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상주(尙州) 싸움에서 이일(李鎰)이 패주함
賊陷尙州 巡邊使李鎰 兵敗奔還忠州.
初慶尙道巡察使金睟 聞賊變 卽依方略分軍 移文列邑 各率所屬 屯聚信地 以待京將之至.
聞慶以下守令 皆引其軍赴大丘 露次川邊 待巡邊使旣數日 巡邊使未及來 而賊漸近 衆軍自相驚動. 會大雨 衣裝沾濕 糧餉不繼 夜中皆潰散 守令悉以單騎奔還.
巡邊使入聞慶 縣中已空 不見一人 自發倉穀 餉所率人 而過歷咸昌 至尙州.
牧使金澥 託以支待巡邊使于出站 遁立山中 獨判官權吉守邑. 鎰以無兵責吉 曳之庭欲斬之 吉哀告願自出招呼 達夜搜索村落間 詰朝得數百人以至 皆農民也.
鎰留尙州一日 發倉開糶 誘出散民 從山谷中 介介而來 又數百餘人 倉卒編伍爲軍 無一人堪戰者.
時賊已至善山
暮有開寧縣人 來報賊近.
鎰以爲惑衆 將斬之 其人呼曰「願姑囚我 明早賊未至 死未晩也.」
是夜 賊兵屯長川 踞尙州二十里 而鎰軍無斥候 故賊來不知. 翌朝 鎰猶謂無賊 出開寧人於獄 斬以徇衆
因率所得民軍 合京來將士 僅八九百 習陣于州北川邊 依山爲陣 陣中立大將旗 鎰被甲立馬大將旗下 從事官尹暹⋅朴箎及判官權吉 沙斤察訪金宗武等 皆下馬在鎰馬後. 有頃 有數人從林木間出 徘徊眺望而回 衆疑爲賊候 而懲開寧人不敢告. 旣又望見城中 數處煙起 鎰始使軍官一人往探 軍官跨馬 二驛率執鞚緩緩去 倭先伏橋下 以鳥銃中軍官墜馬 斬首而去 我軍望見奪氣.
俄而 賊大至 以鳥銃十餘衝之 中者卽斃. 鎰急呼軍人發射 矢數十步輒墜 不能傷賊. 賊已分出左右翼 持旗幟繞軍後 圍抱而來. 鎰知事急 撥回馬向北走 軍大亂 各自逃命 得脫者無幾 從事以下未及上馬者 悉爲賊所害.
賊追鎰急 鎰棄馬脫衣服披髮 赤體而走 到聞慶 索紙筆 馳啓敗狀 欲退守鳥嶺 聞申砬在忠州 遂據忠州.
倭敵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에 패해 도망하여 충주(忠州)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1) 김수(金睟)는 倭敵의 변고(침략)를 듣고서 곧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의거하여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서 각각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모여 주둔하고 있으면서 서울에서 파견하는 장수가 이르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문경(聞慶) 이하의 수령(守令)들은 모두 그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丘)로 나아가 냇가에서 노숙을 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린지 벌써 며칠이 되었으나 순변사는 오지 않고 적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므로, 모든 군사들은 스스로 서로 놀라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큰비가 와서 옷가지가 다 젖고 먹을 양식도 이어지지 않아 떨어지니, 밤 중에 다 흩어져 버리고 수령들도 모두 저 혼자 도망하여 버렸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 李鎰)가 문경으로 들어왔는데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있어 한사람도 볼 수 없었으므로 자신이 창고에 있던 곡식을 풀어내어 거느리고 온 사람들을 밥먹였다. 그리고 함창(咸昌)을 지나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출참(出站)*2)에서 기다리겠다고 핑계하고는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홀로 판관(判官)*3) 권길(權吉)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고을에 군사가 없다고 해서 권길을 책망하고, 그를 뜰로 끌어내어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니, 권길은 자기가 스스로 나아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오겠다고 애원하여 허락하였는데, 밤새도록 마을 안을 수색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수백 명을 데리고 왔으나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묵으면서 창고 안에 있는 곡식을 꺼내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달래어 나오도록 하니, 산골짜기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모여와서 또한 수백 명이 되었다. 이래가지고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여 군사를 만들었 으나, 한 사람도 싸울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때 倭敵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녁 때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는데, 이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곧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두어 두소서. 내일 아침에 적이 오지 않거든 죽이시오. 그래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倭敵은 장천(長川)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그곳은 상주와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斥候兵)이 없었으므로 倭敵이 가까이 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이일은 그래도 적이 온 사실이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개령 사람을 옥(獄)에서 끌어내어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 돌렸다.
인하여 이일은 얻은 바 민군(民軍)과 서울에서 데리고 온 장병을 합하여 겨우 8, 9백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 진치는 법을 북천(北川) 냇가에서 가르쳤는데, 산을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진 한가운데 대장기(大將旗)를 꽂아놓고, 이일은 말 위에 앉아 대장기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4) 윤섬(尹暹)*5)⋅박호(朴箎)와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사근찰방(沙斤察訪)*6) 김종무(金宗武)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섰다. 조금 뒤에 몇 사람이 숲 속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서 서성거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돌아가 버렸다. 여러 사람들은 이들이 적의 척후인가 의심하였으나, 그러나 개령(開寧) 사람의 일을 경계하여 감히 알리지를 못하였다. 이어 또 성 안을 바라보니 몇 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이일은 비로소 군관(軍官) 한 사람을 시켜 곧 가서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군관이 말을 타고 두 역졸(驛卒)이 말 재갈을 잡고 느릿느릿 가는데, 倭敵이 먼저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조총(烏銃)으로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목을 베어가지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조금 뒤에 倭敵이 크게 몰려와서 조총 10여 자루로 막 쏘아대니 총에 맞은 사람은 즉시 쓰러져 죽었다. 이일은 급히 군사들을 불러 활을 쏘라고 소리 질렀으나, 화살은 수십 보를 나가다가 뚝 떨어지니 이것으로써는 적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때 적은 이미 좌익(左翼)⋅우익(右翼)으로 나눠 벌려 세우고 깃발을 들고 우리 군대의 뒤를 둘러 포위하고 달려들어 왔다. 이일은 사세가 위급하게 된 것을 알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니,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져 제각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하였으나 위험을 벗어나 살아간 사람은 몇 사람도 없었고, 그 종사관 이하 미처 말을 타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倭敵들은 이일을 다급하게 뒤쫓으니, 이일은 말을 버리고 의복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제치고는 알몸으로 달아나서 문경(聞慶)*7)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서 종이와 붓을 구하여 그 패전한 상황을 임금에게 급히 아뢰고 물러가서 조령(鳥嶺)을 지키려고 하다가 신립(申砬)이 충주(忠州)*8)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는 충주로 달려갔다.
*1)순찰사(巡察使) : 조선조 때 지방장관인 관찰사(觀察使)가 겸한 관직으로, 종2품 벼슬로 임명함.
*2)출참(出站) : 사신(使臣)이나 감사(監司) 등을 영접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의 숙역(宿驛) 가까운 곳에 사람을 보내는 일.
*3)판관(判官) : 조선조 때의 지방관직. 관찰사(觀察使)⋅유수영(留守營) 및 중요한 주부(州府)의 소재지에서 배속되어 그 장관을 보좌하는 벼슬로 종5품으로 임명되었다. 판관은 또 중앙관직에도 있어 각 시(寺)⋅감(監)⋅원(院) 등에도 배속되었다.
*4)종사관(從事官) : 조선 왕조 때 각 군영(軍營)과 포도청(捕盜廳)의 종6품 벼슬.
*5)윤섬(尹暹, 1561∼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이며 의인(義人). 자는 여진(汝進), 호는 과재(果齋), 시호는 문열(文烈),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형조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내고, 서장관(書状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옴. 임진왜란 때는 노모를 모신 친구를 대신하여 상주(尙州) 싸움에서 박지(朴篪)⋅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이들 3인을 삼종사(三從事)라고 불렀다.
*6)사근찰방(沙斤察訪) : 조선조 때 각 도(道)의 역참(驛站)의 일을 맡아 보던 외직. 일명 마관(馬官)⋅우관(郵官)⋅역승(驛丞)이라고 함. 종6품으로 임명했음. 사근(沙斤)은 함양(咸陽) 동쪽 16리 지점에 있던 역(驛).
*7)문경(聞慶) : 경상북도 서북단에 있는 지명. 그 북쪽에는 남북 교통의 요지인 조령(鳥嶺)이 있음.
*8)충주(忠州) : 충청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요지. 임진왜란 때의 대전지(大戰地)인 탄금대(彈琴臺)가 있음.
賊陷尙州 巡邊使李鎰 兵敗奔還忠州.
初慶尙道巡察使金睟 聞賊變 卽依方略分軍 移文列邑 各率所屬 屯聚信地 以待京將之至.
聞慶以下守令 皆引其軍赴大丘 露次川邊 待巡邊使旣數日 巡邊使未及來 而賊漸近 衆軍自相驚動. 會大雨 衣裝沾濕 糧餉不繼 夜中皆潰散 守令悉以單騎奔還.
巡邊使入聞慶 縣中已空 不見一人 自發倉穀 餉所率人 而過歷咸昌 至尙州.
牧使金澥 託以支待巡邊使于出站 遁立山中 獨判官權吉守邑. 鎰以無兵責吉 曳之庭欲斬之 吉哀告願自出招呼 達夜搜索村落間 詰朝得數百人以至 皆農民也.
鎰留尙州一日 發倉開糶 誘出散民 從山谷中 介介而來 又數百餘人 倉卒編伍爲軍 無一人堪戰者.
時賊已至善山
暮有開寧縣人 來報賊近.
鎰以爲惑衆 將斬之 其人呼曰「願姑囚我 明早賊未至 死未晩也.」
是夜 賊兵屯長川 踞尙州二十里 而鎰軍無斥候 故賊來不知. 翌朝 鎰猶謂無賊 出開寧人於獄 斬以徇衆
因率所得民軍 合京來將士 僅八九百 習陣于州北川邊 依山爲陣 陣中立大將旗 鎰被甲立馬大將旗下 從事官尹暹⋅朴箎及判官權吉 沙斤察訪金宗武等 皆下馬在鎰馬後. 有頃 有數人從林木間出 徘徊眺望而回 衆疑爲賊候 而懲開寧人不敢告. 旣又望見城中 數處煙起 鎰始使軍官一人往探 軍官跨馬 二驛率執鞚緩緩去 倭先伏橋下 以鳥銃中軍官墜馬 斬首而去 我軍望見奪氣.
俄而 賊大至 以鳥銃十餘衝之 中者卽斃. 鎰急呼軍人發射 矢數十步輒墜 不能傷賊. 賊已分出左右翼 持旗幟繞軍後 圍抱而來. 鎰知事急 撥回馬向北走 軍大亂 各自逃命 得脫者無幾 從事以下未及上馬者 悉爲賊所害.
賊追鎰急 鎰棄馬脫衣服披髮 赤體而走 到聞慶 索紙筆 馳啓敗狀 欲退守鳥嶺 聞申砬在忠州 遂據忠州.
倭敵이 상주(尙州)를 함락시키니, 순변사(巡邊使) 이일(李鎰)은 싸움에 패해 도망하여 충주(忠州)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경상도순찰사(慶尙道巡察使)*1) 김수(金睟)는 倭敵의 변고(침략)를 듣고서 곧 <제승방략(制勝方略)>의 분군법(分軍法)에 의거하여 여러 고을에 공문을 보내서 각각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약속한 곳에 모여 주둔하고 있으면서 서울에서 파견하는 장수가 이르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문경(聞慶) 이하의 수령(守令)들은 모두 그 소속된 군사를 거느리고 대구(大丘)로 나아가 냇가에서 노숙을 하면서 순변사를 기다린지 벌써 며칠이 되었으나 순변사는 오지 않고 적은 점점 가까이 다가오므로, 모든 군사들은 스스로 서로 놀라며 동요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마침 큰비가 와서 옷가지가 다 젖고 먹을 양식도 이어지지 않아 떨어지니, 밤 중에 다 흩어져 버리고 수령들도 모두 저 혼자 도망하여 버렸다. 이때 순변사(巡邊使 : 李鎰)가 문경으로 들어왔는데 고을은 이미 텅 비어 있어 한사람도 볼 수 없었으므로 자신이 창고에 있던 곡식을 풀어내어 거느리고 온 사람들을 밥먹였다. 그리고 함창(咸昌)을 지나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상주목사(尙州牧使) 김해(金澥)는 순변사를 출참(出站)*2)에서 기다리겠다고 핑계하고는 산속으로 도망하여 들어가고, 홀로 판관(判官)*3) 권길(權吉)이 고을을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고을에 군사가 없다고 해서 권길을 책망하고, 그를 뜰로 끌어내어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니, 권길은 자기가 스스로 나아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오겠다고 애원하여 허락하였는데, 밤새도록 마을 안을 수색하여 이튿날 아침까지 수백 명을 데리고 왔으나 모두 농민들이었다. 이일은 상주에 하루를 묵으면서 창고 안에 있는 곡식을 꺼내어 흩어져 있는 백성들을 달래어 나오도록 하니, 산골짜기로부터 한 사람 한 사람 모여와서 또한 수백 명이 되었다. 이래가지고 창졸간에 대오를 편성하여 군사를 만들었 으나, 한 사람도 싸울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때 倭敵은 이미 선산(善山)에 이르렀다.
저녁 때 개령(開寧)사람이 와서 적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는데, 이일은 여러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게 만든다고 생각하여 곧 목을 베어 죽이려고 하였더니, 그 사람은 소리를 질러 말하기를, "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잠시 동안만 나를 가두어 두소서. 내일 아침에 적이 오지 않거든 죽이시오. 그래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날 밤에 倭敵은 장천(長川)에 와서 주둔하였는데, 그곳은 상주와 20리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이일의 군사는 척후병(斥候兵)이 없었으므로 倭敵이 가까이 온 것을 알지 못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에 이일은 그래도 적이 온 사실이 없지 않느냐고 하면서 개령 사람을 옥(獄)에서 끌어내어 목을 베어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 돌렸다.
인하여 이일은 얻은 바 민군(民軍)과 서울에서 데리고 온 장병을 합하여 겨우 8, 9백 명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이들을 데리고 나가 진치는 법을 북천(北川) 냇가에서 가르쳤는데, 산을 의지하여 진을 만들고, 진 한가운데 대장기(大將旗)를 꽂아놓고, 이일은 말 위에 앉아 대장기 밑에 서고, 종사관(從事官)*4) 윤섬(尹暹)*5)⋅박호(朴箎)와 판관(判官) 권길(權吉)과 사근찰방(沙斤察訪)*6) 김종무(金宗武) 등은 모두 말에서 내려 이일의 말 뒤에 섰다. 조금 뒤에 몇 사람이 숲 속 나무 사이로부터 나와서 서성거리며 이 광경을 바라보다가 돌아가 버렸다. 여러 사람들은 이들이 적의 척후인가 의심하였으나, 그러나 개령(開寧) 사람의 일을 경계하여 감히 알리지를 못하였다. 이어 또 성 안을 바라보니 몇 곳에서 연기가 일어났다. 이일은 비로소 군관(軍官) 한 사람을 시켜 곧 가서 살펴보고 오게 하였다. 군관이 말을 타고 두 역졸(驛卒)이 말 재갈을 잡고 느릿느릿 가는데, 倭敵이 먼저 다리 밑에 숨어 있다가 조총(烏銃)으로 군관을 쏘아 말에서 떨어뜨리고 목을 베어가지고 달아났다. 우리 군사들은 이것을 바라보고 그만 맥이 빠져 버렸다.
조금 뒤에 倭敵이 크게 몰려와서 조총 10여 자루로 막 쏘아대니 총에 맞은 사람은 즉시 쓰러져 죽었다. 이일은 급히 군사들을 불러 활을 쏘라고 소리 질렀으나, 화살은 수십 보를 나가다가 뚝 떨어지니 이것으로써는 적을 죽일 수가 없었다. 이때 적은 이미 좌익(左翼)⋅우익(右翼)으로 나눠 벌려 세우고 깃발을 들고 우리 군대의 뒤를 둘러 포위하고 달려들어 왔다. 이일은 사세가 위급하게 된 것을 알고 급히 말머리를 돌려 북쪽을 향하여 달아나니,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져 제각기 목숨을 건지려고 도망하였으나 위험을 벗어나 살아간 사람은 몇 사람도 없었고, 그 종사관 이하 미처 말을 타지 못한 사람은 모두 적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倭敵들은 이일을 다급하게 뒤쫓으니, 이일은 말을 버리고 의복을 벗어던지고 머리를 풀어 제치고는 알몸으로 달아나서 문경(聞慶)*7)에 이르렀다. 그는 거기에서 종이와 붓을 구하여 그 패전한 상황을 임금에게 급히 아뢰고 물러가서 조령(鳥嶺)을 지키려고 하다가 신립(申砬)이 충주(忠州)*8)에 있다는 말을 듣고, 드디어는 충주로 달려갔다.
*1)순찰사(巡察使) : 조선조 때 지방장관인 관찰사(觀察使)가 겸한 관직으로, 종2품 벼슬로 임명함.
*2)출참(出站) : 사신(使臣)이나 감사(監司) 등을 영접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하기 위하여 그의 숙역(宿驛) 가까운 곳에 사람을 보내는 일.
*3)판관(判官) : 조선조 때의 지방관직. 관찰사(觀察使)⋅유수영(留守營) 및 중요한 주부(州府)의 소재지에서 배속되어 그 장관을 보좌하는 벼슬로 종5품으로 임명되었다. 판관은 또 중앙관직에도 있어 각 시(寺)⋅감(監)⋅원(院) 등에도 배속되었다.
*4)종사관(從事官) : 조선 왕조 때 각 군영(軍營)과 포도청(捕盜廳)의 종6품 벼슬.
*5)윤섬(尹暹, 1561∼1592) : 조선조 宣祖 때의 문신이며 의인(義人). 자는 여진(汝進), 호는 과재(果齋), 시호는 문열(文烈),본관은 남원(南原)이다. 형조랑⋅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등을 지내고, 서장관(書状官)으로 明나라에 다녀옴. 임진왜란 때는 노모를 모신 친구를 대신하여 상주(尙州) 싸움에서 박지(朴篪)⋅이경류(李慶流)와 함께 전사하였는데, 이들 3인을 삼종사(三從事)라고 불렀다.
*6)사근찰방(沙斤察訪) : 조선조 때 각 도(道)의 역참(驛站)의 일을 맡아 보던 외직. 일명 마관(馬官)⋅우관(郵官)⋅역승(驛丞)이라고 함. 종6품으로 임명했음. 사근(沙斤)은 함양(咸陽) 동쪽 16리 지점에 있던 역(驛).
*7)문경(聞慶) : 경상북도 서북단에 있는 지명. 그 북쪽에는 남북 교통의 요지인 조령(鳥嶺)이 있음.
*8)충주(忠州) : 충청북도 북동부에 위치한 요지. 임진왜란 때의 대전지(大戰地)인 탄금대(彈琴臺)가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