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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18). 삼도군(三道軍)이 용인(龍仁) 싸움에서 무너짐/19. 신각(申恪)의 승리와 억울한 죽음
23/05/28 09:18:09 金 鍾國 조회 2431
​18. 삼도군(三道軍)이 용인(龍仁) 싸움에서 무너짐
三道巡察使之軍 潰於龍仁
初全羅道巡察使李洸 率本道兵入援 聞車駕西狩 京城已陷 收兵還全州
道內人 咎洸不戰而回 多憤惋不平者. 洸不自安 更調兵 與忠淸道巡察使尹國馨 合軍而進.
慶尙道巡察使金睟 亦自其道 率軍官數十餘人來會 兵總五萬餘.
至龍仁 望見北斗門山 有賊小壘 洸易之 先使勇士白光彦⋅李時禮等嘗賊
光彦等 率先鋒登山 去賊壘數十餘步 下馬發射 賊不出 日晚 賊見光彦等稍解 發白刃大呼突出 光彦等倉皇索馬 欲走不及 皆爲賊所害 諸軍聞之震懼.
時三巡察皆文人 不閑兵務 軍數雖多 而號令不一 且不據險設備 眞古人所謂「軍行如春遊安得不敗者也?」
明日 賊知我軍心怯 數人揮刃賈勇而前 三道軍望之大潰 聲如崩山 委棄軍資器械無數 塞路人不能行 賊悉聚而焚之.
洸還全羅 國馨還公州 睟還慶尙右道.

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1)의 군사가 용인(龍仁)에서 무너졌다[패전(敗戰)].
이보다 먼저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 이광(李洸)은 전라도(全羅道)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로 들어와 도우려고 하다가, 임금께서 서도(西道)로 피란하시고 서울이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전주(全州)로 돌아왔다.
그런데 도내 사람들은 이광이 싸우지 아니하고 돌아온 것을 나무라며 분개하고 불평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러니 이광은 마음이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서 다시 군사를 징발하여 가지고는, 충청도순찰사(忠淸道巡察使) 윤국형(尹國馨 : 윤선각尹先覺의 아이 때 이름)과 더불어 군사를 합쳐 가지고 나아갔다. 이때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 김수(金睟)도 역시 그 도(道)로부터 군관(軍官) 수십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합세하였는데, 군사들이 모두 5만여 명이나 되었다.

그들은 용인(龍仁)에 이르렀는데, 북두문(北斗門) 산 위에 적의 작은 보루(堡壘)*2)가 있는 것을 바라보고, 이광(李洸)은 이것을 쉽게 얕아보 는 먼저 용사 백광언(白光彦)과 이시례(李時禮) 등으로 하여금 가서 적을 시험하여 보게 하였다. 백광언 등은 선봉(先鋒)을 거느리고 산으로 올라가 적의 보루에서 수십보쯤 되는 곳에 이르러 말에서 내려 활을 쏘았는데 적들은 나오지 않았다. 날이 저문 뒤에 적들은 백광언 등의 기세가 좀 풀린 것을 보고서 시퍼런 칼을 빼어 들고 크게 소리를 지르면서 돌격해 나오니, 백광언 등은 창황히 서둘러 말을 찾아 타고 달아나려 하였으나 달아나지 못하고 다 적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여러 군사들은 이 말을 듣고,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이때 순찰사 세 사람은 다 문인(文人)이라 군사 일에 관하여는 익숙하지 못하고, 군사의 수효는 비록 많았으나 그러나 훈련이 통일이 안 되었고, 또한 험한 요지에 군사적 방어 설비를 하지도 않았으니, 참으로 옛사람이 말하는 이른바, '군사적인 행동을 봄놀이하듯 생각하면 어찌 패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 말대로라고 하겠다.

그 다음 날에 적은 우리 군사들이 속으로 겁내는 것을 알고는 몇 사람이 칼을 빼어 휘두르고 용맹을 뽐내면서 앞으로 달려 들어왔다. 3도의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무너졌는데, 그 소리가 마치 큰 산이 무너지는 것과 같았다. 이때 군사물자(軍事物資)와 기계(器械)를 헤아릴 수 없이 버려두고 도망하여 길이 막혀서 사람들이 다닐 수가 없었다는데, 적들은 이것을 다 가져다가 불을 질러 버렸다.
이렇게 되자 이광은 전라도로 돌아가고, 윤국형은 공주(公州)로 돌아가고, 김수는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돌아갔다.

*1)삼도순찰사(三道巡察使) :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 경상도순찰사 김수(金睟)를 말한다.
*2)보루(堡壘) : 적군을 막거나 치기 위하여 흙⋅돌로 튼튼하게 쌓은 진지.
 
19. 신각(申恪)의 승리와 억울한 죽음
副元帥申恪 與賊戰于楊州 敗之 斬首六十餘級. 遣宣傳官 卽軍中斬之.
恪初從金命元爲副, 漢江之潰 恪不從命元 隨李陽元于楊州
時咸鏡南道兵使李渾兵適至 恪合兵 遇賊自京城出散掠閭閻 邀擊破之. 自倭入我國 始有此捷 人皆踊躍;
金命元在臨津 狀啓恪擅自他適 不從號令.
右相兪泓 遽請誅之. 宣傳官旣行 而捷報至 朝廷使人追止不及.
恪雖武人 而素淸愼 嘗爲延安府使 修城浚壕 多備軍器. 後李廷馣 守延安全城 人以爲恪之功.
死非其罪 且有九十歲老母 聞者莫不痛之.
遣知事韓應寅 帥平安道江邊精兵三千人 赴臨津擊賊 令勿受金命元節制. 時應寅 赴京新回 尹左相言於衆曰「斯人狀貌有福氣 必能辨事.」遂行.

부원수(副元帥) 신각(申恪)이 倭敵과 양주(楊州)에서 싸워 적을 파하여 패배시키고 적의 머리 60여 급을 베었는데,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1)을 파견하여 즉시 군중(軍中)에서 베어 죽였다. 신각(申恪)이 이보다 먼저 김명원(金命元)을 따라가서 부원수(副元帥)가 되었는데, 한강(漢江) 싸움에서 무너졌을 때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로 갔었다.
이때 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 이혼(李渾)의 군사가 마침 도착하였으므로, 신각이 그 군사를 합해가지고 적군이 서울로부터 나와서 민가로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하고 있는 것을 만나서 맞아 쳐부쉈다. 이는 倭敵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그들을 이긴 첫 승리였으므로 사람들은 다 좋아 날뛰었다. 그런데도 김명원(金命元)은 임진(臨津)에 있으면서,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신각[恪]은 제 마음대로 다른 데로 가는 등 호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우상(右相) 유홍(兪泓)은 급히 그를 베어 죽여야 하겠다고 청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이미 떠나보냈는데, 신각이 적을 쳐부줬다는 첩보가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사자를 뒤쫓아 보내 처형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그가 가기 전에 벌써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武人)이었으나, 평소에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을 때, 성을 쌓고 해자[壕]를 파고 군기(軍器)를 많이 준비하여 놓았었으므로, 뒤에 이정암(李廷馣)*2)이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성을 보전하였으니, 사람들은 이는 신각(申恪)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고, 또 그에게 90세가 된 늙은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이 말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를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지사(知事) 한응인(韓應寅)을 파견하여 평안도(平安道) 강변(江邊 : 압록강鴨綠江의 연변)의 날랜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임진강(臨津江)으로 달려가서 倭敵을 치게 하고, 김명원의 절제(節制 : 지휘)를 받지 말게 하였다. 이때 한응인이 明나라 서울에 갔다가 막 돌아 왔는데, 윤좌상(左相 : 尹斗壽)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얼굴에 복기(福氣)가 있으니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한응인은 드디어 임진강으로 떠났다.

*1)선전관(宣傳官) : 조선조 때의 관직. 선전관청(宣傳官廳)에 소속된 관원으로, 정3품에서 종9품 중에서 임명되었다.
*2)이정암(李廷馣, 1541∼1600) : 조선조 宣祖 때의 공신(功臣).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유거사(四留居士)⋅퇴우당(退憂堂), 시호는 충목(忠穆). 明宗 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사성(司成)⋅동래부사(東萊府使)를 거쳐 임진왜란 때 이조참의(吏曹參議)로 개성(開城) 방위에 공을 세우고, 연안(延安)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쳐부숴 공을 세우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가 됨. 뒤에 전라감사(全羅監司)⋅황해도순찰사(黃海道巡察使) 등을 지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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