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김성일(金誠一)의 논죄문제(論罪問題)
逮慶尙右兵使金誠一 下獄 未至 還以爲招諭使 以咸安郡 守柳崇仁爲兵使. 初誠一到尙州 聞賊已犯境,晝夜馳赴本營 遇曺大坤於路中 交印節
時賊已陷金海 分掠右道諸邑 誠一進與賊遌 將士欲走 誠一下馬踞胡床不動 呼軍官李宗仁曰「汝勇士也 不可見賊先退.」有一賊著金假面 揮刃突進 宗仁馳馬而出 一箭迎射殪*8)之 諸賊却走不敢前.
誠一收召 離散 移檄郡縣 以爲牽綴之計.
上以誠一前使日本 言賊未易至 解人心誤國事 命遣義禁府都事拿來*9) 事將不測.
監司金睟 聞誠一被逮 出別於路上. 誠一辭氣慷慨 無一語及已事 惟勉睟以盡刀討賊. 老吏河自溶歎曰「己死之不恤 而惟國事是憂 眞忠臣也.」
誠一行至稷山 上怒霽 且知誠一得本道士民心 命赦其罪 爲右道招諭使 使諭道內人民 起兵討賊.
時柳崇仁有戰功 故超拜兵使.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성일(金誠一)을 체포하여 하옥(下獄)시키려 하다가 서울에 이르기도 전에 도리어 초유사(招諭使)*1)로 삼고,함안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2)을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김성일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倭敵이 이미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본영(本營)으로 향하였는데 조대곤(曺大坤)을 도중에서 만나서 인절(印節)*3)을 교환하였다. 이때 倭敵은 이미 김해(金海)를 함락시키고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노략질을 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나아가서 倭敵과 만났는데, 부하 장병들이 달아나려고 하였다. 김성일은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4)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며 군관(軍官) 이종인(李宗仁)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용감한 군사이니 적을 보고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적 한 명이 금가면(金假面)*5)을 쓰고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왔다. 이를 본 이종인은 말을 달려 뛰어나가서 그를 한 화살로 쏘아 죽이니 여러 적들이 물러나 도망하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김성일은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거두어 모으면서 여러 군현(郡縣)에 격문(檄文)*6)을 보내어 수습할 계교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김성일이 먼저 日本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倭敵이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해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7)에게 명하여 잡아오게 하여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었다.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수(金睟)는 김성일이 체포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그를 길가에서 송별하였는데, 김성일은 말이나 얼굴빛이 강개(慷慨)하여 한 마디 말도 자기에 관한 일에 미치는 것이 없고, 오직 김수에게,"힘을 다하여 적을 치라."고 권면하기만 하였다. 이것을 본 늙은 아전[吏] 하자용(河自溶)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는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랏일만을 근심하니 정말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떠나서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임금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또 김성일이 경상도 사민(士民)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삼아 도내의 백성들을 타일러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라고 명하였다. 이때 유숭인이 전공(戰功)이 있으므로 차례를 뛰어넘어 군수(郡守)에서 병사(兵使)로 임명되었다.
*1)초유사(招諭使) : 조선조 때 관직으로,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 모아[召集] 타일러 안정시키는 효유(曉諭 : 알아듣도록 타이름) 책임을 맡은 임시 벼슬.
*2)유숭인(柳崇仁, ?∼1592) : 조선조 宣祖 25년 임진왜란 때 함안군수(咸安郡守)로서 포위된 성을 고수, 6월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 당한 倭軍을 추격해 진해(鎭海)에 이르러 수군(水軍)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합세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어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특진. 이해 12월 적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자 창원(昌原)에서 이를 지원하려고 성 밖에 이르렀다가 전사했다.
*3)인절(印節) : 조정(朝延)에서 지방관에게 주어보내는 인장(印帝)과 병부(兵符)를 말함.
*4)호상(胡床) : 승상(繩床)을 말함.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원이 하인에게 들고 다니게 하다가 승마할 때 사용하는 의자.
*5)금가면(金假面) : 日本의 무장(武將)들이 쇠로 만들어 쓰던 투구.
*6)격문(檄文) :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든 글. 또는 사람들의 감흥(感興)을 일으키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발.
*7)의금부(義禁府) : 조선조 때의 한 관아(官衙). 금오(金吾), 왕부(王府)라고도 함. 왕명을 받들어 죄인(罪人)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관원은 판사(判事, 종1품) 1명, 지사(知事, 정2품),동지사(同知事, 종2품)의 당상관(堂上官)을 합하여 4명을 두어 다른 관원이 겸임하게 하고, 경력(經歷, 종4품)⋅도사(都事, 종5품, 관원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봄.)를 합하여 10명이고, 그밖에 나장(羅將) 232명을 두었다.
*8)에(殪) : 쓰러질 에. 죽다. 다하다.
*9)나래(拿來) : 죄인을 잡아옴. 나치(拿致).
逮慶尙右兵使金誠一 下獄 未至 還以爲招諭使 以咸安郡 守柳崇仁爲兵使. 初誠一到尙州 聞賊已犯境,晝夜馳赴本營 遇曺大坤於路中 交印節
時賊已陷金海 分掠右道諸邑 誠一進與賊遌 將士欲走 誠一下馬踞胡床不動 呼軍官李宗仁曰「汝勇士也 不可見賊先退.」有一賊著金假面 揮刃突進 宗仁馳馬而出 一箭迎射殪*8)之 諸賊却走不敢前.
誠一收召 離散 移檄郡縣 以爲牽綴之計.
上以誠一前使日本 言賊未易至 解人心誤國事 命遣義禁府都事拿來*9) 事將不測.
監司金睟 聞誠一被逮 出別於路上. 誠一辭氣慷慨 無一語及已事 惟勉睟以盡刀討賊. 老吏河自溶歎曰「己死之不恤 而惟國事是憂 眞忠臣也.」
誠一行至稷山 上怒霽 且知誠一得本道士民心 命赦其罪 爲右道招諭使 使諭道內人民 起兵討賊.
時柳崇仁有戰功 故超拜兵使.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김성일(金誠一)을 체포하여 하옥(下獄)시키려 하다가 서울에 이르기도 전에 도리어 초유사(招諭使)*1)로 삼고,함안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2)을 경상도병마사(慶尙道兵馬使)로 삼았다. 이보다 먼저 김성일이 상주(尙州)에 이르러 倭敵이 이미 국경을 침범하였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말을 달려 본영(本營)으로 향하였는데 조대곤(曺大坤)을 도중에서 만나서 인절(印節)*3)을 교환하였다. 이때 倭敵은 이미 김해(金海)를 함락시키고 경상우도(慶尙右道)의 여러 고을을 나누어 노략질을 하는 것이었다. 김성일이 나아가서 倭敵과 만났는데, 부하 장병들이 달아나려고 하였다. 김성일은 말에서 내려 호상(胡床)*4)에 걸터앉아서 움직이지 않으며 군관(軍官) 이종인(李宗仁)을 불러 말하기를, "너는 용감한 군사이니 적을 보고서 물러서서는 안 된다." 하였다. 이때 적 한 명이 금가면(金假面)*5)을 쓰고서 칼을 휘두르며 돌진하여 왔다. 이를 본 이종인은 말을 달려 뛰어나가서 그를 한 화살로 쏘아 죽이니 여러 적들이 물러나 도망하고 감히 앞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김성일은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거두어 모으면서 여러 군현(郡縣)에 격문(檄文)*6)을 보내어 수습할 계교를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께서는 김성일이 먼저 日本에 사신으로 갔다 와서, "倭敵이 쉽사리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해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7)에게 명하여 잡아오게 하여 일이 장차 어떻게 될지 헤아릴 수 없었다.
경상감사(慶尙監司) 김수(金睟)는 김성일이 체포를 당하였다는 말을 듣고 나와서 그를 길가에서 송별하였는데, 김성일은 말이나 얼굴빛이 강개(慷慨)하여 한 마디 말도 자기에 관한 일에 미치는 것이 없고, 오직 김수에게,"힘을 다하여 적을 치라."고 권면하기만 하였다. 이것을 본 늙은 아전[吏] 하자용(河自溶)은 감탄하며 말하기를, "자신의 죽음에 관하여는 걱정하지 아니하고 오직 나랏일만을 근심하니 정말 충신(忠臣)이다."라고 하였다.
김성일이 떠나서 직산(稷山)에 이르렀을 때 임금께서는 노여움을 푸시고, 또 김성일이 경상도 사민(士民)의 인심을 얻은 것을 알고 그의 죄를 용서하고 경상우도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로 삼아 도내의 백성들을 타일러 군사를 일으켜 적을 치라고 명하였다. 이때 유숭인이 전공(戰功)이 있으므로 차례를 뛰어넘어 군수(郡守)에서 병사(兵使)로 임명되었다.
*1)초유사(招諭使) : 조선조 때 관직으로,난리가 일어났을 때 백성을 불러 모아[召集] 타일러 안정시키는 효유(曉諭 : 알아듣도록 타이름) 책임을 맡은 임시 벼슬.
*2)유숭인(柳崇仁, ?∼1592) : 조선조 宣祖 25년 임진왜란 때 함안군수(咸安郡守)로서 포위된 성을 고수, 6월 곽재우(郭再祐)의 의병에게 진로를 차단 당한 倭軍을 추격해 진해(鎭海)에 이르러 수군(水軍)의 이순신(李舜臣, 1545∼1598)과 합세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어 경상우도(慶尙右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특진. 이해 12월 적군이 진주성(晉州城)을 공격하자 창원(昌原)에서 이를 지원하려고 성 밖에 이르렀다가 전사했다.
*3)인절(印節) : 조정(朝延)에서 지방관에게 주어보내는 인장(印帝)과 병부(兵符)를 말함.
*4)호상(胡床) : 승상(繩床)을 말함. 당상관(堂上官) 이상의 관원이 하인에게 들고 다니게 하다가 승마할 때 사용하는 의자.
*5)금가면(金假面) : 日本의 무장(武將)들이 쇠로 만들어 쓰던 투구.
*6)격문(檄文) : 급히 여러 사람에게 알리기 위하여 만든 글. 또는 사람들의 감흥(感興)을 일으키기 위하여 여러 사람들에게 보내는 글발.
*7)의금부(義禁府) : 조선조 때의 한 관아(官衙). 금오(金吾), 왕부(王府)라고도 함. 왕명을 받들어 죄인(罪人)을 추국(推鞫)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관원은 판사(判事, 종1품) 1명, 지사(知事, 정2품),동지사(同知事, 종2품)의 당상관(堂上官)을 합하여 4명을 두어 다른 관원이 겸임하게 하고, 경력(經歷, 종4품)⋅도사(都事, 종5품, 관원의 감찰과 규탄을 맡아봄.)를 합하여 10명이고, 그밖에 나장(羅將) 232명을 두었다.
*8)에(殪) : 쓰러질 에. 죽다. 다하다.
*9)나래(拿來) : 죄인을 잡아옴. 나치(拿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