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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17). 왜적(倭敵)이 서울에 들어오고 임금은 평양(平壤)에 도착함
23/05/26 10:16:51 金 鍾國 조회 2463
17. 왜적(倭敵)이 서울에 들어오고 임금은 평양(平壤)에 도착함
初三日 賊入京城 留都將李陽元 元帥金命元皆走初
賊自東萊分三路以進 一路由梁山⋅密陽⋅淸道⋅大丘⋅仁同⋅善山 至尙州 敗李鎰軍.
一路由左道長鬐⋅機張⋅陷左兵營 蔚山⋅慶州⋅永川⋅新寧⋅義興⋅軍威⋅庇安 渡龍宮河豐津 出聞慶 與中路兵合 踰鳥嶺入忠州
又自忠州 分兩路 一趨驪州渡江 由楊根渡龍津 出於京城東.
一趨竹山⋅龍仁 至漢江之南.
又一路由金海 從星州⋅茂溪縣渡江 歷知禮⋅金山 出忠淸道永同 進陷淸州 向京畿
旌旗劍戟 千里相連 炮聲相聞
小過或十里 或五六十里 皆據險設營柵 留兵以守 夜則擧火相應.
都元帥金命元 在濟川亭 望見賊至 不敢戰 悉沉軍器火砲機械于江中 變服以逃. 從事官沈友正 固止不從.
李陽元在城中 聞漢江軍已散 知城不可守 亦出走楊州.
江原道助防將元豪 初率兵數百 守驪州北岸 與賊相持 賊不能渡者數日 旣而江原都巡察使柳永吉 檄召元豪歸本道. 賊毁閭里民家及官舍 取屋材聯爲長筏以渡 中流爲水所漂 死者甚多 而豪旣去 江上無一守者 故累日畢渡.
於是賊三路兵 皆入京城. 城中之民 先已散去 無一人矣.
金命元旣失漢江 欲向行在 至臨津 狀啓言狀. 命更徵京畿⋅黃海兵 守臨津. 且命申硈同守 以遏賊西下之路.
是日 車駕發開城 次于金郊驛 余雖罷散 不敢後從行.
四日 車駕過興義⋅金巖⋅平山府 次又寶山驛.
初出開城時 倉卒留宗廟神主于穆淸殿 有宗室一人號泣 啓不當爲神主於賊所. 於是達夜馳至開城奉還云.
五日 車駕過安城⋅龍泉⋅劍水驛 次于鳳山郡 六日 進次黃州. 七日 過中和入平壤.

5월 3일에 倭敵이 서울에 들어오고,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다 달아나 버렸다. 이보다 먼저 倭敵은 동래(東萊)로부터 세 길[三路]로 나누어 올라왔는데, 한 패는 양산(梁山)⋅밀양(密陽)⋅청도(淸道)⋅대구(大丘)⋅인동(仁同)⋅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패는 좌도(左道 : 慶尙左道)의 장기(長磐)⋅기장(機張)을 경유하여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경주(慶州)⋅영천(永川)⋅신녕(新寧)⋅의흥(義興)⋅군위(軍威)⋅비안(比安)을 함락시키고, 용궁(龍宮)의 하풍진(河豐津) 나루를 건너 문경(聞慶)을 나와서 경상좌도(慶尙左道)와 우도(右道)의 중간 지대인 중로(中路)로 온 군사와 합세하여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들어오고, 또 충주로부터 두 패로 나누어 한 패는 여주(驪州)로 달려가서 강물을 건넌 다음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서 서울[京城]의 동쪽으로 나왔으며, 한 패는 죽산(竹山)⋅용인(龍仁)으로 달려가서 한강(漢江)의 남쪽에 이르렀으며, 동래에서 갈라진 또 한 패는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성주(星州)의 무계현(茂溪縣)으로부터 강을 건너고, 지례(知禮)⋅금산(金山)을 거쳐 충청도(忠淸道) 영동(永同)으로 나와 진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키고 경기(京畿)로 향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깃발과 창검은 천리에 서로 뻗치었고, 총소리는 서로 마주쳐 들렸다. 그리고 지나는 곳에는 10리 혹은 5, 60리마다 모두 험한 요지에 의거하여 진영(陣營)과 방책(防栅)을 설치해서 군사를 머물러두어 지키게 하고, 밤이면 햇불을 들어 서로 신호로 응하였다.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은 제천정(濟川亭)에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감히 나가서 싸우지 못하고, 군기(軍器)⋅화포(火砲)⋅기계(機械)를 강물 속에 다 집어넣고는 옷을 갈아입고 도망하였다. 이때 종사관(從事官) 심우정(沈友正)이 이를 굳게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이양원(李陽元)은 성(城) 안에 있다가 한강(漢江)을 지키는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도성(都城 : 서울)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역시 성을 버리고 나와 양주(楊州)로 달아났다.

강원도(江原道) 조방장(助防將) 원호(元豪)*1)는 이보다 먼저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여주(驪州) 북쪽 강언덕을 지키며 倭敵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강을 건너오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되었었는데, 좀 뒤에 강원도(江原道) 순찰사(巡察使) 유영길(柳永吉)이 격문(檄文)으로 원호를 불러서 강원도로 돌아가니, 적들은 마을의 민가(民家)와 관사(官舍)를 헐어서 그 재목을 가져다가 엮어서 긴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강을 건너오다가 중류에서 그냥 물에 떠내려가서 죽은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원호도 이미 가버려서 강언덕에는 한 사람도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적들은 여러 날에 걸쳐 다 건너왔다. 이에 있어서 倭敵의 세 갈래 길로 퍼졌던 군사들은 다 서울로 들어왔다. 그런데 성 안의 백성들은 이미 다 흩어져 나가 버리고 한사람도 없었다.

김명원은 이미 한강(漢江)을 빼앗기고 황해도(黃海道)로 향하려 하여 임진(臨津)에 이르러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상황을 말하니 임금께서는, "다시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임진강(臨津江)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어 또 "신할(申硈)과 함께 임진강을 지켜 倭敵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날 임금께서는 개성(開城)을 떠나 금교역(金郊驛)에 행차하셨다. 나는 비록 파직(罷職)을 당한 몸이라 하더라도 감히 뒤떨어질 수가 없어서 임금을 모시고 갔다.  5월 4일에 임금께서는 흥의(興義)⋅금암(金巖)⋅평산부(平山府)를 지나서 보산역(寶山驛)에 행차하셨다. 이보다 먼저 개성부(開城府)를 출발할 때 급히 서두르느라고 그만 종묘신주(宗廟神主)를 목청 전(穆淸殿)*2)에 놓아두고 왔었다. 이때 종실(宗室) 한 사람이 울부짖으면서 "마땅히 신주(神主)를 적이 있는 곳에 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이에 밤새도록 개성까지 달려가서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다고 한다.
5월 5일에 임금께서는 안성(安城)⋅용천(龍泉)⋅검수역(劎水驛)을 지나서 봉산군(鳳山郡)에 행차하셨다. 6일에는 황주(黃州)에 행차하시고, 7일에는 중화(中和)를 지나 평양(平壤)으로 들어가셨다.

*1)원호(元豪, 1533∼1592) : 조선조 宣祖 때 무신(武臣). 자는 중영(仲英), 시호는 충장(忠壯). 明宗 때 무과에 급제. 경원부사(慶源府使)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江原道) 조방장(助防將)으로 적을 격파하고, 방어사(防載使)가 되어 김화(金化)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2)목청전(穆淸殿) : 개성부(開城府)에 있는 朝鮮 태조(太祖)의 옛집 이름. 太宗 때는 太祖의 어진(御眞)을 모시고 개성부의 경역(經歷)을 집사(執事)로 임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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