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서울의 수비와 서순문제(西巡問題)
以右相李陽元爲守城大將 李戩⋅邊彦琇爲京城左右衞將 商山君朴忠侃爲京城巡檢使 使守都城 起復金命元爲都元帥守漢江.
時李鎰敗報已至 人心洶洶 內間有去邠之意 外庭不和.
理馬金應壽 到賓廳 與首相耳語 去而復來. 觀者疑之 蓋首相時爲司僕提調故也 都承旨李恒福 於掌中書「立馬永康門內」六字示我.
臺諫劾首相誤國 請罷 不允.
宗親聚閤門外痛哭 請勿棄城 領府事金貴榮 尤憤憤 與諸大臣 入對 請固守京城 且曰「倡議棄城者 乃小人也.」
上敎曰「宗社在此, 予將何適?」衆遂退 然事不可爲矣.
抄發坊里民及公私賤⋅胥吏⋅三醫司 分守城堞 計堞三萬餘 而守城人 口僅七千 率皆烏合 皆有鎚城逃散之心. 上番軍士 雖屬於兵曹 而與下吏相與爲奸 受賂私放者甚多 官員不問去留 臨急皆不可用 軍政解弛 一至於此.
大臣請建儲以繫人心從之.
遣同知事李德馨 使倭軍. 尙州之敗 有倭學通事景應舜者 在李鎰軍中爲賊所獲 倭將平行長 以平秀吉書契及送禮曹公文一道 援應舜出送. 且曰「在東萊時 生得蔚山郡守 傳送書契 而至今未報.」<郡守卽李彦誠 自賊中回 而畏得罪 自云逃來 隱其書不傳 故朝廷不知也.> 朝鮮若有意講和 可令李德馨 於二十八日 會我於忠州.
蓋德馨 往年嘗爲宣慰使 接待倭使 故行長欲見之 應舜至京 時事急 計無所出 意或因此緩兵. 德馨亦自請行 令禮曹裁答書 挾應舜而去. <德馨在道 聞忠州已陷 先使應舜往探 應舜爲賊將淸正所殺. 德馨遂從中路還 復命於平壤.>
熒惑犯南斗
徵京畿⋅江原⋅黃海⋅平安⋅咸鏡等道兵 入援京師.
以吏曹判書李元翼爲平安道都巡察使 知事崔興源爲黃海道都巡察使 皆卽日發遣 以將有西狩之議.
而元翼曾爲安州牧使 興源爲黃海監司 皆有惠政 爲民心所喜 故使之先往 撫諭軍民 以備巡幸.
우상(右相)*1) 이양원(李陽元)*2)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이전(李戩)⋅변언수(邊彦琇)를 경성좌우위장(京城左右衞將)으로,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로 삼아 도성(都城)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3)을 기복(起復)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한강(漢江)*4)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패하였다는 보고서가 이미 이르렀으므로 인심이 흉흉하고, 궁중에서는 서울을 옮기려는[去邠] 의견까지 있었으나 대궐 밖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마(理馬)*5) 김응수(金應壽)가 빈청(賓廳)에 이르러 수상(首相 : 李山海)과 귀엣말로 수군거리고 갔다가 다시 오므로 보는 사람들이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대개 수상이 그때 사복제조(司僕提調)*6)의 일을 맡았던 까닭이었다. 도승지(都承旨) 이항복(李恒福)*7)이 손바닥에 <영강문(永康門) 안에 말을 세워 두라[立馬永康門內]>는 여섯 글자를 써서 나에게 보였다.
대간(臺諫)이 <수상(首相 : 李山海)이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탄핵[劾]*8)을 하며 파면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종친(宗親)*9)들이 합문(閤門)*10) 밖에 모여 통곡하면서, "도성[城]을 버리지 말라."고 청하였다. 영부사(領府事 :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김귀영(金貴榮)*11)은 더욱 분격하여 여러 대신들과 함께 들어가 임금을 뵈옵고 "서울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 청하고, 또 말하기를, "도성(都城)을 버리자는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은 곧 소인(小人)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종묘사직[宗社]*12)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하니, 여러 사람들은 드디어 물러나갔다. 그러나 사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방리(坊里)*13)의 백성들과 공사천인(公私賤人)*14)들과 서리(胥吏)*15)와 삼의사(三醫司)*16) 사람들을 뽑아내어 성첩(城堞 : 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으나, 성첩은 3만여 곳으로 계산이 되는데 성을 지키는 사람의 수는 겨우 7천 명이고, 그것도 거의 다 오합지중[烏合]*17)이라서 다 성을 넘어서 도망갈 마음만 가졌다.
그리고 상번(上番)*18)한 군사들도 비록 병조(兵曹)에 소속되어 있으나, 그러나 하리(下吏)*19)들과 함께 서로 농간질을 하여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놓아 보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관원들도 가거나 있거나 묻지도 않으니, 위급한 일을 당하면 다 쓸 수 없는 군사들이었다. 군정(軍政)의 해이(解弛)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었다. 대신(大臣)이 왕세자(王世子 : 저군儲君)를 세워[建儲]*20) 민심을 수습하자고 청하니, 임금께서는 그 뜻을 따랐다. 동지사(同知事 :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이덕형(李德馨)*21)을 倭軍에 사자(使者)로 보냈다. 우리 군사가 상주(尙州)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할 때에 왜학통사(倭學通事)*22) 경응순(景應舜)이라는 사람이 있어 이일(李鎰)의 군중(軍中)에 있다가 倭敵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는데, 倭將 평행장(平行長)이 평수길(平秀吉)의 편지와 예조(禮曹)에 보내는 공문(公文) 한 통을 경응순에게 주고 내어보내 주면서 말하기를, "동래(東萊)에 있을 때 울산군수(蔚山郡守)를 사로잡아서 편지(평수길의 편지)를 전해 보냈으나, 지금에 이르기 까지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
<당시 울산군수는 곧 이언성(李彦誠)인데, 그는 적의 진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고 말하며, 그 서류를 숨기고 전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朝鮮이 만약 강화(講和)*23)하려는 뜻이 있으면 이덕 형으로 하여금 오는 28일에 우리와 충주(忠州)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대개 이덕형은 왕년에 일찍이 선위사(宣慰使 : 임금의 명령으로 외국의 사신을 영접, 위로하는 임시 벼슬)가 되어 倭國의 사신을 접대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그를 만나보려고 한 것이다. 경응순이 서울에 와서 平行長의 글과 말을 전했다. 이때 사세가 급해서 아무런 계교도 나오지 않으므로, 혹은 이것으로 인해서 싸움을 늦출 수가 있을까 생각하였으며, 이덕형도 역시 스스로 가기를 청하므로, 예조(禮曹)로 하여금 답서를 마련하게 하여 경응순을 데리고 떠나갔다. <그런데 이덕형은 중도에서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경응순으로 하여금 가서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경응순은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덕형은 드디어 중도에서 돌아왔는데, 평양(平壤)*24)에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복명(復命)하였다.> 형혹(熒惑)*25)이 남두(南斗)*26)를 침범하였다. 경기⋅강원⋅황해⋅평안⋅함경도 등의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서울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원익(李元翼)*27)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지사(知事) 최흥원(崔興源)*28)을 황해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모두 그날로 출발시켜 보냈는데, 이는 장차 임금께서 서순(西巡)*29) 하시려고 하는 의논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원익은 일찍이 안주목사(安州牧使)가 되고, 최흥원은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었는데, 모두 어진 정사를 베풀어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을 기쁘게한 바 되었던 까닭으로 해서 먼저 그들을 가게 하여 군민(軍民)을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임금의 순행(巡幸)*30)[파천(播遷) : 임금이 도성(都城)을 떠나 딴곳으로 피란함. = 파월(播越)]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1)우상(右相) : 우의정(右議政)의 별칭. 조선조 때 관직으로 의정부(議政府)에 속하였으며, 정원은 1명, 품계는 정1품이었다.
*2)이양원(李陽元, 1533∼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영의정(領議政).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明宗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書狀官)⋅삼도감사(三道監司)⋅형조판서(刑曹判事)⋅대제학(大提學) 등을 거쳐 우의정(右議政)이 되고, 임진왜란 때 유도대장(留都大將)으로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다. 철령(鐵嶺)으로 후퇴하여 있을 때 왕이 요동(遼來)으로 건너 갔다는 풍문을 듣고 7일간 먹지 않고 분사함. *3)김명원(金命元, 1534∼1602) : 조선조 宣祖 때 문신.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明宗 때 장원급제(壯元及第)하여 좌참찬(左參贊)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활약하고 호조(戶曹)⋅예조(禮曹)⋅형조(刑曹)⋅공조판서(工曹判書)를 거쳐 영의정(領議政)을 지냈다.
*4)한강(漢江) : 우리나라 넷째 가는 큰 강. 길이 514킬로미터. 근원인 두 줄기가 태백산(太白山)에서 나와 중부지방을 횡단하여 서울 근방에서 합류하여 서해(西海)로 흐른다.
*5)이마(理馬) : 조선조 때 관직.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되어 임금이 타는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정원은 4명,품계는 6품 이하였음.
*6)사복제조(司僕提調) : 사복시(司僕寺)는 조선조 때 궁중의 여마(輿馬)⋅구목(廐牧) 및 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 제조(提調)는 관청의 우두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그 일을 다스리게 하던 벼슬로서, 종1품 또는 정2품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맡았다. 정1품일 때는 도제조(都提調),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일 때는 부제조(副提調)라 함.
*7)이항복(李恒福, 1556∼1618) : 조선조 宣祖 때의 명상(名相).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백사(白沙)⋅청화진인(淸化眞人)⋅동강(東岡)⋅소운(素雲).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경주(慶州)이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 호조참의(戶曹參議)⋅승지(承旨)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都承旨)⋅형조판서(刑曹判書)로 활약하였고, 난후(亂後)에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이 되었다. 光海君 때 북청(北靑)으로 귀양가 적소(謫所)에서 죽었는데, ≪백사집(白沙集)≫⋅≪북천일록(北遷曰錄)≫⋅≪사례훈몽(四禮訓蒙)≫⋅≪노사영언(魯史零言)≫⋅≪주소계의(奏疏啟議)≫⋅≪유연전(柳淵傳)≫ 등의 저서를 남겼다. *8)핵(幼) : 탄핵(彈劾)을 말함. 잘못된 점을 들어 논죄(論罪)하며 책망하는 것.
*9)종친(宗親) : 임금의 족속(族屬). 임금의 친족(親族)으로 촌수가 가까운 사람. 대군(大君)의 자손은 4대손까지. 왕자군의 자손은 3대손까지를 봉군(封君)이라 하여 예후했다.
*10)합문(閤門) : 임금이 평시에 거처하는 궁전,곧 편전(便殿)의 앞문.
*11)김귀영(金貴榮, 1519∼1593)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본관은 상주(尙州)다. 明宗 때 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宣祖 때 우의정(右議政)을 지냄. 임진왜란 때 임해군(臨海君)을 모시고 북도로 피란하였다가 회령(會寧)에서 왕자와 함께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혔다. 日本과의 화친문제를 말하다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희천(熙川)으로 유배됨.
*12)종사(宗社) : 종묘(宗廟)와 사직(社稷 : 왕조 때, '왕실과 나라'를 아울러 이르던 말). 종묘는 역대왕의 신주(神主)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토지신(土地神)과 곡신(穀神)을 위하는 곳.
*13)방리(坊里) : 말단 행정구역. 지금 동리(洞里)와 같은 것.
*14)공사천인(公私賤人) : 공천(公賤)과 사천(私賤). 공천은 조선조 때 관부(官府)에 종사하는 천인으로, 죄를 지어 종이 된 자와 관청 소속의 기생(妓生)⋅나인⋅종⋅역졸(驛卒) 등으로 구성 됨. 사천은 개인에게 소속된 천인을 말함.
*15)서리(胥吏) : 중앙과 지방관청에 소속된 하급관리로, 일명 이서(吏胥)⋅이속(吏屬)⋅아전(衙前)이라고 함.
*16)삼의사(三醫司) : 조선조 때의 의료를 맡은 세 관사(官司). 내의원(內醫院)⋅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의 통칭.
*17)오합(烏合) : 오합지중(烏合之衆)의 준말로,쓸모없는 무리들만 모인 것을 말함.
*18)상번(上番) : 지방의 군사를 뽑아 차례로 서울의 군영(軍營)으로 올려보내어 근무하도록 하는일.
*19)하리(下吏) : 지체가 낮은 이속(吏屬)들.
*20)건저(建儲) : 왕세자(王世子)를 세우는 것.
*21)이덕형(李徳馨, 1561∼1613). 조선조 중기의 명신(名臣).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광주(廣州)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直提學)⋅승지(承旨)⋅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이조참의(吏曹參議)를 거쳐 31세에 예조참판(禮曹參判) 겸 대제학(大提學)에 이름. 임진왜란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로 왜사(倭使)와 화의를 교섭하고, 임금을 피란시키고, 明나라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활약이 컸음. 4도(경상⋅전라⋅충청⋅강원의 도)체찰사(體察使)를 거쳐 38세로 우의정(右議政)이 되었고, 뒤에 영의정(領議政)을 지냄. 저서에 ≪한음 문고(漢陰文藁)≫가 있다.
*22)왜학통사(倭學通事) : 사역원(司譯院)의 벼슬 이름. 일본말 통역관이다.
*23)강화(講和) : 화친을 의논하는 것
*24)평양(平壤) : 평안남도에 있는 지명.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고도(古都).
*25)형혹(熒惑) : 화성(火星)의 다른 이름. 재화(災禍), 병란(兵亂)의 조짐이 보인다는 별 이름.
*26)남두(南斗) : 남쪽 두성(斗星). 남방의 여섯 별로 구성된 성수(星宿)의 이름. 제왕(帝王)의 수명을 맡는다고 한다.
*27)이원익(李元翼, 1547∼1634)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전주(全州)다. 宣祖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승지(承旨)⋅대사헌(大司憲)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를 겸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이 되어 4도 도체찰사(都體察使)를 겸하고, 光海君 때 영의정(領議政)이 됨. 저서는 ≪오리집(悟里集)≫이 있다.
*28)최흥원(崔興源, 1529∼1603) : 자는 복초(復初), 호는 송천(松泉), 본관은 삭녕(朔寧)이다. 宣祖 원년(156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한 후 정언(正言)⋅사간(司諫)⋅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했으며 임진왜란 때 황해도 도순찰사(都巡察使)가 되고 이어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좌의정(左議政)으로 승진. 영의정(領議政) 유성룡(柳成龍)이 파면되자 영의정에 기용되었고 그 뒤 의주(義州)에 가서 왕을 시종(侍從)했다.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29)서순(西巡) : 임금이 서쪽 지방으로 피란하는 것.
*30)순행(巡幸) : 순수(巡狩). 임금이 나라 안을 순행(巡行 : 여러 곳으로 돌아다님)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