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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16).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름
23/05/23 07:50:05 金 鍾國 조회 2528
16.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름
四月三十日曉 車駕西巡
申砬旣去 都人日望捷報. 前日夕 有氈笠*30)三人 走馬入崇仁門 城內人 爭問軍前消息 答曰「我乃巡邊使軍官奴僕 昨日巡邊使敗死於忠州 諸軍大潰 俺等脫身獨來 慾歸報家人避兵耳.」聞者大驚 小過傳相告語 不移時 滿城俱震.
初昏 召宰執議出避 上御東廂地坐 張燈燭 宗室河原君⋅河陵君等侍坐. 大臣啓「事勢至此 車駕暫出幸平壤 請兵天朝 以圖收復.」
掌令權悏請對 造膝*31)大聲呼 請固守京城 語囂甚. 余謂曰「雖危亂之際 君臣之禮 不可如是 可小退以啓.」悏連呼曰「左相亦爲此言耶? 然則京城可棄乎?」
余啓曰「權悏言甚忠 但事勢不得不然.」因請分遣王子諸道 使呼召勤王 世子隨駕定議.
大臣出在閤門外得旨 臨海君可往咸鏡道 領府事金貴榮⋅漆溪君尹卓然從. 順和君可往江原道 長溪君黃廷彧⋅護君黃赫⋅同知李墍從. 蓋赫女爲順和夫人 而李墍爲原州人 故幷遣之.
時右相爲留將 領相幷宰臣數十人 以扈從點出. 余無所命 政院啓扈從不可無柳某 於是令扈行.
內醫趙英璇 政院吏申德獜十餘人 大呼言「京都不可棄.」
俄而 李鎰狀啓至 而宮中衞士盡散 更漏不鳴. 得火炬於宣傳官廳 發狀啓讀之 內云「賊今明日當入都城.」
狀入良久 駕出 三廳禁軍奔竄*32) 昏黑中 互相牴觸.
適羽林衞池貴壽過前 余認之 責令扈從*33) 貴壽曰「敢不盡力.」幷呼其類二人而至.
過景福宮前 市街兩邊 哭聲相聞. 承文院書員李守謙 執余馬鞚問曰「院中文書當何如?」余令收拾其緊關者 追來 守謙哭而去.
出敦義門到沙峴 東方向明 回視城中 南大門內大倉火起 煙焰已騰空矣. 踰*34)沙峴*35)石橋 雨作.
京畿監司權徵 追至扈從
至碧蹄驛 雨甚 一行皆沾濕. 上入驛 少頃卽出 衆官自此多還入都城者 侍從臺諫 往往多落後不至.
過惠陰嶺 雨如注 宮人騎弱馬 以物蒙面 號哭而行.
過馬山驛 有人在田間 望之痛哭曰「國家棄我去 我輩何恃而生也?」
至臨津雨不止. 上御舟中 召首相及臣入對.
旣渡 已向昏不能辨色. 臨津南麓 舊有丞廳 恐賊取材作桴筏*36)以濟 命焚之 火光照江北 得尋路而行.
初更到東坡驛 坡州牧使許晉 長湍府使具孝淵 以支待差使員在其處 略設御厨 扈衛人終日飢來 亂入厨中 搶奪以食 將闕上供 晉⋅孝淵 懼而逃.
五月初一日朝 引見大臣 問南方巡察使有能勤王者否.
日晚 乘輿欲發向開城 而京畿吏卒逃散 無扈衞人.
適黃海監司趙仁得 率本道兵 將入援 瑞興府使南嶷先到 有軍數百人 馬五六十匹 以此始發. 臨行 司鑰崔彦俊出曰「宮中人昨日不食 今又未食 得少米饒*37)飢可行.」索南嶷軍人所持糧 雜大小米二三斗以入.
午至招賢站 趙仁得來朝 設帳幕於路中以迎之 百官始得食.
夕次于開城府 御南門外公署 臺諫交章劾首相交結誤國等罪 不允. 二日 臺諫仍啓首相罷 余陞爲之 崔興源爲左相 尹斗壽爲右相.
咸鏡北道兵使申硈遞來.
是日午 上御南城門樓 慰諭人民 有旨令各陳所懐 有一人出行俯伏 問何言? 對曰「願召鄭政丞.」蓋鄭澈 時竄在江界 故云然. 上曰「知道.」卽命召澈赴行在.
夕還宮. 余以罪罷 兪泓爲右相 崔興源⋅尹斗壽以次而陞.
聞賊尙未至京城 衆議皆咎去邠之失 使承旨申磼 還入京城 察形勢.

4월 30일 새벽에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피란길을 떠나셨다.
신립(申砬)이 서울을 떠나간 뒤로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승리했다는 보고가 오기를 기다렸는데, 전날 저녁 때 전립(氈笠)*1)을 쓴 사람 셋이 말을 달려 숭인문(崇仁門)으로 들어오므로, 성 안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전쟁에 관한 소식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우리들은 곧 순변사(巡邊使 : 申砬)의 군관(軍官)의 노복(奴僕)인데, 어제 순변사는 충주(忠州)에서 倭敵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고, 여러 군사들은 크게 무너졌는 데, 우리들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서 돌아가 집안 사람들에게 알려 피란시키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지나는 곳마다 서로 전하여 알려 얼마 안되는 사이에 온 도성안이 모두 진동했다.
초저녁에 임금께서 재상(宰相)들을 부르셔서 나와 피란할 문제를 의논하셨는데, 임금께서는 동상(東廂)*2)에 나와 마룻바닥에 앉으시어 촛불 을 밝히고, 종실(宗室) 하원군(河源君)과 하릉군(河陵君) 등이 모시고 앉았다. 대신(大臣)들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상 감께서 잠시 동안 평양(平壤)에 행하시고 明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장령(掌令)*3) 권협(權悏)*4)이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고 무릎 밑까지 다가가서[조슬(造膝 : 무릎 앞까지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 형제지간에 불량한 행동이 있으면 응당 조슬(造膝)하여 간(諫)해야 한다.] 큰소리로 호소하기를, "청하옵건대 서울을 굳게 지키소서." 하였는데, 말소리가 몹시 시끄러우므로 내가 이르기를, "비록 위급하고 어지러운 때라고 하더라도 군신(君臣)간의 예의가 이같아서는 안 될 것이니, 조금 물러나 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더니, 권협은 연달아 부르짖기를, "좌상(左相 : 柳成龍)께서도 또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서울을 버리는 게 옳다는 말씀입니까?" 하였다. 나는 임금에게 아뢰기를,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마는, 다만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겠 나이다." 하고, 인하여 왕자(王子)를 여러 도(道)로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5)을 부르게 하고, 세자(世子)는 임금님의 행차를 따라가도록 하 기를 청하여 의논을 결정지었다.

대신들이 합문(閤門) 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의 분부를 받았는데, 임해군(臨海君)은 함경도(咸鏡道)로 가기로 하여 영부사(領府事) 김귀영(金貴榮)과 칠계군(漆溪君) 윤탁연(尹卓然)이 모시고 따르게 하고,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江原道)로 가기로 하여 장계군(長溪君) 황정욱(黃廷彧)*6)과 호군(護軍) 황혁(黃赫), 동지(同知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使) 이기(李墍)가 모시고 따르게 하였다. 대개 황혁은 딸이 순화부인(順和夫人)이 되었고, 이기는 원주(原州) 사람이었으므로 아울러 그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때 우상(右相)은 유도대장(留都大將 : 임금이 거동시 서울을 지키는 군대의 대장)이 되고, 영상(領相)과 아울러 재신(宰臣)*7) 수십 명은 호종(扈從)*8)으로 뽑혀 임금을 모시고 가기로 결정되었으나 나에게는 명하는 것이 없었는데, 정원(政院)*9)에서 아뢰기를, "호종에 유성룡[柳某]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나에게도 호종하여 떠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때 내의(內醫) 조영선(趙英璇)과 정원(政院)의 이속(吏屬) 신덕린(申德麟) 등 10여 명이 큰소리로 부르짖기를, "서울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이일(李鎰)의 장계가 이르렀다. 그러나 궁중(宮中)의 위사(衞士)가 다 흩어져서 경루(更漏)*10) 조차 울리지 못하였다. 이때 햇불을 선전관청(宣傳官廳)*11)에서 얻어가지고 장계를 열어보니 그 내용은, <적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꼭 도성(都城)으로 들어갈 것 같습 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장계가 들어간지 한참 있다가 대가(大駕)*12)가 대궐문 밖으로 나왔는데, 삼청(三廳)*13)의 금군(禁軍)*14)들은 다 달아나서 숨어버리고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때마침 우림위(羽林衞)*15)의 지귀수(池貴壽)가 앞으로 지나갔는데, 내가 그를 알아보고 책망하며 호종하게 하니, 지귀수는 말하기를, "어찌 감히 힘을 다하여 모시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같은 무리 두 사람도 아울 러 불러가지고 왔다.

경복궁(景福宮)*16) 앞을 지나는데 시가의 양쪽 길가에서는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승문원(承文院)*17)의 서원(書員) 이수겸(李守謙)이 나의 말고삐를 잡고 묻기를, "승문원 안의 문서(文書)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중에서 긴요한 것만 수습하여 가지고 뒤따라 쫓아오너라." 하였더니, 이수겸은 울면서 돌아갔다. 돈의문(敦義門)*18)을 나와서 사현(沙峴) 고개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차츰 밝아왔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南大門)*19 안의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서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기감사(京畿監司) 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扈從)하였다.
벽제관(碧蹄館)*20)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 역으로 들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이 여기로부터 도성(都城)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시종(侍從) 대간(臺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는 비가 물붓듯 쏟아졌다. 궁인(宮人)들은 약한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馬山驛)*21)을 지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살랍니까?" 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렀을 때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므로 들어 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임진강의 남쪽 기슭에 옛날 승청(丞廳)*22)이 있었는데 적들이 와서 이 재목을 헐어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타고 건널까 염려되므로 이를 태워 버리라고 명령하여 불을 지르니, 불빛이 강의 북쪽까 북쪽까지 환하게 비춰 길을 찾아갈 수가 있었다. 초경(初更)*23)에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파주목사(坡州牧使) 허진(許晉)과 장단부사(長湍府使) 구효연(具孝淵)이 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24)으로 그곳에 와 있으면서 간략하게 임금에게 올릴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호위하는 사람들이 종일토록 굶고 온지라 난잡하게 주방으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빼내어 먹어서 장차 임금에게 올릴 음식이 없어지려 하였다.

이를 본 허진과 구효연은 두려워하여 도망하고 말았다. 5월 1일 아침에 임금께서는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남쪽 지방의 순찰사(巡察使) 중에서 근왕(勤王 : 국사에 힘쓰고자 함)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라고 물으셨다. 날이 저물어서야 임금께서 개성(開城)*25)으로 향하려 하셨으나, 경기도의 아전과 군사들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호위(扈衞)할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황해감사(黃海監司) 조인득(趙仁得)이 황해도 군사를 거느리고 곧 돌아와서 도우려 한다고 했는데, 서흥부사(瑞興府使) 남의(南嶷)가 먼저 도착하니, 그 군사가 수백 명이고 말 5, 60필 이었다. 이것으로써 비로소 떠날 수 있었는데, 떠나려 할 때 사약(司鑰)*26) 최언준(崔彦俊)이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않았고 지금도 또 먹지 못하였사오니, 좁쌀을 좀 얻어서 요기를 하게 한 다음에 떠나게 하옵소서." 하고, 남의가 거느리고 온 군사들이 가지고 있는 양곡에서 쌀, 좁쌀 두서너 말을 구해서 들여왔다.

오정 때에 초현참(招賢站)에 이르니, 조인득(趙仁得)이 와서 뵙는데 장막을 길 가운데 베풀고 영접하였다. 여기서 백관들은 비로소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저녁 때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문밖의 공서(公署)에 납시니 대간(臺諫)이 글을 번갈아 올려, <수상(首相 : 李山海)이 궁중 측근들과 결탁하여 나랏일을 그르쳤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윤허하시지 않았다. 5월 2일에 대간들이 계속하여 글을 올리므로 수상(首相)을 파직(罷職)시키고, 나[柳成龍]를 승진시켜 수상으로 삼고,최흥원(崔興源)을 좌상(左相)으로, 윤두수(尹斗壽)*27)를 우상(右相)으로 삼았다.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 신할(申硈)이 경질되어 왔다. 이날 낮에 임금께서 남성문루(南城門樓)에 나오셔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시며 분부하여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게 하시었더니,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엎드렸다.

임금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정정승(鄭政丞 : 鄭澈)을 불러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정철(鄭澈)*28)은 이때 강계(江界)에 귀양 가 있었으므로 그를 불러 정사를 맡기자고 뜻하는 것이었다. 임금께서는 말씀하시기를, "알았다."고 하시면서, 곧 "정철을 소환하여 행재소(行在所)*29)로 오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임금께서는 저녁 때에 환궁하셨다. 그리고 나를 죄로 다스려(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파면시키고, 유홍(兪泓)을 우상으로 삼고, 최흥원을 수상으로, 윤두수를 좌상으로 차례에 따라 승진시켰다. 그런데 왜적이 아직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고 들리므로 여러 사람의 의논은 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온 것이 실책이었다고 나무랐다. 그리고는 승지(承旨) 신잡(申磼)으로 하여금 서울로 돌아가서 그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1)전립(氈笠) : 벙거지. 군인이나 지체가 낮은 사람들이 쓰는 모자. ①털실로 짠 갓. ②벙거지. 전(氈) : 모전(毛氈) 전. 털로 짠 모직물. 융단. 속자 毡. 동자 氊. 간체 毡.
*2)동상(東廂) : 동쪽 바깥채.
*3)장령(掌令) : 조선조 때 사헌부(司憲府)에 속한 종4품 벼슬. 정원은 2명.

*4)권협(權悏, 1542∼1618)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사성(思省),호는 석당(石塘),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시호는 충정(忠貞). 宣祖 10년(1577)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장령(司憲掌令)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에는 고급사(吿急使)로 明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얻어옴. 뒤에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지냄.
*5)근왕(勤王) : 임금을 위하여 힘쓴다는 뜻. 근왕군(勤王軍)은 곧 나라를 위하여 힘쓰는 군사를 말함.
*6)황정욱(黃廷彧, 1532∼1607)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 자는 경문(景文), 호는 지천(芝川), 본관은 장수(長水)이다. 시호는 문정(文貞). 宣祖 때 문과에 급제, 호조판서(戶曹判書)⋅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냄. 저서는 ≪지천집(芝川集)≫이 있다.

*7)재신(宰臣) : 정3품 당상관(堂上官) 이상으로, 중앙의 중요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이름. 재상(宰相)은 정1품의 3정승을 말함.
*8)호종(扈從) : 임금의 뒤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
*9)정원(政院) : 승정원(承政院)의 다른 이름. 조선조 때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아보던 관청. 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 등으로 불렀음.

*10)경루(更漏) : 밤에 때를 알리는 것. 밤을 5경(更)으로 나누어 초경, 2경, 3경, 4경, 5경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조선 때 밤동안의 시간을 알리는 데 쓰던 물시계.
*11)선전관청(宣傳官廳) : 조선조 때 형명(刑名)⋅계라(啓螺)⋅시위(侍衛)⋅전령(傳令)⋅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형명(刑名) : 법이 규정하는 형벌의 이름.
계라(啓螺) : 임금이 나들이할 때 취타(吹打)를 연주하는 일을 이르던 말.
시위(侍衛) : 임금을 곁에서 모시며 호위함.
전령(傳令) : 훈령이나 명령 따위를 전하여 보냄.
부신(符信) : 병조(兵曹) 등에서 발행한 여러 가지 신표(信標).
*12)대가(大駕) : 임금이 타는 수레.

*13)삼청(三廳) : 금군3청(禁單三廳). 곧 내금위(內禁衞)⋅우림위(羽林衞)⋅겸사복(兼司僕)을 말함.
*14)금군(禁軍) : 궁궐 안을 호위하는 군대.
*15)우림위(羽林衞) : 금군3청(禁單三廳)의 하나. 왕실의 숙위(宿衞)⋅배종(陪從)⋅호위(護衞), 신변보호를 맡았음.

*16)경복궁(景福宮) : 조선조 때의 궁궐. 경복(景福)이라는 이름은 ≪시경(詩經)≫의 '君子萬年, 介爾景福(군자께서는 만년토록 크나큰 복 누리소서)'이라는 데에서 따 붙임.
*17)승문원(承文院) : 조선조 때 사대교린(事大交隣)에 관한 외교 문서를 맡아보던 기관.
*18)돈의문(敦義門) : 서울 서대문(西大門)의 원명.

*19)남대문(南大門) : 지금 남대문. 원명은 숭례문(崇禮門). 太祖 4년(1395)에 성곽 축성과 동시에 기공하여 太祖 7년(1398)에 준공됨. 지금 것은 世宗 때(1447) 개축한 것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임. 2008년 불타기 직전까지의 일로 이 얼마나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내지 못한 바 어찌하리요!
*20)벽제관(碧蹄館) : 경기도 고양(高陽) 읍내에 있는 옛날의 역관(驛館). 이 역관에 외국 사신(使臣)이 숙박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대전지(大戰地).
*21)마산역(馬山驛) : 경기도 파주시(坡州市) 교하읍(交河邑)에 있었던 조선시대의 역원(驛院).

*22)승청(丞廳) : 도장(渡場 : 나루터)을 관리하던 청사(廳舍).
*23)초경(初更) :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눈 첫째 경(更). 곧 오후 8시경임.
*24)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 : 임금의 접대를 위하여 파견된 관리.

*25)개성(開城) : 경기도에 있는 지명. 고려(高麗)의 고도(古都).
*26)사약(司鑰) : 조선조 때 액정서(掖庭署 : 왕과 왕족의 명령 전달, 알현 안내, 문방구 관리 등을 관장하던 관서)의 정6품 잡직(雜職).
*27)윤두수(尹斗壽, 1533∼1601)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해평(海平). 대과에 급제하여 참의(參議)⋅참판(參判)⋅관찰사(觀察使)⋅형조판서(刑曹判書)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우의정(右議政)으로 서순(西巡)하는 임금을 모셨고, 뒤에 좌의정(左議政)⋅영의정(領議政)을 지냈음. 저서에 ≪성인록(成人錄)≫⋅≪오음유고(梧陰遺稿)≫. 편서(編書)에 ≪연안지延安志)≫⋅≪평양지平壤志)≫⋅≪기자지箕子志)≫가 있다.

*28)정철(鄭激, 1536∼1593) : 조선조 宣祖 때의 명신(名臣).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본관은 연일(延日)이다. 明宗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의정(右議政)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으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 때 풀려 활약함. 저서는 ≪송강집(松江集)≫⋅≪송강가사(松江歌辭)≫ 등이 있다.
*29)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대궐 밖에 나가 멀리 거동할 때 일시 머무르는 곳.
*30)전립(氈笠) : ①털실로 짠 갓. ②벙거지. 전(氈) : 모전(毛氈) 전. 털로 짠 모직물. 융단. 속자 毡. 동자 氊. 간체 毡.

*31)조슬(造膝) : 무릎 앞까지 가까이 다가간다는 말. 형제지간에 불량한 행동이 있으면 응당 조슬(造膝)하여 간(諫)해야 한다.
*32)분찬(奔竄) : 도망쳐 숨음. 둔찬(遁竄). 분(奔) : 달릴 분. 달아나다. 도망쳐 내닫다. 패주하다. 속자 奔. 고자 犇.
*33)호종(扈從) : 임금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따름. 임금을 수행하는 사람. 호(扈) : 뒤따를 호. 시중들기 위하여 뒤따르다. 넓다.

*34)유(踰) : ①넘을 유. 지나가다. 건너다. 뛰어넘다. ②멀 요. 아득하다.
*35)현(峴) : 재 현. 고개. 산 이름. 간체 岘.
*36)부벌(桴筏) : 뗏목,桴는 작은 뗏목, 筏은 큰 뗏목을 뜻함. 부(桴) : 마룻대 부. 뗏목 부.
*37)요(饒) : 넉넉할 요. 배불리 먹다. 충분히 있다. 너그럽다. 비옥하다. 여유. 용서하다. 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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