓은 모양과 같았다.
倭敵은 10명의 기병을 내어 양각도(羊角島)를 향하여 강물 속으로 들어가니, 물이 말의 배에 잠기는데 그들은 모두 말고삐를 잡고 벌여 서서 , 곧 말을 건너 강을 건너오려는 모양을 보였다. 그 나머지 적들도 강 위를 왕래하는 자들은 혹은 한두 명, 혹은 3, 4명씩 짝지어 큰 칼을 메었는데 칼날이 햇빛에 비쳐 번개처럼 번쩍거렸다. 어떤 사람은 이는 진짜 칼이 아니고 나무로 만든 칼에 백랍(白蠟)을 칠하여 남의 눈을 어찔어찔하게 하는 것이라 하였으나, 그러나 멀어서 잘 분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 6, 7명의 倭敵이 조총(鳥銃)을 가지고 강변에 이르 러서 평양성을 향하여 총을 쏘니, 그 소리가 매우 크고 탄환이 강을 지나 성 안으로 들어왔고, 먼 것은 대동관(大同館)으로 들어오고 기와 위에 쏟아졌으며 거의 1천 보 거리나 날아왔는데, 혹 성루(城樓) 기둥에 맞은 것은 깊이가 몇 치쯤 틀어박혔다.
그중에 붉은 옷을 입은 倭敵 하나가 연광정(練光亭) 위에 제공(諸公)들이 모여앉아 있는 것을 보고 장수인 줄 알고 조총을 들고 겨누면서 차츰차츰 나와 모래벌판까지 이르러 탄환을 쏘아 정자 위에 있는 두 사람을 맞혔으나, 그러나 거리가 먼 까닭으로 중상은 아니었다. 나는
군관(軍官) 강사익(姜士益)으로 하여금 방패(防牌) 안에서 편전(片箭)*2)을 쏘게 하니, 화살이 모래벌판 위에까지 나가 적들은 이리저리 피하면서 물러갔다. 이를 본 원수(元帥) 김명원은 활 잘 쏘는 사람을 뽑아서 날랜 배를 타고 강의 중류에 나가 倭敵을 쏘며, 배가 점점 동쪽 언덕에 가까워지자 적들도 또한 물러나 피하였다. 우리 군사는 배 위로부터 현자총(玄字銃)*3)을 쏘고 화전(火箭)*4)이 서까래 같이 쭉쭉 뻗어 강을 지나가 떨어지니, 倭敵의 무리들은 이를 쳐다보며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면서 흩어졌다가 화전이 떨어진 곳으로 다투어 모여 이를 구경하였다.
이날 즉시 병선(兵船)을 정비하지 않았다고 해서 공방리(工房吏) 한 사람을 베어 죽였다. 이때 오랫동안 비가 오지 않아서 강물이 날마다 줄어들므로 일찍이 재신(宰臣)을 나누어 보내 단군(檀君)⋅기자(箕子)⋅동명왕묘(東明王廟)에서 비를 빌었으나, 그래도 비가 오지 않았다.
나는 윤상(尹相 : 尹斗壽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곳은 강물이 깊고 배도 없으니 倭敵들이 능히 건널 수 없겠으나, 오직 강물의 상류엔 얕은 여울이 많으니 멀지 않아서 倭敵들이 반드시 여기로부터 건너오리라. 건너오게 되면 성을 지킬 수 없으리니, 어찌 엄중히 방비하지 않으리 오?" 하니, 김원수(金元帥 : 金命元)는 성품이 느린지라 다만 말하기를, "이윤덕(李潤德)에게 명령하여 지키게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윤덕 같은 사람을 어떻게 의지한단 말이오?" 하고,이순찰(李巡察 : 李元翼)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공(公)들이 한자리 에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잔치 모임과 같아서 일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없으니, 공이 나가서 강여울을 지켜서는 안되겠는지요?" 하니, 이원익은 말하기를, "만약 가보라고 명령하신다면 감히 힘을 다하지 않으오리까." 하였다. 이에 윤상(尹相 : 尹斗壽)이 이원익에게 일러 말하 기를, "공이 가보는 것이 좋을 것 같으오." 하니, 이원익은 일어나서 나갔다. 나는 그때 임금의 명령을 받아 다만 明나라 장수만 접대하고 군 사적 일에는 참여하지 않게 되었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하니 반드시 패망할 것만 같아, 빨리 明나라 장수를 중도에서 맞아서 한 걸음이라 도 속히 와서 구원하여 도움이 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겠다고 여겼다.
그래서 날이 저물 때 드디어 종사관(從事官) 홍종록(洪宗祿)⋅신경진(辛慶晉)과 더불어 성을 떠나와 밤이 깊어서야 순안(順安)에 도착하였는 데, 도중에 이양원(李陽元)의 종사관인 김정목(金廷睦)이 회양(淮陽)으로부터 오는 것을 만나 적병이 철령(鐵嶺)에 이르렀다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날 숙천(肅川)을 지나 안주(安州)에 이르렀는데,요동진무(遼東鎭撫) 임세록(林世祿)이 또 왔으므로 그 자문(咨文)을 접수하여 임금이 계신 행재소(行在所)*5)로 보냈다. 그 다음날에 임금께서 이미 영변(寧邊)을 떠나 박천(博川)에 행차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는 박천으로 달려 갔다. 임금께서는 동헌(東軒)*6)에 나오시어 나를 불러 보시고, "평양성[平壤]을 지킬 수 있겠더냐?"고 물으시기에 나는 대답하기를, "사람들 의 마음이 자못 굳건하여 지킬 것 같았습니다. 다만 구원병을 빨리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 일을 위하여 와서 明나라 군사를 맞아 속히 달려가 구원하기를 청하려 하오나, 그러나 지금까지 구원병이 오는 것이 보이지 않으므로 이를 민망하게 생각하고 있나이다." 하니, 임금께서는 손수 윤두수의 장계(狀啓)를 가져다가 내게 보이면서, "어제 이미 늙은이와 어린이들로 하여금 성을 나가게 하였다고 하니, 어떻게 지킬 수 있겠는가?" 하시므로, 나는 대답하여 말하기를, "실로 성상(聖上)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신이 그곳에 있을 때에는 아직 이런 일을 당하지 않았었습니다. 대개 그곳의 형세를 보면 倭敵들은 반드시 얕은 여울로부터 건너왔을 것이오니, 마땅히 마름쇠[능철(菱鐵)]*7)를 물속에 많이 늘어놓고 이를 방비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께서 이 고을[縣]에 마름쇠가 있는가 없는가를 묻게 하시므로, 곧 알아보아 "수천 개가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더니, 임금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급히 사람을 모아 이것을 평양(平壤)으로 보내라." 하셨다.
내가 또 아뢰기를, "평양 서쪽의 강서(江西)⋅용강(龍岡)⋅증산(甑山)⋅함종(咸從) 등 여러 고을에는 창고에 곡식도 많고 백성들도 많사온데, 적병 이 가까이 온다는 말을 들으면 백성들이 반드시 놀라서 흩어질 것이오니, 급히 시종(侍從) 한 사람을 여기로부터 보내어 달려가서 이들을 진무(鎭撫)하게 하시고, 또 군사를 수습하여 평양을 구원하도록 하는 것이 옳겠나이다." 하니,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가 갈만한가?" 하시므로, 나는 대답하기를, "병조정랑(兵曹正郞) 이유징(李幼澄)이 계략이 있사오니 그를 보낼만하다고 생각되나이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은 사세가 급박하와 지체할 수가 없사옵니다. 마땅히 밤새도록 달려가서 明나라 장수를 맞아 구원군이 올 때를 의논하겠나이다." 하고, 드디어 하직하고 물러나와서 이유징을 보고 임금님 앞에서 아뢴 말대로 말하니, 이유징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그곳은 곧 적의 소굴 인데, 어떻게 간다는 말씀입니까?" 하므로, 나는 꾸짖어 말하기를, "국록[祿]을 먹고 있으면 난리를 피하지 않는 것이 신자(臣子)의 의리이다.
지금 나랏일의 위험하기가 이와 같으니, 비록 끓는 물이나 불 속에 뛰어들라고 하더라도 피해서는 안 되겠는데, 이 한 번 가는 것을 가지고 서 어렵게 생각하는가?" 하니, 이유징은 아무 말은 안하면서도 원망하는 기색이 있었다. 나는 임금에게 하직하고 나와서 대정강(大定江) 가에 이르니 해는 벌써 서산으로 기울어졌었다. 고개를 돌려 광통원(光通院) 쪽을 바라보니 들판에 흩어진 군사들이 잇달아 오고 있으므로 평양성이 함락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여 군관 몇 사람을 시켜 달려가서 거두어 오게 하였더니, 그들은 열 아홉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이들은 곧 의주(義州)⋅용천(龍川) 등지의 군사로서 평양에 가서 강 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말하기를, "어제 倭敵들이 이미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강을 건너왔으므로 강가를 지키던 군사들이 다 무너지고 병사(兵使) 이윤덕(李潤德)이 도망하였습니다." 하였다.
나는 크게 놀라,곧 도중에서 서장(書狀)을 만들어 군관(軍官) 최윤원(崔允元)을 파견하여 행재소에 급히 알리게 하였다.
밤에 가산군(嘉山郡)으로 들어갔다. 이날 밤에 내전(內殿)*8)께서 박천(博川)에 이르셨다. 이는 대개 북으로 향하시다가 적병이 벌써 북도(北道)로 들어간 까닭으로 더 앞으로 나가시지 못하고 돌아온 것이다. 이때 통천군수(通川郡守) 정구(鄭逑)*9)가 사자를 파견하여 찬(음식물)을 올렸다(진상해 왔다).
*1)의병(疑兵) : 적을 현혹시키기 위하여 군사가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한 것.
*2)편전(片箭) : 짧고 작은 화살로 살촉이 날카로워서 갑옷이나 투구에 잘 박혔다.
*3)현자총(玄字銃) : 불화살을 쏘는 대포의 한 가지.
*4)화전(火箭) : 불을 달아 쏘는 화살.
*5)행재소(行在所) : 거동 때에 임금의 연(輦 : 임금이 타는 가마의 하나. '덩' 비슷한데, 좌우와 앞에 주렴이 있고 채가 썩 긺.)이 머무는 곳.
*6)동헌(東軒) : 고을의 원님이 공사를 다스리던 관청집.
*7)마름쇠[능철(菱鐵)] : 끝이 송곳처럼 날카롭고 서너 갈래가 지게 무쇠로 만든 물건. 옛날에 도둑이나 적군이 쳐들어오는 길목에 깔아서 방어하는 데 썼음.
*8)내전(內殿) : 왕비가 거처하는 궁전. 곧 왕비를 가리켜 말함.
*9)정구(鄭逑, 1543∼1620) : 조선조 宣祖⋅光海君 때의 문신, 학자.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시호는 문목(文穆), 본관은 청주(淸州)다. 조식(曺植)⋅이황(李滉)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강릉부사(江陵府使)⋅강원감사(江原監司)⋅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산수(算數)⋅병진(兵陣)⋅의학(醫學)⋅풍수(風水) 등에 능통하며 ≪심경발휘(心經發揮)≫⋅≪역대기년(歷代紀年)≫⋅≪한강집寒岡集)≫ 등 많은 저서를 남겼다.
*10)소(踈) : 踈는 疎의 와자(譌字=바뀐 글자). 疎는 疏와 동자. 疏 : ①트일 소. ②거칠 소. ③적을 소. (1)멀다. 드물다. 길다. 트이다. 통하다. 멀다. 넓다. (2)험하다. (3)조목 별로 써서 진술하다. 적다. 상소하다. 쓰다. 기록하다. 주. 주석. 편지. 문체(文體) 이름. 상소. 주소(奏疏) 따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