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다
遞慶尙右兵使曺大坤 特旨以承旨金誠一代之. 備邊司啓「誠一儒臣也. 不合此時邊帥之任.」不允. 誠一遂拜辭而行.
四月十三日 倭兵犯境 陷釜山浦 僉使鄭撥死.
先是 倭平調信⋅玄蘇等 與通信使偕來 館於東平館. 備邊司 請令黃允吉⋅金誠一等 私以酒饌往慰 因從容問其國事 鉤察情形 以備策應 許之.
誠一至館 玄蘇果密語曰「中國久絶日本 不通朝貢 平秀吉以此心懷憤恥 欲起兵端 朝鮮先爲奏聞 使貢路得達 則必無事 而日本六十六州之民 亦免兵革之勞矣.」誠一等 因以大義責諭之 玄蘇又曰「昔高麗導元兵擊日本 日本以此報怨於朝鮮 勢所宜然. 其言漸悖.
自是再不復問 而調信⋅玄蘇自回.
辛卵夏 平義智又到釜山浦 爲邊將言「日本飮通大明 若朝鮮爲之奏聞 則幸甚 不然兩國將失和氣 此乃大事 故來告.」
邊將以聞 時朝議方咎通信 且怒其悖慢不報. 義智泊船十餘日 怏怏而去.
是後倭人不復至 釜山浦留館倭 常有數十餘人 稍稍入歸 一館幾空 人怪之.
是日 倭船自對馬島 蔽海而來 望之不見其際.
釜山補僉使鄭撥 出獵絶影島 狼狽入城 倭兵隨至登陸 四面雲集 不移時城陷.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을 갈아버리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승지(承旨)*1) 김성일(金誠一)을 그 대신 임명하였다. 그런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성일은 유신(儒臣 : 문신文臣)입니다. 그는 이러한 때 변방의 장수로 소임을 맡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김성일은 임금께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다.
4월 13일에 왜병(倭兵)들이 국경을 침입하여 부산포(釜山浦)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첨사(僉使) 정발(鄭撥)*2)이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倭國의 평조신(平調信)⋅현소(玄蘇) 등이 우리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와서 동평관(東平館)에 묵고 있었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임금께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체하면서 조용히 그 나라 형편을 물어 그 정세를 살핀 다음에 방비할 대책을 마련하자."고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김성일 등이 동평관에 이르니, 玄蘇는 과연 비밀히 말하기를, "中國[명(明)나라]이 오랫동안 日本과의 국교를 끊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 므로, 평수길(平秀吉)은 이것을 마음속에 품어 분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朝鮮이 먼저 이 사정을 中國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이 트이게끔 주선한다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며,日本 66주(州)의 백성들도 역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면하게 될 것이입 니다."라고 하였다. 김성일 등은 대의(大義)로써 이를 책망하고 타일렀는데, 玄蘇는 말하기를, "옛날에 高麗는 원(元)나라의 군사를 인도하여 日本을 쳤습니다. 日本이 이로 인한 원한을 朝鮮에 갚으려 하는 것은 그 사세가 마땅할 것입니다." 하면서 그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로부터 두 번 다시 찾아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신(調信)⋅玄蘇도 스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묘년(1591) 宣祖 24년 여름에 평의지(平義智)가 또 부산포에 와서 변장(邊將)에게 위협조로 말하기를 "日本은 明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朝鮮이 이를 위하여 그 뜻을 알려 주면 아주 다행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和氣)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일인 까닭에 우리가 일부러 와서 알려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변장(邊將)이 이 사실을 위에 알렸으나, 이때 조정의 의논은 마침 日本에 통신사를 보낸 것이 잘못이라고 나무라고, 또 그들의 거칠고 거만한 것을 노여워하여 회보하지 않으니, 의지(義智)는 10여 일 동안이나 배를 머물러 두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앙심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이 뒤로는 倭人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고, 부산포의 왜관(倭館)에 항상 머물러 있던 倭人 수십 명도 차츰차츰 돌아가 버리고 倭館 전부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니 사람들은 이를 괴상하게 여겼다. 이 날(선조 25년 임진년인 1592년 4월 13일) 倭敵의 배가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온 바다를 덮고 건너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포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3)로 나아가 사냥을 하다가 倭敵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성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왜병(倭兵)이 뒤따라 와서 상륙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부산성(釜山城)이 함락되었다.
*1)승지(承旨) : 조선조 때 관직.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는데,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 벼슬로 정원은 6명임.
*2)정발(鄭撥, 1533∼1592) : 조선조 때의 장군.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시호는 충장(忠壯). 1579년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뽑혔고, 임진왜란 때 부산진(釜山鎭) 첨사(僉使)로 있다가 전사함.
*3)절영도(絶影島) : 지금 부산(釜山)의 영도(影
遞慶尙右兵使曺大坤 特旨以承旨金誠一代之. 備邊司啓「誠一儒臣也. 不合此時邊帥之任.」不允. 誠一遂拜辭而行.
四月十三日 倭兵犯境 陷釜山浦 僉使鄭撥死.
先是 倭平調信⋅玄蘇等 與通信使偕來 館於東平館. 備邊司 請令黃允吉⋅金誠一等 私以酒饌往慰 因從容問其國事 鉤察情形 以備策應 許之.
誠一至館 玄蘇果密語曰「中國久絶日本 不通朝貢 平秀吉以此心懷憤恥 欲起兵端 朝鮮先爲奏聞 使貢路得達 則必無事 而日本六十六州之民 亦免兵革之勞矣.」誠一等 因以大義責諭之 玄蘇又曰「昔高麗導元兵擊日本 日本以此報怨於朝鮮 勢所宜然. 其言漸悖.
自是再不復問 而調信⋅玄蘇自回.
辛卵夏 平義智又到釜山浦 爲邊將言「日本飮通大明 若朝鮮爲之奏聞 則幸甚 不然兩國將失和氣 此乃大事 故來告.」
邊將以聞 時朝議方咎通信 且怒其悖慢不報. 義智泊船十餘日 怏怏而去.
是後倭人不復至 釜山浦留館倭 常有數十餘人 稍稍入歸 一館幾空 人怪之.
是日 倭船自對馬島 蔽海而來 望之不見其際.
釜山補僉使鄭撥 出獵絶影島 狼狽入城 倭兵隨至登陸 四面雲集 不移時城陷.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 조대곤(曺大坤)을 갈아버리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승지(承旨)*1) 김성일(金誠一)을 그 대신 임명하였다. 그런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성일은 유신(儒臣 : 문신文臣)입니다. 그는 이러한 때 변방의 장수로 소임을 맡기기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김성일은 임금께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다.
4월 13일에 왜병(倭兵)들이 국경을 침입하여 부산포(釜山浦)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첨사(僉使) 정발(鄭撥)*2)이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倭國의 평조신(平調信)⋅현소(玄蘇) 등이 우리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와서 동평관(東平館)에 묵고 있었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임금께 "황윤길(黃允吉)⋅김성일(金誠一) 등으로 하여금 사사로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체하면서 조용히 그 나라 형편을 물어 그 정세를 살핀 다음에 방비할 대책을 마련하자."고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김성일 등이 동평관에 이르니, 玄蘇는 과연 비밀히 말하기를, "中國[명(明)나라]이 오랫동안 日本과의 국교를 끊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 므로, 평수길(平秀吉)은 이것을 마음속에 품어 분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朝鮮이 먼저 이 사정을 中國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이 트이게끔 주선한다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며,日本 66주(州)의 백성들도 역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면하게 될 것이입 니다."라고 하였다. 김성일 등은 대의(大義)로써 이를 책망하고 타일렀는데, 玄蘇는 말하기를, "옛날에 高麗는 원(元)나라의 군사를 인도하여 日本을 쳤습니다. 日本이 이로 인한 원한을 朝鮮에 갚으려 하는 것은 그 사세가 마땅할 것입니다." 하면서 그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로부터 두 번 다시 찾아가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신(調信)⋅玄蘇도 스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묘년(1591) 宣祖 24년 여름에 평의지(平義智)가 또 부산포에 와서 변장(邊將)에게 위협조로 말하기를 "日本은 明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朝鮮이 이를 위하여 그 뜻을 알려 주면 아주 다행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和氣)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일인 까닭에 우리가 일부러 와서 알려 드립니다."라고 하였다. 변장(邊將)이 이 사실을 위에 알렸으나, 이때 조정의 의논은 마침 日本에 통신사를 보낸 것이 잘못이라고 나무라고, 또 그들의 거칠고 거만한 것을 노여워하여 회보하지 않으니, 의지(義智)는 10여 일 동안이나 배를 머물러 두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앙심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이 뒤로는 倭人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고, 부산포의 왜관(倭館)에 항상 머물러 있던 倭人 수십 명도 차츰차츰 돌아가 버리고 倭館 전부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니 사람들은 이를 괴상하게 여겼다. 이 날(선조 25년 임진년인 1592년 4월 13일) 倭敵의 배가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온 바다를 덮고 건너오는데, 이를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포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3)로 나아가 사냥을 하다가 倭敵이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성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왜병(倭兵)이 뒤따라 와서 상륙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부산성(釜山城)이 함락되었다.
*1)승지(承旨) : 조선조 때 관직. 승정원(承政院)에 소속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는데, 정3품의 당상관(堂上官) 벼슬로 정원은 6명임.
*2)정발(鄭撥, 1533∼1592) : 조선조 때의 장군.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본관은 경주(慶州)이고, 시호는 충장(忠壯). 1579년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宣傳官)으로 뽑혔고, 임진왜란 때 부산진(釜山鎭) 첨사(僉使)로 있다가 전사함.
*3)절영도(絶影島) : 지금 부산(釜山)의 영도(影